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옷에 피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 발렌타인의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그가 좀전까지 보이지 않던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예상보다 상태가 좋지 않다. 타니아 누님에게 가기에는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그렇다고 방송부 얘들을 부르자니 그 아이들은 너무 눈에 띈다. 일단 수를 낼수 있다면 그나마 가까운 현궁의 기숙사로 뛰어들어가는 수 밖에 없는데..... 이를 꽉 깨물며 발렌타인에게 어깨를 빌려준 채 그가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 순간 발렌타인의 발언에 그가 잠깐 걸음을 멈칫한다. 그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울분이 들어있다고 해야할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왜소해보여서 잠시간 머뭇거림이 생길정도였다. 불쌍하다는 말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싸구려 동정은, 이 긍지높은 짐승에게 어울릴 수 없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인간이니까요."
그가 주저 없이 대답한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스템을 구축한 인간들끼리 싸우고 다퉈가며 인류는 그렇게 약육강식의 절대 원리를 세워갔다. 어찌 보면 눈물 흘릴수 밖에 없는 광경이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빠르게 이해할 수도 있는게 아니고... 그렇기에 상처 받고 또 싸우는것이고요."
용을 꿈꾸는 이가 짐승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이어진 의지를 안고 걸어가는거니까요. 물론..... 그 의지와 소망이 수만, 수십만이고 하늘의 별만큼이나 헤아릴수 없다는것도 같지만....."
허나 그 눈빛 만큼은 용의 그것과도 뒤지지 않았다. 따스하면서도 진중하고, 무게감 있지만 한 없이 자유로운 눈빛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분위기가 심오해졌다. 일순 주앙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포기한다. 무엇을? 어째서? 그 어떤 힌트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 단어 하나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기에 무엇도 걸지 않은 채. 만약 본인이 지게 될 경우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상대는 또 처음이다. 분위기가. 그리고 지금의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깊어져버리고 말았다. 허나 그 사실이 주는 것은 위기감도 불안함도 아니었다. 이윽고 다시 입꼬리를 슥 끌어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 오호라.. 그래. 감당할 수 있겠니?"
자신의 가벼운 도발과, 거의 일상이었던 내기에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반응을 보여준다면 이 관계를 쉬이 끊어낼수는 없을거라고 느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순탄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좋았다. 마치 일생일대의 내기를 하는것만 같은 이 짜릿함과 아찔함은 자신에게 큰 황홀경을 선사해주었다. 지금의 이 기분을 인생의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 날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역시 그것은 자신의 과한 욕심이겠지. 몇 걸음 다가가 당신과 눈을 맞추던 주양은 슬쩍 눈꼬리를 아래로 내려 휘게 만들었다.
"어때. 정신이 확 들지? 지금의 그 감정 기복. 평온하고 일정한 것보다 더욱 짜릿하면서.. 좀 더 살아갈 맛이 나지 않아? 너도 내가 말한것처럼 온전히 이 기분을 느끼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게 내 인생의 원동력이야."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이 짜릿함을 원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가길 바랄게. 자신의 입술을 가벼이 핥아 올리며 미소를 더더욱 짙게 머금었다. 앞으로. 평생 끝나지 않을 이 덧없는 싸움 앞에서 꺾이지 않고 나아가, 마지막에는 그 평생이라는 전제조건조차 무시해버린 채 자신마저 쓰러트릴 수 있기를 바라며. 당돌하면서도 대담하게 평생의 싸움을 자신에게 제안한 당신에 대한 기대치는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한참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던 주양은 이윽고 내기를 위해 몸을 돌렸다.
"오늘 처음으로 이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는건데~ 벌써 너를 내기에 걸고싶어지는걸~? 그 당돌함. 내가 높이 평가하겠어!"
그리고 그것은 그 기대치의 연장선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조금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다시 평소대로의 말투로 돌아와 언제 그랬냐는 양 능글거리는것이 퍽 일품이었다. 내기에서 지고, 당신에게 승리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그것도 정정당당이 낳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으니 아쉬움은 뒤로 하기로 했다. 이해서 정정당당함과는. 쉽게 친해질래야 친해질 수가 없지.
