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또 다시 탈과의 접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역시도 자신의 지팡이는 말을 들어먹지를 않았다. 맞붙은 탈들 중에서 처음으로 아즈카반으로 돌려보낸 탈이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이긴 셈이었으나 주양은 불만이 많았다. 이 거지같은 지팡이는 왜 항상 자신이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무생물인 지팡이한테마저도 적의를 드러내야만 그제서야 어영부영 말을 듣기 시작하는 것일까. 너무 유연하게 만들어서 그런가?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 시작하니, 생각은 지팡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때 나눈 대화들. 탈에게 들었던 도발. 그리고. 임페리오 저주로 자신을 조종해 정말 MA를 불러내려던 듯한 모습. 주인이라는 작자가. MA를 이길 만큼 강한 존재인건가? 무슨 자신감이지 그건? 아니면. 그저 자신이 생 구라를 까고 있는 모습으로만 보였던 것인가? 한번 굴린 눈덩이는 점점 커져 모든 것을 집어삼킬만큼 커졌다. 아. 안돼.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진다, 이러면.
"휴.... 안되겠다. 바람좀 쐬러 나가야지! 청. 너도 나갈래?"
간만에 청을 위시하고 밖으로 나가보려 했건만, 역시 순순히 말을 들어먹는다면 청이 아니다. 다시 횟대에 앉아, 고개도 날갯죽지 사이로 파묻지 않고 뻔뻔하게 조는 시늉을 하는것이 참 얄미워보였다. 살살 꿀밤을 날리려던 주양은 이윽고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이럼 어떻고 저럼 어떻겠는가. 결국에는 자신의 패밀리어인데. 앞으로의 플랜들을 떠올리며 주양은 다시 비틀린 미소를 내걸었다. 허나.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냥 바람을 쐬기에는 꽤 심심한 저녁이었다. 혼자서 한참 생각정리를 하고 있으면 또 다시 이런저런 잡생각에 가득 휘둘릴것만 같았다. 적어도, 분위기를 조금 완화시켜줄 수 있는 사람. 어울려 놀때만큼은 잡생각 다 버리고 놀 수 있는 사람. 한참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떠올리던 주양은 곧바로 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야, 방에 있어~? 나랑 저녁 데이트 가지 않을래?! 마침 날씨도 그렇게 선선하지만은 않겠다. 돌아다니기엔 딱 적당할거야!"
그래놓고서는 당신의 방이 마치 자신의 방인 양. 그리고 자신이 당신의 룸메이트인 양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문을 벌컥 열고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쓰지 않는. 비범하고 과감한 대쉬(?)였다. 그렇게 방 안으로 쏙 들어가고 나서, 늘 그랬듯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채 당신에게 치대기 시작했다.
"여보랑 나랑~ 전부터 잡아둔 약속이었으니까~ 꼭 같이 가줄거지, 응? 참. 그리고.. 내가 첫 데이트 가져가게 된 거. 맞지?!"
뭔가. 묘하게 들뜬듯한 모습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씩 웃었다. 역시 전에 병동에서부터 불 붙이기 시작했던 경쟁욕이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앞에 놓여 있는 편지들을 보던 단태는 이 편지들을 모조리 불태워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세번, 그것도 마지막으로 만났던 탈은 교내에 숨어 있었고 그 탈을 기어이 아즈카반으로 보냈다는 소식이 들어갈 줄 모른 건 아니였는데 말이지. 탈과 접전하는 내내 말을 들어먹지 않은 자신의 지팡이를 쥐고 책상을 툭, 툭, 하고 몇번 두드리다가 머리를 헤집는 것처럼 쓰다듬었을 것이다.
졸업할 때까지는 좀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참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고. 아, 이건 그냥 내 인내심이 못참아내는 건가. 단태 기준으로는 상념이라기엔 너무 가벼운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방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처음에는 잠시 방을 나섰던 자신의 룸메이트가 돌아온 줄 알았다. 아무리 주단태라도 다른 기숙사의 학생이 들어올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테니까. "깜..짝이야. 자기야?" 문이 열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절대로 현궁에 있어서는 안되는 자신의 친구 목소리여서 문에서 등을 보이고 있던 몸을 돌려서 모습을 드러낸 주양을 보는 단태의 암적색 눈동자가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보통 학생 대표쯤 되면 다른 기숙사를 이렇게 들어올 수가 있나? 말과는 다르게 단태의 태도는 평소랑 똑같이 능청스럽고 능글맞았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현궁에 쳐들어올 생각을 다했을까, 우리 자기? 들키면 기숙사 점수 차감될텐데 그렇게 보고 싶었어? 미리 편지를 보냈으면 달링이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끼치지 않고 내가 마중 나갔잖아~ 응?"
언제 놀랐냐는 양, 단태는 편지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버리며 기숙사에 침입한 자신의 단짝을 향해 재잘재잘 떠들었다. 능청스레 중얼거리는 게 역시나 뻔뻔했고 첫데이트 이야기에 병동에서 있었던 데이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고 헤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여기서 그건 아니다라고 하더라도 주양이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우리 키티의 부탁인데 저녁 데이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그럼그럼~ 그러니까 일단 내 룸메이트한테 들키기 전에 나갈까?"
