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습한 욕망들로 빼곡히 찬 공간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 사방을 넓은 유리창으로 채워 바깥의 빛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공간은 어둠으로 가득했으니 사내는 그저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으려 할 뿐이었다. 도시에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은 대부분 이 건물보다 한참 낮았기에 사내는 그런 도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 장소는 과연 정말로 동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지.
뭐,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사내는 그렇게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을 일축하며 시선을 그보다 더 멀리 던졌다. 이 건물보다 한참 낮은 대부분의 건물들, 하지만 몇몇 건물들은 이 건물과 비견될 정도로 높았으니... 예를 들면 저 멀리 햇빛을 비추는 높은 빌딩이라던가. 잠깐,
" 햇빛이.. "
사내의 눈에 보이는 빌딩은 유리창이 아닌 콘크리트로 덮인 투박한 빌딩이었다. 분명 저런 둥그런 반사광을 비출 이유는 없는.. 눈을 찌푸리면서 손을 치켜들자, 사내의 주위에 있던 남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화려한 공간에서 약에 찌든 남녀들이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함과 동시에 남자가 주시하던 빌딩에서 무언가가 이쪽으로 빠르게 날아오기 시작한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화살 한 대. 어지간한 가디언들조차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날아오는 그 화살을 사내가 인식했을 때, 사내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아는 이름을 읊조릴 수 밖에 없었다.
" 신정훈(停暈)? "
강력한 결계로 뒤덮여 있는 건물이지만 날아오던 화살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채로 가볍게 외벽에 꽂히고, 사내는 무언가가 자신을 부드럽게 내리누르는 느낌에 이를 악물고 시선을 다시 예의 빌딩으로 돌립니다. 그곳에 있던 빛무리는 이미 사라져, 부드럽게 열리는 방문과 함께 이 공간으로 옮겨옵니다.
" 신정훈(正訓)이거든요! 남의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꿔서 말하지 마세요! "
크다고는 할 수 없는 키에,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 말투. 회색빛의 가디언은 등 뒤에 옅은 광륜을 띄우며 이 자리에 서서 사내를 향해 웃어보입니다.
" 여기 계신분들 전부 현행범으로 체포고, 어느정도는 짐작하고 있지만.. 그래도 당사자의 확인이 있으면 더 좋으니까, 협력해 주시죠? "
게이트의 토벌만으로도 바쁠 가디언이 어째서 이런곳에서 마약사범들을 소탕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사내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습니다.
" ...벌써 벚꽃이 필 때가 된건가? "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신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범죄자들을 잡아넣는 가디언. 처음에는 누구도 그 이유를 몰랐지만, 해마다 계속 되는 그 행동에 뒤를 캐던 범죄자들은 결국 어이없는 진실을 깨닫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잡범에서, 의념 범죄자까지 여러 범죄자를 닥치는대로 잡아들이던 가디언이 점점 자신의 사냥감을 찾았다는 듯이 정치판에 연관된 범죄자들을 잡아넣는 이유.
그 귀여운 소년.. 이 아니라, 자신을 남자라고 말한 - 그리고 여자 아이일 것이 분명한 - 진화를 만나러 온 것인데, 아무래도 그 소녀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쉬는 날인가보다. 그러면 어떠랴. 이왕 온 김에 커피나 마시고 가자. 그러고보니 저번에는 방패에 맞고(...)쫓겨나느라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기도 했고. 허나 나에게 주문했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캬라멜 마끼아또. 잘은 모르지만, 단맛의 커피인 듯 하다.
릴리의 머릿속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었다. 「자비로운 나는 가쉬 군을 쥐어패는 대신 지문을 남기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응─. 작전 회의. 말해 주세요.”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다. 놀리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말하는 대로 승부가 아니고 ‘공동전선’이었으니 고분고분한 태도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오늘의 오렐리 샤르티에는, 이른바, 그거다! 이르미 쥬가인 가쉬의 충실한 부관이자 파트너!
