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주 이씨 집안에 입적되면서 겪었던 것은 텃세였는데, 이게 또 우스운 것이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른을 조잡하게 흉내 내며 으스대던 으름장이었다. 어른들은 아무런 말이 없는데도 아이들만 분개하니, 이는 가문의 모든 사람이 내게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기 때문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저들끼리 쑥덕이고 심통을 낸 것이 분명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한 아이가 나를 시기하였고 무리를 지어 괴롭힘을 주동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가주 후계자로 거론되는 녀석이다. 독남으로 오냐오냐 자라 갖고 싶은 것을 모조리 가졌던 터라 인내심이 유독 없고 오만방자하던 녀석은 현 가주인 고모가 어느 날 굴러들어온 나를 애지중지 하는 것을 보고, 제 자리에 위협을 느끼다 끝내 그 질투를 참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고모가 손가락으로 치면 깨물면 반창고를 붙이고 옥 반지까지 끼워줄 정도로 끔찍하게 아끼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절대 건드릴 수 없으나 제깟 덜 돌아가는 머리로 수를 썼으니, 간접적으로 계속 건드리는 것이 계속되는 것이다. 녀석의 대표적인 수는 아이들끼리 놀거나 하는 일에 나를 배제하는 것이었고, 저들만의 암호를 쓰며 나를 배척하곤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잔 잔악하던 것은 놀 시간을 선심 쓰듯 알려주는 척하며 내게만 다른 시간을 알려줘 지각하게 했던 것이었다. 자기는 제대로 알려줬다. 으름장을 놓으며 나를 보고 숲에서 자라서 시간 개념도 없는 녀석이라고 다른 가문원 아이들 앞에서 폄하하기도 하는 것이 제법 어른의 엿먹이는 묘수를 쓸 줄 아는 녀석이었다.
어차피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유치한 녀석들과는 안 놀아버리면 그만이거니와 창문을 열면 날아 들어오는 새와 함께 놀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그 이상한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와 함께 지루하기 짝이 없고 의미조차 없는 심리치료니, 뭐니 하는 짓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 유년 시절에서 녀석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고 입학이 다가와 바빴던 날이 많았다. 녀석은 내가 시간이 지나 무시를 할 때마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는데, 나는 그조차 무시해버렸다. 그게 편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관심이 식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녀석들과 어울리지 않는 내 나름의 수로 계속 방어하면 좋으련만, 중요한 가족 행사에는 가끔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고모께 가기 싫다고 하여도 그래도 할아버지를 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를 어르고 달래 데려가곤 하였다. 그런 중요한 때마다 녀석은 내 한복의 소매를 죄 찢어놓는가 하면 남들 보는 앞에서 넘어지는 척하며 내 머리에 음료수를 쏟곤 했으니 그 참 영악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전자는 녀석의 반려동물이 벌인 짓이라 하면 되는 일이며 후자는 당연히 한창 넘어질 나이의 코흘리개 아이들이라 '실수였어요' 나 '제가 잘못했어요' 한마디면 끝나는 일이라 그 점에서는 내가 반박하기도 마땅치 않아 유일하게 기세가 등등하였다. 복수하기에도 그 치졸함을 따라 하고 싶은 마음도 없거니와 나는 이 또한 녀석이 행복하였으면 되었다 하고 넘어갔다. 훗날 나도 행복할 선택을 하면 되는 일이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 너른 아량을 베푼 셈 치면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1학년 입학 당시 고모는 녀석에게 '너는 지금부터 우리 이씨 가문을 대표해서 가는 아이고, 누리는 후부키 가문을 대표해서 가는 아이니, 서로에 대한 것을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 했다. 