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책을 넘기자, 가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나무 그림이 드러났습니다. 뿌리에는 '최초의 가주' 라는 글자가 적힌 영 그레이엄 이라는 남성이 보입니다. 뿌리에서 줄기로 올라가면, 한 부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거기에서 가지로 뻗어나가는 위치 중 하나에 [레이먼드 그레이엄] 이라는 글자와 비어있는 초상화가 보입니다.
짧은 문구가 옆 페이지에 적혀있습니다.
그레이엄 가문은 그린폴드 가문과 사촌 지간이다. 머글을 낮게 여겼으며, 가문에서 유일한 메타포마구스는 레이먼드 그레이엄 뿐이었다.
정리 중인 역사서 속에서 그레이엄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 건, 그에게 미리 그 성씨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의 책들은 제목이 뭔지 재질이 뭔지 전혀 관심 없는 채로 넘기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구석으로 빠져 책을 펼치자 가문의 책이라는 걸 알려주듯 나무 그림이 가장 먼저 보인다.
가문의 시작인 뿌리부터 슬슬 거슬러 올라가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키득거렸다. 레이먼드 그레이엄. 그는 그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 하지만 그녀는 꽤나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그 어떤 가명을 쓰더라도, 그 이름만이 그에게 제격이라는 느낌이었으니까. 어째서인지 비어있는 초상화 자리를 검지로 꾹꾹 눌러보고 옆 페이지로 시선을 옮긴다. 거기 적힌 짤막한 문구를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0 손을 흔드는 실루엣의 모습에 단태는 한손으로 턱을 괴며 눌렀던 손가락을 떼어냈다. 페이지를 넘기자 보이는 한 가문-강 가-의 글이 시선을 잡았다. 머글과 혼혈도 같은 마법사라고 주장하던 가문. 전쟁 시기에 쇠락한 가문. 우호적이던 가문. 딱, 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단태는 들리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적힌 글을 읽었다. 초랭이탈.
"탈들 중 한명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초랭이탈을 바라보는 단태의 붉은 암적색 눈동자가 그 빛을 죽이고 암암리에 서늘히 가라앉았다. 단태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0 다음 페이지로 넘기던 단태는 손을 멈췄다. 갓을 쓴 남자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아니 초랭이탈까지는 모르겠지만 갓을 쓴 남자의 모습은 확실히 단태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야, 마주쳤고 이야기도 나눠봤던 기억이 머리 한구석에 밀려져 있던 기억을 일깨웠다. 하! 하고 짤막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사람이 초랭이탈이었군."
옆에 있는 중탈의 긴 코트를 잠시 흘끗 바라보던 단태의 눈동자가 글귀를 읽었다. 머글과 혼혈이 배울 장소, 라는 건 어디지? 혹시 학원은 아니겠지? 보통 이렇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학원이 맞을 것 같기는 한데. "중탈과 초랭이탈이 같이 나타난다-라는 거겠지. 이거."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단태는 또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페이지를 넘기기 전, 초상화들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오는 것이 좀 찜찜하긴 했다. 그녀의 저택에는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없어서 그닥 익숙치 않은 탓이다. 괜히 손을 한번 털고 넘긴 페이지를 보았다. 그레이엄 가문에 대한 짤막한 설명과 함께 먹으로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극렬한 순혈주의라. 순혈주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머글과 혼혈에게 친화적이지도 않은 그녀의 가문과는 극이라면 극이다. 하지만 실상은 머글과 혼혈을 자신과 동렬로 취급하진 않으니, 그들 입장에서 보기에 그녀의 가문도 다른 순혈주의 가문과 다를 바 없어보일지도.
완전한 흑도, 완전한 백도 아니나, 그렇다고 회색도 아닌 기묘한 위치에 존재하는 스피델리 가.
여기서 질문을 한다고? 단태는 페이지가 무거워지는 감각을 느끼면서 넘기려던 행동을 멈추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히죽, 웃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몇페이지 넘기지 않았지만 읽은 내용으로 봐서는 목숨을 지키려는 자는 초랭이탈이 아닌 중탈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다. 탈을 받은 이가 지키려고 한다. 무엇을 위해? 신념은 탈들을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노력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때에 우리네 가문 신념은 참 그럴듯한 핑계가 되기 참 좋은 것 같아."
우리네 가문의 신념은 참으로 교활하기 그지 없었다. 단태는 지팡이를 겨누고 있는 먹 그림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첫 페이지부터 나타나는 붉은 글자를 보며 기겁하고 말았다. 마치, 지금 당장 등 뒤에서. 어쩌면 옆에서. 천장에서. 땅바닥에서. 그것도 아니면.. 바로 앞에서, 그것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신과의 내기를 한 사람. 그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껴 펼친 책이나, 이게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마냥 희희덕거리며 읽을 순 없을것만 같았다.
허나 여기서 포기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지. 어떻게든 다시 마음을 다잡고서, 주양은 책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커다란 개를 닮은 짐승이 보입니다. 곰의 발처럼 생긴 게 네 발이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연신 물어뜯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 머글들을 많이 죽인 것 중 하나는 매구가 끌고 온 짐승들이기도 했다. 그 중 혼돈은, 먹자마자 바로 토하고 오장육부가 없으며 공복만이 존재하고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는 짐승인데, 머글들을 삼키면 바로 시체로 배설했다. 매구가 그 짐승을 어떻게 끌고 왔는지는 의문인데, 매타포마구스인 그 자가 그것으로 변해, 끌고 왔을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