“아하, 그러니까 남매는 안 되고 부녀나 모자도 안 되고. Mon petit ami et ma petite amie. 잘 이해했어. 그러니까, 요컨대……?”
커플이어야 한다! 아하, 그런 것이었군. 릴리는 깊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 릴리가 처음 가디언넷 메시지를 받았을 때부터 짐작했던 것처럼 이건 일종의 커플 이벤트이고, 가쉬 군은 식사권을 쟁취하기 위해 필요한 애인 대역으로 릴리를 선택했다는 것이 되겠다. 이제는 남녀 커플이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이 이벤트는, 애인 없는 인간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처사로 이루어져 있다. 쳐부숴 주겠어. 릴리의 눈동자가 고요히 타올랐다.
“…… ‘척’?”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눈동자를 허공으로 돌렸다.
“요컨대 그거네. 우리가 연인인 것으로 가장해서 경쟁자를 모조리 쳐부숴 버리고 식권을 따낸다. 음, 마음에 드는 작전이야.”
릴리는 가쉬의 이마를 꾹 누르느라 벗었던 오른손의 장갑을 도로 끼면서, 팔을 앞으로 뻗은 그대로, 가쉬의 옆구리를 향해 전진했다. 키가 한참 짧은 릴리의 팔은 그의 팔꿈치 아래 팔뚝에 와서 걸려 팔짱을 낀다. 표정에는 일체의 미동도 없다. 그의 팔을 자기 겨드랑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끼우며, 그를 올려다보고 말한다.
딱딱한 칭호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친분을 쌓을 시간과 노력보다는, 눈 앞에 당면한 과제를 학술적으로 해결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친구 만들거면 이런거 안했다.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탄환이야. 아직까지 그정도 단계는 무리이기에 지금은 해봤자 도수운용이 가능한 발사관 정도의 선이지만..."
그리고 그런 개인화기로, 고도의 숙련된 가디언이 아닌 일반 병사들이 약간의 훈련과 장비만으로 게이트 너머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면... 전장의 구도는 좀 달라지겠지. 물론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누군가 의념을 미리 부여하거나, 그러한 의념이 함유되어 있는 자재를 통해서 제품을 만들어 의념 각성자가 아닌 병사들도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역시 힘들거고."
볼펜을 들어 그 끝을 책상에 두어번 두드리고서는, 그것을 휙 하고 던져 책 더미 위에 얹고는 대답했다.
"하지만 반응장갑의 아이디어는 어려워. 반응장갑 자체가 폭발을 통해 성형작약탄의 메탈제트나 폭발력을 상쇄하거나 왜곡시키는건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상쇄하려면 비슷한 위력의 폭발을 의념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정도의 사거리, 정확도, 위력으로 그 폭발을 낼거면 차라리 의념만으로 싸우는게 낫겠지."
"결국 반응장갑은 그 장갑 패널이 날아가서 관통자를 저리 치우거나, 메탈제트의 방향을 휘거나 하는 정도일 뿐이야. 폭발로 폭발을 상쇄시키는건 꽤 어려워."
길게 양갈래로 땋은 머리, 하얀 원피스에 하얀 에이프런, 하얀 마스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8bit 선글라스. 혹시 무슨 수상한 코스프레하는 사람이냐고 물으신다면 전혀 아닙니다. 에미리의 이 몽블랑 카페에서의 출근복이랍니다! 물론, 저는 상담을 하는 것이지 음료를 내리는 쪽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복장이 가능한 거랍니다. 하여튼간에 이런 옷을 입고 지금 막 출근을 하였습니다만, 웬일인지 다른 점원분들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검은 머리의 손님 한 분만 카운터에 서계셨을 뿐이었습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Sir! "
뭔가 너구리 직원님도 보이지 않는 듯해 하는 수 없이 종종걸음으로 카운터로 들어가 저는 손님께 죄송하단 말씀을 건네었습니다. 같은 애기같은 하이톤으로 바꿔 말하였지만 내용물은 유창한 영어였답니다. 일하는 동안에는 굳이 일본어를 써서 저라는 걸 티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흙을 두고 모래로 그릇을 굽는 듯한 논의에, 적어도 릴리는 미궁으로 말려드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말려드는 방향은 미궁의 바깥쪽이 아닌, 가장 가운데였다. 보물이 있기를 기대할 수는 있으나, 사실 조난자의 해골 아니면 미노타우르스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동지, 동지…….”
