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감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오기 전에 라온으로 도망친 것은 꽤나 큰 실수였다. 다행히 상황을 보고있던 학생들은 너의 편이었던 것 같다. 한서가 외쳤던 촌놈새끼나 버려진 녀석 같은 말에 말이 너무 심한게 아니냐며 언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에게 진압 마법을 사용해서 도망친 것은 명백한 죄였으니 학생들이 비호해준다 해도 넘어가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돌아가서 이노리가 잘못했어요. 하고 증언하기엔 네 상태가 너무 불안정했다. 너는 이런 상황을 견뎌낸다고 해도 참 여린 아이기 때문이었다. 가문에서 버려지지 않았는데, 그 말이 계속 맴돌아서 평정심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노리 옷, 이미 더러워져서 괜찮아요?"
너는 더러워진단 말에 피에 젖은 소맷단을 한번 들어보였다. 팔뚝에서 살까지 베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까 한서가 디핀도를 썼기 때문이다. 너도 리덕토를 날렸지만 살이 베이는 것과 강한 충격을 주는 것중 더 아픈건 전자다. 흔적이 계속 남기 때문이다. 어차피 옷은 세탁하면 그만이지만 지팡이를 두고왔다. 던져버리듯 하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너는 팔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리고 한번 수축한다.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잠깐 숨을 고르다 네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잣대로 판단하기에 도와주는 사람 또한 선인이다.
"착한 사람. 고마워요. 정말 착해. 그러니까 뚝 그쳐요. 착한 사람이 울면 이노리도 슬퍼?"
너는 아이처럼 순수하게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잔잔한 소년의 목소리로 네가 입술을 달싹이며 손가락 세개를 펼쳤다.
"있죠, 이노리가 착한 사람에게 원하는 소원을 3가지 들어드릴게요. 그러니까, 모두 비밀로 해줘요..그리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상처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팡이를 놓고 왔는데, 위치를 들킬 것 같아서 아씨오는 쓸 수 없어요. 교수님께 혼나기는 싫어.."
말이란 때때로 사슬이 되어 그것을 내뱉은 이를 속박한다. 그 때문에 언령이라는 표현이 있을만큼 말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말도 쉬이 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이 마음을 담은 말이라면 더더욱 신중해야만 한다. 일생에 단 한 사람만 품을 수 있는 '스피델리'의 사람이라면, 더욱.
"......"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보이는 건 감은 뒷커풀의 뒷면 뿐이었지만, 마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기에 더 선명히 느껴지는 감촉에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이러다 그에게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주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당장이라도 휩쓸려 가버릴 것만 같은 그녀를 그의 목소리가 부른다. 얼굴을 보여달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들어 은은한 홍조가 번진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겹쳐지는 입술에 거부는 일절 없었을거다. 가만히 눈을 감으며 받아들이고, 겨우 숨이 트였을 때는 평소보다 진한 금빛이 도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겠지.
"..바라지 않던 답례까지 받아버려서, 제가 더 기쁜 걸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뜻하지 않게 들은 그의 본명을 그녀의 뇌리 깊은 곳에 깊숙히 새겨넣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다. 그녀는 결코 어둠의 마법사나 그의 추종자는 되지 않으면서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어둠에 머무르며 그에 물들지 않는 기묘한 일을 그녀는 해낼 것이다. 스스로 한 말대로, 영원히.
"답례에 답례, 라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그래도 지금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 뿐이니까요."
곱게 웃는 얼굴로 말한 그녀는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을 풀고서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풀어낸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그녀에게로 당기며 그가 스쳐가기만 했던 목덜미로 이끌고, 다시금 가까워진 귓가에 속삭인다. 거의 숨소리에 가까운 작은 소리로.
"아까 하려다 말았던 거, 마저 해줘요. 아쉬웠단 말예요. 응?"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을 그를 또다시 시험에 들게 하는 교태를 부리고, 일부러 고개를 살짝 기울여 하얀 목덜미를 그의 시야에 드러내보인다. 참고 있는 걸 조금은 풀어도 좋을 듯이.
너는 고작 이정도 고통으로 비명을 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를 악물고 버티지만 너는 어딘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너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우는걸 모르는 것 같다. 너는 상처를 본다. 감히 비교를 해보자면 저 사람과 나는 꽤 비슷할 것 같았다.
"지금 보게 될 모든것."
말이 끝나자마자 네 몸이 일렁였다. 가장 먼저 눈동자가 선명해진다. 죽은 사람 같던 눈동자가 테두리마저 백색으로 물들더니, 디터니 원액을 보던 눈이 휘었다. 이걸로는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 않은가. 상처가 금세 아물어들자 너는 머리카락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모로 기울였고, 기다렸다는듯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누군가에겐 아주 익숙할 수도 있는 소리였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기 때문이다.
"치료해줘서 고마워요. 이노리 기뻐?"
네 몸이 빠르게 뒤틀린다. 네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뒤틀리던 모습이 사그라들고 어떤 기숙사의 것도 아닌 흰 한복자락이 바닥을 고이 덮고, 한복만치나 하얗고 긴 머리카락이 허벅지 근처에서 살랑였다.
"참으로 기쁘옵지요. 은원은 확실히 하며 은혜를 갚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사탕이라면 부디 원없이 품으시기를. 가시지요."
그것이 눈을 휘어 미소를 짓고는 고아하게 인사했다.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천천히 한 발을 내딛자 어깨 위로 걸친 하오리 자락이 나부낀다. 그리고 눈을 낮게 내리깐다. 새하얀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핏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맨발로 가볍게 그어 흔적을 흐리게 만들었다. 손을 다소곳하게 모으며 그것은 눈을 이내 내리감았다 뜬다.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랑이다 슬픈듯이 입술의 끝이 내려갔다.
"..한없이 미천한 저의 잘못이지요. 몸담고 있던 가문의 도련님이 저 때문에 가주 후계 계승권을 박탈 당하였다 분개하시어 공격을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