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엔 대체로 '우리 친구부터 시작하자' 패턴인 경우가 많다는 모양인데(만화에선 그랬다). 이미 친구이기에 그랬던걸까? 사실 나도 지금의 연인인 춘심이에게 사귀자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감정이 아주 없진 않았음으로.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 입장에서의 감상이 궁금했다. 무엇을 위해서 한달의 유예를 준걸까.
"그래. 그렇지. 물론 그렇겠지..."
그 부분에 대해 너무 추궁하면 그녀를 울릴지도 몰라서, 나는 따스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면 그러한 것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과격적인 책이었다만, 뭐...연애 관련 서적을 찾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상대가 상당히 적극적인가보네."
유혹이라는 말에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면, 춘심이의 적극적인 어필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던 내가 떠올라 어쩐지 간지러우면서도 흐뭇해진다. 친구사이라고 이런 것 까지 닮을 필요는 없을텐데. 우린 역시 너무 닮았다.
뭐? 이건 일반적으론 여자애들이 취하는 포지션이니, 내가 닮았다는건 어딘가 이상하다고? 내가 여자애 같을 뿐이라고?
나는 활짝 웃었다.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건 나지. 청월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선배였다가 전학간 동급생이 된 지금의 내 처지는 솔직히 말하자면 미나즈키가 날 얕보거나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와 같이 의뢰를 가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그게 기뻤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칭찬이나 기대가 너무나도 기쁘고, 거기에 보답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노력하고 싶은 사람인 걸지도 모른다. 그와 조만간 갈 의뢰도, 힘껏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겠지. 나는 늦은 시간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카페도 마감하고 나도 돌아가봐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 같네. 공부하려고 온 그를 자꾸 말거느라 방해한 모양새가 된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조심해서 들어가, 미나즈키. 다음에 또 보자."
심심할 땐 언제든지 연락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앞치마를 멘 차림으로 그를 마중해주었다.
사람이 오지 않을 법한 공터. 즉 반대로 말하자면 혼자 산책하기에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다. 너무 스스로만 생각한 듯 싶다. 충분히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서 산책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후회해봤자 뭐하랴. 익히 알고 있던 소녀는 내 눈 앞에서 둥둥 떠 있었는데. 고의가 아니다. 정말로.
"믿어줘! 나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그, 지금, 긴장해버려서.." 이어 그녀가 속옷을 보고 싶은게 아니냐고 묻자 나는 나도 모르게 3초쯤 침묵한 뒤 "그, 그럴리 없잖아! 난 그런.. 파렴치한 놈이 아니라고!" 하고, 대답했다. 지금의 침묵으로 신뢰를 잊었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나는 공중으로 띄어오른 다림을 위로 힐끗 보고곧바로 고개를 홱 숙인 뒤 정신을 집중했다.
.dice 1 3. = 3 1 = 그대로 공중에서 아주 느리게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킨다 2 = 슈퍼맨 자세에서 아주 느리게 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고 회전하게 한다. 3 = 그대로 90도 회전시킨다.
그래, 동정이었다. 어쩌면 그 애가, 나한테 '친구'의 일을,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 아니, 걱정이 아니지. 이건 내 편협함이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네가 착각한 게 아니라고 증명해보라는 동시에, 처음부터 잘못된 마음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대해줄 테니 평범한 친구로 돌아가자고. 그런 비겁한 제안을 했다.
" 진화야. "
심신을 가라앉히고 자칭 170cm의 쓰다듬기 좋은 머리카락을 팔을 뻗어 쓰다듬으면서 따스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내가 기억하기론 네 영성이 B인 것 같았는데. 좀 더 잘 써봐.
" 적극적이...려나. 그런 쪽으론 경험이 많이 보이긴 하지. " //💕💕💕💕💕💕💕💕💕💕💕💕💕💕💕
"산책하기 나쁜 곳은 커녕 오히려 좋지 않나요?"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적당히 다니기 좋은 인프라가 있고.. 아늑한 길.. 이라고 하면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게다가 혼자가 되고 싶다면 딱 좋잖아요.
"정말 그러시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3초간 침묵했다고 하여도 다림은 일단 믿어줄 겁니다. 그리고 힐끗 본 것도 일단은 믿어는 드립니다. 네.. 절대로 루비의 그 색이라던가 그런 건 다림이는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렇죠? 네? 그리고 가쉬가 행한 일은... 90도 회전이군요.
"...." 90도 회전이 어떤 방향인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180도 회전이라 뒤집히는 것보단 낫겠지... 그러면 붙잡는 것도 한계니까 흘러내려버릴 것이다.. 그리고 가쉬에게 스테이터스 150의 차이만큼 저주를 해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이르미 씨. 이게....최선인가요..?" 덤덤하기는 하지만. 원래 그랬지만 한결 더 신뢰가 사라진 말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