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양이 속으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해서 그 속마음을 그가 알 길이 없고, 나쁜 일만 아니라면 그에게는 만사를 평온하게 납득해버리는 기질이 있으니 순순한 동의가 돌아왔다. 갑작스레 시작된 물놀이 패대기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는 주양이 참 유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나자마자 과격한 장난질부터 시작해서 그런지,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오래 본 사이처럼 스스럼없게 얘기하게 된다. 마침 지금 꺼낸 대화 주제가 반려동물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고. 지금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주양에게 청이라는 새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네?"
내깃돈이라고……. 이해하기 힘든 갑작스러운 논리 점프에 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해버리고 말았다. 그, 소중한 판돈…? 소중한 복돼지… 같은 의미로 한 말인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농담인가 싶어 일단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소중하다고 했으니까 나쁜 뜻은 아니겠지… . 그는 다짜고짜 이 초면인(엄밀하게는 대화가 처음인) 주궁 학생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주양의 사람됨을 모르는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납득이었다.
"아, 고마워요. 그럼."
그는 위로 손을 들어 아직까지도 인간 위에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선 라쉬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개는 모르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신호를 줘도 묵묵부답이다. 결국 그는 입으로 말했다.
내려와, 어우우…(싫어), 내려와, 우어엉(태워줘), 내려와, 힝잉이……. 개 나이 다섯 살이면 세금도 낼 줄 안다… 아니, 이게 아니지. 탈것의 편안함을 알게 된 라쉬는 올라온 김에 육지까지 안락하게 쉬고 싶어진 모양이다. 결국 그가 라쉬를 진 채 물 속으로 스르륵 잠수하려 하고서야 겨우 내려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풍덩, 두 발로 섰을 때 기준 몸길이 180cm 가량의 육중한 5세 아가는 체념한 얼굴로 휘적휘적 성의 없는 발짓으로 물 속을 유영했다. 그렇게 조금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냅다 주양에게 매달린다. 앞발을 잡고 수영을 도와달라는 수준을 넘어서, 그냥 힘 빼고 물속에 미역처럼 둥둥 떠있을 테니 잘 붙잡고 데려다달라는 신호였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요구였다. 대강의 상황을 감으로 짐작한 그는 뒤편에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강아지'를 보는 듯한 보호자의 표정이었다.
' 즉흥곡! 특히, 아무 악보 없이 연주되는 즉흥곡을 가장 좋아해. 가수의 노래가 즉흥적인 것도 좋아하지! ' 그건 어떻게 보면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래서 잘생긴 사람은 피곤하다고요? 하. 즉흥곡이긴 하죠 ' 잘 생긴 건 사실이야? 목소리도 엄청 좋은 걸? '
까르르 웃으면서 말한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크게 웃었습니다.
' 아하하하하ㅡ 그러면, 나중에 내가 한 잔씩 알코올 줄 수도 있다고? 학생 앞에서 알코올 마셨다고 잡혀가는 거 아니려나 몰라! '
물론, 농담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그는,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이 아니니까요. 경박, 경솔, 경망. 그 세 가지 단어가 그를 지칭하는 단어니 말입니다.
당신의 순순한 동의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이 쪽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사실쯤은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대화를 몇번 나누지 못했던 상대와 노는 시간에서, 이것저것 현실적으로 따진다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거라는 극히 낙관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주양 자신의 모습은 오히려 낙관적이기도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시간은 흘러, 언제 살벌하게 물장난을 하고 패대기치고 패대기쳐졌냐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쁜 모습이었다. 역시 과격한 장난은 리스크가 크지만 그 대신 돌아오는것도 큰 법이다. 이렇게 따로 이야기를 섞은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음 속 내적 친밀감은 최대치를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을 만큼 커져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내적 친밀감과 서로를 알아가는 것은 한참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응을 보며 주양은 다시 실없이 웃었다.
"왜 그래~? 내 비유에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어? 내깃돈! 앞으로 너도 자주 듣게 될 테니까, 금방 익숙해질거야~"
허구한 날 뭘 걸고 내기하는 주양으로써는 당신 앞에서도 청을 걸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안 하고 가뿐히 넘기는 날도 종종 있었지만 기회만 잡았다 하면 어김없이 내기 이야기가 나오고 그 뒤에는 청이 걸린다. 주양 자신이 먼저 내깃돈을 다른 것으로 바꿔 걸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기의 흐름이었다. 지금. 내깃돈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때의 반응도 충분히 재미있었는데 그때가 된다면 또 얼마나 재밌는 반응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뭘 이정도로~ 라쉬, 라쉬~ 내려.. 푸핳!!"
