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자신이 누나를 본 적 있냐고 물어봤던 사람 대다수는 모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갔기 때문에 이렇게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5년 전인데다 당시에 꽤 어렸기에 기억나지 않는 것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미나즈키는 최대한 가쉬의 질문에 대답해보려 노력했다.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올 정도로 긴데 이건 잘랐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요... 저보다 키가 커요. 아마 180은 될 거예요."
그 외에 힘이 세다거나(가디언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보면 사진보다 더 예쁘다거나(이건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우동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걸 좋아한다거나(실종된 사람을 찾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였다) 하는 얘기는 깔끔하게 생략했다.
다행이라는 그의 말에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얼마전 미나즈키와 대화할 때도 그랬지만, 요 근래 노력해서 무언가 내세울 것이 없었다면 이러한 흐름에서 분명 울적해졌겠지. 그럼 상대도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그런건 어쩐지 슬프니까.
"그래? 그런 것 치곤....."
흐응, 하고 나는 잠깐 그의 기색을 살폈다. 목소리는 어딘가 가라 앉아있고, 짧게 신음하면서 내 시선을 피하고. 그냥 그렇다기엔 무언가, 고민이 있어보이는 모양새였다. 나는 파고들어도 될지 조금 고민하다가, 아까 그가 보여준 호의에는 답해줘야겠다 싶어서. 기울였던 고개를 다시금 바로 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도 언제든 의지해줘. 친구잖아?"
그렇게 말하곤 좀 더 믿음직해보이도록, 나는 팔을 굽혀 근육을 자랑하는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한쪽 눈을 깜빡이는 것이다. 물론 내 가녀리고 가녀린 팔뚝은 그런다고 무언가 울퉁불퉁 해지지는 않지만.
지금 시간은 대략 밤 10시. 나는 팬티차림으로 거리를 걷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좋아. 설명해주지. 빨래를 귀찮아 하는 나는 거의 일주일에 한 두 번 빨래를 돌릴까 말까 하고 있지. 그런데 마침 기숙사의 세탁기가 고장나 시내의 외곽에 있는 빨래방까지 나가야 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매우매우 귀찮고 너무나도 가기 싫었지만 슬슬 입을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되기 시작해 어쩔 수 없이 빨래방에 가서 지금 입고 있던 바지와 옷과 후드를 제외하곤 전부 세탁기에 쳐놓고 돌리고 온 것이다. 어때, 효율적이지? 이제 이것만 끝나면 세탁기 수리가 끝날 때까지 안심이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 패인이었다.
빨래방에 빨래거리를 넣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우선 바지랑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침대에 뛰어들어 가디언넷을 살펴보았다. 조금 던지는게 잘못 돼 바지를 열어둔 창문 근처로 던져둔 것이었다. 뭐 어때. 냄새도 빠지고 좋겠지. 하고 그냥 냅두고 나는 가디언넷을 살펴보았다. [술취한 너구리 만난 썰 푼다.] [커플 피자 푸드 챌린지 너무 억지 아님?] [영화 상영회 엽니다!] 등 여러가지 글들을 살펴보던 와중, 창문에서 갑작스런 강풍이 불어닥쳤다. 강풍이라곤 해도 봄이었기에 그저 시원하게 느껴지고 말았지만. 그렇게 침대에 누워 가디언 넷을 하다보니 어느새 알람이 울리며 빨래거리를 다시 챙겨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 귀찮아."
그냥 거기에 있을걸 그랬나. 거리가 애매해서 그냥 돌아왔는데. 나는 아까 던져둔 옷과 후드와 바지를 입고. 바지를 입고. 바지를 입고.. 응? 바지가 없..다?
"???"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분명히 바지.. 창문 근처에 던져뒀..
"아!!!"
설마 아까 강풍에 날아간건가? 불운도 이런 불운이 다 없지. 허나 당황하지 마라 가쉬. 아무리 그래도 멀리 날아가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팬티차림으로 서둘러 기숙사를 나서 날아갔을 법한 방향을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밤산책을 하는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한동안 기숙사 영역을 돌아다녔지만, 날아간 나의 바지는 결국 찾지 못했다.
"내 바지!!!!!!!!!!!!!!!!!!!!!!!!!"
나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허나 그런다고 바지가 돌아오는 일도 없겠지. 나중에 누구에게 부탁하면 되는거 아니냐고? 공교롭게도 지금 부탁할 사람도 없을 뿐더러, 거긴 빨리 찾아가지 않으면 다음 사람이 빨래거리를 밖으로 던져두거나, 없어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음. 어쩔 수 없지."