이러니 굉장히 묘한 말투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릴리는 호칭을 바꾸기로 했다.
“진석 동무, 세상은 요지경이야.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어느 날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코스트를 보면 그런 것따위 어린애 장난처럼 해내는 물건들이 더러 나오기도 한다구. 이 바닥을 얕봐서는 될 게 아니야.”
비 의념 각성자들의 대 게이트 무장. 가디언 후보생이 되기 이전에는 게이트와 하 관계 없는 삶을 살았으니 그쪽 방면으로 어떻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었으나, 적어도 민간인들이 스스로를 방위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면 가디언과 헌터들이 목숨을 버려 가며 게이트로 뛰어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 나도 휴식할래.”
그러면서, 릴리는 서가 쪽으로 가서 다른 책 한 권을 더 뽑아 왔다. 『폭발예술학: 동양편』이었다.
그녀가 작전을 확인하자 나는 "뭐, 뭐어. 그런거지." 하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조금 의외의 반응이었다. 부끄러워 하거나, 그런걸 어떻게 하냐는 식의 반응을 보일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평온했다. 설마 나를 일말의 그런 쪽으로도 보지 않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 자꾸 무슨 생각을 하는거람? 나는 얼굴을 찌푸리곤 고개를 휙 휙 흔들었다.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흘러간다. 이렇게까지 신경쓰는건 나답지 않다.
마음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그녀는 도로 장갑을 끼고 팔을 앞으로 뻗은 채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뭘 하려는거야. 하고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는 팔을 나의 팔꿈치 아래 팔뚝에 걸어 팔짱을 꼈다. 그 일련의 행동에는 그 어떠한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 뒤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꾸우우욱 누르고 어떻게든 이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반응을 본 사람, 특히 나를 아는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왜 그런 연애, 아니. 스킨십 처음 해보는 사람 마냥 반응을 하냐고. 팔짱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아득히 높은 단계의 스킨십이라고 할 만한 것의 경험은 전부 이전에 끝낸 상태지만, 지금 이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이 나의 마음을 몽둥이로 후드려 패는 것 처럼 감추기 힘든 두근거림과 어질어질함을 경험시켜주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나에겐 심장병은 없다.
사랑의 묘약. 그런거라도 뿌리고 온거 아냐?
이어 그녀가 자기 쪽으로 나를 강하게 끼우자,
...
아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니까? 내가 이상한게 아니라.
그래. 그냥,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고만 하자. 응. 그냥, 부드러웠다고만 하자. 그 이상으로 내 머릿속엔 가득 차있지만 그걸 묘사했다간.. 아냐, 응. 넘어가자. 내 마음 속의 분홍색 털뭉치가 몽둥이로 나를 두드려 팰동안 바깥의 털뭉치가 나에게 연인끼리 어떻게 행동하냐며 물어왔다.
"그, 어, 연인 끼리 행도옹?"
긴장한 나머지 노래도 아닌데도 음이탈을 내어 이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크흠! 아. 이, 이걸로 충분할거다. 응. 가자. 전진!"
나는 말이 끝나자 마자 내 얼굴을 감추려 한 걸음 성큼 걸었다가, 그녀와의 보폭을 생각해 걷는 속도를 늦추어 그녀와 함께 팔짱을 끼운채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베이지 톤의 양갈래로 땋은 머리의 여성이 와 주문을 받아주었다. 여기까진 괜찮다. 그런데 하얀 마스크와.. 굉장히 각진 선글리스까지. 도저히 카페의 점원으론 보기 힘든 차림이었다. 내가 잘 모를 뿐이지 본래 카페엔 이런 사람이 있는건가? 아니, 그럴리가 없잖아. 누가 봐도 수상하다. 혹시 이 카페, 이 여성에게 '하이재킹' 당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그러니까, 이 카페를 너무 갖고 싶은 나머지 원래 있던 점원들을 모두 묶어 어딘가에 가둬놓고 숨겨둔거지.
