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쥔 소녀의 팔에 딱 들러붙어 시선은 문자로 향한 채 책 속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의 몸은 그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설산을 오르는 남자 옆에서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의 어깨를 잡고 끌어 당겨 함께 설산을 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제발 부디. 책의 저자가 슬픈 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사람이 아니길.
남성은 눈보라에도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누군가가 말해준 설산 너머의 작은 마을을 향해. 두 팔과 다리는 동상으로 감각을 느낄 수 없었고, 옷갖 방한구를 몸으로 둘러싸도 옷을 뚫는 살기와도 같은 저온의 바람은 살까지 뚫고 뼈를 흔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육체는 이미 사망의 한계를 뛰어넘어 여기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남자는 그저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뿐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여기까지 온 이상 가야한다는 마음? 아니면 사랑? 아니면, 어떤 사명과도 같은 것? 만약 나였다면 애초에 조금 주위를 둘러보다 '꿈은 꿈.' 으로 포기했을텐데, 이 남성의 의지와 끈기는... 나라는 인간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찌됐든, 책 속의 남자는 끈기 없는 나와는 달리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무의식마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돕고 있던 것이다. 거센 눈보라도 그 의지를 완벽하게 밀어내지 못하고, 남성은 그저 묵묵히,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귀를 찢는 추위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남성은 맑은 하늘의 눈 덮힌 산 내려온 곳에서, 한 마을을 눈에 담고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남성은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 마을을 바라보는 채로, 그대로 있다가, 쓰러졌다.
"안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장면을 읽곤 소리쳐버렸다. 무슨 동화책에 몰입한 애도 아니고!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어찌할줄 모르고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조금 옆으로 떨어졌다.
"어, 그, 미안." 그러고보니 되게 들러붙었었구나. 아니, 애초에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역시 그렇게 된 것인가……. 릴리는 약간의 울적함으로 눈을 깜빡였는데, 의외로 더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붉히고 떨어지는 그를 쳐다보면서, 씨익─ 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 헤헹.”
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묘한 승리감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 표정은…… 이제는 거꾸로 놀릴 기색으로 가득하다!
“꼬마 같은 구석이 있─구─나? 당신. 헤헤헹! 주인공이 걱정되었나 봐?”
반달 모양으로 뜬 눈을 하고 콕콕 찌르듯이 놀리면서, 연신 쿡쿡 웃어 대었다. 이젠 누가 꼬마지! 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듯이 말이다. 애늙은이인 릴리는 나이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나머지 이런 데서는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릴리의 판정승이었다!
“귀엽긴! 푸하항. 당신…….”
단지 놀릴 거리를 하나 찾아낸 것이 즐겁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나저나, 달라붙어 있었던 것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안’이라는 말을 듣고 딱히 반응 없이 흘려보낸 것을 보면 말이다. 혼자 몰두해서 읽었다면 꽤나 서글픈 이야기에 가슴이 찡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한바탕 웃고 나니까 그럴 기운도 거의 없어져서 가벼운 마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친 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나를 놀릴 생각으로 가득한 것 처럼 보인다. 아까의 복수를 하겠다는거냐! 내가 나빴지만! 내가 먼저 하긴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변명을 찾아야 해. 내 머릿속엔 그것 뿐이었다.
"아냐! 그런게 아니라고! 그저..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놀랐을 뿐이라고!"
응. 스스로 생각해도 변명이 안 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꼬마에게 저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놀림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내 프로 장난러(그런거 없음)으로서의 정신이 구겨지는 기분이라는거다! 고작 저런 꼬마 아이에게! ..완전 빌런 말투잖아. 나는 "아..으.." 하는 소리를 내며 두 팔을 당기고 분함에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걸로 봐선, 혹시, 나 분하다고 얼굴 붉히고 있는건 아니지? - 맞다 - 얼굴이라도 가리자. 응.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곳은 빨개져 있겠지만. 아, 귀까지 화끈거려!
"귀, 귀, 누가 귀엽다는거냐! 이 ㄲ..."
