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둘은 얼떨결에 내기를 걸어버렸다. 후에 밥먹듯이 청을 내거는 주양을 보며 민은 기절할듯 따질지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허망해진 민이 지금의 진지함을 한 스푼 내려놓을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부터 패밀리어를 건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요."
여상한 대답이 들려온다. 민은 이 내기가 길고 끈질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민은 사람을 설득할때의 자신이 얼마나 끈질기고 섬세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허탕으로 돌아갈때의 몰아치는 무력함이 얼마나 잔인한지조차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이 기껍게 느껴졌다. 자신은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차갑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당신이 가진 맹렬한 업화에 기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저를 내기에 건다고요? 나를 담보삼는다는 소리죠, 그거?"
일순 황당함이 얼굴에 떠오른다. 나의 소유권, 언제부터 주양에게 가있었나. 어안이 벙벙해진 민이었다. 내가 내기에 건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데. 아니 그전에 아직 지지도 않았잖아. 고민하느라 민의 걸음이 더욱더 늦어진다. 아까는 그래도 비틀거리는 모습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정말로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민의 시름이 깊어진다.
이 선배, 심상치 않은게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큰맘먹고 제 신념을 걸고 내기를 했건만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자신이 지는 날이 오면... 시치미 뚝 떼어버리자. 내가 뭘 포기하는지 말 안했잖아. 손톱 1mm정도 포기했다고 구라치면 어떻게든... 주양이 들으면 기함을 토할만한 생각을 하며 민이 균형을 되찾았다. 낯빛이 한결 빛나보인다.
"뭐, 진짜 코코넛을 잘라준다~ 이런 뜻 아니겠어요?"
민이 건네받은 코코넛 안쪽을 빨대로 긁어내며 대꾸한다. 이렇게까지 고민 없이 대답한 티를 내기도 힘들텐데 이걸 민이 해낸다. 이미 빨대를 입에 넣었던 민이 주양의 제안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맑고 더우니 좋은 생각이었다.
"...!"
그늘에 앉아 코코넛 음료를 목에 넘긴다. 말라있던 목 점막에 시원하고 투명한 코코넛 즙이 닿는다. 민의 얼굴이 깨달음을 얻은 신자처럼 진중해진다.
아앗.. 나가기 전에 잠깐 봤는데 이건 말을 안 얹을수가 없겠네. 꼭 앞에서 까놓고 말할 자신 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 다니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사람들한테 너무 마음쓸것 없어. 그치만 저릿저릿하고 화나고 억울한 건 당연히 드는 거니까.. 캡틴 힘내고. 잘 추스르길 바랄게! :)
보자~ 첼주랑 타타주랑 땃주랑 랸주 안녕! 진짜 다녀올게. 오늘도 밤 늦게? 올 것 같지만.. 아무튼 저녁 아직 안 먹은 사람들은 얼른 저녁먹고 오기!
다들 어서오세요. 캡틴은 잘못한 점 하나 없으니 괜찮아요.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런 생각 하지 마시고 일단 푹 쉬셔요.
물론 세상 일이 맘대로 안 되겠죠. 푹 쉬고 추스리고 와야지 해도 그게 없던 일이 되고 한 번에 잊어버릴 일은 아닐 거예요..아무렴요. 누가 내 욕을 한다니. 당연히 화가 나고, 계속 생각나고, 그 사람들에게 내가 왜 미움 받아야하나 억울하실 거예요.😠
그래도 아, 그 사람들은 거기까지인 거구나..하고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만약 캡틴을 정말 생각했더라면 앞에서라도 조심스럽게 지적 했겠지, 그럴만한 인물상을 가진 존재는 절대 아니란 거니까요. 그런 되도 않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상처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부디 푹 쉬시면서 추스리고, 내일이나 모레, 앞으로도 근사한 일만 생기길 바랄게요.😌
말주변이 없지만 이렇게나마 심심한 위로를 보내드려요. 아무튼 정말 푹 쉬시기여요. 심심한 위로인 웹박수도 확인해주시고요.🙄
"어.... 음...." "부탁합니다. 아현양." "제가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는걸까요....?"
리안이 대놓고 아현에게 절을 하며 빌고 있다.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상황이 이해는 간다는 것인지 안절부절 못하던 아현은 천천히 자신의 부장에게 다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만지며 표정을 짐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간 표정을 살피던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음.... 일단은 도와드릴께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부장님이 도와달라는데요. 그래서 제가 할 일이...." "여름철에 좋은 음료수가 뭘까요? 다른 것보다 직접 만드는게...." "아....!!"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주작님이 더위를 먹어서 현무의 물을 구해가야 하고, 그를 위해 감 사감님께 드릴 무언가를 드려야 한다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건 다름아닌 그녀, 한때 그쪽 관련으로 공부를 했다고 이야기했으니 그가 손을 벌린건 당연한 것이리라. 그 순간 그녀가 살포시 웃었고, 그는 그녀의 이끌림에 따라 조리 실습실로 향하였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이라 쓰고 6시간이 흘렀다.—, 리안은 자신도 못하는게 있다는 타박을 아현에게 듣고서 도망치듯 주방을 튀어 나왔다. 그런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아닌 직접 달여낸 수정과 한병, 마법으로 차게 식힌 수정과 한잔은 분명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그는 서둘러 감 사감님께 달려가 그것을 진상해 올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