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주의 무게를 짊어진 이후 늘 두통과 함께했다. 사실 가주의 무게를 짊어지기 이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처음엔 엉클 톰이 준 머글의 과자가 자신과 안 맞아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알러지 증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두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이 두통을 결국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어머니께서 울면서 그를 껴안았을 때. 어째서 어린 네가 휘말렸냐고 한탄하실 때, 엉클 톰으로부터 그것이 선조부터 내려온 굴레임을 알고 나서부터는, 거스르지 않고 그 무게를 짊어지기로 했다.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그는 흐려진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소매깃이 입가의 피를, 턱을 흐른 범벅진 혈흔을 닦는다. 이런 친절은 과분하다. 싫다. 밀어내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당신은 또 가문을 걸고, 그는 또 환멸을 느꼈다. 이런 중압감이 싫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가를 치르리라.
"잠깐, 뭐 하는…"
너무나도 쉽게 업혔다. 힘없는 그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우리라. 예상보다 더 깊게 잡아야 팔에 걸칠 수 있는 나뭇가지 같은 다리. 들키고 싶지 않아 품이 넓은 옷을 고수했다. 그는 당신의 말에 겨우겨우 손을 올린다. 당신의 목 주변으로 검은 손톱이 배회한다. 그의 손등에 얌전히 자리한 혈관이 툭 불거졌다. 손가락에 기묘하게 힘이 들어간 탓이다. 그가 당신에게 나지막히 속삭인다.
"아가야."
짐승이 당신에게 당부한다. 정 반대에 있기에 가장 닮을 지도 모르는 자가 당신에게. 죽음이 삶에게, 달이 해에게 속삭인다. 흐린 분홍색 눈동자가 당신의 머리카락을 향하고, 검은 손톱은 날이 서 목가를 배회한다. 금방이라도 조를듯한 그 기묘한 손짓과 달리 저주는 나오지 않았다.
"죽음을 거래의 수단과 신뢰의 증명으로 사용하는 포부는 높이 사나 네 주어진 삶을 스스로 끊어내려 들지 말거라. 죽음이 네 곁을 도사리는 것이 마냥 옳은 일은 아닐지니."
마디가 조금 꺾여 고정될 정도로 큰 힘이 들어간 손은 다시 힘이 빠진다. 그가 고개를 한 번 천장을 향해 들어올린다. 아직 남아있던 피가 목 뒤로 넘어간다. 기분이 나빴다. 그가 나지막히 입을 연다. 피끓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네 죽음의 의미가 개죽음이 아니어야 할 것 아니니, 응? 그리 무거운 주제도 아니거니와 가벼운 주제도 아닌 것이 삶의 경중일진대 네 어찌 그리 경히 여기려 하느냐. 비단 남의 것이 아닌 너의 것도..."
아끼는 존재일수록 소중히 대하려는 성향의 그로서는……, 아니 일반적인 감성의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자명한 지론에 그는 반절은 의문, 반절은 의심―의심의 대상은 두말할 것 없이 제 귀였다.―에 찬 표정이 되어 눈을 깜빡거렸다. 한국어로 내기+돈이 조합되면 자산이 몰랐던 다른 뜻으로 바뀌는 문법이 있었던가? 아니면 주양이 말하는 '내기'는 내기¹의 동음이의어였다든지? 내버려뒀더라면 급기야 그 자리에서 그동안 배운 한국어 어휘와 문법 공부까지 돌아볼 기세였다. 그만큼 영문을 모를 소리라 대답마저 조금 뒤늦었다.
"무슨 일에 뭘 건다고요, 그거?"
그러나 놀람도 뒤이은 상황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 부끄러운 강아지야…! 주양이 웃었을 때 1차, 한 치 머뭇거림도 없이 처음 만난 사람한테 냉큼 안겨버린 데서 2차.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관종견의 너무도 뻔뻔하고 당당한 태도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지만, 이건 라쉬를 너무 예뻐한 나머지 버릇을 이렇게 들여놓은 그의 자업자득이었다. 그래도 주양이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라 다행이다. 하기야 라쉬를 소개했을 때부터 이미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으니 주양이 개를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긴 했었지만. 주양이 걸음을 떼자 그도 따라 나선다. 사실 중간 정도 깊이의 바다는 탁 트인 공간이라 해변보다 편하고, 주양이 말한 만큼의 수준으로 정성들인 안내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운 강아지를 맡겨 죄송하니 따라가는 데만 해도 바빴다.
