세상 참 좁다, 좁아. 강찬혁은 이 섬이 엄청나게 좁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얼마나 좁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강찬혁이 청월고 선도부원들 진짜 싸이코라고 생각하면서 뭐라고 불평을 하면서 우동을 먹고 있었는데 그 우동집 주인이 사실 선도부원 이모라서 대민마찰 혐의가 붙어서 정말로 인생이 쫑날 뻔하기도 했고, 평소에 어육소시지 같은 거라도 챙겨주면서 키워주던 고양이가 알고 보니 선도부원이 기르다가 길 잃은 고양이라서, 무려 방화미수라는 끔찍한 죄목이 붙은 강찬혁을 다 붙잡아놓고, 그 고양이를 보더니 적당히 '범인 불명'으로 끝내준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연이 닿는 건 처음이었다.
"참 신기한 인연이라니까요. 하하..."
그리고 강찬혁은 건강 S라는 것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찬혁이 진짜 동네 왈가닥 깡패라면, 이 사람은 제대로 된 태엌의 느낌이었다. 강찬혁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공격 기술이 없다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건 저도 똑같고요. 정말로 멋지겠네요. 방패를 들고 아군을 지키는 여기사라, 전 잘 해봤자 그냥 깡패인데..."
"와, 그래요? 뭐라고 해야할까....솔직히 요즘 사람을 만나서 다른 누군가 얘기를 하면 지인인 경우가 참 많네요."
나는 조금 놀라선 볼을 긁적였다. 확실히 요즘 사람들끼리의 인연이 참 넓다고 느낀다. 요즘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대화할 때, 혹시 이 사람 아세요? 라고 물어보면 열에 여덟 정도는 마찬가지로 지인이었던 것이다. 섬이고, 서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다보니 인연도가 좁아질 수 밖에 없는걸까? 그래도 이런 인연이 싫지는 않았기에, 나는 베시시 웃으며 신기한 인연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동의하기로 했다. 뭐 좋은게 좋은 것 아니던가.
"에이, 깡패라뇨? 지금 말씀하시는거 보면 충분히 상냥 하신.......네?"
자신을 그냥 깡패라고 표현하는 말에 내가 느끼는 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웃으며 대답해주려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칭찬을 들어서 헤실거리느라 놓쳤지만 방금 좀 이상한 표현이 있지 않았나? 조금 침묵하던 나는 순간 상대의 착각을 깨닫곤, 얼굴이 터질듯이 새빨갛게 타오르는걸 느꼈다. 그러나 여태 좋은 분위기로 대화하던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고 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마 화내지도 못하고 결국 고개를 푹 숙인체 상의를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면서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강찬혁은 물음표 수천개를 머리 위로 띄우며 유진화를 바라보았다. 잠깐, 남자라고. 이게, 남자? 이게? 이 가녀린 곡선이? 이 희고 탱탱한 피부가? 이 엷은 미소가? 저 어지간한 여자들도 일부러 귀여운 척 하려고 내는 게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 하이톤의 미성이, 남자? 강찬혁은 얼굴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몸통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다리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고는, 이게 남자라는 결론을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엄청난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 사과를 해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민증 까보라고 하자, 아니 이렇게 생겼으면 여자로 오해해도 내 잘못이 아니지 않냐는 참으로 나쁘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분명했고, 이건 강찬혁의 잘못이 맞았기에 바로 숙였다.
"생긴 게 너무... 그러니까 제 말은... 참으로 아리따운... 아니, 제기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지훈의 말이 이어질수록 미나즈키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게 지훈을 더 즐겁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쩌면 권역 쟁탈전이라는 건 사실 말만 권역 쟁탈전이지 지는 쪽이 이기는 게 아닐까? 자신의 학교 근처에 있는 폭탄을 남에게 떠넘기기 위한 혈투를 그렇게 포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평소라면 지훈의 표정에서 우동을 먹게 될 (약 30분 뒤의)미래를 아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미나즈키에게 그럴 정신은 없었다.
상대방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게 보일 수록 내 눈빛은 희미해졌다. 예의가 아니라고 사과하면서도 뭐라고 해야할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가슴이 아프다. 이럴 수가. 그래서 아까 근육을 좋아하는거냐고 물어보았던건가. 나는 한박자 늦은 깨달음에 속으로 탄식을 했다. 나는 '저렇게 되고 싶으신건가요? 저런건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텐데' 라고 이해했던 질문이, 실제로는 '저런게 취향이신가요? 요즘 여자들은 저런거 안좋아하던데 특이하시네요.' 였다니. 하. 하하......입가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상대는 전혀 악의가 없었던데다가, 지금도 일단 정중하게 사과하시기에 나도 손을 절레 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그......이렇게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런 오해.....자주 받는 편이라서.....익숙해요...."
강찬혁과 유진화의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는 왜인지 모르게 군비경쟁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였다. 옛날 한국 인터넷에 그런 만화가 있었다. 미안, 내가 더 미안, 내가 더더욱 미안, 내가 더더더 미안, 내가 제일 미안, 그런 식으로 서로 미안해서 허리를 숙이는 끝에 결국 머리가 땅 속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자꾸 죄송하다와 괜찮다가 핑퐁을 치고, 강찬혁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제를 갑자기 전환하는 방식을 썼다.
"그, 그러고보니, 이걸 잊고 있었는데, 성현 씨를 아신다고 했으면... 잠깐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을까요?"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팔을 내밀었다. 그의 칩이 왼팔인지 오른팔인지, 하여간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 연락처나 교환하려고 했다. 그리고 연락처를 받으면, 눈치를 봐서 바로 도망칠 생각이라. // 막레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그와 눈빛을 교환했다. 이 흐름은 뭐랄까,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거나 상황이 불편해지는 전형적인 도입부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기까지 불편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는 꽤나 책임감이 있는 편인 것 같다. 이렇게 서로 뭔가 계속 사과하는 흐름은 좋지 않아서 대화의 전환이 필요했는데....고민하던 차에 그가 연락처 교환을 제시하자, 나는 그 신호를 눈치껏 알아들었다.
"아, 네, 네! 물론이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뵈요."
나는 마찬가지로 오른팔을 내밀어 그에게 손목을 가볍게 접촉했고, 그러면서도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운동하시는데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두고 있는 것 같네요.' 라고 덧붙여서 그에게 빠져나갈 구실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 또한 그 신호를 받아들여서, 결국 우리는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인사를 나누곤 헤어질 수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가 갑자기 안심한 탓일까. 안도의 한숨을 미나즈키는 돌에 걸려 그대로 넘어질 뻔 했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하긴, 정말로 학교가 그런 꼴이라면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을 리가 없...는데. 한지훈도 멀쩡한 학생은 아니었던 기분이... 저번에 자신의 다리를 작살낼 뻔 했던(물론 지훈의 입장에서는 목이 졸리고 있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만) 일이 떠올라서 미나즈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