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확실히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야 복면가왕도 아니고, 노래에 그렇게 큰 리액션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애초에 남을 괴롭히는 것이 큰 취미도 아닌 릴리가 왜 굳이 아까운 시간을 들이며 이 내기를 승낙힀을까? 자, 여기서 오렐리 샤르티에의 속마음을 들어 보자.
‘안 들려줄 거야.’
그렇구나. 하여튼 릴리는 어떤 꿍꿍이를 품은 채로 그를 뒤따라 갔다.
“하─ 하─? 그러─시─겠다?”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 부들부들 떨린다. 대놓고 애 취급이야?! 오냐, 잡아 주마. 손을 아주 꽈아아아아악 잡아 비틀어 주마! 바키에 나오는 것처럼! “그러─자? 하하?” 하고 다가가서, 의념으로 악력을 강화하여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문제는 의념을 통한 근력 강화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냥 꼭 붙잡은 것 이상의 감촉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설마 자기를 숙녀라고 생각하는건가? 정말로? 무리잖아, 그런 작고 ㄱ...꼬맹이같은 몸을 하고선 말이지! 나는 시원하게 대폭소를 터트렸다. 생각해보면 굳이 승부라고 할 것도 없는 것에 승낙한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이유는 어찌되든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꿈에 관한 것은 싹 잊고서 어떻게 하면 이 꼬맹이를 골탕먹일 수 있을까 하는 즐거움과 두근거림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손이라도 잡아줄까, 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어떻게 거절할까 싶었는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처음에 빠알개진 얼굴로 부들거리는 것까지 예상하던 반응이었는데, 진짜로 잡을줄은, 진짜 몰랐다. 그녀는 분노를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그러자고 말하며 나의 손을 아주 강하게 - 아마 릴리의 입장에서 - 잡아왔다. 잡은 손은, 작긴 했지만, 따뜻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강하게 잡아올줄은 몰랐다. 손이라도 비틀려는건가 싶었는데, 그정도의 힘은 아니었고, 그냥 아이가 부모의 손을 꼭 잡는 정도의 힘이었다.
"지, 진짜 잡는거냐? 아니, 싫다는건 아니고. 그, 사람 많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런거라고 하자고."
별로 이런 것 까지 놀릴 정도로 세심하지 못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 키가 작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러다가 헤어지기라도 하면 귀찮고. - 왠지 내 머릿속에 가디언 칩으로 다시 연락해서 만나는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대로 떨어지면, 귀찮으니까. 응. - 그녀의 손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잡고 내가 떠올린 '경기장' 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앞서 가는 내 얼굴, 안 보이겠지? 나 감기기운이라도 있나? 갑자기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여자 손을 잡는 것은 그저 평소의 일이고, 그렇다고 이런 꼬맹이 손을 잡았다고 내가 부끄러워 할리가 없잖아. 그냥, 좀 놀라서 그런거다. 흐흥, 이렇게 해서 경기 시작 전에 내 감정을 어클어둘 생각이겠지? 그런데에 질 내가 아니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 사실 할 말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 그녀를 '경기장' 으로 안내했다. '경기장' 이라곤 말 했지만, 사실 내가 자주 낮잠을 자러 오는 곳이다. 강가 근처라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대로에서 떨어져 있어 사람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그런 곳. 거기에 수풀들 사이에 감춰져 있어 일부러 누가 찾아다니지 않으면 찾기 어려운 그런 장소였다. 요컨데, 꼬마들의 비밀기지 같은 곳이랄까. 거기에 큰 나무도 한 그루 있어 그 나무에 등을 기대로 자는 것은 여간 기분좋은 일이 아니니까.
생각해보니까, 여기에 누군가를 데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도 여길 데려오진 않았다. 뭐애초에 이 학원도에 온지 얼마 되진 않았다고 해도 만난 여성은 꽤 됐었으니까. 하지만 이런데 데려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조금, 다르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숲속 작은 비밀기지와 같은 공터에 도착한 뒤에도 왜 데려왔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탓에 한동안 손을 놓지 못했다.
"으아아아아!"
나는 그제서야 계속 꼬옥 하고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할거 아냐. 그것만은 질색이라고!
