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를 갸웃하곤 말했다. 그런거 안해도 얼굴 보면 다 구분 되잖아. 무슨 문제라도 있는건가? 갑자기 묘하게 굉장히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불이 붙었다. 의문에 불이 붙은 이상 무엇이 어찌되건 나는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질문을 계속하기로 했다. 이어 그녀는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게 <상담석> 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에..미야국기..짜다..?"
...
조크 같은건가?
나는 개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왜 그 선그라스랑 마스크를 하고 계세요? 그런거 안 써도 구분 되잖아요."
이름은 뭐든 상관 없다. 내 호기심에 불이 붙어버린 이상 나 스스로도 날 말릴 수 없었다...!
>>764 미나즈키 군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저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아니,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선 저도 전해 들은 바 있기 때문에 굳이 안 좋은 일을 들춰낼 필요는 없단 생각에서였습니다. 제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이유와 똑같았습니다.
"정말이지~🎵 미나즈키 군, 확연히 구분하실 수 있지 않은지요! 유우토 오라버니랑 저는 키와 피부색부터 다르답니다~ "
장난스레 덧붙이신 말에는 똑같이 장난스레 받아쳤습니다. 이제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기에 확실히 시무룩해져 있다는 걸 보실 수 있으시지 않을까 싶답니다!
"자아, 자~ 그건 그거고 일단은 한 젓가락 드시는 건 어떠신지요? 이러다가 저희 카레 우동이 다 불어버릴지도 모르겠사와요~ "
어찌저찌 잘 넘긴 줄 알았는데 집요하게 파고드시는군요! 저 손님께서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시는 분이란 인상이 들었습니다. 어찌되었건간에 저는 제 본래 신분을 감추고 일하기로 한 만큼 마스크와 선글라스만큼은 기를 쓰고 사수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만약 벗어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거절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하기로 했습니다. 절대로 선글라스만은 안됩니다. 절대로!!!!!!!!!!
"Sir, 저는 이곳의 연애 상담사랍니다. 그렇기에 다른 분들과 확실히 구분될 필요가 있답니다! "
맙상에 세소사, 지금 릴리의 머리 뚜껑이 과열되어 날아가게 생겼는데 이 상태로 커플이 아니라는 걸 들켜 쫓겨나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 분위기는 어찌할 것인가! 릴리는 간당간당하는 정신을 붙잡고 혼신의 힘을 쥐어짜내 셰프에게 대꾸했다. 문제는 정신이 조금 간당간당하고 있어서 튀어나온 것이 한국말도 프랑스 말도 아니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Sì, sì! Siamo amanti! Ci frequentiamo da ieri, quindi è ancora un po' imbarazzante! Grazie!»
허점 투성이 cuoco 같으니! 생판 남이라도 가게에 들어올 때 사귄 다음에 가게를 떠날 때 헤어지면 터무니없이 쉽게 통과할 수 있다는 걸 모르나! 하지만 릴리는 지금 자기를 봉변에 처하게 만든 요리사 양반에게 신경쓰기에는 정신이 모자랐다. 너무…… 가깝단 말이야! 이렇게 가까이 팔짱을 끼고 붙어 있으면 피자는 먹을 수 없어!
오만 논리를 이루지 못하는 생각이 흘러가며 릴리의 정신은 아득해져 갔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겠으므로 가쉬의 팔뚝에 얼굴을 파묻고 기댄다. 검귀를 때려잡고 숙청여제를 교육해 줄 때도 멀쩡했던 릴리의 정신이, 지금은 폭풍에 깎이는 눈밭보다도 빠르게 갉아먹히고 있었다. 빨리…… 빨리 자리에 앉고 싶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셰프와의 이성적인 대화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가쉬뿐인지도 몰랐다.
«Trentatré Trentini entrarono a Trento, tutti e trentatré, trotterellando…»
간신히 주제를 바꾸려 하였습니다만 이렇게 또 물어오시다니 정말이지 곤란하네요! 이걸 대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요? 저 집요하게 물어오시는 손님에게서 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어떻게 사수하면 좋을지요??????? 저는 솔직히 정말로 당황스러웠습니다만 애써 친절한 말씨로 설명하기를 계속하려 하였습니다. 아주아주 매끄럽게 말입니다!