다시 제법 상냥한 목소리를 내비치려던 주양은 이윽고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목덜미를 툭툭 쳤는데도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하던 그 모습까지는 어찌저찌 버틸 수 있었으나 이어지는 3연속 내려와 콤보에 대한 반응에서 결국 웃음을 더 이상 참을수 없었다. 맙소사. 내가 뭘 보고 뭘 들은거지 방금. 지금만큼은 살짝 라쉬가 부러워질 뻔 했다. 청도 저렇게 애교가 많았다면 좋았으련만. 허나 청의 성질머리가 지금처럼 더더욱 고약해지는데 크게 기여한게 누구인지 떠올려본다면 그런 생각은 금방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자~ 이리로 온. 착하지! 그. 패대기 잘 치는 친구도 내 목소리랑 걸어가는 소리 잘 듣고 따라와~ 파도소리 때문에 걸어가는 소리를 쫓기 힘들어지면 딱 멈춰서 이야기하고! 내가 끊임없이 재잘거릴 테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영 애매해진다 싶으면 라쉬를 들쳐업고 당신의 손을 잡고서 같이 나오는 방법이 있었으나, 아까 전 당신의 등 위에 올라갔던 라쉬의 위용을 떠올려봤을 때 그건 영 옳지 않은 선택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기에 버틸 수 있었지, 아마 자신이라면 당장 샌드위치처럼 반 접혀 물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을 것이다. 휘적거리며 헤엄을 치던 라쉬가 자신에게 척 매달려서 뒷발질도 안하고 둥둥 떠있는 걸 보고 주양은 다시 한바탕 깔깔거리며 경박하게 웃었다.
"아하하핫, 괜찮아~! 원래 5살때가 어리광이 제일 많을 때 아니겠어~? 자. 가자~ 너도, 라쉬도 내가 안전하게 얕은 곳까지 잘 에스코트해서 데려갈 테니까 걱정 말고~!"
자. 그럼 이쪽으로! 하며 주양은 라쉬의 앞발을 잡고 얕은 곳으로 살살 끌기 시작했다. 장애물이 있나 없나 끊임없이 확인하는것도 잊지 않고, 중간중간 파도소리에 물을 가르고 걸어가는 소리가 묻힐때쯤이면 다시 이쪽이라면서 목소리로 신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켠으로는 눈 앞의 이 거대한 어리광쟁이에게 완전 혹해 있었다. 적어도 이 강아지는, 마음이 여리지도 유약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더 마음을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거 알려줬다고 뺨을 맞는거에요? 그러면 더 물어보면 안되겠네~ 잘생긴 얼굴은 보호해야하죠. 그러다가 상하면 그건 큰 손해라구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는 남자와 다르게 단태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보이며 대답했다. 능청스럽고 능글맞지 않은 진지한 태도였다가도 단태가 헤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쵸?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한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여보이기도 했다. 즉흥곡을 좋아한다는 대답에 다시금 단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문득 끄덕이던 것을 멈췄다. 뭔가가 슬그머니 신경쓰였다.
"악보없이 연주되는 즉흥곡이 제일 힘들지 않아요? 하는 것도 힘든데~ 연주가 안맞으면 듣는 사람도 괴롭고 말이에요."
남자의 말에 단태는 대답을 하다말고 히죽-하니 웃음을 지어보인다. "학생도 아니고 어른이 술 마셨다고 잡혀갈까. 알콜이 들어있는 술 한잔 주신다면 난 감사히 받아마시겠지만요. 오라버니~?" 능청스럽게 뻔뻔한 목소리로 느물느물 대꾸하면서 단태가 주막으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름이 너무 특이하면 남들이 잘 기억하잖아요? 아! 물론 오라버니의 이름은 잘 기억할 수 있어요. 나랑 같은 '태'가 들어가잖아요? 안그래요? 이것이 바로 운명?"
역시나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느물느물하게 중얼거리던 단태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