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는 '그래도 내가 일반인보다는 훨씬 강한데...' 같은 걸 신경쓰지 않더군요. 그건 참 악의적인 수준이지만."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고 상대방을 슬쩍 훑어보았다. 저 사람은... 생긴 거로만 보면 강찬혁과는 마치 양 극단과도 같이 다른 인물이었다. 퉁퉁 부은 강찬혁의 몸과는 대비되는 얇은 몸. 딱히 전문적인 피트니스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지만, 그동안 살아온 세월에 단련된 노가다근육과는 달리 가는 잔근육조차 없는 유려한 곡선. 그리고 갱단 전쟁부터 괴물과 싸우는 지금까지 온갖 적과 싸우며 생긴 잔상처와 흉터와는 달리 깨끗한 몸. 강찬혁은 그 모습을 보고, 분명 랜스나 서포터일 것이라 생각했고... 워리어라는 이야기에 놀라는 것은 조금은 당연했을 것이다. 강찬혁은 눈을 크게 뜨고, 얼떨떨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워리어요? 그, 그렇군요."
강찬혁은 상대방을 계속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워리어도 있을 것이다. 스테이터스는 외견으로 보이는 근육량과는 차이가 있으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겉모습만 보면 두개골을 붙잡아서 한 손으로 파쇄해버리게 생긴 아프리카 출신의 키가 2.5m에 달하는 오우거같은 유학생이, 실은 서포터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강찬혁은 자신의 이름도 밝혔다.
[매 년 바다에 익사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있었어요.] [매일같이 드나드는 해녀들은 별 문제가 없었는데, 외지인들이나 주의사항을 듣지 않은 이들이 희생당하는 그런 곳이었지요.] [그래서 바다에서 수영 금지같은 걸 표지판으로 붙였지만. 그럼에도 빈발했어요.] [A라는 사람은 바다에서 누군가 손짓을 한다며 말리는 사람들도 뿌리치고 뛰어들었다네요] [그래서 어떤 외지에서 온 이가 호기심에 알아보며 주의사항을 숙지하지 않고 그냥 바다를 가봤다고 해요.] [스쿠버 다이빙 장비를 빌려서 잠수했는데. 미역이 너울대고 백화한 산호가 나뒹구는 창백한 바다가 있었어요.] [미역에 발이 붙잡힌 알려지지 않은 익사자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게 움직여서 뽀그르르 숨을 내뱉으며 너절거리는 눈으로 뭐라 말하며 잠수자를 붙잡으려 했어요] [잠수자는 기겁해서 빠져나오려 했는데. 어느 순간 미역이 발을 휘엉키고 산소통에서 바다 향이 나기 시작했지요.] [그 때. 해녀 한 분이 미역인 줄 알았던 수많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칼로 잘라서 구출해주고 뭔가를 확 뿌렸더니 익사자의 불어터진 눈과 보라색으로 너절한 것이 터져나가 흰 뼈가 드러나서 멈칫했고 잠수자는 겨우 살아났어요] [해녀 님이 말하기를. 물귀신이 끊임없이 끌어들여 양분삼는다고 하며 무모하게 도전하지 말고 어디 무당집에 가서 부적을 사서 붙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그 잠수자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이 이야기를 적은 뒤 다시 바닷가를 걷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에 잡혀 질질 끌려간 자국만 남은 채 바다속에 끌려들어가는 걸 어린 아이가 목격했다네요.] [결국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구나. 라는 평을 했을까요]
"게이트의 악의는 꽤 유명하니까요. 얼마전에도 기회가 있어서 고레벨의 게이트에 다녀와봤는데, 어후....난리도 아니더라구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방에서 번개가 울려치고, 거대한 거인들이 수십이 몰려 달려오며, 보스였던 번개의 신의 고위 사제는 또 어땠던가. 강력한 아군에 의해 사실상 "버스" 라고 불리던 얻어타는 게이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떨렸다. 그러다가 나는 상대방의 시선을 눈치챘다. 조금 얼떨떨해하는 기색에서 보건데, 익숙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자면....역시나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렇게 작고 가녀린 몸으로 워리어라고 하니까. 그게 내가 방금전 근육질 남성을 그런대로 부러워 한 이유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보고 여자라고 오해하지 않는게 어디인가(사실은 오해하고 있지만).