뒤따라가는 릴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인파 가운데서 손을 잡고 걷는 건 훨씬 (보호자에게 인솔받는 어린아이 같아서) 부끄럽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손을 놓으려고 해도 그가 억척스럽게 이끌고 가는 통에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쯤에 이미 릴리의 얼굴은 완숙 계란처럼 푹 익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곁눈으로 가쉬의 얼굴을 훔쳐보았을 때, 그도 마찬가지로 완숙 계란이 되어 있는 걸 본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걸로 비긴 게 되니까. 릴리는 ‘경기장’의 주위에서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으로 얼굴의 열기를 식히려 애썼다. 꽤나 분위기가 좋은 곳이다. 학원도는 나름 넓은 땅이므로 이런 구역도 찾아나선다면 더러 발견할 수 있지만, 릴리에게는 아직 이런 비밀기지가 없었다. 도서관이면 충분했으니까다.
“갸앗!?”
그가 소리를 지르자 덩달아 놀라며 손을 놓았다. 숲에 사는 문어가 튀어나오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어린애같은 이유였다. 그래도 비명을 바로 귓전에서 들은 탓에 위기를 감지한 손이 화끈거려서, 그 손의 장갑을 벗고 손아귀에 꼭 쥐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뭐, 다─행─히, 가쉬 씨를 인파 속에서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네. 혹시나 당신이 미아가 될까 봐 걱정했다구.”
장난스럽게 넌지시 이야기하며 팔짱을 낀다. 그러고는 구둣발로 바닥의 풀을 고른 다음에 그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낮은 자세로 있으니 마음이 안정된다. 이대로라면 조금이라도 숨을 고를 수 있을 듯하다.
>>560 아하 있군요! 맞아요. 좀비게임이나 영화나 그런거 보거나 하면 막 자기 머릿속으로 스토리 상상돼서 진행되지 않아요? 막상 쓰려면 써지진 않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맞아맞아. 머릿속에서 지금 당장 좀비사태가 일어나면.. 이라던가!! 지금 당장 좀비사태 일어나면 이 집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라던가. 아마 그걸 영화화한게 살아있다라는 영화인가 그런걸로 아는데.. 영화 보긴 했는데 살아있다는 걍 그렇더라구요.
기타를 조율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뭔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나마 분위기가 있는 양반인데…… 어쩌다…….’
그리고, 그의 연주가 끝났다.
“…….”
내기의 조건은 노래를 듣고 그에 따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좋다, 나쁘다라는 일체의 표현을 하지 않은 채로 감상하면 그만인 것이다. 릴리는 노래에 빠져들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라운드는 릴리의 승리였다.
‘애초에, 노래를 듣고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그걸 잘 숨기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인데, 딱 걸렸어.’
맞아맞아! 저는 개인적으로 만약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좀비 사태가 일어난다면? 하는 식으로 망상 되게 많이 해요! 집이랑 멀리 떨어진 곳에서 좀비 사태가 벌어지고 집이 외진 곳에 있으니 사람이 적어 좀비도 적겠고... 집에는 먹을 것도 있으니 집으로 가자! 하는 식으로 라던가 좀비 게임은 워낙에.. 비현실적인게 많아서 그다지 안 떠오르지만, 좀비영화 같은 건 되게 많이 떠올라요! 흑흑.. 최근엔 아미 오브 더 좀비 였나? 그그.. 라스베거스에서 금고 털려고 하는 사람들 이었는데 그건.. 좀.. 뭐라케야하면 좋을지... 좀.. 그랬지요.. 나에게! 좀비! 영화를! 내놔라!
나는 그녀를 맘껏 매도하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나 조차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펑펑 울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니. 조금은 실망이었다. 별로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지만 - 맞을지도 모르지만 - 조금은, 같은 감정을 느껴주길 바랬을지도.
"뭐, 좋아. 다음곡."
눈물이 날 것 같은 곡으로는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다음 곡은.. 좋아. 그걸로 해볼까. 나는 다시 기타의 헤드를 조금씩 조율한 뒤 줄을 잡았다. 이번엔 사실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지만, 반응은 좋던 곡이다. 이 곡을 연주하고 난 뒤엔 꼭 한 두 명은 얼굴을 붉히고 입가를 가리던 여학생이 몇몇 있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다지 좋아하는 곡은 아니다.