"Sir, 상담사란 직업은 본래 내담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 집중해야 한답니다. 중요한 점은 그 내용이 어떻던간에 상담사는 격양되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아주 침착한 태도로 내담자를 대해야 한단 것이에요. 제 얼굴과 표정을 드러내는 게 상담에 있어 꼭 중요할까요? 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또, 상담사가 누군지 전혀 모르게 함으로써 내담자 분들이 좀더 편하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수 있기도 하답니다. 성당에 고해성사를 하러 갈때 신부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굉장히 편하게 말이 나오지 않던가요? 뭔가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숨겨두었던 말들이 꺼내지지 않던가요? "
굉장히 의기양양하게 제 마스크를 가리켜보이며 저는 이렇게 되묻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저는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상담하는 것이랍니다. 어떻게 이걸로 궁금증이 해결되셨을까요, Sir? "
거짓말도 청산유수라고 진짜 이유는 '제 진짜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 이지만 아무튼 어떻게 답변은 드렸습니다! 에미리는 할 만큼 했사와요!!!!!
"Mamma mia! una bambina carina. 이 남성이 정말 당신의 una coppia innamorato가 맞나요?"
릴리가 이탈리아어로 대답하자 쉐프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쭈구려 앉아 릴리를 보곤 질문했다. 허나 릴리는 그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내 팔뚝에 작은 얼굴을 파묻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이탈리아어, 겠지? 릴리가 나에게 가까이 붙을 수록, 그리고 내 팔뚝에 기대고 있는 만큼 나의 정신도 날아가버릴 것에 가까웠지만, 반대로 이 난관을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무래도 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모 게임의 食いしばり(이악물기)스킬을 쓰듯 이미 정신력은 0에 달했으나, 쓰러질 수 없었다.
"흐음...Non ci posso credere...
릴리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쉐프는 의심의 눈초리를 유지한채로 일어나 수염을 매만지고 있었다. 가까이 붙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릴리. 나를 의심하는 눈 앞의 거구의 쉐프.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고개를 쳐들고
눈을 감은채로
"저희는!!!!!!!!!!!!!!!!!!!!!!!!!!"
"커플!!!!!!!!!!!!!!!!!!!!!!!!!!!!"
"입니다!!!!!!!!!!!!!!!!!!!!!!!!!!"
"사귄지!!!!!!!!!!!!!!!!!!!!!!!!!!"
"얼마!!!!!!!!!!!!!!!!!!!!!!!!!!!!"
"안됐지만!!!!!!!!!!!!!!!!!!!!!!!!"
"사랑하는!!!!!!!!!!!!!!!!!!!!!!!!"
"사이!!!!!!!!!!!!!!!!!!!!!!!!!!!!"
"입니다!!!!!!!!!!!!!!!!!!!!!!!!!!"
하고, 오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훈련소에서 각종 얼차려 뒤 정신이 끊어질 정도로 악을 쓰며 내뿜는 복무신조마냥 레스토랑이 떠내려갈 정도로, 아니 접시가 깨질 정도로 큰 몬소리로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Ok, l'ho capito.."
쉐프는 나의 외침에 당황한 듯 두 손으로 그만 하란 제스쳐를 취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인지 이게 진짜 나의 육체인지 아니면 저 멀리 우주에서 또다른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를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나는 '릴리를 챙겨야 한다.' 라는 것만은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시켜 정신적으로 한계에 달한 그녀의 등을 부축해주어 어떻게든 자리로 안내했다.
>>783 정말이지 유우토 선배란 말씀을 들었을 때 이렇게 사람이 당황할수도 있구나 싶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머리색도 피부도 키도 생김새도 애초에 성별부터 전혀 다르신 분과 저를 헷갈리실 수 있을까요! 아무리 저희가 5년이나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어요!!!!!! 아무리 미나즈키 군이어도 말이어요!!!!!! 유우토 오라버니와 저를 헷갈리시는 건 사양이랍니다!!!!!! 제 머리는 오니기리가 아니라 크로와상인 것이와요!!!!!! 아 시 겠 지 요!!!!!!!
