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왕 게이트인가요? 그때 딱 장기파견 임무를 나갔던 때라서 못 갔는데. 고생이 많았겠네요."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그곳에 갔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보았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독이 몸에 듣지 않는 특질을 이세계의 잔혹한 악신들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맹독 앞에서 한계까지 시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는 것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강찬혁은 조용히 그 사람의 노고를 치하하고는, 볼을 부풀리는 것을 보고 자기가 미안하다며 금방 사과했다. 그렇다. 원래 인간세상 돌아가는 일은 생긴 걸로 판단하면 안 된다지만, 이곳, 이 섬에서는 특히 그렇다.
"방어력이요? 오. 저도 방어력 특화거든요. 의념기도 그 쪽에 맞춰져 있고."
강찬혁은 웃으면서 손을 내민다. 워리어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다. 정말로 좋은 일이다. 옛날에는 여자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 지 몰랐지만, 지금은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문제가 있다면 상대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거지만, 강찬혁은 아무래도 좋았다.)
미나즈키가 지금 들고 가고 있는 우동은 무려 세 달 분량이었다. 먹을거리를 사러 나올 시간에 공부를 해야 했으니 이런 습관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
그래도 이번에는 한지훈이 도와줘서 다행이었지. 미나즈키는 드디어 앞이 보인다는 사실에 약간 감동한 채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야가 확보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미나즈키는 여태 청월이 아니라 성학교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훈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매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언급했던 고레벨 게이트는 연인이 소개해준 지인을 통해서 같이 갔던 곳이다. 듣기론 권장 레벨이 30을 넘어간다나. 그런데 그걸 혼자서 버스 태워줬던 연인의 지인은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40레벨을 넘겼다는 모양이니, 역시 학원도는 넓고 괴물은 많은 법이라는게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눈 앞의 상대는 태양왕을 겪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장기 파견 임무도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양왕 때 정말 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니까.
"헤에, 어떤 형식인가요? 실은 저도 그런데!"
나와 같다고 반갑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그에게, 나도 흥미를 가지면서 손을 뻗어 악수했다. 어쩐지 다부진 느낌이 상당한 투쟁속에서 살아왔다는 인상이 강한 손이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의 인상으론, 험악하거나 성격이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워리어가 천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 제 경우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 그 순간에 의념기가 자동으로 발동해요. 피해를 엄청나게 줄여주죠. 머리에 총알이 박혀서 죽을 뻔했는데... 그런데 BB탄보다도 안 아파서 오발 났나 착각했다니까요. 그리고, 이건 뭐... 어떻게 이런 원리가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독을 거부해요. 어떤 독이건 거부하죠. 고블린의 조잡한 독도 거부하고, 용왕이 내린 저주도 거부하는데... 사실 이거 때문에, 옛날에 과다출혈 때문에 의사가 응고제를 쏟아부었는데... 몸이 응고제를 온 몸의 피를 굳혀서 죽여버리는 악독한 독약으로 오인하고 거부해버려서 진짜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죠. 하하."
강찬혁은 자신이 싸우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걸 왜 알려주나 했겠지만, 강찬혁은 그냥 알려주었다. 강찬혁이 이곳에서 세운 목표는 그다지 큰 게 아니었다. 그냥 남들처럼 성장하고, 남들처럼 강해져서, 딱 남들만큼만 싸우면서 남들만큼 잘나가는 것. 누구들처럼 세계 최강 따위는 노리지 않았고, 애시당초 이곳은 게이트 너머의 존재들이라는 인간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전혀 의미없는 괴물들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기에, 이런 정보는 오히려 공유할 수 있으면 빨리 공유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체 능력치가 꽤 강해요... 나름 S 정도는 되죠. 유진화 씨는 어떤가요? 방어력으로 견디는 데 몸에 흉터가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확실히 어지간한 창칼로는 몸에 흡집 하나 못 낸다는 건 알겠네요."
강찬혁은, 외유내강형 스타일로 보이는 유진화에게 물었다. 저 여린 외견 안의 내용물은 얼마나 튼튼할까?
성학교 근처에는 강도단이 있단 말인가? 제노시아의 살인 자판기에 이어서 또 엄청난 얘기가 튀어나왔다. 그놈의 자판기는 어떤 이상한 학생이 취미로(그런 자판기를 만드는 일이 취미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긴 했지만) 만들 수 있다고 쳐도 강도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성학교로 전학간 진화 선배와(이제는 같은 학년이지만) 에미리가 괜찮을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청월은 이쪽이야."
하지만 일단은 우동을 무사히 기숙사까지 들고 가는 일이 제일 급하지. 미나즈키는 지훈의 말에 생각을 끊고는 지훈을 앞서갔다.
"아....패시브형 의념기인가? 제가 아는 분과도 꽤 흡사하네요. 작동 방식은 반대인 것 같지만. 그 분은 의념을 투기처럼 발산해서 큰 충격을 받기 전까지는 방어력과 공격력이 둘 다 강화되는 형태셨거든요. 마찬가지로 신체도 S 로 상당히 높으셨고..."