"이래보여도 방어력만이라면 상당히 튼튼하답니다?"
아마 상대는.....내가 특히나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내고 버티는데 특화된 방어 중심의 워리어란걸 알게 되면 더더욱 놀라하지 않을까. 그 점이 조금 서운하면서도 재밌어서, 나는 얼떨떨해하는 상대방에게 볼을 부풀리며 살짝 토라진 티를 냈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 정도 오해는 이제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워리어셨군요. 저는 솔직히 랜스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내가 조금 놀랄 차레였다. 싸움에 상당히 익숙한 기색과, 지금은 정중하지만 사나워보이는 투기를 보건데 솔직히 말하자면 성현씨와 비슷한 격투계 랜스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워리어였구나.
"태양왕 게이트인가요? 그때 딱 장기파견 임무를 나갔던 때라서 못 갔는데. 고생이 많았겠네요."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그곳에 갔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보았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독이 몸에 듣지 않는 특질을 이세계의 잔혹한 악신들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맹독 앞에서 한계까지 시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강찬혁은 조용히 그 사람의 노고를 치하하고는, 볼을 부풀리는 것을 보고 자기가 미안하다며 금방 사과했다. 그렇다. 원래 인간세상 돌아가는 일은 생긴 걸로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이곳, 이 섬에서는 특히 그렇다.
"방어력이요? 오. 저도 방어력 특화거든요. 의념기도 그 쪽에 맞춰져 있고."
강찬혁은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 워리어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다. 정말로 좋은 일이다. 옛날에는 여자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몰랐지만, 지금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문제가 있다면 상대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거지만, 강찬혁은 아무래도 좋았다.)
미나즈키가 지금 들고 가고 있는 우동은 무려 세 달 분량이었다. 먹을거리를 사러 나올 시간에 공부를 해야 했으니 이런 습관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
그래도 이번에는 한지훈이 도와줘서 다행이었지. 미나즈키는 드디어 앞이 보인다는 사실에 약간 감동한 채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야가 확보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미나즈키는 여태 청월이 아니라 성학교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훈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매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언급했던 고레벨 게이트는 연인이 소개해준 지인을 통해서 같이 갔던 곳이다. 듣기론 권장 레벨이 30을 넘어간다나. 그런데 그걸 혼자서 버스 태워줬던 연인의 지인은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40레벨을 넘겼다는 모양이니, 역시 학원도는 넓고 괴물은 많은 법이라는게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눈 앞의 상대는 태양왕을 겪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장기 파견 임무도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양왕 때 정말 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니까.
"헤에, 어떤 형식인가요? 실은 저도 그런데!"
나와 같다고 반갑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그에게, 나도 흥미를 가지면서 손을 뻗어 악수했다. 어쩐지 다부진 느낌이 상당한 투쟁속에서 살아왔다는 인상이 강한 손이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의 인상으론, 험악하거나 성격이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워리어가 천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 제 경우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 그 순간에 의념기가 자동으로 발동해요. 피해를 엄청나게 줄여주죠. 머리에 총알이 박혀서 죽을 뻔했는데... 그런데 BB탄보다도 안 아파서 오발 났나 착각했다니까요. 그리고, 이건 뭐... 어떻게 이런 원리가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독을 거부해요. 어떤 독이건 거부하죠. 고블린의 조잡한 독도 거부하고, 용왕이 내린 저주도 거부하는데... 사실 이거 때문에, 옛날에 과다출혈 때문에 의사가 응고제를 쏟아부었는데... 몸이 응고제를 온 몸의 피를 굳혀서 죽여버리는 악독한 독약으로 오인하고 거부해버려서 진짜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죠. 하하."
