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순순한 동의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이 쪽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사실쯤은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대화를 몇번 나누지 못했던 상대와 노는 시간에서, 이것저것 현실적으로 따진다기보다는 좋은 게 좋은거라는 극히 낙관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주양 자신의 모습은 오히려 낙관적이기도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리기도 하고.
시간은 흘러, 언제 살벌하게 물장난을 하고 패대기치고 패대기쳐졌냐는 듯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쁜 모습이었다. 역시 과격한 장난은 리스크가 크지만 그 대신 돌아오는것도 큰 법이다. 이렇게 따로 이야기를 섞은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음 속 내적 친밀감은 최대치를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을 만큼 커져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내적 친밀감과 서로를 알아가는 것은 한참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응을 보며 주양은 다시 실없이 웃었다.
"왜 그래~? 내 비유에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어? 내깃돈! 앞으로 너도 자주 듣게 될 테니까, 금방 익숙해질거야~"
허구한 날 뭘 걸고 내기하는 주양으로써는 당신 앞에서도 청을 걸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안 하고 가뿐히 넘기는 날도 종종 있었지만 기회만 잡았다 하면 어김없이 내기 이야기가 나오고 그 뒤에는 청이 걸린다. 주양 자신이 먼저 내깃돈을 다른 것으로 바꿔 걸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기의 흐름이었다. 지금. 내깃돈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때의 반응도 충분히 재미있었는데 그때가 된다면 또 얼마나 재밌는 반응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뭘 이정도로~ 라쉬, 라쉬~ 내려.. 푸핳!!"
다시 제법 상냥한 목소리를 내비치려던 주양은 이윽고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목덜미를 툭툭 쳤는데도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하던 그 모습까지는 어찌저찌 버틸 수 있었으나 이어지는 3연속 내려와 콤보에 대한 반응에서 결국 웃음을 더 이상 참을수 없었다. 맙소사. 내가 뭘 보고 뭘 들은거지 방금. 지금만큼은 살짝 라쉬가 부러워질 뻔 했다. 청도 저렇게 애교가 많았다면 좋았으련만. 허나 청의 성질머리가 지금처럼 더더욱 고약해지는데 크게 기여한게 누구인지 떠올려본다면 그런 생각은 금방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자~ 이리로 온. 착하지! 그. 패대기 잘 치는 친구도 내 목소리랑 걸어가는 소리 잘 듣고 따라와~ 파도소리 때문에 걸어가는 소리를 쫓기 힘들어지면 딱 멈춰서 이야기하고! 내가 끊임없이 재잘거릴 테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영 애매해진다 싶으면 라쉬를 들쳐업고 당신의 손을 잡고서 같이 나오는 방법이 있었으나, 아까 전 당신의 등 위에 올라갔던 라쉬의 위용을 떠올려봤을 때 그건 영 옳지 않은 선택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기에 버틸 수 있었지, 아마 자신이라면 당장 샌드위치처럼 반 접혀 물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을 것이다. 휘적거리며 헤엄을 치던 라쉬가 자신에게 척 매달려서 뒷발질도 안하고 둥둥 떠있는 걸 보고 주양은 다시 한바탕 깔깔거리며 경박하게 웃었다.
"아하하핫, 괜찮아~! 원래 5살때가 어리광이 제일 많을 때 아니겠어~? 자. 가자~ 너도, 라쉬도 내가 안전하게 얕은 곳까지 잘 에스코트해서 데려갈 테니까 걱정 말고~!"
자. 그럼 이쪽으로! 하며 주양은 라쉬의 앞발을 잡고 얕은 곳으로 살살 끌기 시작했다. 장애물이 있나 없나 끊임없이 확인하는것도 잊지 않고, 중간중간 파도소리에 물을 가르고 걸어가는 소리가 묻힐때쯤이면 다시 이쪽이라면서 목소리로 신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켠으로는 눈 앞의 이 거대한 어리광쟁이에게 완전 혹해 있었다. 적어도 이 강아지는, 마음이 여리지도 유약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더 마음을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거 알려줬다고 뺨을 맞는거에요? 그러면 더 물어보면 안되겠네~ 잘생긴 얼굴은 보호해야하죠. 그러다가 상하면 그건 큰 손해라구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는 남자와 다르게 단태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여보이며 대답했다. 능청스럽고 능글맞지 않은 진지한 태도였다가도 단태가 헤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쵸?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한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여보이기도 했다. 즉흥곡을 좋아한다는 대답에 다시금 단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문득 끄덕이던 것을 멈췄다. 뭔가가 슬그머니 신경쓰였다.
"악보없이 연주되는 즉흥곡이 제일 힘들지 않아요? 하는 것도 힘든데~ 연주가 안맞으면 듣는 사람도 괴롭고 말이에요."
남자의 말에 단태는 대답을 하다말고 히죽-하니 웃음을 지어보인다. "학생도 아니고 어른이 술 마셨다고 잡혀갈까. 알콜이 들어있는 술 한잔 주신다면 난 감사히 받아마시겠지만요. 오라버니~?" 능청스럽게 뻔뻔한 목소리로 느물느물 대꾸하면서 단태가 주막으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름이 너무 특이하면 남들이 잘 기억하잖아요? 아! 물론 오라버니의 이름은 잘 기억할 수 있어요. 나랑 같은 '태'가 들어가잖아요? 안그래요? 이것이 바로 운명?"