녀석은 후계자 자리에 여전히 집착하여 고모 말이라면 철석같이 지킬 녀석이라 내가 따로 언질을 건네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후부키 이노리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여러 기숙사 중 현궁을 택하였을 때 그 녀석은 백궁 하나만의 선택을 받았다. 고작 하나의 선택임에도 그놈의 순혈이 뭔지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양 의기양양하게 다녔으니, 그 안에서도 또 무리를 지어대는 것이다. 나야 뭐 현궁의 얼음 호수나 금지된 숲 근처에 틀어박혀 있어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으며 만난다고 하더라도 수업 때만 가끔 마주쳤으니 그 녀석도 내게 말도 걸기 전에 친구들이 데리고 가버렸기에 서로 영양가 없는 기 싸움을 할 시간이나 여력도 없었으리라. 적어도 내 딴엔 그랬다는 소리지 녀석은 심성이 고약하며 기가 펄펄하고 이젠 보는 어른조차 없기에 기숙사 방에 들어오면 꼭 부엉이 한 마리를 보내 계속 내게 협박을 하던 것이다. 오늘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으며 학교생활을 편히 보내고 싶다면 처신을 잘하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면 참 우습기만 한 일이다. 당연히 그럴 때마다 나는 고모가 제발 답장이라도 해달라며 안달복달을 하며 보낸 편지와 함께 죄 태워버리며 침묵으로 일관하곤 하였다. 제깟 것이 아무리 교내에선 제한할 가문 사람이 없어 날뛰어도 늘 그렇듯 무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놈이 내 발을 걸어 넘어져도, 내 마법 약에 괴상한 재료를 몰래 넣어도, 내가 미쳐버렸으니 하는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 학교생활을 불편하게 만든다 해도 졸업까지만 감내하면 되는 일인 것이다. 녀석이 행복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생각을 번복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학기 중이며 내가 6학년에 올라갔을 때다.
나는 드디어 6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게 되었다. 몇 번째 왔는지도 헤아릴 수 없는 편지를 불태우며 내 멋대로 살아온 것이다. 벗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장의사 녀석이 선물해준 장죽에 쑥을 넣어 대놓고 뻑뻑 피워대기도 하고 아닌 밤중에 종이우산을 쓰고 뛰어다니기도 했으며 기어이 방종에 가까운 생활을 해내고 말았으니 그동안의 변화도 제법 많다. 나는 제법 학생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받았고 그 녀석도 머리가 좀 크니 나를 괴롭히던 빈도가 줄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냥 방심하고 살았다. 늘 그렇듯 기숙사 방에서 편하게 쉬고 있더니만 간만에 오는 부엉이의 부리에 글쎄, 또 괴상한 편지가 딸린 것이다. 나는 편지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날따라 불길함이 풀풀 피어올라 편지를 불태우지 않고 뜯었으니, 그 안의 내용은 내가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내 인내심을 모조리 박살 내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을 용납하기엔 내 인내심은 아주 부족했고, 아무리 후부키의 온화한 성정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피마저 들끓게 하였다. 내 가장 큰 비밀을 동네방네 떠들어 졸업을 아예 없던 일로 해버리겠다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며 심신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발설하는 순간 녀석도 평생 무덤 속에 썩혀 졸업을 못 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을 삭이며 나는 들끓는 피를 겨우 참아내고 넘어가기로 했다.
