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물게도 그녀의 권유에 고개를 기울였다가, 아하. 하고 깨달았다. 간단한 채집 의뢰인가. 나쁘지 않은걸. 어차피 특별히 바쁘지도 않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겁이 많은 몬스터라면, 내 【발구르기】로도 간단히 내쫓을 수 있을테니까. 무엇보다 채집 대상이 과일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괜찮을 것 같은데? 응, 동행할게."
별로 어려워 보이는 의뢰도, 오래 걸릴 것 같은 의뢰도 아닌지라 나는 흔쾌하게 동의를 포시하면서 군락지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이걸 보니 마침 떠오르는게 있었다.
"혹시 우리 상점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이계의 과일로 만든 아이스크림. 저거 몇개 얻어가서 재현 못해보려나?"
그녀와 처음 만난 계기는 상점가에서 같이 쇼핑했던 것이었지. 그 때 게이트산 과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상당히 맛있었던 것이 인상 깊다. 나는 나무에 잔뜩 자라나있는 과일을 보면서, 그 추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네 채집 의뢰에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의뢰지만 혼자서는 역시 쫓아내기 곤란할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발구르기를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들었다면 발구르기를 해서 과일이 떨어지면 곤란하니 방패로 깡! 이 괜찮을 것이라고 덧붙였을까? 동행하는 데 동의하고 군락지를 보던 진화 씨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네요. 이계의 과일로 만든 거 꽤 맛있었어요" "상당히... 대단했다는 느낌이었죠?" 몇 개 얻어가서 재현하는 거.. 가능할지도요? 너구리 왕님은 게이트산 과일로 케이크도 만드시더라고요. 먹어본 적은 없지만요. 라고 말하면서 과일을 조심스럽게 따 봅니다. 꼭지를 잡고 순식간에 따면 영롱한 빛이 있는 과일이 하나 손에 들립니다.
"바구니에 담고.. 그걸 노리는 몬스터를 쫓아내는 걸로 하면 딱이겠네요" 하나를 담고 또 이리저리 들고 다니는 게 맞겠지요. 다림이 사다리를 타고 따고, 진화가 지킨다거나. 교대로 하긴 하겠지만서도
마침 조금 배가 고픈 차였던지라 미나즈키는 진화와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과자를 하나 집어먹었다. 다른 손님도 없고, 이렇게 단 둘이라면 모르는 걸 물어봐도... 그런데 진화는 공부를 안 해도 괜찮은 건가? 책을 펼치던 미나즈키의 손이 멈췄다. 생각해보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날에도 진화는 여유롭게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자신이 누군가보다 느리다는 것 자체를 최근 5년간 거의 겪어본 적이 없었던 미나즈키는 혼란에 빠졌다. 학교 안에 몽블랑과 이어지는 비밀통로 같은 게 있나? 아니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순간이동 장치가 있는데 여태 혼자 걸어다닌 건가? 아니면 에릭이 선배의 약점을 잡고 몽블랑에서 노동착취를... 미나즈키는 책을 반쯤 펴다가 말고 진화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좋아, 있다. 그렇게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나이스! 라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건 평생 지나가면서 기억에도 남겨 보지 않은, 내가 관심을 보일 거라곤 생각도 한 적이 없던 바로 그것. '연애 서적'이었다...! 꼭 그렇단 건 아니지만 학교별로 학생들의 성향이 극명히 갈리는 만큼, 어느 쪽이 주로 이용하는 서점엔 특정한 책이 없다거나 한단 말야. 청월에 가까운 서점에는 주로 참고서 같은 책─공부법 책은 적다─이 종류별로 있는 반면, 아프란시아에 가까운 서점엔 만화책과 소설책부터 시작해서 '초심자에게 추천하는 종이접기 시작법' 같은 취미 관련된 책이 다양한 분야별로 있는 편. 참고로 이 정보는 가디언넷에서 얻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 서점으로 온 나는, 무려 한쪽을 차지하고 진열되어 있는 반짝반짝한 연애서적 코너를 발견하고, 마침내 사냥감을 무엇으로 할지 고르는 일만 남았던 것이다. 근데 이거 집기 전에 제목을 안 봤네. 표지가 엄청 강렬한데. 어디, 책 이름이...
[ 남자 여럿 울려본 언니의 남자 꽉 잡는 법 ]
...잠깐, 뭔가 기억나는 거 같은데.