강찬혁은 자신이 싸우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걸 왜 알려주나 했겠지만, 강찬혁은 그냥 알려주었다. 강찬혁이 이곳에서 세운 목표는 그다지 큰 게 아니었다. 그냥 남들처럼 성장하고, 남들처럼 강해져서, 딱 남들만큼만 싸우면서 남들만큼 잘나가는 것. 누구들처럼 세계 최강 따위는 노리지 않았고, 애시당초 이곳은 게이트 너머의 존재들이라는 인간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전혀 의미없는 괴물들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기에, 이런 정보는 오히려 공유할 수 있으면 빨리 공유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체 능력치가 꽤 강해요... 나름 S 정도는 되죠. 유진화 씨는 어떤가요? 방어력으로 견디는 데 몸에 흉터가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확실히 어지간한 창칼로는 몸에 흡집 하나 못 낸다는 건 알겠네요."
강찬혁은, 외유내강형 스타일로 보이는 유진화에게 물었다. 저 여린 외견 안의 내용물은 얼마나 튼튼할까?
성학교 근처에는 강도단이 있단 말인가? 제노시아의 살인 자판기에 이어서 또 엄청난 얘기가 튀어나왔다. 그놈의 자판기는 어떤 이상한 학생이 취미로(그런 자판기를 만드는 일이 취미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긴 했지만) 만들 수 있다고 쳐도 강도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성학교로 전학간 진화 선배와(이제는 같은 학년이지만) 에미리가 괜찮을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청월은 이쪽이야."
하지만 일단은 우동을 무사히 기숙사까지 들고 가는 일이 제일 급하지. 미나즈키는 지훈의 말에 생각을 끊고는 지훈을 앞서갔다.
"아....패시브형 의념기인가? 제가 아는 분과도 꽤 흡사하네요. 작동 방식은 반대인 것 같지만. 그 분은 의념을 투기처럼 발산해서 큰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방어력과 공격력이 둘 다 강화되는 형태셨거든요. 마찬가지로 신체도 S 로 상당히 높으셨고..."
나는 그의 싸움 방식을 들은 감상을 전하며, 성현씨라고 혹시 아는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물론 워리어와 랜스, 방어와 공격의 차이는 있지만. 둘은 덩치도 그렇고 어느정도 전투 스타일이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아마 만나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그에게, 생각 이상으로 자세한 설명을 들었던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도 마찬가지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저는....신체는 A , 건강은 S 에요. 사용하는 무기는 방패, 그것도 보통 제 키랑 비슷한 커다란 장방패를 들고, 장비는 중장갑을 착용하는 편이에요. 부동일태세라는 움직일 수 없게 되지만 방어력이 상승하는 자세를 주요 탱킹 스킬로 쓰고....의념기는 심플하게, 한 순간이지만 갑옷을 구현화시켜서 방어력을 크게 증가시키는 방식이네요."
이해의 설명을 돕기 위해, 나는 가디언칩에서 스킬 설명을 첨부해서 그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 그래도 나는 영웅을 꿈꾼다. ■ 의념의 힘을 증폭하여 자신의 의념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관철한다. 방패에 의념의 힘이 덧붙고 전신에 갑주를 둘러싼다. 방어력이 크게 증가하나, 신속 랭크가 한 단계 감소한다.
부동일태세不動鎰態勢(D) - 어떤 위험에도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자세를 취한다. 행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비례하여 방어력이 증가한다.
[ 레드스미스 社에서 제작한, 성벽을 닮은 방어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 기이할 정도의 튼튼함과 그에 걸맞는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 갑옷에는 독특한 무늬의 결이 존재하여 원거리 공격에 약간의 저항력을 추가하고 있다. ] ▶ 숙련 아이템 ▶ 성벽 - 아주 튼튼하지만 그 댓가로 매우 무겁다. 신속에 마이너스 판정을 추가한다. ▶ 흘림 각인 - 원거리 공격을 낮은 확률로 경감한다. ◆ 착용 제한 : 레벨 15 이상. 건강 C 이상.
"그래서 솔직히 방어력만은 튼튼.....하지만, 반대로 공격 기술은 거의 없어요. 그런 점에선 찬혁씨가 조금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