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 가문의... 민입니다. 주양 선배님. 이제 막 친구 됐다고 물만난 물고기처럼 놀리실 생각이시라면 정말 안 좋은 선택을 하셨다고 전해드리죠."
왜 한국 사람들은 성씨가 두개일거라 예상하지 못하는거지? 한국 성씨는 전부 외자일 거라는 편견은 버리길 바란다. 백번 양보해서 한국 문화에 익숙해졌으니 어쩔 수 없다 치자. 이게 다 유명하지 않은 성을 가진 제 잘못이다. 제갈 가문만 봐도 누가 감히 제갈 윤 선배한테 아 갈윤씨군요,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겠는가. 평생 가문의 명예니 뭐니 다 쓸모없다 여겨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문의 명예가 중요한 법이었다. 민은 주머니속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한 명을 더 보냅니다.
"...내기요?"
민이 느리게 되물었다. 단순히 행동이 느려서 그렇다기보다는 잠시 생각에 빠져있어서 그런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로코모토르 모르티스나 엿가락 다리 마법 같은 것들을 말이다. 하여튼 내기 자체는 민에게 썩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어차피 자신이 사줄 생각이었으니 지면 그만이고 이기면 이득이다.
"음, 괘씸하게도. 뭐, 좋아요."
그렇지만 자신의 저질 체력을 뻔히 알면서 이런 내기를 제안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만일 주양이 자신을 황씨라 놀리지 않았고, 누가 듣기에도 공명정대한 내기를 제안했으면 이렇게까지 모질게 굴진 않았을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신은 결코 감정적으로 굴고 있는게 아니다. 가문을 모욕받고 질게 뻔히 보이는 내기를 제안받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대응했을 터였다. 비록 민은 꾸준히 가문의 명예에 시큰둥한 태도를 고수해왔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 하나쯤은 무시 가능했다.. 나름의 자기합리화를 마친 민이 주양의 다리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빙그레 웃음 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 깡충깡충 뛰어서 달려가보시지요. 로코모토르 모르티스."
세상에, 저 능숙한 움직임을 보아라. 교과서에 표본처럼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강세와 발음,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지팡이의 끝... 여러번 이 주문을 사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우연히 의무실 근처를 지나다 요청을 승낙하게 되었다. 초콜릿 재고가 떨어졌는데 수요처도 공급처도 자리를 비우기엔 곤란한 상황이라고. 따로 용품 보충을 담당하는 사람은 없는 걸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고로 평소에는 어련히 방법이 있었겠거니 한다. 필요한 물건이 들어올 동안 초콜릿이 필요한 환자가 들어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의무실에는 그도 가끔 신세를 지고 있는데다,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가끔은 조금 먼 곳으로 외출하는 것도 좋으리라. 장거리 산책 소식에 혹한 라쉬가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당과점은 오랜만에 들르는 기분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니 사장의 얼굴이 단번에 화색이 된 듯했다. 초콜릿을 전달받고 그는 이탈 없이 곧장 학교로 돌아왔다. 부탁한 자리에 물건들을 내려놓으면서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포장하면서 보냉 처리도 했을까? 날씨가 더워서 초콜릿이 녹으면 큰일인데.
기분 전환 삼아 간식을 사러 라온으로 가는 길에, 그런 얘기를 들었다. 의무실의 선생님이 초콜릿이 부족하다던가. 그걸 가져올 사람이 필요하다던가. 얘기를 듣다보니 어차피 가는 길에 좀 받아오면 되겠거니 싶었다. 점수나 용돈이나 별로 관심은 없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당과점에 도착해 자신의 용건을 먼저 보곤 몽고메리 부인의 초콜릿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리고 건네주는 초콜릿을 받아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총질이 핵폭탄이 되어 돌아올지. 역시 이래서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주양처럼 여기저기 찌르면서 다니면 필히 그 제곱으로 보복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거의 폭발음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고 주양은 비명을 지르면서 급히 얼굴을 가렸다. 옆에 있는 귀여운 멍멍이에 신경을 쓸 겨를조차도 없었다. 정말 손으로 내리친게 맞는가. 사실 이건 지팡이 없이 봄바르다를 쓴 게 아닐까? 어느 쪽이든 엄청나다는 느낌을 받으며 주양은 깔깔 웃었다.