"설마 제 이름 잊으신 건 아니겠죠?"
대신에 여상스러운 말투로, 그가 몸을 숙이고 주양의 옆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걷는 속도는 평범하건만 기본적인 보폭이 넓으니 마음만 먹으면 앞사람을 따라잡는 것도 순식간이다. 곁에서 튀어나왔지만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하니 느낌이 묘하다. 사실은 그냥 장난 치는 것이지만. 한복 입고 한식 먹으며 지낸지 5년, 그동안의 경험으로 말의 어감에서 오는 느낌을 한국인 못지 않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패대기 잘 치는 친구 앞에 '그,'가 붙었으니 아마 대충 가물가물한 게 아닐까. 한국 사람 기준으로 제 이름이 곧바로 외우기 쉬운 편은 아니란 건 아니 기분 상할 일은 아니라 당연히 이해는 하지만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5살 먹은 어리광쟁이만 신이 났다. 편안하게 주양의 팔에 매달렸다가, 조금 뒤에는 떠내려가는 상태로 아예 일광욕 즐기는 해달처럼 아예 위쪽을 보고 벌렁 누워서는 간헐적으로 꼬리만 느릿느릿 흔든다. 처음부터 수심 깊은 먼 곳까진 나가지 않았던 탓에 물 밖으로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이 얕아지자 한껏 퍼질러져 있던 라쉬가 갑자기 빠릿하게 몸을 뒤집고 육지로 우다닥 달려간다. 그러더니 젖은 땅의 둔덕으로 올라가 한쪽 앞발을 들고는 한껏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했다. 자기가 1등으로 도착했다 그건가……. 뻔뻔하도록 자신감 교육만큼은 아주 잘 받은 개였다. 이윽고 라쉬는 다시 인간 친구들의 앞까지 달려와서는 푸르륵 거세게 물을 털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 그는 덤덤하게 물을 맞으며 말했다.
당신의 말을 듣고 주양은 살짝 휘둥그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당신에게는 자신이 패밀리어를 거는 걸 자주 볼 거라는 이야기도. 청이 내깃돈이라는 것도 제대로 이야기한적이 없었다. 바퀴벌레에 쫓겨 정신 없이 내달리다 보니, 설명 포인트를 놓친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해명한다면 훨씬 나은 상황이 될 지도 모르나 눈 앞의 즐거움을 쫓지 않는것은 주양이 아니었다. 언제 그런 얼빵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비열한 미소를 내걸면서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나는 충분히 감당 가능하고,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패밀리어를 건 거였는데! 내 질문에 확실한 답이 없는걸 보니까, Hoxy.."
당신의 속뜻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전혀 관계 없이, 주양의 무차별식 무근본 도발이 시작되었다. 말 끝에 쫄을 붙이지 않은 이유는, 어디선가 그런 말을 본 것 때문이었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으으음.. 뭐라고 해야 하려나. 그거랑은 조금 더른 개념이라는것만 알아둬~? 후후. 지금 내가 전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이윽고 주양은 애매모호하게 말하며 입꼬리를 쓱 올렸다. 역시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아는 상대의 반응과 자신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상대의 반응은 가지각색이기 마련이며, 그런 반응들 덕분에 주양이 더더욱 이런 것을 끊지 못하기도 했다. 청 대신 내기에 건다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는 극히 무례할지도 모르는 행동이지만, 주양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말하기엔 조금 낯뜨겁지 않나. 그렇다. 주양은 지금 너의 마인드가 꽤 호감이야 하는 한 마디 말을 꺼내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네. 그럼 다른곳은 가짜 코코넛을 판다는 뜻일까? 근데 이건 너한테 계속 물어봐도 별 의미 없겠다! 나중에 저기 주인 아저씨한테 한번 물어보거나 해야지."
그리고 벌써부터 물건 안 살거면 저리 가라며 쫓겨나는 장면이 눈에 훤했다. 현수막의 문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건 주양이 유일할것이다. 그런 스불재급 결말을 예측하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궁금증이 들고 시선이 가는 것은 결국에는 주양 역시 어쩔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이었겠지.
나무그늘 아래로 가, 적당히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삐딱한 자세로 코코넛을 들이켰다. 한 모금. 그리고 몇번 입맛을 다시고. 주양의 표정은 급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건 자신이 상상하고 있던 코코넛의 맛이 아니다. 분명 이미지만 본다면 멜론 급의 달콤함에 약간의 크리미함이 더해지고, 미각을 열심히 자극시켜줄수 있는 이미지였는데. 한참 할 말을 잃은 채 코코넛을 뚫어져라 보던 주양은 천천히 어깨를 으쓱였다.