나는 두뇌 회전이 빠르다. 영성 S이기 때문이지. 나의 영성S의 초S급 두뇌의 판단은 간단했다.
팬티 차림으로
빨래방으로 간다.
다행히도 지금 입은 팬티는 그렇게 더럽진 않았다. 설명하자면, 하늘색의 바다와 배가 띄워진 아기자기한 바다모험을 그린 귀여운 트렁크팬티랄까. 내가 좋아하는 최애 팬티다.
아냐.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내 최애 팬티를 모두에게 자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 말이야. 봐. 귀엽잖아? 물결치는 바다를 돚단배를 타고 여행하는 꼬마 아이의 모습! 거기에 중앙에는 고래가 바다 위로 뛰쳐나오는 그림도 있다.
그게 포인트인데, 고래의 눈이 흰색 단추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을 좋아한다. 실용적이기도 하고, 절묘하게도 느껴져서. 아무튼, 좋게 생각하자. 귀여운 팬티를 자랑하는거다. 응. 뭐 그렇다고 노출증이 있는 것도 아닌 나는 상의는 빨간색의 후드집업 상태로, 하의는 방금 설명한 귀여운 바다항해의 팬티와 검은색 슬리퍼 상태로, 기숙사를 나섰다.
"꺄악!"
"변태야!"
"너 미쳤냐?!"
나를 향해 외치는 각종 감탄사가 들려왔지만, 나에겐 단순히 경외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범인들아 이것이 바로 패션이다! 왠지 이러다보니 조금씩 자랑스러워지는게, 버릇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걷다보니 꽤나 시내까지 나왔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나는 그래도 으슥진 곳을 노려 향했지만, 역시나 나를 향해 쏟아지는 각종 갈채와 찬사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었다. 거기에 셔터 소리까지 들리는데, 그건 좀 심하지 않아?
>>257 단언컨대, 열일곱 인생에서 이번 만큼 당황스러웠던 적은 손에 꼽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손에 꼽을 만큼 지금 이 상황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저 망측한 디자인의 고래 무늬가 곁들여진 바지는 바지가 아니라 사실 속옷이었다…뭐…그런 건가요? 아무리 한밤중이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지만 대체 이 광경은 무엇이지요? 제가 정말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잘못 보고 있는 것이겠지요????? 주변의 비명소리가 지금 제 심정을 표현해주고 있는 듯 하답니다. 에미리는 그저 밤산책을 나왔을 뿐인데 대체 왜 이 광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사내의 속옷 디자인을 제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차암, 천박하셔라…..🎵”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저는 저 속옷 차림의 학우분을 이렇게 불러 멈춰 세우려 하였답니다.
그렇게 빨래방으로 서둘러 - 사실은 어느정도 속도를 눚추고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이건 나름대로 즐거운데. 짜릿해! - 가던 도중 어디선가 천박하다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를 멈춰세웠다. 누구냐. 난 바쁘단 말이다. 하고 고개를 돌리니 귀족의 영애같은 분이 나의 앞길을 막아섰다. 베이지톤의 긴 머리는 돌돌 말린것이 매일 한 1~2시간쯤 쓰지 않으면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팅이 잘 되어 있었고 화장 또한 꽤나 비싼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굉장히 깔끔해 보였다. 뭐, 요약하자면 귀족 아가씨같은 느낌.
"뭐냐. 이 몸은 바쁘단 말이다."
나는 빨간색 후트 집업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채로 그녀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나저나 천박하다니, 이 바다항해팬티가 천박하다는 것인가?! 그녀는 밝게 웃으면서도 어딘가 차가운 인상을 한채로 나에게 다가왔다. 호오, 다가오는가.
이르미 쥬가인 가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던 미나즈키는 그제서야 눈앞에 있는 학생이 바로 그 (여기에는 차마 전부 적을 수 없는 수많은 기행으로 유명한) 가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미나즈키는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하쿠메이를 찾을 수 있다면 물구나무 하모니카 소년과도 기꺼이 협력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의 정체에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나즈키 하쿠야. 2학년이에요."
이번주 들어서 어쩐지 이상한 일만 생기는 기분이었다. 5년만에 에밀리를 보고, 진화 선배는 이제 더이상 선배가 아니고, 이제는 전설의 그 가쉬와 통성명을 하고 있다니. 이 다음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슬슬 두려워질 지령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따라 웃던 나는, 그가 갑작스레 팔을 잡기에 조금 놀랐다. 이두삼두 전완근? 슬픈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없다시피해도 무방하다. 내 피부와 근육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거나 물렁하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하는 편이니까. 스스로 말하기엔 우습지만 단순한 신체적 조건만 봐선, 나는 민간인 여고생과 흡사한 수준이 아닐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의념 사용자가 아닐 때 얘기고.