"..."
하하 그럴리가 없지.
"어, 캬라멜 마끼아또. 있나요?"
일단 나는 저번에게 들었던 음료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지나가듯 "다른 점원들은요?" 하고 물었다. 확실히 이.. 수상한 여성 혼자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이 카페가 '하이재킹' 당했다거나.. 하는 그런 가능성을.. 아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지 않은가. 별로 이 카페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의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굉장히 신경쓰였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전부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무튼 웃는 낯으로 손님께 대답하며, "다른 점원분들은 사정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우셨답니다. " 라는 말을 덧붙였답니다. 사실 저도 다들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어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답니다. ...아, 마침 저기 오고 계시는 분이 보이시네요. 우리의 주방장 씨!
"그럼 Sir~ 카라멜 마끼아또로 주문 맞으시지요? "
재빨리 계산을 위해 기계를 톡톡 두드리며 재차 확인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좋습니다, 주방장 님이 계시니 제가 음료를 만드는 불상사는 없겠군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릴리의 기분은 굉장히 묘했을 것이다. 면사포와 티아라 대신 은도금된 왕관을 쓰고, 허리춤에는 부케가 아니라 연금술을 위한 물병 꾸러미를 차고 있으니……. 이제 아치 밑으로 걸어가서 피자를 마주본 다음 가쉬를 돌아보면서 ‘아버님, 다년간 감사했사옵니다’ 하고 인사를 올려야 하는 건가?
당연히…… 그런 일은 없겠지. 눈을 뜨자 요행히도 이곳은 결혼식장이 아닌 레스토랑이었다. 주위에는 푸드 챌린지에 도전하러 온 커플들인지, 아니면 릴리와 가쉬랑 마찬가지로 커플인 척하는 사람들인지, 하여튼 제법 숫자가 되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거나 줄을 서 있거나 했다. 릴리는, 차분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전력 분석이었다. 이윽고 영성 S의 천재적인 시각으로 ‘경쟁자’들을 가만히 분석한 결과, 릴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 아무도…….”
그 다음 말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앵무새처럼 속사포로 튀어나왔다.
“아무도팔짱을끼고있지는않구만그럼어서이건푸는게나을까가쉬군!”
릴리는 이렇게 낯선 경우에는 자기 상황에 대한 객관화가 비상하게 늦다. 다시 말해서, 누구 팔짱을 껴 본 적이 없었으니 커플들이(또는, 적어도 커플인 척하는 사람들이) 꼭 팔짱을 끼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자마자 자기반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가쉬가 풀기 전까지는 팔짱은 계속 낀 채였겠지만 속사포로 튀어나오는 말은 여전했다. 빨간 얼굴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은 마치 과열된 주전자 같다.
상대가 여성이라면 곧바로 능글맞은 부분이 나오는 나지만, 아무리 상대가 여성이라도 더렇게 흰 마스크에 각진 선그라스를 끼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수상할 정도니까. 다른 점원에 대해선 사정이 생겨서 자리를 비웠다고 말한다. ...더 수상하잖아! 마음 속에서 의심이 불씨가 점점 커지는 사이 주방장이라고 부르는 너구리가 왔다. 아무래도 여기 직원인 것 만은 사실인가보다.
"네. 맞아요."
나는 주문에 고대로 대답하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음, 묻고 싶은 걸을 묻지 않는건 도리 - 나의 도리 - 에 어긋나지.
대답과 함께 저는 어찌저찌 계산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제 자리로 돌아가려 했습니다만..... 예상치 못한 손님의 질문이 제 발목을 잡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어쩜 좋죠? 이걸 어떻게 대답드려야 할지 정말 곤란하답니다. 하지만 이 마스크와 선글라스가 없으면 저는 제 정체를 다 드러내고 일하게 되는 셈이라 어쩔 수 없는데요!! 애시당초 '사오토메 에미리' 가 아닌 'Emiyaguggizzada' 로써 일하고 있으니까요!!