문제는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이 끝난 날이었다. 에반스 그린폴드 교수님이 크루시아투스와 임페리우스, 거기다 살인 저주를 얘기하다 칼 선생님과 혼인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진 날이었다. 흥미롭던 수업이 끝났다. 정확히는 수업이 끝나고 복도로 나가기 전의 일이다. 나는 질문할 것이 있어서 학생들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각 저주에 대해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하면 역마법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그 이전엔 내가 생각한 가설이 들어맞아야만 했다. 그렇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더니 녀석은 수업이 끝난 내 책상 앞으로 굳이 지나가며 6년 동안 마시던 맛대가리 하나 없는 주스를 쳐서 엎지르고야 마는 것이다. 기껏 열심히 필기한 것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럽혀진 것도 있지만 나는 엎질러진 주스를 보며 들끓는 속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는 지난 밤의 일도 있었으나 이 주스는 오늘 마실 수 있는 마지막 분량이었으며, 고모가 주실 것은 아무리 빨라도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오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미처 녹지 못한 내용물을 손으로 쥐며 나는 녀석의 사과를 기다렸다. 그래도 사과만 한다면 봐줄 요량이 있었다. 재빨리 기숙사 방에 돌아가면 되는 일이고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복도를 나서는 것이다. 되레 날 보고 비웃는 표정을 지으니, 오늘 너 한번 엿먹이고 끝내겠단 고약한 심정은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달려 나가 녀석의 머리채를 부여잡아 바닥에 깔아 눕혔다. 그동안 많이 참아오던 것이 기어이 폭발한 것이다. 내가 달려가 뒤통수에 달린 머리채를 휙 잡고 그대로 다니자 녀석의 뒤통수가 바닥에 쿵 찧는 소리를 냈다. 어찌나 큰 소리인지, 작은 체구치고는 무시무시한 힘임을 짐작게 했다. 잉크병이 엎질러지고 깃펜이 땅을 구른다. 양피지가 공중에 흩날렸다. 녀석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녀석의 몸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폭력의 현장에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고 반항을 해도 내 주먹이 멈출 리가 없었다. 6년 동안 참았던 울분을 쏟듯 주먹은 얼굴에만 집중했다. 잘난 듯 웃는 얼굴이 이젠 꼴도 보기가 싫었다. 녀석이 허우적거리던 손에 채여 가면이 벗겨지고 다른 학생들이 말리려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기어이 녀석의 코뼈가 으스러졌다. 딱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와 찢어지는 비명이 울리고 질질 흐르는 피 사이로 나는 한 손으로 놈의 목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지팡이를 꺼내 이마에 꾹 눌렀다. 그러자 목을 쥔 손이 새하얗게 물들지 않던가. 날 선 지팡이 끝이 이마의 살갗을 파고들자 학생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고 녀석이 몸을 잔뜩 긴장한다. 이대로는 어떤 마법을 써도 머리가 터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이 교수님과 사감 선생님을 부르러 달려가는 사이 녀석은 벌벌 떨었다.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내가 보살이라 하여도 가문원이 다 알다시피 자비롭지 않고 할아버지껜 부모, 자식 다 잡아먹은 불쌍한 녀석이란 소리를 들었을 정도의 사람인데, 그런 내 성정을 끝까지 건드리던 오만방자한 자의 최후가 무엇이겠는가. 녀석은 그깟 자리 하나에 욕심을 내 질투하는 머저리에 대가리 안 돌아가는 불쌍한 녀석이었다. 그렇다고 내 자비를 주기엔 앞서 서술하였듯 자비롭지 않은 자였다. 나는 고개를 확 내려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오블리비아테를 써줄까, 봄바르다를 써줄까. 제가 도련님께 선택할 기회를 주니 제법 자비로운 처사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녀석이 대답도 못 하고 흰 손에 목이 졸려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거슬려서 빨리 끝내버리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을 벌려 봄바르다의 바까지 발음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콱 붙잡아 녀석에게서 멀리 떼어둔다. 그런데도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풀릴 일은 절대 없었다. 나는 하도 흥분했는지 새빨갛게 충혈이 된 눈으로 방해한 사람을 쳐다봤고, 누군지 알아봤어도 그새 날카롭게 뻗은 손톱으로 녀석을 붙잡기 위해 몸을 계속 바둥거렸다. 기어이 몸을 쫙 뻗어 녀석의 옷깃을 잡았을 때 제발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쫙 때리는 것이 아닌가. 머리가 일순 시원해지고 일말의 이성을 찾았음에도 결국 짐승처럼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 놔!!" 하고 말이다. 추후 녀석이 병동으로 옮겨지고 그 일이 가문까지 퍼졌다. 고모와 사감 선생님께서는 각각 교실 안의 상황을 보고 녀석의 후계자 자리를 박탈하고 내가 왜 그랬는지 상황을 이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번 일은 심했다 하지 뭔가.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절대 심하지 않았음에도 고작 한 번의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간의 인내와 선행이 수포가 되는 것이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냐는 질문에 나는 그날따라 색채가 더 짙어진 것 같은 눈동자로 허공을 올려다보곤 눈알을 긁어내듯 손톱을 최대한 세워 얼굴을 좍 그어내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짐작이 아니라 아마 정답일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묻지 않으니 그녀도 따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글쎄요? 라는 말로 애매한 태도를 보여 무언가 아나보다 싶게만 만든다. 이런 장난 정도는 그냥 넘어가주니까. 덕분에 다음에 샤오를 만나면 할 얘기가 생겼으니 그녀로서는 이득 밖에 없었지.