"어.. 그러게. 여러 의미로 진짜 엄청나네. 차라리 청이 목욕한 물을 마시는게 이것보다 더 낫겠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진짜 마신다면 결국 그거나 그거나일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코코넛은 음식이라도 되지 않는가. 그럼에도 이 코코넛 특유의.. 말로 형용할수 없는 맛은 차라리 청의 목욕물을 마시는게 더 나을거라는 묘한 기분을 주었다. 원래 같았더라면 이것도 내기를 걸고 누가 먼저 다 마시나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만큼은 주양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수가 없었다. 패배는 한 번이면 충분한 것이니. 두번 연속으로 패배하는 굴욕은 보이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우리 지금은 코코넛 말고 바다 풍경에나 관심을 좀 주도록 할까? 오늘 날씨 참 좋다~ 아하하.."
맥없는 웃음이 주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허무맹랑한 맛이라니. 두번 다시는 안 사먹고 말겠다. 아니면 청이 말을 안 들을때 훈계용으로 먹여도 되겠다는 몹쓸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청이 느끼는 맛은 사람과는 다를지도 몰랐지만.
저녁도 넘기고 침대에 뻗어 있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또 언제일까. 전 같았으면 지금도 충분히 좋았겠지만 지금은 솔직히 약간 아쉬웠다. 옆이 허전하다고 할까. 꿈 같던 휴가 중을 떠올리며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그녀. 그러 그녀에게 하얀 솜뭉치가 돌진한 것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냐앙!
"커헠!"
아무리 리치가 동년배 고양이보다 작다곤 하나, 전력질주로 들이받으면 꽤 아프다. 하필이면 긴장 다 풀고 늘어져 있는데. 아픔에 놀람까지 더해져 배를 감싸고 그녀의 옆으로 의기양양한 표정의 리치가 다가온다. 엎드린 자신의 앞에 꼿꼿히 앉아 꼬리를 바닥에 두번 내리친다. 무언가 원하는게 있을 때의 모션. 그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리치를 보자, 거만한 금안이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ㅇ...왜에... 간식 줘...?"
탁탁!
"어...놀아줘?"
탁탁!
간식도 놀이도 아니면 뭘까. 그녀의 금안이 가늘게 좁아진다. 슬슬 가라앉는 배의 통증에 천천히 일어나 앉자, 리치가 도톰한 앞발을 들어 불만스럽게 그녀의 허벅지를 때린다. 그것도 모르냐고 따지는 거 같다. 아니 그러면 말을 하던가.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리치를 쓰다듬어 주다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어 꺼내본다.
"리치.... 사냥?"
탁! 냥!
아, 정답이었나보다. 경쾌한 울음소리와 꼬리치기에 그거였냐고...라며 한숨을 쉰다. 그리고 느릿느릿 일어나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하며 말한다.
"리치리치~ 몰아오는 건 리치가 하는거다?"
냐앙.
"난 잡아서 들어주기만 할거야?"
냐앙."
"나는 절대 뛰거나 달리거나 안 할거니ㄲ 어흨."
연달은 질문에 성이 났는지, 리치가 상체를 숙인 그녀를 다시 들이받아 침대로 고꾸라지게 만든 건 안 비밀이다.
-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가방과 리치를 짊어지고 학원 앞 숲으로 나간 그녀. 저멀리 숲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엉덩이를 들썩이는 리치를 달래며 몰이하기 좋은 거리까지 걸어간다. 인기척에 파사삭 도망가는 니플러들의 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리치를 내려준다.
"자 리치.... go!"
그녀의 신호와 함께 어둑한 숲 안으로 하얀 섬광이 튀어나간다. 파사사삭, 사사삭. 요란한 수풀 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쌍한 니플러의 비명이 들리고, 이쪽으로 오는 기척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한마리를 낚아채었다.
"옛다~"
갓 잡아 싱싱한(?) 니플러를 거꾸로 잡고 리치 앞에 내밀자, 통통한 앞발이 니플러를 사정없이 후들기기 시작했다.
한마리를 주머니 속 먼지까지 탈탈 털어낸 뒤 내려놓자 금방 쏜살같이 도망가버린다. 리치도 그건 잡았던거라 판단했는지 그쪽을 쫒지 않고 수풀 쪽을 응시한다. 이미 다 숨은 후인지 숲 안은 조용했다. 그러자 어떻게든 해달라는 리치의 눈빛이 그녀를 향했고, 그 눈빛을 보자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응."