예상치도 못한 적토마 비유에 주양은 그만 한차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맙소사. 간만에 조금 신나게 달려보기는 했는데 이 후배가 느끼기에는 그 정도였단 말인가. 아까 자신감 있게 평생의 싸움을 제안할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라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하는 마인드로 당신을 부축하며 당신이 손가락질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구나~ 그. 문구 참 유별나네. 코코넛이 당연히 코코넛이지, 100% 생코코넛은 또 뭐람? 누가 보면 다른곳은 가짜 코코넛이라도 파는 줄 알겠어~ 안 그래~?"
주양에게는 이런 문화가 익숙하면서도 어쩔 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특히 과장광고같은 것을 접했을 때는 더더욱. 이래저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듯한 반응을 내비치면서도 일단은 음료수를 마셔야 했으니. 주양은 얼른 그리로 향해 음료를 두 잔 주문했다. 다행스럽게도 조금은 한적한 시간대였기에, 그리 오래 기다릴것 없이 음료를 받을 수 있었다. 계산까지 끝내고, 자신 몫의 코코넛을 꼭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책하면서 마셔도 좋겠지만, 역시 이런건 그늘 아래서 마셔줘야 제맛 아니겠어? 어때. 저기서 바다 경치라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즐거볼까?"
짜증이 스몄다. 아픈 사람은 자신인데 왜 호들갑은 당신일까? 사소한 걱정이라도 필요가 없었다. 그냥 묵인할 수는 없는 건가? 그는 예민하게 굴었지만, 종잇장같은 몸뚱이는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기가 어려웠다. 몸도 가누지 못하니 불쑥 분노의 화살표가 당신이 아닌 그에게 꽂힌다. 고작 이것 하나 버티지 못하여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수치스럽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뱉으며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들갑 떨지 말게. 늘 있는 일이니."
단지 그 정도가 아주 조금은 강할 뿐이다. 그는 지금 사냥 당하던 짐승이다. 당신을 사냥꾼으로 가정하고 묻듯 날카로운 발언이 향한다. 굳이 당신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있을 난제다. 하지만 비난의 화살이 당신에게 간 것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최악의 성격임은 확실하다.
"인간이라서?"
그는 당신의 어깨에 기대 다시 숨결만 존재하는 웃음을 터뜨린다. 인간이라서! 참 싫은 답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하고 갈구하며 파멸을 자초하지만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믿음이 배신 당한다 하여도 변함이 없다. 아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굴레 속의 평행길을 걷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습군."
다르단 희망을 품었지만 우린 결국 같고 극과 극이기에 닮았다는 건가? 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해할 수 없다 믿고싶다. 아, 나는..그는 낮게 가르랑거리듯 느즈막한 웃음을 흘린다. 자조적인 웃음, 그 뒤로 가라앉지 못한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자네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 자네가 날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얄량한 자존심을 세우고 부정한다. 그리고 체념한다. 발버둥쳐도 인간은 인간의 삶을 사누나. 나의 삶이여. 눈 감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거늘 어찌 불을 끄느냐...그는 기어이 비틀거리다 당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러니 오늘 일은 없었던 게야."
한 걸음. 현궁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이 더 심하게 휘청거렸다. 기어이 고개를 돌려 바닥을 향해 거칠게 피를 뱉어내고, 날카롭게 흐느끼듯 웃으며.
가만히 그의 말을 듣는다. 항상 이렇게 살아왔다는 이야기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늘 말했던 사실이다. 간판을 지고 가는 이여, 그 무게가 가진 의미를 알지어다, 간판이란 살아감에 따라 자연스레 따라 붙는 것이니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역량이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 이 눈 앞에 있는, 상처를 입었어도 그 긍지를 높이 치겨든 짐승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무게를 지고 가는지, 그가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이미 리안의 옷은 전신이 피로 범벅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옷이야 다시 빨고 수선하면 끝이지만 사람의 손은 한번 놓아버리면 그걸로 끝인 법, 그는 그것이 싫었다. 그렇기에 그는 천천히 자신의 소매깃을 이용해 발렌타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모두 닦아내고, 더불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피들을 최대한 자신의 옷을 이용해 땅바닥에 그 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한다.
"원하신다면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황금천칭의 이름을 걸고. 오늘 일은 없었던걸로 해드리죠. 하지만 그 댓가로...."
