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정말 기숙사 사감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건가? 아직 미래는 막연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주양의 표정은 제법 밝았다. 졸업 후의 모든 살벌한 계획이 끝을 맞이하고 난 다음. 가문 내 최고자의 자리마저도 모두 지루해졌다고 느꼈을 때 그 자리에 앉는다면 꽤 알찬 미래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꼬드긴다면, 그땐 망설임 없이 넘어가겠다고 생각했다. 뒤의 이야기를 듣고 잡시 주춤 하기는 했지만.
"목숨을 바치고.. 였군요. 그래서 지금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거고.. 으으, 그런 심오한 뜻이 있을줄은 몰랐는걸요."
이제야 미스테리가 풀렸다. 주양 자신의 단편적인 생각보다도 훨씬 깊이 있는 이유라면, 더는 겁먹지 않을 수 있다. 언제나 두려움은 미지의 무언가에서 다가오기 마련이었고, 이유가 밝혀진다면 더 이상 미지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당신이 내민 손 위에 살포시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나서야, 완전히 안도한 듯 미소지었다. 사람의 온기. 역시 자신이 아주 대강 예측한대로 살아있는 사람이 맞았다. 백호님이 리 사감님에게 더 가차없었던 이유는, 역시 따뜻하고 숨도 쉬는 무언가. 자신보다 작은 무언가라서, 고양이.. 아니. 호랑이 특유의 야생성이 나오는 걸까. 그렇게 상상하니 조금 소름이 돋으면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리시고도 멀쩡하신 이유 역시 납득이 되었다.
"으음~ 그치만. 사감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지금 사감님께서는 엄연히 살아 계시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너무 슬퍼하실 것도 없지 않을까 싶어요."
어울리지 않지만. 자신과 어울리는 진지함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주양의 표정에서는 장난기가 싹 가셔 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주양은 진심이었으니까. 자기 패밀리어를 걸고 하는 내기. 그 이상으로 짜릿한 것은 지금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것만으로 삶의 낙을 즐기며 스릴 넘치게 살고 있었지만.. 복수의 이유가 전부 저물어 버린다면. 더는 청을 거는것으론 만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보다도 더 큰 것은 역시 자신 패밀리어의 마음고생에 대한 보답을 해 주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청. 너도 그때 가서는, 평온하게 남은 생을 만끽해야지. 제법 순수한 미소가 주양의 입가에 머금어졌다.
".. 만약 그 부탁이 들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욕심이 많이 생기는걸요? 더는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답니다. 무지함에서 오는 게 두려움이고 무서움일 뿐이지. 알고 나면,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지금 이 상황은 전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숨을 가져간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도 알았다. 사감이라는 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큰 무언가를 바쳐야 하는 자리이며, 책임감 역시 필요할 것이다. 허나. 그 책임감과 바쳐야 할 것의 무게보다, 청을 거는 것 이상으로 짜릿할지도 모를 뭔가를 해내는 것은. 역시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 그것을 청룡에게 바친다는 것. 남에게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 상황이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설령 사감님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굴레를 똑같이 받는다는 한이 있어도. 다음 대 건은 제가 희망해봐도 될까요? 부족한 그릇이라면 언제든 거절하셔도 좋아요."
물론 당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숨을 바치지도. 그리고 같은 굴레를 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것 역시 좋았다. 오로지 그 상황을 즐기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게다가 지금 바로 닥쳐올 일이 아니라, 졸업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니. 지금이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모든게 다 끝난다면, 자신의 위에 누군가를 두고 모시는 일도 꽤 해봄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위이기만 하다면 삶의 재미와 질은 급격히 하락할테니. 가문을 뒤엎겠다는 삶의 절정 이후로 찾아올지도 모를 대단원 앞에서, 주양은 한 없이 진지했다.
"그래도 역시 사감님이 슬퍼하는 건 좀 많이 신경쓰일것 같은데. 만약 제가 다음 대 건으로 만족스러우시다면, 같이 부탁해보실래요?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의 제안이 조금 더 힘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신경쓰인다는 애매한 단어로 얼버무리고 주양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평소처럼 느긋느긋한 말투를 되찾았다. 역시 너무 오래 진지해져 있는 것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장담하듯 척하니 팔짱을 꼈으나 물론 진담은 아니다. 정말로 지원한다 해서 합격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질문을 너무 많이 했나 싶은 자각이 뒤늦게 들어서다. 처음에는 그저 무료한 시간 말상대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인데, 어느샌가 제 쪽에서 자연스럽게 질문공세를 하고 있는 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절세絕世하는 방식이 필연되어야 하나요?"
그렇지만 안 된다 한 적도 없으니 괜찮겠지. 약간쯤 눈치가 보이기 시작해 그의 태도가 조금 더 공손해졌다. 어깨 높이로 한쪽 손을 들며 질문한 것이다. "아, 그리고 그 예견한 정보를 저희한테 알려주는 게 금기인지도요." 추가 질문까지 넣는 모습이 꼭 지금이 수업 시간이라도 된 듯 바람직한 학생 태도의 전형이었다.
완벽한 불살,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가볍게 디딘 걸음 한 번으로도 수많은 목숨을 밟아죽이는 게 사람이다. 광의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만물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의 죽음을 취하고, 그 죽음 위에 섬으로써 자신을 존속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당장 그 역시도 살아가며 아주 많은 것을 죽여왔으며 앞으로도 그리 살 수밖에 없다.
"무엇이 우리를 노리고, 막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나쁜 일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최소 규모가 전쟁인데."
그리고 그가 문득 눈길을 바다로 돌린다. 그르렁거리는 무기의 음성이 울컥 쏟아지는 파도 소리와 닮은 것 같다는, 조금은 생뚱맞은 감상을 하며. 모래땅에 사그라드는 도성(濤聲)이 멀었다. '꺾여버리면' 이런 운치도 다시는 못 즐기게 될까 싶어 아쉽다. 그래서 귀를 열고, 지금의 기억을 머릿속에 새기고 형상화한다. ……아, 그런데 파도 칠 때 물거품이 어떻게 흩날렸더라. 기억하는 해변 여행은 손에 꼽는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았을 때, 지루해 말고 파도 치는 풍경을 좀 더 오래 담아둘 걸 그랬나. 공연히 과거의 자신도 원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