"다른 방법이 뭔지 궁금한데, 알려주면 안 돼요?"
윤이 찾아보라는 선물을 찾으며 대화를 주고받다가 손끝에 걸리는 무언가를 잡아 꺼내본다. 이런게 있었구나 싶은 작은 상자였다. 이게 선물이 맞는 듯 그가 상자를 가져가 열었다. 의문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에 보인 건 동그란 보석이 장식된 반지 한 쌍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반지 상자였구나. 내용물을 보고서야 상자의 정체를 깨달은 그녀는 다시금 떠오르는게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반지가 선물이라는 건가?
"어... 으응..."
그녀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도 지금 상황이 얼떨떨했다.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싫은 건 아니었다. 싫을 리가 있을까. 악세사리라면 줘도 구석에 처박아 놓던 그녀지만 그의 심장인 로켓만은 이음새 없는 줄로 걸고 다닐 정도다. 그런데 윤이 직접 끼워준 반지를 어떻게 싫다고 할까. 행여나 반지가 빠질까 손을 살짝 쥐고서 가만히 반지를 바라보고, 뒤늦게나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지금만이 아니라 계속 이것만 있어도 좋을 거 같아요. 그래도 선배가 다음을 말한거니까, 꼭 지켜야 해요?"
반지의 가치가 어찌됐든 그가 직접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건 미래가 있다는 의미기도 하니.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말한 후 눈웃음을 짓고있는 윤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준다. 처음은 아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가득 담아서, 라고 할까. 바깥이 아니었으면 볼이 아닌 입술에 좀더 진하게 해줬겠지만. 지금은 가볍게만 하고 아직 상자에 남은 반지 하나를 보고 윤을 보며 묻는다.
"선배도 낄 거에요? 그럼 제가 해줄래요."
그녀는 받은 걸로도 충분해서 꼭 그가 한쌍인 반지를 끼지 않아도 불만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껴준다고 하면 정말 기쁠 것이고, 그가 해준 것처럼 그녀도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한 빼지 말았으면, 하고 조용히 생각하겠지. 그런 내심을 가라앉히며 윤을 바라본다. 지금은 얼른 반지를 끼워주고 안기고 싶을 뿐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공간 자체에서 이질감이 느껴지고 내가 서있는 것인지 아니면 공중에 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양 옆으로는 얼마나 넓은지, 위 아래로는 얼마나 높은지도 알 수 없었다. 레오는 '꿈이구나' 하고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 꿈을 꿈이라고 인지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잠에서 깨던데- 레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여차하면 잠에서 깨겠지 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바닥에 누웠다. 역시나 이질감이 느껴진다. 누워있긴 했으나 등을 받쳐주는 것인지 아니면 공중에 누워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이상한 감각.