"Sir~ 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말씀드리자면, 이건 다른 분들과 저를 구분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랍니다. "
애써 친절하게, 당황한 티가 전혀 없이 답변드리며, 저는 카운터를 나서서 제가 원래 있을 자리로 향했습니다. 상담을 위해 Crei 씨께서 마련해두신 자리였지요. 다른 자리와 다르게 여기 테이블에는 <상담석> 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었습니다.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Sir. 저는 이곳의 상담사인, Emiyaguggizzada 라고 한답니다~ "
빙그레 웃으며 저는 꾸벅 숙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전히 도트모양 선글라스와 마스크는 벗지 않고 있었기에 제 표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짤막한 답을 마지막으로 미나즈키는 입을 다물었다. 에미리라면 '그 사건'이 뭘 뜻하는 말인지 대충 알고 있을 것이고, 설령 모르고 있다고 해도 이런 곳에서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무슨 일 때문에 슬펐는지(정말로 '조금' 슬픈 일이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언급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었으므로, 그는 에미리가 말한 '조금 슬픈 일'이 실제로는 꽤 심각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설명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겠지.
"...그래도 얼굴 보니까 좋네."
유우토 형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고. 계속 침울해지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그는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농담을 덧붙였다.
작은 여자아이를 옆에 끼운 채 로보트가 걷는 것 마냥 다리를 직각으로 내밀고 다음 발걸음으로 향하고. 그런 우스꽝스런 모습이 레스토랑까지 이어진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그냥 피자를 먹으러 온 일반 손님도 있고, 굉장히 큰 대형 피자를 눈 앞에 둔 남녀, 남남, 여여의 두 쌍도 꽤 있었다. 아무래도 도전하는건 우리만이 아닌 듯 싶었다. 당연하겠지. 피자 한 달 무료 이용권인데. 기다리는 사람들도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은 꽤 있었지만, 우리처럼 팔짱을 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이상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사람들은 없었다. 라는 것이다.
...
그것을 깨달은 릴리는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하더니,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ㅁㅁㅁ뭐? 뭐?"
나는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모 래퍼와 같이 말을 쏟아내는 릴리를 보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뭐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대단히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뭐라는.." 하고 말을 끝내기 전에 그녀는 방금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그리고 더 빠른 속사포 랩으로 나에게 뭐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팔짱을 풀자는 것 같은데.. 마치 잘 익은 것 같은 대추 같이 새빨간 얼굴을 하고 나에게 팔짱을 풀자는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잇 알았..아니 안돼!"
나는 팔짱을 풀려다 오히려 홱 하고 그녀의 팔을 내쪽으로 당겨 아까보다 더 가까이 그녀를 당겼다.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해 이 레스토랑의 오너로 보이는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굉장한 풍채에 '나 이탈리안 요리사요.' 라고 말하는 것 마냥 큰 콧수염이 나 있는 인상 좋은 남성이었다. 키는 거의 180후반~190초반정도? 몸무게는 입은 쉐프 유니폼 위로 배가 나올 정도였으니 굳이 말 할 필요도 없겠지. 아무튼 후덕한 인상의 거구는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넸다.
"Buona pomeriggio. 두 분께선 혹시 커플 챌린지를 하러 오신 것이 맞는지?"
남성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느끼할 정도였다.
"아, 예. 물론입죠! 저희 커플 맞습니다!"
나는 머릿속에 '어떻게든 커플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 에 그만 잘못된 대답을 했다.
"예? 두 분께서 una coppia innamorato인지는 묻지 않았습니다만…?"
내가 잘못된 대답을 한 탓에 풍채 좋은 레스토랑 오너는 도끼눈을 뜨고 자기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나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심으로 una coppia innamorato가 맞으신지…? 안타깝지만 저희는 bugiardo에게는 장사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고, 우리를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승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게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