<회상> [ 가디언넷 ] [ 제목 : 연애법 책 샀다ㅋㅋㅋ 이제부터 나도 카사노바 ㄱㄴ? ] [ 내용 : (대충 제목으로 어그로 끄는 연애서적 표지 화질구지로 찍은 사진) ] ㄴ [ (욕설)ㅋㅋㅋㅋㅋㅋㅋㅋ ] 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ㄴ [ 왜 다들 웃으시죠ㅡㅡ 전 이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봅니다. 도전해보세요! ] ㄴㄴ [ 얘가 제일 나쁘네ㅋㅋㅋㅋㅋㅋ ] ㄴㄴㄴ [ 악질쉑ㅋㅋㅋㅋㅋㅋ ] ㄴ [ 여자가 넘어오는 게 아니라 님이 선을 넘어가겠네요ㅋㅋ ] ㄴㄴ [ 좀 치네 ㄷㄷ ] <회상 종료>
......응, 가디언넷 스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면 이 책은 내려놓는 게 좋겠다. 표지를 보면서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느낌으로 웃다가 그렇게 책을 내려놓으려는데... 거기엔, 친구가 있었다! 나랑 정말 안 어울리는 책을 손에 쥔 채로 마주치고 말았다!
" 자, 잠깐. 뭔가 생각했다면 모두 오해야. " " 서-설명할 수 있어! 조금만 기다려! "
괜히 허둥지둥하면서 손에서 책을 놓는 것도 깜빡하고 ─딱히 진화가 도망치진 않았을 수도 있지만─아무튼 잡으려 했다...!
학교가 끝난 후 그대로 기숙사에 돌아가기엔 기분이 내키지 않아 재미있는 것 없을까~ 하고 학원도 내를 싸돌아다녔다. 그러다 별달리 할 것을 찾지 못해 공원에 잠깐 쉬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하다기보단, 묘하게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목소리.
목소리의 근원지로 가보니 꽤 오랜만의 지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백춘심. 학원도에 오기 전에 잠시 알바를 했던 곳의 사장님의 딸이다. 정말로 잠시라서, 한 달 하고 도망쳤지만. 제철소 알바의 고수익에 혹해서 들어갔는데, 한 달 동안 정말 뺑이만 치다가 도망쳤다. 그래도 한 달동안 한 덕에 몇 주 동안은 풍요로웠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소장님의 호통이 뇌를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시달렸다. 겨우 한 달이었는데도 워낙 고생을 했다보니 평생 잊지를 못 할 그런 기억이었다. 나는 그 때 고생한 만큼 되돌려줄까 싶어 골려줄 모양으로 그녀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홱 하고 두 손으로 눈을 가리려고 했다.
간단한 호기심에 물어보면서도, 발구르기로 과일이 떨어지면 곤란할 것이라는 말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걸 이용해서 반대로 과일을 아래 받아낼 방법만 마련하면 역으로 편하게 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아싿.
"인기집인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었지~ 그러고 보면...."
생각해보니 최근 다른 차원 외계인에게서 받은 과일 후르츠들이 아직 꽤 남아있다. 효과가 영 괴이 했기에 그것을 먹어도 되는가 의아 했고, 따라서 아직 보관중인데 다림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가볍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랑 같이 몽블랑에서 수 많은 다른 차원의 인물들과 교류한 그녀니까, 마찬가지로 이 외계인의 음료도 그럭저럭 많이 가지고 있겠지.
"방심하는건 좋지 않겠지만 말이야. 일단 주변에 별로 위협이 느껴지진 않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과일을 따는 그녀를 올려보곤,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자세를 취하면서도 어쩐지 평화로운 광경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했다. 이 정도면 잡담도 충분히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미나즈키는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얼마 안가서 그는 책을 펼치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다. 무, 무슨 일이지? 최근에 내 외모에 관련된 웃기지만 웃지 못할 해프닝덕에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이 착실한 후배 입에서도 '선배, 혹시 여자인건 아니죠?' 라던가 나오면 울면서 뛰쳐나가고 싶을지도 몰라.....그래서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야 할지 말지를 한참 고민하면서 힐끔 힐끔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도저히 못견디고는 입을 열어 물어보는 것이다.
"그, 내 얼굴에 뭔가 묻었니?"
조금 어색하지만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기울이며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묻는다. 내가 아는 미나즈키는 상당히 성실한 애다.....엉뚱한 소리는 안할거라고, 나는 어딘가에서 그에 대한 간절한 신뢰를 품었다.
"받게 된 건.. 너구리 왕님 주선이었어요." 친구 분께서 너구리들과 매우 친한데요. 그 덕에 주선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아래 받을 방법만 있다면 편하게라는 말에 따는 방법은 몰라도 그러면 조금 품질이 있을 것 같아서요. 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좋은 의견이었다고 답합니다.
"인기집일 만하더라고요." 아마 늦게 갔다면 다 팔리고 없었을 거라는 답을 돌려주며 외계 개구리의 후르츠라는 것에 6개 얻었는데 그 중 절반이 동일한 음료라서요. 누군가랑 교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는 진화 씨는 뭐 가진 게 있나요? 라고 말해봅니다.
"그렇네요.. 하긴 따낸 것을 주워먹는 게 그들도 편하단 걸 인지하는 걸지도요?" 따고 있는 동안 방해하면 곤란하단 걸 아는 걸까. 라고 생각하면서 과일을 조심스럽게 따기 시작합니다. 반짝반짝거리는 예쁜 과일들이 바구니에 쌓여가고. 그것을 반납하고 다시 돌아온다거나 하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