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오랫만에 좋아하는 만화책이라도 사려고 서점에 온 나는, 익숙한 장신의 여학생을 마주했던 것이다. 나와 어쩌면 가장 친하고도 할 수 있는 친구를 보고 오랫만에 반가운 마음으로 아는체를 하려다가 그녀가 어떤 책을 발견하곤 나이스! 라고 하는 듯한, 엄청나게 기뻐하는 자세를 취하는걸 봤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그렇게 좋아하는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먼저 말걸기 보다는, 그 책을 잠깐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 남자 여럿 울려본 언니의 남자 꽉 잡는 법 ]
".....?!......!!"
세상에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기나 한건가. 그녀가 저, 저런 책을....!? 여, 연애를 시작하려는 건가?! 성실하고 성실한 그녀의 이미지를 180도 꺾어버리는 듯한 강렬한 책에 나는 사랑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다림이가 너구리 왕과도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그녀의 인맥이 넓다곤 생각했지만....그렇게 생각하면 너구리 춘덕이가 일하는 우리 카페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는 것도 어쩐지 신기한 시선으로 느껴진다. 너구리왕이라....나도 한번쯤 보고싶네.
"우리도 그런걸 메뉴로 내놓아볼까?"
요 근래 다른 차원 사람들을 위한 신메뉴는 꽤 호평이었다고 얘기하면서, 뭐 가진게 있냐는 말에 잠깐 가디언칩으로 확인해봤다. 개구리가 주었던 아이템들은 대체로 괴상하지만, 음료라면....은신 기능을 부여하는 블루 레모네이드 스무디가 있네. 라고 대답했다. 그 외 다른건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피자라서 영 애매하네. 라고 덧붙이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귀여운데. 몇개 정도는 건네주는게 차라리 편할지도?"
과일을 따는 그녀를 보곤, 나는 쌓인 바구니를 옮기는건 내게 맡기라고 말하면서 가볍게 들었다. 요즘 여자라는 오해를 부쩍 많이 받고 있지만 이래보여도 신체도 A 건강도 S 다. 과일 좀 쌓인 바구니 같은건 거뜬하게 들 수 있다.
진화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미나즈키는 진화가 생각만 하던 그 문장으로 말을 시작했다. 이렇게 가쉬에 이어서(물론 미나즈키는 가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 질문'을 하는 두 명째 인간이...
"에릭이 선배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죠?"
...나오지는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금 미나즈키가 한 질문도 꽤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배, 혹시 여자인 건 아니죠?' 보다는 낫지 않은가. 미나즈키는 물론 시험공부도 중요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게 제대로 수업도 못 듣고(진화가 수업을 '안' 들을 순 있지만 '못' 듣고 있지는 않았다), 몽블랑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이건 사실일 수도 있다), 다림과 함께 자유를 되찾을 날만을 꿈꾸는(이건 정말로 사실이 아니다) 진화의 일을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넋을 빼고 있었던 탓에 누군가가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을 물음표로 채워 넣으며 눈가를 덮은 손등을 연신 더듬었다. 짓궂은 장난에 태연한 체를 하려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목소리를 기억하냐 물어도 이전에 알던 이를 학원도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아니어서, 역시 당혹감은 감추기가 어려웠다. 학원도에서 사귄 친구 중에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이 진화나 지훈이 말고 더 있던가 싶다. 그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흉내 내지만 은근히 장난기가 묻어나서 그다지 나쁜 상황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뭐야... 누군데."
눈가를 덮은 손을 겨우 붙들고, 잡아내리려 하며 고개를 비틀어 뒤쪽에 섰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망설이는 그를 보며, 나는 아. 무언가 학업에 고민이 있는걸까. 시험 공부라던가, 연애라던가. 혹은 전투법이나 인간 관계에 대해서 물으려는 걸까. 선배로써 후배의 고민에 나름대로 멋있게 대답해줄 방법을 열심히 고민했다.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진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의지해준다면 무언가 멋진 대답을....
"응응??"
응응????
대화의 흐름을 전혀 못따라가겠다. 한가롭게 디저트를 먹고 있는데 어째서 에릭의 괴롭힘이 언급되는거지? 물론 에릭이 날 괴롭히는?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요즈음에는 내가 반격하는 일이 많달까 사실 따지자면 내가 그를 잔소리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게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쭈글쭈글 하다가 요 근래 카페에 얼굴을 잘 비추질 않는데 혹시....
"가, 갑자기 그건 왜....??"
어쨌거나 나는 무언가 오해가 있음을 직감하고, 당황하면서도 거기까지 도달한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친구가 데려간 카페가 너구리 왕님이 운영하는 카페였거든요." 거기에서 너무 맛있는 것들을 먹어버린 탓인지 입만 높아졌다고요. 라고 말하면서 요리라도 배워서 해야죠.. 라고 말하면서 그런 걸 메뉴로 내놓는다는 말에 그래도 괜찮을지도요... 라고 말하다가 역시 공급이 불안정하니까 완전 한정판이 되겠네요. 라고 말합니다. 스페셜 후르츠 파르페 같은 느낌이 되려나?
"블루 레모네이드가 2개쯤이라면 하나.. 교환하실래요?" 1개만 있으면 교환하기엔 그러니 물어보는 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랑 케이크는 저도 있으니까요. 라고 덧붙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난폭해진다네요." "많이 먹으면 랜스를 데리고 와서 토벌 쪽이 되려나요.." 한두개 정도는 되지만요. 라고 덧붙이다가 들고 가는 걸 봅니다. 돌아오는 동안에 쌓아둬야겠다면서 부지런히 다람쥐마냥 과일을 똑똑 땁니다. 색으로 익은 게 구분이 가서 다행일까요. 그러다가 잠깐 쉬다 보면 나무 밑에서 반짝거리는 풀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