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게 너였나? 미안하네. 내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 아주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강하지 않은, 하지만 그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느낌이 강한 억양의 사투리로 재잘거리는 단태의 붉은 암적색 눈동자는 여전히 암암리에 가라앉아 섬찟한 빛을 품고 있었다. 그 눈빛은 뱀눈처럼 서늘했다. 히죽- 웃음을 짓던 단태가 시선을 잠시 무기 선생님이었던 기린을 바라보며 "신수라는 존엄을 빼앗긴거군요." 하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던져지는 모든 질문들에 답하는 선비탈을 향해 움직인 암적색 눈동자가 샐쭉, 가늘어졌다. 봄바르다가 날아오자 단태는 똑같이 옷으로 막았고 타버린 옷을 가볍게 툭툭 털자마자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 폼새가 짐승 같았다.
참, 나불나불 말도 많은 사람이다. 한명 한명에게 친절히 말대꾸를 해주는 선비탈을 보며 그녀는 킥킥 웃으면서도 작게 중얼거렸다. 아쉽다, 라고. 좀더 일찍 마주칠 기회가 있었더라면 잠시나마 재밌게 지냈을 수 있었을텐데.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있었을지 모르는 기회도 그로 인해 생겼을 시간도.
아, 다시 생각해보니 말만큼 아쉽진 않네. 그가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말에 웃으며 옷자락을 살짝 들어보였다. 각시와 양반이 말했던, 이라. 분명 좋은 말들은 아니었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그녀는 그에게만 잘 보이면 되지 그 밑의 탈들에게까지 잘 보이고픈 마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다시금 지팡이를 들어 겨누며 말했다.
"지목받을 만큼 인상이 새겨졌었다니, 이야, 어지간히도 억울했나봐요. 그 두 분."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선비탈이 다른 누군가를 향해 마법을 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녀는 그쪽을 막거나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좀전처럼 가볍게, 주문을 읊었을 뿐이었다.
"우와~ 진짜 극혐이다. 아까는 소중하니 어쩌니 했으면서 결국 혼나는 게 무서워서 그랬어? 오구구. 나이는 내가 한살 더 적은데~ 어째 생각하는 건 내가 더 누나같네!"
MA를 알현하고 나서 그런가, 부쩍 겁이 없어졌다. 웡래도 다짜고짜 들이까는 게 주양이었으나 평소보다 더더욱 노골적으로 내리까며 킥킥거리는 것이었다. 탈에게 한껏 불태운 호전심도 한 몫 하기도 했다.
이윽고 주양의 시선은 혜향 교수님에게 잠깐 머무르며 살짝 흐려지는 듯 보였다. 아이고. 맙소사. 우리 불쌍한 교수님은 어째 탈이 뜰 때마다 당하시는 거 같은데. 이 정도쯤 되면 에반스 교수님처럼 인간을 겁내거나 하지 않는 게 대단할 수준이었다. 임페리오 저주가, 크루시오와는 다르게 기억을 남겨두지 않는 거라서 크게 개의치 않으시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내가 날렸던 걸 막다니. 시건방져! 탈이 빠개지는 게 싫다면 이건 어때?! 블루벨 플레임!"
또 다시 새로운 마법 -그래봐야 결국 화염 마법이지만-을 시도하는 것은. 같은 마법을 자주 써서 매너리즘(?)이 오는것을 방지하겠다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성장을 위함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건 평소 쓰던거랑 얼추 비슷한 느낌이니.. 잘 명중시킬 수 있겠지 하는 믿음과 함께.
그는 후회했다. 애초부터 미친 사람들과 왜 대화와 상종을 하려 들었는지 모르겠다. 시선이 느껴져도 그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선비탈을 향해 시선이 멈췄을 뿐이다. 추측이 맞다면 교내엔 매구가 있고, 그의 얘기를 들었을 지도 모른다.
알게 뭔가. 그도, 당신도 관에 들어가면 똑같이 썩고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어차피 다 죽을 인생인데 욕 두어번 더 먹는다고 뭐 달라지나. 기분만 나쁠 뿐이다. 어차피 그러라고 한 말이고. 공감하는 태도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합리화 하기는. 그는 심호흡을 했다. 찰나의 소모적인 감정에 더 열과 성의를 쏟고싶지 않았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감정이며 한순간의 삶이다.
…당신도 내가 합리화 하는 존재 아닌가. 그는 눈을 굴려 어깨 위의 백정을 바라본다. 당신도 수많은 생명을 스러지게 하고 매구를 따랐으니 달라질 바가 없는데. 당신 또한 악인이며 나는 묵인하는데. 나 또한 머저리에 불과하다. 아니. 나는 기어이 결정을 번복하고 당신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수도 있으리라. "아즈카반도 과분해."
설마하니 불이 붙은 채로 다가올 줄이야. 갑작스럽게 다가온 선비탈, 현성을 보며 그녀는 눈썹을 살짝 움찔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도 놀라지도 않은 채 단지 뭐냐는 듯이 선비탈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전하는 사실엔 칫, 하고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그러게요. 깜빡했네. 분명히 봤었는데 말이에요. 선배가 목걸이를 걸고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걸."
그녀는 유리병이 보여준 환상에 대해 언급했다. 주변엔 퍼지지 않게 작은 소리로. 어떻게 그 중요한 사실을 잊을 수 있었는지, 나 참. 그걸 깨달아버린 이상 그녀는 더이상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팡이를 거두지 않고 겨눈 채 다시 작게, 짧게 말했다.
"그가 아닌 선배가 죽든지 말든지 관심없어요. 그러니까 내놔요."
그건 내거야.
지팡이를 겨누기만 했지 프로테고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지팡이를 든 그녀의 팔이 디핀도로 찢겼다. 벌어진 소매 사이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지는 걸 힐끔 보기만 하고, 선비탈에게 선택을 종용한다.
"자, 내놓고 물러나든지, 계속 맞다 죽던지. 제가 멈춘다고 해서 저들이 멈출 것 같아요? 아니면, 저를 인질 삼아 도주극이라도 꾀해 보실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