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절벽에서 다이빙을 해버린 충격 때문인지 주단태의 옷차림은 꽤 달라져 있었다. 그놈의 선글라스를 향한 집착은 버리지 못했지만 일단 눈돌아가게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가 눈돌아가게 화려한 긴팔 비치웨어로 교체된 상태로 주단태는 해변을 걷고 있었다. 나름대로 주어진 여행을 즐기고 있는 상황이다. 샌들 사이로 파고드는 모래알의 결정이 작아서 부드러운 감촉이였고 소리에 민감한 단태의 귀에 여러가지의 소리들이 뒤엉켜서 들려왔다. 너무 평화로워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문득 단태는 걸음을 멈추고 선글라스를 내려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였다면 단태는 풍경들을 계속, 쭉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내렸던 선글라스를 당겨올리며 시선을 움직였다. 불러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찾던 선글라스 너머의 암적색 눈동자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팔을 흔들고 있는 사람에게 닿았다. 내가 아는 애는 저런 애가 아니었는데?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머리에 스치는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단태에게 황보 민이라는 같은 현궁 기숙사의 후배는 저렇게 생기 넘치는 모습이 아니었는데. 혹시 누가 변신마법을 쓰고 자신의 눈을 속이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은 당연히 입밖에 내지 않고 단태는 민에게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가다가 민이 만들어놓은 모래성을 건드리지 않고 훌쩍 뛰어넘어 당연하다는 듯이 민을 끌어안으려 시도했다.
"뭐야? 나 기다리고 있었어? 전에도 그렇구 지금도 그렇구~ 계속 기다리는 거 보니까 혹시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거야? 응?"
안녕이라는 인사대신, 주단태의 느물한 목소리가 뻔뻔스럽게도 이어졌다. 단태는 히죽하니 미소를 지으며 민을 한번, 모래성을 한번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안전주의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다. 위험한 길을 밟지 않기 위해 차라리 걷기를 멈추고, 그렇게 한참을 제자리에 머무르며 안전하단 보증을 받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는 여유로운 걱정꾼. 그런 그가 생각하기에도 전지적인 시각은 오히려 끔찍했다, 반면에 미지에는 적어도 희망의 여지라도 숨겨둘 수 있는 노릇인데.
"그건 동의해요. 이미 전부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인생은 살 맛이 안 날 것 같네요."
무기가 아는 방법은 스스로 들여다보는 방식은 아닌가. 다른 네 명과 다소 동떨어져 있단 느낌이 들어도 무기 역시 사감이니 신탁과 유사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예언과도 조금 다른 듯하고. 짝, 하는 소리에 주의가 환기된다. 그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장황하게 꼬여가는 질문 시간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설―마, 그 여우라는 게 매구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상황이었다면 여우 말을 그저 단순한 비유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당장 학생들이 때아닌 휴가를 갖게 된 이유를 돌이켜보면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 없다. 잡종을 죽여라, 머글을 죽여라, 주인님을 위해… 발악하며 외치던 목소리가 아직껏 기억에 생생한데. 솔직한 심정은 부정을 원했다. 길다랗게 늘인 첫머리 말과 함께, 그가 골치아픈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리고 또 설마, 모든 것이 무로 되돌아간 상태는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無'이므로 죽는 게 아니라는 논지는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니 뒷목에 소름까지 돋는 기분이다. 난 그냥 집 나간 멍멍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쩌다 내 앞에 무시무시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소식을 듣게 됐을까…. 속으로 한탄하니 골치만 더 아픈 것 같다.
"그, 혹시 한 가지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희가 또 근시일 내에 공격을 받을 미래가 있다든지."
이것 역시 무기가 알려주지 못할 범주의 이야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만약에 긍정이 돌아온다 한다면… 차라리 자퇴할까. 직접 살인까지 저지른 경력직 살인마와 고문 숙련, 세뇌 전문 등등의 이력이 붙어 있을 강력범죄자들과 맞붙기엔 그는 그저 순탄한 학원생활을 보내고 싶은 청소년에 불과했다.
서슬퍼런 타니아의 모습에도 그는 오히려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의 심층부를 건드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여러가지 갈등이 반목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 자신에게 이빨을 내민다고 하더라도 그걸 두려워 할 필요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무례에 대해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그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왔다.
<clor steelblue>[다른 것은 몰라도,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함이라면 스스로가 그 책임을 질수 있어야 함이라. 이는 우리 가문의 절대 원칙과도 같은것일지니.]</clr> "무례를 범했습니다. 오히려 용서를 빌어야겠지요. 답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단순한 수행원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행색이 분명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더욱 깊숙히 파고들어가지 않고, 천천히 그 진실을 바닥 밑으로 파묻어버리기로 한듯 조용히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자신의 마법지팡이를 집어든다.
"답변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죠. 그 이상으로는 파고들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발렌타인, 타니아 둘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지팡이가 그대로 그의 팔목 깊숙히 파고들고, 그는 망설임 없이 주문을 외웠다.
"인센디오(Incendio)"
매캐하게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울려퍼지고, 팔에 검은 반점이 생겨날 무렵 그는 지팡이를 뽑고 천천히 평온한 안색 그대로 발렌타인 일행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에스카마리 가문의 절대 원칙, 모든 것은 스스로의 마음대로, 그리고 책임 또한 스스로. 자 이제 이걸로 됐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저한테 질문을 던지셔도 됩니다. 아니면.... 제가 질문을 이어나가도록 할까요?"