"으응~ 그야 당연히 이야기만으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었지~? 반응 보니까, 역시 내가 찾아올줄은 모르고 있었구나! 이래서 깜짝 방문은 재미있는 법이라니까~"
재미있는 게 아니라 예의가 없는 일이지만 당연하다시피 그런 것을 신경쓸 주양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당장의 반응. 평소에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모습을 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충분히 재미있어하는 것이다. 방 안 이곳저곳을 살피며, 현궁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사실 주궁과 크게 다를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기숙사는 방이 크고. 또 어느 기숙사는 방이 작고. 그런 부조리함은 없을 테니. 다만, 역시 크게 체감되는 것은 온도 차이였다. 항상 껴입고 다니는 주양에게는 딱 맞을지도 모를 그런 선선함이었다. 어쩌면 밖이 더우니, 너프를 먹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에이,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겠어? 편지를 보내고 가는 건~ 뭐랄까. 귀찮달까! .. 라고는 해도. 요즘 생각할게 좀 많아져버려서, 머리좀 비울 겸 바람쐬면서 걸어와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 뭐야~"
평소대로 능청스러운 당신을 보며 방싯 웃었다. 그래. 역시 사람 선택 하나는 잘 한것 같아. 적어도 당신이라면 지금의 이 깊어져가는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 숨통을 틀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찾아왔는데, 기대를 져버리지 않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다시 이렇게 서로 이해자가 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한다고 하던, 옛날부터 쭉 해오던 그 역극에만 집중하면 될 테니까.
일단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말을 꺼내기는 했어도, 내심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 사실 현궁 학생이야! 하고 구라를 치는 건 어디까지나 주양 자신이 조용하고 온순하며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어야 믿고 넘어갈 일이지, 평소 쌓아온 업보와 행동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위치를 떠올리면 아주 무의미한 쌩 구라였다. 물론 룸메이트에게는 쫌생이처럼 일러바치면.. 알지? 하고 위협을 하는 것도 좋은 대책이 될테지만 역효과를 불러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신에게 착 붙어서는 조잘거리는 폼이, 아무래도 막 급하게 나갈 생각은 없어보이는 듯 싶었다. 지금 상황이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고, 책임지는 건 당신이 아니라 자신이니까 꽤 느긋한 모습이었다. 룸메이트라는 사람이 그렇게 일찍 올 것 같지도 않았고. 걸려도 기숙사 점수 조금 깎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하는, 그런 당당함이 있었다. 그동안 심부름을 열심히 돌며 기숙사 점수를 꽤 많이 쌓아뒀으니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주양은 여전히 당신에게 들러붙은 채 여유만만하게, 느릿느릿하게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현궁 공기가 꽤 기분 좋았다. 그동안 쌓인 일들으로 과부하된 머릿속이 시원하게 식혀지면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참. 우리 여보야~ 아까전에 책상 위에 있던 편지들은 뭐야, 응? Hoxy... 러브레터? 꺄하핫! 역시 우리 여보라면 그런거 엄청 받을 줄 알았어~"
뭐든 멋대로 떠올리고서 짐작하고 그게 진짜인 양 꺼내는 것도 이젠 버릇이었다.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게 진짜 미움받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이런 성격인데 얘가 미움받지 않을 수 있지?
유령은 무섭지만 그 외의 것은? 무섭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정하겠다. 이젠 MA 말고 모든것이 두렵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기린궁에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의 마인드가 심어졌기는 하나, 그럼에도 옮기지 않는 건 역시 공명정대한 것은 제 특유의 성질머리와 맞지 않는다는 불굴의 고집 때문이었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하물며 유령이나 MA보다 덜 무섭게 생긴. 되려 조금 귀여울지도 모를 설녀한테라면. 뭔들 못 사줄까?
"... 당과점. 지금은 괜찮을까나..~"
그때. 무기 사감님을 끌고 겨우겨우 당과점을 나와 어떻게든 학원까지 돌아가기는 했다만..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8살때의 몸과 허약했던 그때의 체력으로 돌아간 채,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어른을 들쳐매고 학원까지 돌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마차라는 현명하고 좋은 선택지가 있으나... 머리가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딱 그런 꼴이 된 것이다. 어찌저찌 학원까지 돌아가고. 기숙사 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이번엔 마차를 이용해서 당과점까지 향하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몇 개를 사줘야하나 곰곰히 생각했다. 2개로는 아무래도 영 쪼잔하다. 5개? 뭔가 애매하다. 한참 고민하던 주양은 이윽고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래. 어차피 쌓아둔 갈레온은 넘치고 또 넘친다. 그렇다면, 그동안 갈고 닦아두었던 갈레온이 오늘에서야 빛을 볼 때가 아니겠는가?
"자. 여기 60 갈레온이요!"
그렇게 풀매수하다시피 쓸어담은 지렁이 젤리 20봉지를 한가득 안아들고서 당과점을 나선다. 주변 사람들이 본다면 도대체 뭐 하자는 사람인가 싶을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