여기서 꼬맹이라고 했다간 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패배자의 발악, 이란 것을 할 순 없어. 난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어! 진정하자 일단. 나는 "후으후으으으웋으으으..." 하는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가슴을 가라앉히려 했다. 저런 꼬맹이에게 놀림 받다니. 참을 수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어지는 말엔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바탕 논(?)탓에, 조금은 감정이 가라앉기도 하고, 몰입해서 다음 장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해야 하나?
나는 조금 어색하고 딱딱한 몸짓으로 그녀의 옆으로 가 그녀의 작고 흰 손이 쥔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금새 다시 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행히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는지, 남자는 눈을 떴다. 남자가 눈을 뜬 곳은 작은 민가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발소리에 아직 움직이기 어려운 몸을 옆으로 틀어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자신이 꿈에서 봤던 여성.
과 굉장히 흡사한 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나이대는 자신과 비슷했을까. 그녀는 남자가 깨어난 것을 보고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가 상태를 살펴 봐주었다.
남자는 이 여성에겐 진실대로 말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해, 자신이 꿈에서 만났던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눈 앞의 여성과 같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놀랍도록 닮았다고. 그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곰곰히 듣던 여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남성을 놀라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꿈에서 꼬마 남자 아이를 보았노라고. 그것도 눈 앞의 남성과 굉장히 흡사한. 하지만 조금 다른. 요즘 계속 그런 꿈을 꾸고 있노라고 여성은 말했다.
둘은 기묘한 인연을 느끼고 금새 친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둘은, 누가 말 할 것도 없이 평생을 약속하고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오..."
나는 낮게 탄식을 흘렸다. 남은 페이지를 보니 아직 조금은 이야기가 남아있는 모양이었지만, 왠지 그래도 마음이 굉장히 놓였다. 그래도 둘은 행복해졌단거니까. 비록, 그 꿈이 무엇인지는...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다니, 꼬마 중의 꼬마가 따로 없는걸! 푸헤헹. 사실은 아니지이─? 그렇게 몰입했어─?”
그러면서 실컷 치근치근거린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놀린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봐주기로 할까. 이 정도면 충분히 아까의 복수는 됐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관대하고 고귀한 오렐리 샤르티에 님이 누구를 놀리는 데 그렇게 몰두하는 것도 영 아니어 보인다는 판단이 선 탓도 있었다.
…… 하지만 역시 한 번만 더. “헤헹. 조금 마음이 진정되면 얘기해 줘─. 다음 장 넘길 테니까.”
알아보기 쉬워서 굉장히 편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릴리는 그 다음을 읽어 가기 시작한다. 삶의 저편으로 갔다가 돌아온 다음에 만난 그 여성에게 결국 청혼한 남자.
언제나 그렇듯…… 행복한 결말은 릴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마치 높은 장대 위에 지은 누각처럼, 휘청이다 떨어지는 것만이 예정되어 있는 결말처럼. 그래서 희곡보다도 비극을 주로 읽어 온 릴리였는데, 지금이 마치 그런 전개였다.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릴리의 마음에는 호기심만이 아닌 의심이 솟아나 있었다.
책장 끝을 손가락으로 오므려 쥐고, 그를 향해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기우뚱 숙인 채로 묻는다.
다른 사람에게 놀림 당하는 것보다 자신이 놀리던 사람에게 놀림 당하는 것은 데미지가 꽤 컸다. 거기에 말하는 건 얼마나 얄미운지! 꿀밤 한 대 쥐어주고 싶은 정도야. 하지만 그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나는 그저 새빨개진 얼굴을 구기며 애써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무시하곤 있어도,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장난이 끝난 줄 알았는데 마음이 진정되면 말 하라며 다시 한 번 장난을 걸어온다.
"너어어..."
생각지도 못한 변칙성 장난. 됐어. 더는 못 참아! 반격이다! "머리 헝크러트리기 공격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같이 잘 정돈 된 마치 포메라니안의 털과 같은 복슬복슬한 옅은 핑크빛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거칠게라곤 해도, 조금 빠르게 쓰다듬을 뿐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머리를 헝크러트리는 복수(?)를 마친 나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따라갔다.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른 이야기. 도대체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맥거핀? 이대로 행복하게 끝났습니다? 제발 그렇길 빈다.
