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의 말이 이어질수록 미나즈키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게 지훈을 더 즐겁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쩌면 권역 쟁탈전이라는 건 사실 말만 권역 쟁탈전이지 지는 쪽이 이기는 게 아닐까? 자신의 학교 근처에 있는 폭탄을 남에게 떠넘기기 위한 혈투를 그렇게 포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평소라면 지훈의 표정에서 우동을 먹게 될 (약 30분 뒤의)미래를 아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미나즈키에게 그럴 정신은 없었다.
상대방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게 보일 수록 내 눈빛은 희미해졌다. 예의가 아니라고 사과하면서도 뭐라고 해야할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가슴이 아프다. 이럴 수가. 그래서 아까 근육을 좋아하는거냐고 물어보았던건가. 나는 한박자 늦은 깨달음에 속으로 탄식을 했다. 나는 '저렇게 되고 싶으신건가요? 저런건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텐데' 라고 이해했던 질문이, 실제로는 '저런게 취향이신가요? 요즘 여자들은 저런거 안좋아하던데 특이하시네요.' 였다니. 하. 하하......입가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상대는 전혀 악의가 없었던데다가, 지금도 일단 정중하게 사과하시기에 나도 손을 절레 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그......이렇게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그런 오해.....자주 받는 편이라서.....익숙해요...."
강찬혁과 유진화의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는 왜인지 모르게 군비경쟁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였다. 옛날 한국 인터넷에 그런 만화가 있었다. 미안, 내가 더 미안, 내가 더더욱 미안, 내가 더더더 미안, 내가 제일 미안, 그런 식으로 서로 미안해서 허리를 숙이는 끝에 결국 머리가 땅 속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자꾸 죄송하다와 괜찮다가 핑퐁을 치고, 강찬혁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제를 갑자기 전환하는 방식을 썼다.
"그, 그러고보니, 이걸 잊고 있었는데, 성현 씨를 아신다고 했으면... 잠깐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을까요?"
강찬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팔을 내밀었다. 그의 칩이 왼팔인지 오른팔인지, 하여간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서, 연락처나 교환하려고 했다. 그리고 연락처를 받으면, 눈치를 봐서 바로 도망칠 생각이라. // 막레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그와 눈빛을 교환했다. 이 흐름은 뭐랄까, '아니에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를 반복하면서 서로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거나 상황이 불편해지는 전형적인 도입부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기까지 불편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는 꽤나 책임감이 있는 편인 것 같다. 이렇게 서로 뭔가 계속 사과하는 흐름은 좋지 않아서 대화의 전환이 필요했는데....고민하던 차에 그가 연락처 교환을 제시하자, 나는 그 신호를 눈치껏 알아들었다.
"아, 네, 네! 물론이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뵈요."
나는 마찬가지로 오른팔을 내밀어 그에게 손목을 가볍게 접촉했고, 그러면서도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운동하시는데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두고 있는 것 같네요.' 라고 덧붙여서 그에게 빠져나갈 구실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 또한 그 신호를 받아들여서, 결국 우리는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인사를 나누곤 헤어질 수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가 갑자기 안심한 탓일까. 안도의 한숨을 미나즈키는 돌에 걸려 그대로 넘어질 뻔 했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하긴, 정말로 학교가 그런 꼴이라면 멀쩡하게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을 리가 없...는데. 한지훈도 멀쩡한 학생은 아니었던 기분이... 저번에 자신의 다리를 작살낼 뻔 했던(물론 지훈의 입장에서는 목이 졸리고 있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만) 일이 떠올라서 미나즈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그 사건 이후로 지훈하고는 대련을 단 한 번도 못 하고 있었다. 시간이 난다면 다음에 또 연락해봐도 괜찮겠지. 물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날이 좀 무딘 검도 챙겨서 말이다. 미나즈키는 지훈에게 "믿으니까 하는 소리야", 라고 대꾸해주곤 꽤 가까워진 청월 기숙사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동을 끓여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기숙사 방까지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가면 교칙 위반 아닌가? 미나즈키는 지훈을 몰래 숨겨서 데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