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벌레 하나 때문에 피안길로 떠나고 싶진 않네요. 여러마리면 모를... 젠장, 오늘 밤 잠은 다 잤군."
궁시렁거리며 옷 매무시를 정리한다. 급하게 나온 터라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외출복이라하기에는 지나치게 편한 복장이었다. 간단히 내려와 편의점 들리기에는 안석맞춤이었지만 민은 언제쯤 저 새가 입에 있는 것을 깔끔하게 먹어치울지 알 수 없었다. 음료수를 마시고 약간의 수다를 떠는 시간이면 충분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물론 그 새가 바퀴벌레를 먹어치우지 못한다면... 퍽 유쾌한 발상은 아니었지만 주인이 알아서 해결하기를 종용할 생각이었다.
"초면이라뇨. 이정도 해프닝이라면 친구라 할 수 있죠. 혹시 타인과 친구의 경계가 확실한 편은 아니지요?"
뻔뻔스러운 친구 제안이었으나 경박해보이지는 않았다. 착실하게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다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다리로 과연 몇걸음이나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방금의 공포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모양새가 주양을 부축하는 것이 되었으나, 실로는 민 멋대로 부축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할 수 있었다. 침착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다리가 우습게 보였다.
"아, 저는 현궁 4학년 황보 민이에요. 황보가 성, 민이 이름."
보민이라고 불려온지 17년쯤 되면 소개할때마다 성과 이름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두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끈질기게 보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꾸준히 존재하지만, 그건 간단한 마법 주문-이를테면 다리 묶기 주문 같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마침 마시고 싶었던 게 있으니 그걸 먹으러 가요. 모래 사장에서 코코넛 음료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던데, 어찌나 탐나던지."
코리안 유교걸 민은 코코넛 음료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다. 해봤자 코코넛이 함류된 과자에 버터 바른 것만 몇번 먹어봤을 뿐이다. 이국적인 것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능이었고, 코코넛 음료를 꼭 마시고 학원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니 마침 잘되었다.
"맙소사.. 그. 그런 건 상상도 하기 싫어! 하나 나온것만으로도 내 정신력이 한계점을 넘어섰는데 여러.. 마리... 으으.."
정말 싫다는 듯 인상까지 구겨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그마한 바퀴벌레도 굉장히 극혐하는 주양으로썬 아까전과 같은 크고 우람한 크기의 바퀴벌레가 떼를 지어 나온다면 여름이고 저택이고 바다고 학교고 다 때려치운 채 바로 본가로 내려가 오늘부터라도 직계 방침에 충실하게 따르며 그들만을 위한 사냥견이 될 수 있겠노라고 선언하고도 남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하는지는 그때 가봐야 알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의 마음가짐은 그랬다. 차라리 뱀이 떼지어 나오는 것이 훨씬 유쾌한 상황일 것이다. 청에게는 정반대의 상황이겠지만.
"진짜? 그렇게 생각해주니까 기쁜걸!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혹시나 부담스러웠다면 어쩌나 해서 일부러 돌려서 말했는데. 그럴 필요 없었네!"
사실 뻥이다. 타인과 친구의 경계가 확실한 건 아니었으나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선생에 놀라 차마 그런 것 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쪽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주양이 초면이라고는 했으나 이미 혜향 교수님과 문카프의 춤을 보러 갔을 때 얼핏 보기도 했으니, 아예 초면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여전히 정신을 부여잡지 못한 채 웅얼거리는 주양의 헛소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부축해주는 듯 하면서도 부축받는 듯 아리까리한 모양새를 유지하며 걷다가, 저택에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이제 정말 안도한듯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남은것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을 때 청이 바선생을 다 삼키지 않은 채 반역을 꾀하지 않길 바라는 것 뿐이다. 당신의 자기소개를 듣고 아는 척을 해 보이려던 주양은 이윽고 비열한 느낌의 미소를 머금었다.
"오호라~ 그래서, 황씨 가문의 보민이구나? 앞으로 잘 부탁할게! 이쪽은 서 주양, 주궁 5학년 학생대표야!"
어쩌면 꾸준히 보민이라고 부를 사람들 중 주양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양의 장난은 대화를 몇번 섞어보지 않은 당신에게도 유효한 것이었다. 일부러 뭔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시대에 뒤쳐지는듯한 말투로 당신의 성과 이름을 날조하며 킥킥 웃었다. 그 후폭풍이 어떨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윽고 당신의 뒤를 이어 자기소개를 하며 학생대표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에 손을 척 얹고 자부심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학생대표가 되었나 싶지만 그건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음료수 마시면서 바다 구경 하는건가? 좋지! 나도 코코넛 음료는 한번 마셔보고 싶었거든~ 근데 역시 그냥 사주는대로 받아서 먹는 건 재미가 없고.. 그래. 그렇지. 나랑 내기 하나 안 할래?"