나는, 새드 엔딩 스토리는 싫어.
행복한게 좋아.
그녀가 나를 보곤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갸우뚱 하며 끝까지 읽을거냐며 물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다. 설사 그 이야기가 슬픈 완결이라고 해도, 혼자가 아니니 그렇게까지 슬프진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그의 손길이 닿자, 오작동하는 솜사탕 기계나 폭발한 베개처럼 머리카락이 복실복실복실하게 말려 올라가 털 깎을 시기를 놓친 양처럼 되어 버렸다. 품위 유지에 굉장히 신경쓰는 릴리다 보니까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지만, 욕심 부리다가 당한 일이므로 결국은 자업자득이었다. 정성껏 빗질해 놓은 머리를 조금만 건드려도 솟구치는 곱슬기가 대단한 지경이다.
“으으으. 세팅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에…….”
왕관의 위치를 고치고 손가락으로 결을 따라 머리를 빗으며, 릴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쓰다듬어 주는 건 좋지만 머리가 헝클어지는 건 곤란하니 늘상 겪는 딜레마다.
“…… 후훙. 좋아, 그럼…….”
‘진지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릴리는 웃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결말까지는 얼마 남아 있지 않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책에 쓰인 내용을 그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결말 정도는 서로 발을 맞춰서 읽는 게 좋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장난으로 머리를 헝크러트릴 정도였는데 의외로 쓰다듬는게 복실복실한 아기 강아지 쓰다듬는 것 마냥 기분이 좋아 중독될 것 같다. 머리카락에 이런 마력을 숨겨뒀을 줄이야. 역시나 연금술사!(아니야) 잔뜩 쓰다듬고 나자 그녀는 세팅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푸념했다.
...조금 심했나? 장난+의외로 기분 좋은 감촉에 나도 모르게.. 조금은 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음, 미안.." 나는 들릴듯 말듯한 말투로 사과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책을 읽던 것을 그만 두고 화낸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대단하게 여겨진달까, 처음에 만났을 때도 책을 양보하려고 했던 것이나, 예전에 성공하고 쭉 실패하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 어쩌면 그녀는 내가 보는 것보다 더 큰 - 그러니까, 키보다 - 정신을 품고 있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녀가 연금술은 본인 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까지 한단계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고, 스스로를 연금술사라고 말 한 이상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입 밖으로 내진 않을거다. 그랬다간 또 의기양양하게 날 놀릴테니까!
아무튼, 그녀는 책의 남은 내용을 나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결말은 이러했다.
그들은 결혼하고 나서 더이상 그 아이들이 꿈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꿈을 포기했기 때문일까.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 대신 서로에겐 서로가 있었으니 그들은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충실하게 살아갔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곧 아이를 가졌고 딸과 아들을 각각 한 명 씩 낳게 되었다.
딸과 아들이 커갈수록 남편과 아내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이 꿈에서 봤던 그대로 아이들이 커가는 것 아니겠는가? 어느덧 둘은 각각 7살과 8살이 되었고, 이젠 완전히 꿈에서 보았던 그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깨달았다. 꿈에서 보았던 것은 미래의 자식이었고, 그 미래의 자식들이 지금의 남자와 여자를 이어주었노라고.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직감을 믿었고, 서로를 사랑했고, 결국 사랑의 결실을 이루고 그 꿈의 정체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행복이었다.
...
감동적이잖아!! 눈물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는 담담하게 읽어가는 것 같았지만, 난 후반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에 일부러 고개를 그녀의 반대편으로 돌리고 검지로 눈물을 계속 훔치고 있었다. 그 남성과 여성은 틀린게 아니었어. 그 꿈이 서로를 연결해준 것이었다니! 그리고 결국 꿈에서 보았던 아이들을 갖게 되다니! 무엇보다 마지막에 완벽하게 행복해진 엔딩이,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기쁨으로 느껴졌다.
더이상 나는 맛보기 힘든 행복일 테니까. 이럴 때만이라도, 아주 작은 갈증의 해소를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홱 돌린채로 눈물을 삼키기 위해 침을 꼴깍 삼키곤 "크흡음!" 하고 강하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들키지 않았을거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