" 여유있네. 너 다워서 좋다. "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 레오는 어차피 자신의 꿈인데 별 일 있을까- 싶은 생각으로 '어- 그래.' 하고 대수롭지않게 답하며 일어나 앉았다. 새카맣게 어두운 공간에서 발소리를 내며 걸어나오는 여자아이. 왼쪽 눈에 보이는 흉터가 인상적이었고 건강한 흑발과 표범을 연상시키는 노란 눈동자. 아, 나구나. 레오는 '오~' 하고 조금 신기한듯 자세를 고쳐앉았다.
" 누구냐고 물을 필요는 없는것같고. " " 그렇지. 보시다시피 나는 너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없는것처럼 치부하던 너. " 아, 네- 그러시구나- " " 조금 더 솔직한 모습의 너. 필터링되지 않은 너. 순수하고, 날것 그대로인 모습의 너. 남들한테 보여주기 싫고 보여줄 수 없고 꾹꾹 눌러담은 감정이나 기억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너의 모습. 그게 나야. " " 무슨 소리를 하려고.. "
꿈 속의 레오는 레오의 앞에 앉았다. 그리곤 빙글빙글 웃었다. 레오는 조금 당황한듯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레오는 손목을 잡아 제 자리로 끌고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레오는 물었다. 레오는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이질적인 공간이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느낌일까, 레오는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늘이 낮아져서 숨쉬기가 힘든 기분. 입 안에 쓴 맛 사탕이 굴러다니는 기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그런 기분.
" 조금 더 솔직한 시간을 가지는게 좋을것 같아서. 너, 원망스럽지? " " 다짜고짜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 " 나는 너야. 거짓말할 필요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어. 조금 더 편해지면 좋잖아? " " 아니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니까? 아무리 네가 나라도 나는- " " 쳐죽여버릴 수 있어- 라고 하려고 했지? 자,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보자.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긴 설명은 필요없어. 우리가 어딜 보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
페이스가 완전히 넘어갔는지 레오는 조금 벙찐 상태로 시간을 돌려보자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나는 나라는건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알고있으니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할지를 알고있으니 페이스를 몰고올 수 있다. 조금 뒤로 돌아간 시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듯이 한 장면 한 장면이 기억난다. 처음으로 크루시오를 맞았던 날, 두 명의 탈을 만나 크루시오를 맞고, 섹튬셈프라를 맞고, 이상한 동물에게 찢겨 죽기 직전까지 갔던 날. 레오는 보고싶지 않다며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레오는 그것마저 알고 있었다는듯 앉아있는 레오의 뒤에 앉아 슬그머니 끌어앉고 턱을 잡아 고정시켰다.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흘러가는 장면들을 보면서 레오는 가만히 속삭인다.
" 그렇잖아. 억울하고, 원망스럽잖아. 증오스럽잖아.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했는지, 왜 그 누구도 신경써주지 않았는지. 그렇지 않아? " " 아니, 아니야. 상황이 상황이었고 싸우는 도중에도 두 명이나 내 신변을 걱정해줬어. 이후에는 다들 그랬고. " " 아니, 아니야. 솔직해져야해. 더 솔직해져봐. 네가 그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 혼자서 피를 흘리고, 혼자서 죽어가고, 혼자서 몸이 찢기고, 혼자서 아파해야할 정당한 이유가, 있어? "
레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애써 무시하고 애써 감춰두었던 그런 것들.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부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인 감정들. 레오는 어렸을 때 배운 가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wie ein Stahl, 강철처럼. 주변이 뜨거울 땐 같이 뜨거워지고 차가울 땐 같이 차가워지는 강철처럼 주변의 상황에 물들어 유연하게 대처하고 강한 자에겐 강하게, 약한 자에겐 약하게 대응하는 사람이 되어라. 쉽게 주변 상황에 물들어버린다는 것은 부정적인 기운이 감돌면 그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부정적으로. 뒤에서 레오를 끌어안은 레오는 볼을 부비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 wei ein " " Stahl.. " " 하나씩 얘기해보자. 너무 무시하고 살면 그것도 안 좋으니까. 어차피 나는 너고 너는 나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리고 네가 그 말을 하고싶지 않아하는 것도 알고있고 결국은 그 말을 해야한다는 것도 알고있어. 그리고 널 어떻게 도와야 할지도 알고있지. "
레오도 알고있다. 레오는 레오고 레오는 레오니까. 어떤 말을 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있다. 레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에 있는걸 끄집어내라는 이야기겠지.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결국 이게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너의 말을 따르고 싶다는 것을 나는 나는 알고있고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테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 볼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 머리카락의 조금 간질간질한 느낌까지. 너는 완벽한 나구나. 나는 완벽한 너였구나. 레오는 한 번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는 레오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할 수 있지?' 라고. 레오는 '어차피 답을 알고 있잖아.' 하고 답했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니까. '시작할게'라는 말과 함께 레오는 한 단어, 한 단어씩 물꼬를 틀어주었다. 한 단어씩 물꼬를 틀어주면 레오는 감춰두었던 감정을 꺼내고, 묶어두었던 말을 풀어낸다.