"괜찮사와요, 괜찮사와요~🎵 사람은 한번쯤 헷갈리거나 할 수 있답니다! "
아무튼 눈물이 나긴 하였지만 제 어릴 적 친우인 만큼 이 정도는 넓은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답니다. 카레우동 비우듯 넘어갈 수 있답니다!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저는 가볍게 한 젓가락 들어 입에 담았습니다. 으음, 적당히 뜨겁지도 너무 식지도 않은 게 먹음직하여요. 미미랍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가게가 성학교에서 가까울 줄 몰랐사와요🎵 미나즈키 군의 기숙사는 여기서 가까우신 편이신가요? 아니면 굉장히 머신 편이신가요? "
면을 완전히 삼킨 뒤에 말하면서도 저는 당연히 좀 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단 생각을 하였습니다. 남자기숙사에서 오는 거라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아마 제노시아나 청월 쪽이시겠지만 역시 청월이시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말이어요, 미나즈키 군과 제노시아는 전혀 매치가 안된다거나 하여서 말이어요......이상한 자판기가 튀어나오시는 곳과 미나즈키 군이라니 전혀 상상이 안 된답니다.....??
집요하게 질문하자 그제서야 자칭 연애상담사는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표정을 들켜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상담사가 누군지 모르게 함으로서 내담자가 좀 더 솔직하게 말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들으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거기에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님 얘기까지. 구구절절 듣는다면, 맞는 말 처럼 들릴지 몰라도..
답변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어떻게 피해내야 합니다!!!!!!!! 선글라스만은 어떻게 사수하여야 해요!!!!!!!!!!!!! 제가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런 간절한 마음을 품고 신속을 강화하여 피해 손님으로부터 제 선글라스가 벗겨지는 걸 막으려 하였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일에 의념을 쓰나 싶지만 다행스럽게도 신속을 강화한 덕인지 선글라스는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살았사와요!!!!!!!!!
"초면에 다짜고짜 숙녀의 얼굴에 손을 대시는 것은 실례랍니다, Sir! "
자아 어떠냐! 아무튼간에 나는 피해내었다! 는 의미로 브이를 해보이며 저는 간신히 숨을 고르고 제 자리에 도로 앉으려 하였습니다. 그래요...어떻게....살았네요....또 강화할 일이 생기지는 아니하겠지요......??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의자에 가만히 앉은 처지가 되자, 릴리는 혼이 빠져나간 상태로 힘 빠진 가필드처럼 숨을 내쉬었다. 가쉬의 팔에 부비적거린 앞머리가 왼쪽으로 꼬여서 들려 있었다.
“…… 가쉬 군……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게 음식을 먹는 파트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아……. 배고파졌어.”
이건…… 어쩌면 아직 서로 쑥스러워하는 커플들을 골리기 위한 오너의 장난기였을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이벤트의 명제부터가 ‘커플 푸드 챌린지’였으니 말이다. 아, 그런 거였군. 조금 맑아진 머리로 생각하자 금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헤어지기로 약속한 한 쌍이라도 저 양반에게 걸리면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맞습니다’라는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구조였던 거야.
빤히 가쉬를 바라보다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탈진했는지, 릴리는 테이블 위에 털푸덕 하고 엎드렸다. 그리고 엎드린 실뭉치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작게 웅얼거린다.
“…… .”
그 얼굴빛은 엎드려 있었으므로 당연히 볼 수 없었다.
그것은 그것이고, 이제는 정말로 공동전선의 목표에 맞게 활동할 시간이 왔다. 1개월 무료 식권을 위해 식사결전에 돌입하는 것이다. 가쉬가 밥값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릴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 되었으므로, 그를 측은하게 여겨서라도 꼭 이겨 줄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 몸집이 작은 릴리를 푸드 챌린지의 파트너로 선정했다는 건…… 그 정도로 대안이 심각하게 없었다는 말이 되니까. 릴리는 그렇게 판단했다.
엎드려 있는 릴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을 테이블과 평행하게 빼꼼 들었다. 그 오너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방에서 열심히 도우를 회전시키고 있는…….
“……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애정행각을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읽은 책에 나온 커플들은 보통 안 그러던데?”
『커플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 것도 같지만…… ‘그건 가쉬 군이 그렇게 설명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릴리의 생각은 대강 이랬다.
오늘 일어난 일이 앞으로 10년쯤 놀림거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미리는요, 미나즈키 군이 저를 오라버니로 착각할 정도로 그렇게 오라버니를 각별히 여기는 줄 몰랐... 이건 너무 갔는데. 미나즈키는 생각을 떨쳐내고자 고개를 홱홱 젓고는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조금 멀지. 청월이니까."
다른 학교는 애초부터 선택지에 없었다. 누나는 청월 학생이었으므로, 뭐라도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도 청월에 입학해야 한다고 여겼으니까. 꽤 비약이 심한 사고였지....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의외로 성학교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긴 했다. 제노시아는 그놈의 자판기 때문에라도 절대 가고 싶지 않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