역시나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느물느물하게 중얼거리던 단태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둘은 얼떨결에 내기를 걸어버렸다. 후에 밥먹듯이 청을 내거는 주양을 보며 민은 기절할듯 따질지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할 일이었다.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허망해진 민이 지금의 진지함을 한 스푼 내려놓을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부터 패밀리어를 건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요."
여상한 대답이 들려온다. 민은 이 내기가 길고 끈질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민은 사람을 설득할때의 자신이 얼마나 끈질기고 섬세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허탕으로 돌아갈때의 몰아치는 무력함이 얼마나 잔인한지조차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이 기껍게 느껴졌다. 자신은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차갑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당신이 가진 맹렬한 업화에 기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저를 내기에 건다고요? 나를 담보삼는다는 소리죠, 그거?"
일순 황당함이 얼굴에 떠오른다. 나의 소유권, 언제부터 주양에게 가있었나. 어안이 벙벙해진 민이었다. 내가 내기에 건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데. 아니 그전에 아직 지지도 않았잖아. 고민하느라 민의 걸음이 더욱더 늦어진다. 아까는 그래도 비틀거리는 모습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정말로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민의 시름이 깊어진다.
이 선배, 심상치 않은게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큰맘먹고 제 신념을 걸고 내기를 했건만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자신이 지는 날이 오면... 시치미 뚝 떼어버리자. 내가 뭘 포기하는지 말 안했잖아. 손톱 1mm정도 포기했다고 구라치면 어떻게든... 주양이 들으면 기함을 토할만한 생각을 하며 민이 균형을 되찾았다. 낯빛이 한결 빛나보인다.
"뭐, 진짜 코코넛을 잘라준다~ 이런 뜻 아니겠어요?"
민이 건네받은 코코넛 안쪽을 빨대로 긁어내며 대꾸한다. 이렇게까지 고민 없이 대답한 티를 내기도 힘들텐데 이걸 민이 해낸다. 이미 빨대를 입에 넣었던 민이 주양의 제안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씨가 맑고 더우니 좋은 생각이었다.
"...!"
그늘에 앉아 코코넛 음료를 목에 넘긴다. 말라있던 목 점막에 시원하고 투명한 코코넛 즙이 닿는다. 민의 얼굴이 깨달음을 얻은 신자처럼 진중해진다.
아앗.. 나가기 전에 잠깐 봤는데 이건 말을 안 얹을수가 없겠네. 꼭 앞에서 까놓고 말할 자신 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호박씨나 까고 다니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사람들한테 너무 마음쓸것 없어. 그치만 저릿저릿하고 화나고 억울한 건 당연히 드는 거니까.. 캡틴 힘내고. 잘 추스르길 바랄게! :)
보자~ 첼주랑 타타주랑 땃주랑 랸주 안녕! 진짜 다녀올게. 오늘도 밤 늦게? 올 것 같지만.. 아무튼 저녁 아직 안 먹은 사람들은 얼른 저녁먹고 오기!
다들 어서오세요. 캡틴은 잘못한 점 하나 없으니 괜찮아요.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내가 뭐 잘못했나? 그런 생각 하지 마시고 일단 푹 쉬셔요.
물론 세상 일이 맘대로 안 되겠죠. 푹 쉬고 추스리고 와야지 해도 그게 없던 일이 되고 한 번에 잊어버릴 일은 아닐 거예요..아무렴요. 누가 내 욕을 한다니. 당연히 화가 나고, 계속 생각나고, 그 사람들에게 내가 왜 미움 받아야하나 억울하실 거예요.😠
그래도 아, 그 사람들은 거기까지인 거구나..하고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만약 캡틴을 정말 생각했더라면 앞에서라도 조심스럽게 지적 했겠지, 그럴만한 인물상을 가진 존재는 절대 아니란 거니까요. 그런 되도 않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상처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부디 푹 쉬시면서 추스리고, 내일이나 모레, 앞으로도 근사한 일만 생기길 바랄게요.😌
말주변이 없지만 이렇게나마 심심한 위로를 보내드려요. 아무튼 정말 푹 쉬시기여요. 심심한 위로인 웹박수도 확인해주시고요.🙄
"어.... 음...." "부탁합니다. 아현양." "제가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되는걸까요....?"
리안이 대놓고 아현에게 절을 하며 빌고 있다.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상황이 이해는 간다는 것인지 안절부절 못하던 아현은 천천히 자신의 부장에게 다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만지며 표정을 짐작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시간 표정을 살피던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음.... 일단은 도와드릴께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부장님이 도와달라는데요. 그래서 제가 할 일이...." "여름철에 좋은 음료수가 뭘까요? 다른 것보다 직접 만드는게...." "아....!!"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주작님이 더위를 먹어서 현무의 물을 구해가야 하고, 그를 위해 감 사감님께 드릴 무언가를 드려야 한다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건 다름아닌 그녀, 한때 그쪽 관련으로 공부를 했다고 이야기했으니 그가 손을 벌린건 당연한 것이리라. 그 순간 그녀가 살포시 웃었고, 그는 그녀의 이끌림에 따라 조리 실습실로 향하였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이라 쓰고 6시간이 흘렀다.—, 리안은 자신도 못하는게 있다는 타박을 아현에게 듣고서 도망치듯 주방을 튀어 나왔다. 그런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아닌 직접 달여낸 수정과 한병, 마법으로 차게 식힌 수정과 한잔은 분명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그는 서둘러 감 사감님께 달려가 그것을 진상해 올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