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까지 있던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시는 고모님의 편지에 반하고 가문원에게 일말의 아량을 베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뿐이다. 너는 그날 오블리비아테로 저녁의 일과 네가 가진 큰 비밀을 지워버렸지, 그가 네 자신을 안다는 사실은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자신을 싫어하던 녀석이 그게 누구냐고 하면 일이 커질게 뻔하기 때문에 내버려뒀는데, 이게 부메랑처럼 되돌아 온것은 고작 몇주가 지나서다. 수업이 끝나고 너는 또 싸웠다. 촌놈새끼인 너 때문에 후계자 자리를 뺏겼느니 뭐니 노발대발을 하며 기어오르는데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 있나. 용서 못한다며 악에 받치던 것을 무시하며 주스를 마시려던 순간 홱 잡아 던져버리는 것이다. 물통은 그렇게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닥을 몇번 구르다 기어이 깨졌다. 잠시 물통과 그를 몇번 번갈아 쳐다본 너는 무시했다. 기숙사로 가면 되는 일이니까.
"집안에서 버려져놓고 우리 가문에 기어와서 내 자리를 뺏어놓고.." "쏘기 주문."
그렇지만 가족 얘기가 나오자마자 녀석과 한바탕 싸웠다. 이번엔 녀석도 반격한답시고 디핀도를 맞았다. 그렇지만 승자는 너다. 너는 고작 그런것에 아파 구르며 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어이 리덕토를 썼다. 스투페파이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녀석이 멀리 나가떨어지자 뭘 했냐면.
도망쳤다. 정확히는 라온을 향해 뛰었다.
기숙사고 뭐고 사감 선생님을 볼 면목이 도저히 없었다. 이번에 또 심했다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오면 냅다 크루시오 저주를 쓸 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 진짜 짜증난다. 내가 언제 미움 받을 짓을 했나? 자기가 뿌려놓고 또 자기가 거두면서 말이 많다! 감정이 도저히 제어가 안 된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골목에 들어가서 몸을 웅크리고 자리에 앉았다. 소중한 하오리는 찢어지고 팔뚝에선 피가 흘렀다. 효력은 점점 떨어지겠지. 최악의 날이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인기척이 느껴져서 네가 웅얼거렸다.
윤이 매구인 것을 알고도 여태 입 다물고 있는 그녀가 고작 귀곡탑에 간 걸 누군가에게 말 할 리는 없었다. 걱정 말라며 그의 팔을 꼭 잡고 나란히 걷는다. 가는 도중, 그가 재차 궁금해하는 모습에 그녀는 그저 싱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도착할 때까지의 비밀, 이라고.
"흐음. 뭐, 누가 있든 상관없긴 하지만요."
정확히 누가 있는지 알려주지 않고, 그 존재 여부마저 어물쩍 흘려넘기는 대답에 그녀도 아무렴 어떻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을 것이다. 다짜고짜 공격해오는 것만 아니라면 누가 누구로 잠입해 있든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다만, 신경이 쏠릴 만한 다른 소식은 좀더 궁금하긴 했으나. 이미 귀곡탑이 가까워져 그마저도 물 흐르듯 흘러가버렸다.
귀곡탑. 그녀는 교칙을 빠릿하는 준수하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굳이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라온은 숱하게 들락거렸으면서 단 한번도 걸음을 내딛은 적이 없는 귀곡탑에, 이곳을 이리 만든 장본인이라 해도 좋을 그와 같이 걸어들어간다. 밤이었으면 좀더 스산한 분위기가 흘렀겠지만 낮이라 햇빛이 들어 그렇게 음침하지도 무서울 것도 없어보인다. 그저 세월을 탄 흔적이 좀 보일 뿐일까.
처음 들어와보는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린다. 막상 와보니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런가 싶었지만, 이미 와버렸고 오는 동안 잔뜩 궁금하게 만들어버렸는 걸. 이제와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다소 안 어울리더라도 여기서 하자고 생각하며, 그때까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앞에 마주보고 섰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거 같았지만. 천천히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 선배가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았던 그 날에, 약간 제 고집이라던가 어거지로 들이밀어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한 때의 변덕이나, 유희 같은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솔직히 말하는게 좀 주저하게 됐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러니까 좀 주제넘더라도 말해주고 싶었어요."
주제 넘는 말. 그의 입장에서 보기에 이제부터 그녀가 할 말은 그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와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걸어온 길이 다른 그녀가 감히 할 말은 아닐 수 있지만. 그녀 나름대로 고심하고 생각해 정리한 진심이었다. 그것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심히 그의 손을 잡고, 또박또박, 말을 전한다.
"당신의 시간이 오늘까지라면 제 시간 역시 오늘까지이길 바라고, 끝없는 영원이라면 저도 영겁의 시간을 그 곁에 있을게요. 그 시간 동안 얼만큼의 피가 당신의 손을 적신다 해도 절대 놓지 않을게요. 시작은 치기 어린 아이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각오라고 해도 좋을만큼 확실하게 말 할 수 있어요."
그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꾹 하고 들어간다. 정말로 각오한 듯이. 흰 손이 더 희어질만큼 그렇게 쥐고서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심 깊숙히 품었던 말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사랑해요. 레이먼드."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을.
거기까지 말한 직후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 살짝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구불진 은발 사이로 얼굴을 감추면서도, 결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을테지. 그가 빼거나 움직일 때까지 손을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