"이렇게? 영차."
나는 팔을 들어 올려 잡고 있는 그를 같이 들어 올렸다. 확인에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두어번은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다. 신체 A 와 건강 S 는 장식이 아니다. 전력을 다하고 버텨서면 최고 속도로 달려드는 자동차와 부딫혀도 견딜 수 있을 텐데, 다이안 정도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것은 사실 해보라고 하면 실로 간단한 일인 것이다.
"위치라.....노력하다보면, 그래도 결실이 올거야."
그의 고민은 성장에 관한 것이었을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도 그렇게 얘기했다. 노력이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화려한 재능도 타고난 인맥도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노력이라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자는 응원의 얘기였다. 나는 내가 허수아비와 대련을 통해, 부동일태세라는 특이한 기술을 얻었던 일화를 그에게 간단히 들려주었다. 너무 자랑처럼 들리지 않도록, 덕분에 시험 공부를 하나도 안해서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며 혀를 내밀고 웃는 것으로 마무리 했지만 말이다.
"친구끼리 같이 산책한걸로 고마울 것 까진 없지? 오히려 나도 말동무가 있어서 좋았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산책할까?"
그리고, ...같이 힘내요. 가쉬가 자세한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았기에 미나즈키는 가쉬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세상 사람 모두가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다면, 아니라면 애초부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 세상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나즈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쉬를 보고 살짝 웃었다.
멈춰 세워놓고 보니 이 남자, 익숙한 얼굴입니다. 그도 그럴게 제 선글라스를 카페에서 벗기려 하셨던 그 분을 제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분께서 한밤중에 속옷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시는 취미를 가지고 계시다는 걸로 생각하면 되는 걸까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망측하고 남사스러운 복장이 있을 수 있는지요??????? 만약에 여기 하즈키 오라버니께서 계셨더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도부 가자고 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열일곱 평생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입니다. 정말로요!!!!!!
"흐음~🎵 그렇군요~ 굉장히 멋진 디자인의 옷을 입고 계시셔서 말이어요~ 특히 저 바다를 항해하는 그림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너무 눈에 띄었답니다~ "
바쁘다는 도련님의 말씀에 해맑게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천천히 그분께 다가서려 하였습니다. 굉장히 지금 제가 돌려말했는데 이 말은 '도련님께서 팬티차림으로만 입고 다니셔서 뭘 보려고 해도 팬티밖에 보이지가 않아 고역입니다' 란 소리입니다.
"달이 청명한 밤이랍니다. 이러다 도련님께서 무슨 옷에 무슨 무늬 속옷을 입으셨는지 학원도의 모든 학우분들이 다 알게 되실 지도 모르오니, 부탁컨대 바지라도 사입고 거리를 활보해주시면 아니되련지요? "
천천히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며 저는 이렇게 조곤조곤 말하려 했답니다. 설마 돈이 없으셔서 팬티 차림으로만 다닌다 이런 말씀이 들려올 일은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이제 어찌할 도리도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괜히 그런 말을 해서 분위기를 더 침울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그저 말꼬리를 흐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가볍게 팔을 두드리자 나는 괜찮다며 미소지었다. 제대로 미소 지어졌는진 모르겠지만. 난, 어떻게 해서도 돌이킬 수 없다. 나의 의념이 막대하게 강해져서 그 때로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마저도 불투명한 상태. 그저, 이대로 걸어가는 수 밖에 없는것이다. 나는. 그래도 맞은편의 하쿠야씨는 희망이 있는거겠지.
"어, 어어."
말을 놓으라는 말에 조금 어색하게 반말로 대답했다.
"암튼. 나중에 도울 수 있는거 있음 연락 혀. 그럼 난 기본다."
슬픔을 공유하면 반이 된댔던가. 허나 둘 다 슬픔이 있는 사람들끼린 그 슬픔이 배가 될 뿐이다. 그저 공감하는 수 밖에. 나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정처 없이 걸어다녔다. 오늘 밤에 나온 이유 조차 잊어버린 채.
//막레로 하죠! 수고하셨슴다! 이제 이걸로 캐릭터마다 가쉬의 이미지가 천차만별이겠군.. 껄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