나는 그의 싸움 방식을 들은 감상을 전하며, 성현씨라고 혹시 아는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물론 워리어와 랜스, 방어와 공격의 차이는 있지만. 둘은 덩치도 그렇고 어느정도 전투 스타일이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아마 만나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그에게, 생각 이상으로 자세한 설명을 들었던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도 마찬가지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저는....신체는 A , 건강은 S 에요. 사용하는 무기는 방패, 그것도 보통 제 키랑 비슷한 커다란 장방패를 들고, 장비는 중장갑을 착용하는 편이에요. 부동일태세라는 움직일 수 없게 되지만 방어력이 상승하는 자세를 주요 탱킹 스킬로 쓰고....의념기는 심플하게, 한 순간이지만 갑옷을 구현화시켜서 방어력을 크게 증가시키는 방식이네요."
이해의 설명을 돕기 위해, 나는 가디언칩에서 스킬 설명을 첨부해서 그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 그래도 나는 영웅을 꿈꾼다. ■ 의념의 힘을 증폭하여 자신의 의념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관철한다. 방패에 의념의 힘이 덧붙고 전신에 갑주를 둘러싼다. 방어력이 크게 증가하나, 신속 랭크가 한 단계 감소한다.
부동일태세不動鎰態勢(D) - 어떤 위험에도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자세를 취한다. 행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비례하여 방어력이 증가한다.
[ 레드스미스 社에서 제작한, 성벽을 닮은 방어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 기이할 정도의 튼튼함과 그에 걸맞는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 갑옷에는 독특한 무늬의 결이 존재하여 원거리 공격에 약간의 저항력을 추가하고 있다. ] ▶ 숙련 아이템 ▶ 성벽 - 아주 튼튼하지만 그 댓가로 매우 무겁다. 신속에 마이너스 판정을 추가한다. ▶ 흘림 각인 - 원거리 공격을 낮은 확률로 경감한다. ◆ 착용 제한 : 레벨 15 이상. 건강 C 이상.
"그래서 솔직히 방어력만은 튼튼.....하지만, 반대로 공격 기술은 거의 없어요. 그런 점에선 찬혁씨가 조금 부럽네요."
세상 참 좁다, 좁아. 강찬혁은 이 섬이 엄청나게 좁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얼마나 좁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강찬혁이 청월고 선도부원들 진짜 싸이코라고 생각하면서 뭐라고 불평을 하면서 우동을 먹고 있었는데 그 우동집 주인이 사실 선도부원 이모라서 대민마찰 혐의가 붙어서 정말로 인생이 쫑날 뻔하기도 했고, 평소에 어육소시지 같은 거라도 챙겨주면서 키워주던 고양이가 알고 보니 선도부원이 기르다가 길 잃은 고양이라서, 무려 방화미수라는 끔찍한 죄목이 붙은 강찬혁을 다 붙잡아놓고, 그 고양이를 보더니 적당히 '범인 불명'으로 끝내준 적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연이 닿는 건 처음이었다.
"참 신기한 인연이라니까요. 하하..."
그리고 강찬혁은 건강 S라는 것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찬혁이 진짜 동네 왈가닥 깡패라면, 이 사람은 제대로 된 태엌의 느낌이었다. 강찬혁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공격 기술이 없다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건 저도 똑같고요. 정말로 멋지겠네요. 방패를 들고 아군을 지키는 여기사라, 전 잘 해봤자 그냥 깡패인데..."
"와, 그래요? 뭐라고 해야할까....솔직히 요즘 사람을 만나서 다른 누군가 얘기를 하면 지인인 경우가 참 많네요."
나는 조금 놀라선 볼을 긁적였다. 확실히 요즘 사람들끼리의 인연이 참 넓다고 느낀다. 요즘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대화할 때, 혹시 이 사람 아세요? 라고 물어보면 열에 여덟 정도는 마찬가지로 지인이었던 것이다. 섬이고, 서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다보니 인연도가 좁아질 수 밖에 없는걸까? 그래도 이런 인연이 싫지는 않았기에, 나는 베시시 웃으며 신기한 인연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동의하기로 했다. 뭐 좋은게 좋은 것 아니던가.
"에이, 깡패라뇨? 지금 말씀하시는거 보면 충분히 상냥 하신.......네?"
자신을 그냥 깡패라고 표현하는 말에 내가 느끼는 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웃으며 대답해주려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칭찬을 들어서 헤실거리느라 놓쳤지만 방금 좀 이상한 표현이 있지 않았나? 조금 침묵하던 나는 순간 상대의 착각을 깨닫곤, 얼굴이 터질듯이 새빨갛게 타오르는걸 느꼈다. 그러나 여태 좋은 분위기로 대화하던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고 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마 화내지도 못하고 결국 고개를 푹 숙인체 상의를 손가락으로 만지작 거리면서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강찬혁은 물음표 수천개를 머리 위로 띄우며 유진화를 바라보았다. 잠깐, 남자라고. 이게, 남자? 이게? 이 가녀린 곡선이? 이 희고 탱탱한 피부가? 이 엷은 미소가? 저 어지간한 여자들도 일부러 귀여운 척 하려고 내는 게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 하이톤의 미성이, 남자? 강찬혁은 얼굴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몸통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다리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고는, 이게 남자라는 결론을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엄청난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 사과를 해야 했지만... 머릿속에서는 민증 까보라고 하자, 아니 이렇게 생겼으면 여자로 오해해도 내 잘못이 아니지 않냐는 참으로 나쁘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분명했고, 이건 강찬혁의 잘못이 맞았기에 바로 숙였다.
"생긴 게 너무... 그러니까 제 말은... 참으로 아리따운... 아니, 제기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