" Why " " Why was it easy for you "
" Did " " Did I deserve the abuse? "
" I " " I can't believe I let it "
" Not " " Not what I wanted "
" See " " See through your bullshit "
" Your " " You're so dramatic "
" True " " True to your form of "
" Face " " Every consequence "
" Un- " " Unintimidated "
" -til " " 'Til the very end "
" It " " It'll never happen "
" Was " " " Was it all a lie? "
" Too " " Many motherfuckin '"
" Late " " That's what you do best "
" Lie " " That's what you do best "
속에 있던 말들을 잔잔하지만 거칠게 전부 쏟아냈다. 부정적인 기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전부 쏟아냈다. 원망과 증오 억울함과 분노 짜증과 화. 전부 쏟아냈다. 레오는 아무것도 하지않고 말만 했을 뿐인데 숨이 거칠어짐을 느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 리얼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때 레오는 가만히 레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하나가 남았어' 하고 말했다.
"Nero " " Forte.. "
검고 강하게 그리고 강철처럼.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하늘이 낮아서 숨쉬기가 힘든 수준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 내려 숨쉬기가 힘들어진 듯한 느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다거나 속을 게워내고 싶다는 느낌. 레오는 잘했어, 하고 한 마디를 남기며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레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거칠게 숨을 쉬었고 이상한 이질감과 불쾌감에 사백안을 뜨고 호흡을 가져오려 하고 있었다.
"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알잖아? 억울하고, 화가나고, 원망스럽고, 증오스럽고. 그 부정적인 감정들. 삼키지 말고 뱉어. 조금씩 뱉어도 좋아. 로아나는 강철처럼 쉽게 물드니까 쉬울거라는거 알잖아? " " 그랬다가는... " <clr black black"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게 나쁜건 아니잖아? 복수는 해야지. 누가 널 한 대 때리면 열 대는 때려줘야하잖아. 살을 취하려하면 뼈를 뺏어야하잖아. 묻어두지마. 다른 사람도 아닌 '나'니까 넌 할 수 있어. 그렇게 해야해. "
레오는 레오의 볼을 쓰다듬었고 '이제 갈 시간이야' 하고 말하며 레오의 앞으로 왔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자신의 모습에 짐짓 당황할 뻔 했지만 레오는 그럴 틈도 없어보였다. 레오는 천천히 다가와 레오를 끌어안고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푹 잔듯 개운한 기분이었지만 뱃 속이 간질간질했다. 이 느낌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의 느낌. 내가 아픈 만큼 상대를 아프게 하고싶고 내가 맞는 만큼 상대를 때리고 싶고 내 피를 흘리는 만큼 상대의 피도 흘리고 싶게 하고 싶은 이 느낌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의 기분이다. 화, 증오, 분노, 원망 따위의 부정적인 에너지들. 가만히 누워있던 레오는 한 차례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