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트라우마가 생겼다, 정도는 흔한 사연이 되어버린게 우리 시대다. 그러니까 그걸로 얼마나 상처 입었다 한들 진정으로 따스하게 위로해줄 사람은 많지 않고, 어린 나이에 그저 울만큼 울고 나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조금 씁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아이스티를 한모금....
....아이스티 뿜을 뻔 했다. 푸헥, 하고 사레들려서 대찬 무례를 하지 않고, 잠깐 멈췄다가 애써 태연하게 한모금 마셔낸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다. 예상외의 방향이었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깜짝 놀랐으나. 눈 앞의 은후의 성격상, 그리고 내가 아는 정훈의 성격상, 둘이 사귄다면 절대 장난삼아 사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축하해주기로 했다.
"...축하해. 솔직히 조금 의외였지만. 나는 검귀 파티 때 부터 둘과 인연이 있었으니까. 행복해졌다면 좋겠네."
둘이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서 사귀게 되었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나도 궁금하지만....내 경험상, 당장엔 풋풋하면서도 부끄럽고, 주변의 시선 보단 서로의 감정을 느끼며 즐기고 싶을 때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상대도 내가 그려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인물이라 믿었기 때문에 털어놓아 준 것이 아니겠는가. 눈치없이 'WA!! OH!!!' 거리면서 분위기를 초치지 말자. 천천히 물어봐도 되겠지.
"자기 잘못도 아닌데 말이지."
그래서 나는 얼마전에 한번 찾아갔어. 라고 웃으며 덧붙이곤, 이후에 이어지는 어딘가 자신감이 없는 그의 말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아이스티잔을 흔들다가, 마저 마시며 말했다.
"조금 들었어. 과거에 여러....일들이 있었다고. 나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정확하게는 모르니까, 어쩌면 은후가 지금 생각하는게 더 이치에 맞을지도 몰라. 그래도.....때때로는, '도와주고 싶다' 라는 강한 마음이 가장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주변 사람들이 불우한 환경과 그에 이은 자괴감에 대해. 무엇을 도울 수 있겠는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도와주고 싶다' 라고 강하게 밀어붙여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 라는 안심만을 주는 것만으로도, 구원받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녀에게 주장했던 것이다. 나는 그 기구하고 불우한 운명에도 개의치 않고, 너와 가까이 지낼 것이라고 말이다.
"......잘 어울려. 무척이나. 아마도 준비할 때 많이 고심했겠네."
시선을 돌리고 귀가 붉어진 그의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다. 그러나 이상하냐고 물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반응을 보건데 누가 주었는지는 너무나도 명명백백 했으나, 나는 멋없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축복이 담긴 순수한 칭찬과 더불어, 거기에 담겨있을 마음을 모른체 넌지시 훈훈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이어진 것도 예상 외였다만, 저런 모습을 보건데....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싶다.
아니 물론 나도 연애에 능숙한 사람이 아닌데 남의 커플을 걱정한다던가 상당히 잘난 소리지만 말이다...
보기 좋게 지각이구나. 역시, 30분 전에 나와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성심껏 준비한다면 반드시 상대가 실수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섭리는 노력하는 자에게 보상을 가져다 주는 법이니까. 그 섭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 나름대로 기쁜 일이었다.
“우리 가쉬 군이, 자기가 한 말을 잘 기억 못 하고 있나 본데…… 정신이 번쩍 드는 물약이라도 먹여 줘야 하나?”
릴리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만약 가쉬가 엄청난 몸놀림으로 릴리의 꿀밤을 모조리 회피해 버린다고 해도, 그 전에 실컷 놀릴 수는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놀리기 승부에서 승률이 더 낮은 쪽은 릴리였으니까, 이럴 때 충분히 점수를 따 놓지 않으면 오렐리 샤르티에의 이름이 빛바래는 꼴이 된다. 릴리는, 분명하고 명백하고 확실하고 진실되고 틀림없이 화장을 한 얼굴로 가쉬를 빤히 올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묻은 게 맞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화장을 이렇게 써먹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런데…… 대답이 없다. 그는 넋을 잃은 것처럼, 아니, ‘빼앗긴’ 것처럼, 멍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이리로 넘어져 엎어질 것 같은 불안한 균형으로, 릴리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뭘 잘못 먹었나 싶어 릴리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푸드 챌린지를 하는 데 뭘 먹고 올 정도로 가쉬가 허당은 아니길 바랐기 때문이며, 둘째로 뭘 잘못 먹었다면 굉장히 속이 불편할 테니까, 라는 이유였다. 다행히 가쉬는 쓰러지지는 않았고, 무릎을 꿇었을 뿐이었다.
“…… 푸흡…… 뭐야……. 실패하기도 전에 실신하지 말라구. 1달 무료 식사권을 따러 온 거잖아.”
릴리는 장갑을 벗고 주먹을 쥐었다. 네일이 되어 있지 않은 손이었다. 이어 엄지손가락을 나머지 손가락 안으로 말아 쥐는 잘못된 주먹을 쥐고, 꿀밤을 먹일 곳을 가늠하는 듯 한쪽 눈을 감은 채 그의 이마를 겨누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