내기 이야기를 하며 다시 씩 웃었으나 차마 이번만큼은 청을 걸 수 없었다. 코코넛 음료수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 패밀리어를 거는 건 이상하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유는 뒤로 미루고, 그저 청은 지금 그 어마어마한 바선생을 쪼아먹고 있을테니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걸 내거는 것은 당장 지금 이 친구사이를 끝장내자는 뜻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해줄지도 모를 사이인데, 함부로 그럴 리가 있나.
"먼저 저기 파도가 닿는 곳까지 가는 사람이 코코넛 음료수 사주는걸로. 콜?"
자신 있는 내기라고 생각하며 주양은 씩 웃었다. 아까 바선생을 보고 도망칠때의 느낌으로 내달린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잠깐 갱신만 하고 갈게요. 다들 눅눅하지만 근사한 하루 되셨길 바랄게요.😊 죄송해요, 펠리체주. 답레를 조금..늦은 저녁에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 초면인 분께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어버려서 충격이 크네요. 생각할수록 계속 얄밉고 화가 치밀어서 조금만 쉬다 정리하고 올게요. 마음이 어수선하면 글도 어수선한 법이니까요..😂
무기로부터 차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없는 소식을 들은지도 며칠, 고민하느라 때때로 머리를 부여잡은 것은 하루 이틀 일이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이 터지긴 할 거지만, 너희가 죽지는 않는 데다 은밀한 조력자가 돕고 있으니 안심은 해도 되는데, 어른이 없을 때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말라는 건 마음 놔도 된다는 뜻인지 아닌지. 혼자서 고민해봤자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이걸 알려야 할지가 관건일 텐데……. 무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감이나 교수진들이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는 못 하겠다. 그렇다면 역시 학생들한테 말 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집 안에 틀어박히는 것보단 해 떠있는 시간에 어떻게든 야외에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발상은 부정할 수 없는 북쪽 사람의 호기였다. 이같은 고민마저 조용하고 안락한 실내가 아닌 파도 치는 해변에서 하겠다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한 게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학원에 돌아가서 맛보게 될 밀린 진도와 과제의 향연을 생각하면 이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즐겨야겠다는 절실함도 드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온전히 고민하는 시간은 갖지 못 하게 되었다. 낮 시간을 꼼짝없이 사색에 잠겨 보내기엔 이곳 날씨는 너무도 화창하고 더웠기 때문이다. 처음 한동안은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해보려고 했던 그는,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가만히 앉은지 10분도 되지 않아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가 싶더니……. 그가 몸을 숙여 함께 따라나온 라쉬의 옆구리를 툭툭 두드렸다. 생활 대부분의 시간을 현궁에서 보낸 탓에 아직까지도 겨울 털이 풍성한 러시안 보이는 이미 바닥에 배를 까고 뻗어 있었다. 아무런 눈짓도 대꾸도 없었지만 둘 사이에 암묵적인 신호가 조용히 오갔다.
그렇게 결국, 시점은 그가 라쉬의 앞발을 붙잡고 한창 개헤엄을 도와주고 있는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다. 당장 쪄죽게 생긴 판에 미래는 조금 미뤄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휴가가 좋긴 했다. 다행히도 라쉬는 물을 싫어하지 않았고, 막 마지막 장난꾼 하나를 '처리'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니…….
그러나 근거리에서 얍, 하고 물이 끼얹어지자 상황이 바뀌었다. 동시에 반격이 돌아갔다. 벼르고 있기라도 했던 듯 그가 즉시 공격이 들어온 방향으로 수면을 내리쳤다. 분명히 손에 닿은 건 물인데도 불구하고 폭발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터지는 굉음이 난 건 단순히 기분 탓인, 가. 높이 치솟아 후두둑 떨어져내리는 물보라를 그 역시 고스란히 맞았다. 마구 쏟아붓는 짠 물에 대비해 미리 눈을 감고, 개 눈도 가려주고 있던 그가 조금 늦게 말을 꺼냈다. 튀어오른 수면이 다시금 본래의 흐름을 되찾을 즈음 뒤늦게 이성적인 반응이 뒤따라왔다.
"앗, 그런데 누구시죠?"
방금의 행동은 지극히 반사적인 수순이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데에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는데, 방금까지 다른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탓이다. 물에서 얌전히 놀고 있으려니 장난기 많은 학생 몇몇이 장난을 걸어와서, 처음에는 조금 참다가……, 참다가…… 그들의 짓궂은 놀이에 호응을 좀 해주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놀이가 다소 격해져 꽤 많은 친구들을 수장시켰, 아니 물놀이를 즐기게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덕분에 그는 평화를 쟁취할 수 있었다. 아, 아까 걔들이랑 한 패는 아닌 것 같은데 너무 과했나. 무안한 마음도 조금 늦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