화려한 단태의 패션에 민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민은 그것보다 더 신경쓸 거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몇개 꼽자면, 저번 묻어갔던 사건과 보름달과 단태의 상태의 상관관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쓰던 과격한 공격 마법... 그건 묻어두고 넘어가기엔 너무 큰 문제들이었다. 자신을 끌어안으려는 단태를 저지하는 동시에 불쑥 지팡이를 들이 밀었다.
"머플리아토(*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이야기 하고 싶을 때 쓰는 마법)"
양 눈 곱게 접어 환한 미소를 보이던 민이 그대로 눈을 천천히 뜬다. 흐드러진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집요하고 냉엄한 시선이 느껴졌다. 따뜻한 바닷바람과 볕 드는 모래사장은 민에게 생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다만, 민은 그런척 하며 단태를 끌어들였다. 대수롭지 않은 몸짓으로 지팡이를 다시 비치 가디건 품 속에 갈무리했다. 용캐도 저 하늘하늘한 가디건에 공간이 있는가 싶다만, 마법사 사회에서 산 물품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될터였다.
"우리 할 일이 참 많아요, 그죠?"
민이 샐쭉 웃었다. 단태의 셔츠를 끌어당기는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민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제 입 가까이 댔다. "우선..." 습관적을 뜸을 들였다. 그 행동이 이목을 끈다는 사실을 민은 알까?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민의 눈은 여전히 날서있었고, 하고픈 말 역시 확실해보였다.
"여기 있는 크고 작은 조개 껍질로 제 모래성을 예쁘게 꾸며볼까요?"
그러나 꺼내온 말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어서, 방금 무거웠던 분위기가 꿈인양 위화감이 들었다. 민은 알찬 여름 휴가와 선배와의 깊은 대화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구경하던 학생들이 소리를 높여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긴장감이 넘치던 인터뷰 현장은 아비규환이 됐다. 사감 선생님을 불라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궁 학생의 의견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냐는 백궁 학생의 의견도 하나씩 모여 복잡하게 소음을 만들었다. 타니아도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높여 비명을 질렀다.
"예의치레를 너무 보이는 것이 아닌지. 혹 디터니 원액이 필요한가?"
유일하게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그와 당신은 여전하다. 그는 당신의 행동에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되레 디터니 원액을 언급하며 상처가 생겼으니 치료해야지. 같이 일상적인 어조로 묻는다. 그로 인해 생긴 상처임에도 퍽 너무한 사람이다. 혹은 참 강심장인 사람이다.
...아니면 이런 장면을 많이 봐서 익숙한 걸까? 폐쇄적인 언더테이커 가문의 사람이라 속을 쉽게 알 수 없으리라. 그는 당신의 원칙에 혀를 찬다. 비효율적인 원칙이지만 남의 가문을 모독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자네 마음대로 잇게. 슬 돌아갈 터인지라 마지막 하나 정도는 제대로 답해주도록 하지."
단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 미리 언질을 둔 그는 손을 모았다. 평상시 그가 자주 보이던, 무언가 들지도 않았으면서 드는 것 같은 제스처였다. 지금 이 아비규환인 상황을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판단하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단태는 자신의 포옹 시도가 후배에게 거절당할 것쯤은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태도또한 충분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뻔뻔하리만치 능청스러운 태도와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아이~ 자기야~" 하고 말하며 한번만~ 이라는 통하지 않을 말들을 늘어놓았다. 아니 늘어놓으려했다. 민에게서 흘러나오는 주문만 아니였더라면 말이다. 갑자기 지팡이를 꺼낸다 싶었는데 이러려고 그런건가.
어처구니 없을 행동이여서 단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백궁의 그 후배도 그렇고, 왜 다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들을 해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집요한 시선을 마주하는 선글라스에 가려진 주단태의 암적색 눈은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히죽- 하니 웃는다. "방음마법까지 쓰면서 나랑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달링?" 굳이 방음마법을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위험해보이지 않는 여자아이들 둘이 나누는 대화에 신경쓸 사람은 없을텐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겠지. 단태는 뻔뻔하게 대꾸하며 끌어당기는 손에 꽤나 순순히 끌려갔다. 침묵이 길었다. 방음마법이 걸렸기 때문에 그저 순수하게 단태는 민의 사소한 움직임이 부르는 작은 소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무섭게 보길래 무서운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조개껍질로 모래성을 같이 꾸미자는 말을 그렇게 비밀스럽게 할 필요는 없잖아. 자기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가벼운 말에 단태는 다시 헤죽- 웃어보이며 경박하고 가볍기 그지 없는 태도를 내보였다. 방금 보였던 민의 무거운 분위기가 위화감을 주는 것처럼, 단태또한 평소와 같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만들어진 모래성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단태는 조개껍질을 고르기 시작했다.
물론 진짜를 본 발렌타인은 그의 지팡이가 꽤 깊이 들어가 뼈 근처까지 닿은것을 봤겠지만, 그것은 오직 자신과 발렌타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천천히 발렌타인의 말에 잠시간 고민이라도 하듯 조용히 침묵을 지켰고,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으려 했다.
"그럼...." "부장이셨군요. 혹여나 했는데." "아, 뭐야, 케인이었냐?"
어느새 주궁 학생들 사이에서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온다. 그에게 부장이라고 하는걸로 봐서는 비공식 방송부의 부원일것이다. 케인이라 불리우는 붉은 머리카락의 스포츠 머리스타일의 사내가 조용히 그의 뒤에 시립하고, 이야기가 모두 끝난 듯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다. 예의 그 거짓없는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