"기분 좋은 날은 늘 그렇게 딱 맞아들어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애매한 게 없지 널 만나러 가는 길도 온종일 설레서 난 보고 싶은 것도 느끼고 싶은 것도 애매한 게 없지 음음 난 좋아 너의 모든 게 말이야 아니 아니 나 좋아 그래 거기서 볼게 Yeah 네가 온다 걸어온다 기분 좋은 바람이 후 하고 불어오면 내 마음도 후 네가 보고 싶어 네게로 달려갈래 포근하고 좋은 너의 그 품으로 너와 다툰 뒤엔 늘 이렇게 편지를 적어 사랑한단 말도 보고 싶단 말도 모두 담아 넣지 널 만나러 가는 길에 몇 번씩 곱씹어 나 하고 싶은 말도 널 생각하는 맘도 전부 다 전할게 음음 난 좋아 너의 모든 게 말이야 아니 아니 나 좋아 그래 너에게 갈게 Yeah 기분 좋은 바람이 후 하고 불어오면 내 마음도 후 네가 보고 싶어 네게로 달려갈래 포근하고 좋은 너의 그 품으로 널 꼭 안고 있으면 따뜻하고 참 좋은 것 같아 눈부신 햇살 사이로 스르르 나 잠들 것 같아 기분 좋은 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널 보는 내 맘이 네 맘을 닮아 빛나죠 널 향한 내 맘이 후 하고 불어오면 네 마음도 후 내게 가까워져 두 팔을 벌려 갈게 포근하고 좋은 너의 그 품으로"
중간중간 추임새 부분에서 상대 - 릴리 - 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짓는 것은, 원래 버스킹 할 때 이렇게 하기도 하고 이래야 반응이 좋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유가 아니다. 다만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일 뿐..!
>>569 벗.. 한국에선... 정말요? 저는 외국에서 흥한 한국 좀비 영화 하면... 미스터 마 가 등장하는 부산행 외엔... 저는 ㅋ ㅋㅋ ㅋ 좀비들이.. 신체 능력이.. 너무.. 좀... 너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지능도.. 좀... 너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약간, 좀비에 대한 설정이 제대로 잡혀져 있지 않은 그 모습이 약간 좀... 그렇더라구요. 영화니까 뭐 그럴 수 있지! 싶지만서도... 그리고!! 너무 지루해!!! 영화가!!
좀비물 되게 러브러브~~ 도트형 좀비게임이요? 음.. 좀비주식회사인가? 하는 그 플래시 게임?
사실 이런 데서 두 곡을 내리 들으면 저절로 흥…… 이라고 해야 할까, 무슨 감흥 같은 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어 있다. 릴리도 감정이란 게 있었으니까. 아직까지 릴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어릴 때 심심해서 읽었던 연기 지도법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정 안 되면 신경독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다.
마지막 곡. 신 한국…… 아니지, 일야성이 닫히기도 전의 분단된 한국에 살았던 가수였나. 릴리는 두 손을 턱 밑에 받치고 차분하게 눈을 감은 채로 노랫소리에 빠져들었다.
릴리의 마음 중 반은 공정한 승부를 위해 노래에 집중하고 느낌을 얻어내려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반은 잠깐 딴 생각을 했다. 이런 조용하고 호젓한 곳에 자기를 데려와서 저런 노래를 불러 주면서, 이기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쉬 씨는 승부욕의 화신일까? 아니면…….
감고 있었던 눈 가운데 한 쪽을 동그랗게 뜨고, 노래하는 그를 바라본다. 그의 모습이 비친다.
이번에도 두 번째 곡을 들을 때처럼 웃음이 밀고 올라온다. 아뿔싸. 신경독을 정말로 썼다간 사실 죽을 텐데, 이런 상황에는 어찌 대처해야 할까. 일단 혀다. 혀를 이빨로 물고 버티자. 그리고 턱이 떨리지 않게 두 뺨을 밀어올리는 거다. 그 밖에는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버티는 거다.
어째서일까, 세 곡이나 라이브로 들으니까 정말 감정이 북받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느낌은 감동도, 우스움도, 이를테면 기쁨이나 재미 같은 것도 아니었다. 다시 첫 번째 곡을 떠올린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가사에 깊이 빠져들어서 노래하던 그와, 지금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짜내어 노래하는 그는 똑같은 사람이다. 깊은 내면과 얕은 장난기가 노랫소리가 되어서 온다.
‘이것은 무슨 감정이다’ 하고 릴리가 나름의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 연주는 끊겼다.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잠깐 비볐다.
“…… 아니, 4할은 당신이 이긴 걸로 해.”
가쉬가 올려다본 릴리의 얼굴에 자신만만함은 없었다. 그저 잔뜩 간지럽혀지고 났을 때처럼 상기되어서,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무언가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감정인지를 드러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릴리의 말대로, 승패는 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