용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황금천칭이 움직인다. 누군가 그랬었다. 에스카마리 가문 만큼 그들의 성향이 확고한 곳은 없다고, 그들은 은혜와 원한을 갚는데 있어 목숨도 주저하지 않고 거래로 낼수 있다지만, 역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지려 하거나 부탁을 한다면 그만큼의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지금 발렌타인은 부탁을 하였고, 그는 그에대해 이행해주려 한다.
"아쉽게도, 아픈 사람을 보고서 잠자코 있을 점잖은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죠,"
그 순간, 그가 허리를 굽힌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등에 업어버리고는 다리를 들어올린 뒤 말그대로 발렌타인이 등뒤에 실려가는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이미 각혈과 두통으로 힘이 빠져버릴대로 빠져버린 터라 그러한 자세를 잡기는 워낙에 쉬운 상황,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진중한 어조 그대로 입을 열었다.
"댓가는 이걸로 받아낸 걸로 하겠습니다. 물론 이게 치욕스러우시다면, 이대로 섹튬셈프라를 외우시고 제 목을 잘라버리셔도 됩니다."
자신을 죽여도 된다는 말을 무덤덤하게 한다. 도대체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일까.
주양이 속으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해서 그 속마음을 그가 알 길이 없고, 나쁜 일만 아니라면 그에게는 만사를 평온하게 납득해버리는 기질이 있으니 순순한 동의가 돌아왔다. 갑작스레 시작된 물놀이 패대기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는 주양이 참 유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나자마자 과격한 장난질부터 시작해서 그런지,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묘하게 오래 본 사이처럼 스스럼없게 얘기하게 된다. 마침 지금 꺼낸 대화 주제가 반려동물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고. 지금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주양에게 청이라는 새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네?"
내깃돈이라고……. 이해하기 힘든 갑작스러운 논리 점프에 그는 저도 모르게 반문해버리고 말았다. 그, 소중한 판돈…? 소중한 복돼지… 같은 의미로 한 말인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농담인가 싶어 일단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소중하다고 했으니까 나쁜 뜻은 아니겠지… . 그는 다짜고짜 이 초면인(엄밀하게는 대화가 처음인) 주궁 학생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주양의 사람됨을 모르는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납득이었다.
"아, 고마워요. 그럼."
그는 위로 손을 들어 아직까지도 인간 위에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선 라쉬의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개는 모르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신호를 줘도 묵묵부답이다. 결국 그는 입으로 말했다.
내려와, 어우우…(싫어), 내려와, 우어엉(태워줘), 내려와, 힝잉이……. 개 나이 다섯 살이면 세금도 낼 줄 안다… 아니, 이게 아니지. 탈것의 편안함을 알게 된 라쉬는 올라온 김에 육지까지 안락하게 쉬고 싶어진 모양이다. 결국 그가 라쉬를 진 채 물 속으로 스르륵 잠수하려 하고서야 겨우 내려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풍덩, 두 발로 섰을 때 기준 몸길이 180cm 가량의 육중한 5세 아가는 체념한 얼굴로 휘적휘적 성의 없는 발짓으로 물 속을 유영했다. 그렇게 조금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냅다 주양에게 매달린다. 앞발을 잡고 수영을 도와달라는 수준을 넘어서, 그냥 힘 빼고 물속에 미역처럼 둥둥 떠있을 테니 잘 붙잡고 데려다달라는 신호였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요구였다. 대강의 상황을 감으로 짐작한 그는 뒤편에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강아지'를 보는 듯한 보호자의 표정이었다.
' 즉흥곡! 특히, 아무 악보 없이 연주되는 즉흥곡을 가장 좋아해. 가수의 노래가 즉흥적인 것도 좋아하지! ' 그건 어떻게 보면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래서 잘생긴 사람은 피곤하다고요? 하. 즉흥곡이긴 하죠 ' 잘 생긴 건 사실이야? 목소리도 엄청 좋은 걸? '
까르르 웃으면서 말한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크게 웃었습니다.
' 아하하하하ㅡ 그러면, 나중에 내가 한 잔씩 알코올 줄 수도 있다고? 학생 앞에서 알코올 마셨다고 잡혀가는 거 아니려나 몰라! '
물론, 농담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그는,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이 아니니까요. 경박, 경솔, 경망. 그 세 가지 단어가 그를 지칭하는 단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