"와, 대박. 쩔어! 너 엄청 대단하구나~! 이거. 선으로 그냥 내리친거 맞지? 봄바르다나 엑스펄소같은 걸 끼얹은게 아니라?"
반응이 화끈하면 장난을 친 사람으로써 꽤 뿌듯한 느낌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 반응이 화든 아니면 다른 무언가든 상관쓰지 않는 주양이기는 했으나, 뒤이어진 말을 듣고 화가 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한결같이 짓궂은 표정으로 다시 손에 물을 담는 주양을 보며 이미 저 멀리 당신에게 패대기쳐진 학생들은 주양에게 애도를 표했을 것이다. 아. 주님. 또 한명 갑니다. 그런 느낌으로.
"어라~ 누군지 몰랐던거야? 나는 널 아는데! 전에 수업때도, 추종자.. 때도 몇번 본 적이 있고. 결정적으로 너.. 지금 보니까. 걔구나? 사람 패대기 잘 친다던 애! 그런 이야기를 애들 사이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주양의 넓은 오지랖이 다시 발동되었다. 추종자 이야기에서 살짝 아랫입술을 곱씹었다. 여전히 마음속에 벼려진 복수의 톱날은 유효했다. 언젠간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직접 갈아버리고 말 테다. 허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대대손손 전해져오는 전설마냥 다른 학생들의 입소문을 타고 들려오던 인간 패대기 머신. 키 크고. 피부는 살짝 갈색에, 체격까지 좋은. 뒤늦게서야 그 특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씩 웃었다.
그러면서 슬쩍 물 속으로 손을 담갔다. 후속타를 위해 일부러 자신의 소개는 뒷전으로 미뤄뒀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딱 좋은 타이밍이겠지. 옆에 있는 강아지한테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능한 한 강아지의 눈이나 귀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조절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다시 비열하게 미소짓는 것이었다.
"아무튼 나는 주궁 5학년 학생대표, 서 주양이야! 그리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 너의 적이기도 하지! 자, 물보라 공격이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보시지~! 날 바다에 던져버리지 않는 한 계속 깔짝거릴거라구~?"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당신에게 맹렬한 기세로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역시 장난은 장난으로 받아쳐주는게 제 맛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조금은 혹하기도 했다. 과연 저런 사람한테 잡혀 물 속으로 패대기쳐지는 기분은 어떤 느낌일까. 얼마나 자신을 짜릿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은근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서 잡기 편하게 제자리에 딱 서서는 물을 퍼붓고 있었다. 물론 아까 전에 다짐했듯이 당신의 패밀리어로 보이는 강아지에게는 피해가 없게 하도록 하기 위해, 맹렬한 기세라고는 해도 조금 강도가 약하기는 했다만.
"어때, 시원하지! 역시 바닷가 왔으면 바닷물좀 묻혀 가면서 놀아야 재밌는 법 아니겠어~?"
뭐 우리 아이들중에 얼빠지게 독사에 물릴 아이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는 것인지 너스레를 떨면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물론 그 독사가 그 독사가 아니라 다른 의미의 독사일수도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답례를 생각하는 현성의 말에 낄낄 웃어버린다.
"저희는 지금 이미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는 시점인데요! 그것만으로도 저희에게 충분한 답례입니다!"
그렇게 말한 시점의 리안의 모습은 확실히 아름다워보였다. 남자가 아름답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의 모습을 본다면 확실히 이해가 갈 정도로, 그의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남자답게 웃는 모습은, 그 모든것을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어지는 말에 그가 혀를 내두른다.
"으엑?!"
그거 엄청 어려운거 아닌가요? 그는 잠시간 목구멍 너머로 넘어올뻔하던 이야기를 다시 밀어넣으면서 입을 열고는 그대로 머리까지 확 담궜다가 빠져나오면서 입을 열었다.
"뭐 어쩔수 있나요. 그럼 즐기는수밖에."
그가 웃는 소리가 하늘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다가 잠시간 달을 바라보던 와중 그가 조용히, 그리고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