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책을 읽어 나가던 릴리의 목소리는 책의 마지막 글자를 읽고 나서 멈추었다. 과연, 그랬던 것이군. 고개를 끄덕이면서 릴리는 뒷표지가 위로 오게끔 책을 덮었다. 통, 하고 종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 감동적이다. 릴리는 딱히 감동적인 걸 읽어도 크게 벅차오르거나 눈물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이다. ‘실제로 감동적이야!’ 꽤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무덤덤한 얼굴을 하면서도 릴리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잠깐 여운을 느끼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위를 올려다본다. 엉터리로 된 연금술 암호서만 읽다가 오랜만에 만난 꽤나 괜찮은 책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빙글 돌려 그를 쳐다본다. …… 이 반응은 설마?
‘야! 우냐?’ 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 이전에 푸흡,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는 것부터가 고역이었지만. 딱히 건드릴 것도 아니고, 한동안 저러게 놔둘까 싶었다.
“…… 휴우.”
그나저나 참고 있었던 숨은 쉬어야지.
“어땠어? 감동했나? 후훙……. 나도 간만에 좋은 걸 읽었네 그래.”
그러고 나서, 잠깐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언가 결정했다는 듯이 살짝 위로 시선을 올리고 얕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릴리는 자기 허벅지에 얹힌 책을 그의 무릎 위로 옮겨 얹어 주었다. 그러면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 역시 생각해 봤는데, 있지, 이건 당신이 가지도록 해. 그러는 게 이 책의 입장에서도 더욱 기뻐할 거야. …… 아마도. 그리고, 내 무릎 위에 놓고 읽는 게 아니라 혼자서 깊이 읽는 시간도 필요할 거고. 무엇보다…… 어차피, 난 한 번 읽은 책은 무조건 기억하거든.”
나는 최대한 훌쩍이는 소리를 죽이고 "크흠." 거리는 헛기침으로 속이려고 했지만, 이런게 속여질리가 없지. 알고 있음에도 장난쳐오지 않는 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이리라. ...그래서 더 분해! 젠자앙...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이런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일까?
언제나 그랬던 것일지도. 다만 타인을 믿지 못할 뿐. 정확히는 내가 가진 슬픔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비웃지 말란 법도 없고, 이런 세상엔 그저 굴러다니는 돌과 같은 평범한 이야기니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지금? 잘 모르겠다. 눈물 때문이야. 괜히 울음을 참으려고 하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내 등 뒤에서 가까스로 장난치고 싶어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라면, 혹시 우는거야~? 하고 물어봤을 테니까. 아무튼 그녀는 간만에 좋은 것을 읽었다며 화제를 바꿔주었다. 상냥하네. 꼬마아가씨.
"나아도, 그렇, 크흡, 게 생, 허윽, 각해."
난 문장 중간중간에 딸국질과도 같이 울음 섞인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이젠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도 아니고,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우는게 뭐 어때서! 그래도 눈을 마주칠 용기는 없어 계속 등을 돌린채로 애써 혼자 침착해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녀는 책을 나의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그 행동에 눈믈 잔뜩 흘린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퉁퉁 부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
왜 하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을 때 상냥하게 말하는거냐고! 젠장!
"너.."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을 떼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아, 나도 모르게.
"좋은 녀석이구나아아아아!"
하고, 울먹이는 채로 그녀의 어깨를 당겨 꼬옥 안았다. "그렇, 크흐윽, 치! 좋은, 얘기지 참! 으아아앙!" 괜히 울 때 친절하게 굴면 더 눈물 난다고! 그런 것도 모르는거냐! 사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 앞의 어깨를 당겨 눈물을 터트렸다는 것 뿐. 괜히 이럴 때 상냥하게 군 네가 나쁜거니까!
릴리는 감동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 장난을 치는 정도의 취미는 없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더구나 별다른 연금술 암호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꽤 좋은 이야기를 읽은 것으로 보상이 되어서 꽤나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 그, 그래애?”
으에, 진, 진짜였어? 진짜 울어? 울먹거리는 그를 보면서 이걸 어찌 위로하나 하고 쩔쩔매고 있던 차에 그가 릴리에게 안겨 왔다. 뭐, 이렇게 되면 굳이 위로해 줄 거리를 찾을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많이 알기 쉬운 녀석인걸…… 하고 무덤덤하게 안긴 채로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옳지, 옳지. 뚝.”
부둥부둥……을 해 주기에는 릴리의 체구가 ‘비교적으로’ 작았으므로 그렇게 다독여 주는 것이 전부였다.
“좋…… 좋은 사람인 건…… 사실이지……! 헹! 헤헹……!”
이걸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우쭐해하는 것은 상당히 중증인 행동이었지만……. 윈-윈이라고나 할까.
대낮에 벤치에서 엉엉 우는 초면의 남자를 안으며 위로해 주고 있는 모습이 자신의 고귀한 평판에 이상한 작용을 하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하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상하게 보일 만한 사람은 릴리 자기가 아니라 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안아 준 채로 한동안 시간을 지나보냈다. ‘역시 남자들은 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이유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에 눈물을 터트려버린 나는 눈 앞의 작은 꼬마 아가씨에게 안겨 위로를 받았다. 아마 1시간 전의 나였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지금의 나도 믿을수 없다.) 아무튼, 마음 속으론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그런 상태였다.
좋은 사람이란건 사실이라며 의기양양해 하는 그녀의 모습도, 지금으로선 위로를 해주려는 배려가 아닐까 하고 느껴질 정도로 지금 내 정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울고 싶으면 맘껏 울라는 말에 꺽꺽 한껏 눈물을 쏟아낸 뒤, 이젠 어느정도 괜찮아진 것 같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스스로 눈물을 닦아낸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기억 소각 버튼이 있다면 그 버튼을 눌러 나와 눈 앞의 꼬마 아가씨의 기억까지 지우고 싶다. 한, 1시간정도.
아무튼 어느정도 마음을 추스렸다. 두 눈은 퉁퉁 불어오는 상태고,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겠지. 양 볼엔 애써 닦아낸 눈물자국이 남아있을거고. 아마 스스로 거울을 보면 웃음을 터트릴지도. 아무튼, 그런 얼굴인 상태로 나는 그녀가 무릎 위에 올린 책을 검지와 엄지로 집어 들었다.
"정말 괜찮겠어? 계산도 네가 했잖아. 나 지금 돈이 없는데."
하고 울음으로 인해 잠긴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앗, 말해버렸다.
나는 '움찔' 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온갖 장난을 치고 책을 건네줬는데, 사실은 책을 살 돈도 없었다는 것이 들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