그녀는 비녀 대신 머리를 고정하던 지팡이를 뽑아 소노루스를 쓴 뒤, 가능한 크게 숨을 들이쉬고 소리를 질렀다. 발음으로 치면 악, 하는 소리가 나무들 사이를 울리자 숨었던 니플러들이 또다시 혼비백산 하는 소리가 울리고, 리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수풀로 돌진했다. 그런 다음 두번째를 잡아올리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하, 그게 문제였구나? 다시 설명해줘야겠어. 내기에 청을. 내 패밀리어를 건다는 뜻이지! 내 소중한 내깃돈이니까. 그 가치를 한껏 빛내줘야 하지 않겠어~? 절대 뺏기지 않을 자신도 있으니까 더더욱 가차없이 거는거고!"
정말 내깃돈 그 자체로써의 의미였다면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든 없든 막 내걸었을테니. 이쯤 된다면 자신의 의도를 확실히 전달했을 것이다~ 하는 몹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쪽 묘사에 대해서는. 게다가 둘만 있을때가 아닌 남들과 대화를 나눌때에는 자신의 입으로 소중한 내깃돈 이상의 다른 가치를 논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다채로운 이유는 없었다. 대신. 자신의 입으로 꼭 그것을 논할 필요는 없다는 것과, 그러기 상당히 낯뜨겁다는 두 가지의 이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미묘한 기분을 다시금 떨쳐버리기 위해 눈 앞의 커다란 5살 어리광쟁이에게 시선을 두었다. 항상 티격태격하는 느낌의 패밀리어를 두고 늘 소소한 전쟁을 벌이다가 이렇게 덩치 크고 온순한 친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주양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휴식시간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꺅!.. 어, 언제 온거야! 놀랐다구..! 그. 그리고 그런 건 아냐. 이름, 엘로프잖아 엘로프~ 단지 내가 남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적어서 그랬어. 양해 바랄게?"
역시 이번에도 그런 자신의 태도에 대해 고쳐 나가겠다는 말이나 이름으로 부르도록 노력하겠다는 말 대신 양해 바란다는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했다. 대화에서 남들을 구분지어 이야기할때는 몰라도 이렇게 일대 일 상황에서는. 게다가 사람에게는 이름보다 너라는 호칭을 더 자주 사용했으니까. 가끔은 짓궂은 별명까지 지어 부르기도 했고. 그러니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는 변명만을 마음 속으로 늘어놓으며 정신승리를 시전하고 있었다.
"아하하, 귀여워라~ 그렇게 누위서 가는 게 편했던 걸까~?"
자신이 뭔가. 이런 표현에 후한 사람은 아니었건만. 묘하게도 이 크고 듬직한 친구에게는 아낌없이 마음을 쏟아내게 되었다. 털이 다 마른다면 분명 보들보들하고 푹신할 것이다. 그때 한번 저 털에 푹 파묻혀보고 싶었다. 발바닥 느낌도 굉장히 괜찮았다. 이래저래 주양을 무장해제 시키기에는 딱 좋은 조건이었다.
이윽고 라쉬가 해변으로 나가 앞발을 척 들고 의기양양한 자세를 보이자 주양은 다시 경박스럽게 웃어댔다. 맙소사. 이런 친구한테라면 몇 번이라도 져줄수 있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며 박수를 짝쯕 쳐주다가, 라쉬가 몸에 묻은 물을 털자 주양은 다시 얼굴을 가리면서 마냥 웃었다. 그래. 졌으면 벌칙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라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주양은 제멋대로 해석하고 생각하기에 바빴다.
"아. 좋아~ 너도 내가 오기 전에 꽤 여럿 패대기친것 같으니까. 잠깐 쉬면서 여유를 만끽하는것도 나쁘지 않지! 일단 휴전이라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야~"
.. 역시 한번 패대기쳐지는 것 만으로는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바다에 한번 시원하게 들어가줬으니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금 햇볓을 쬐어주는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모자를 다시 벗고 물기를 탈탈 털어낸 다음, 다시 얌전히 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분명 청도 같이 있었더라면 재미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그 애는 물에 들어가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니 신경쓸게 하나 줄었다는 점은 좋기는 했다.
"물론 휴전이니까~ 언제 또 내가 달려들지 모른다구? 준비 단단히 하고 있는 게 좋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