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늘 나름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머리는 적당히 틀어올려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앞머리도 적당히 눈가를 가려 자세히 본다면 그의 가려진 눈이 보일지도 몰랐다. 비숍소매의 흰 셔츠와 검은 슬랙스는 그가 후드 안에서도 언뜻 보였던 긴 다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구부정했던 허리를 쭉 펴니 제법 큰 키가 도드라졌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위태로웠던 가는 몸선이 옷으로 커버가 됐다. 그는 백정에게 '방에서 얌전히 먹으며 기다리고 있어주렴' 하고 부탁했다. 손에 Mars를 쥐어주는 모습은 호탕한 엉클 톰과 달리 제법 우아했다. 그마저도 겉치레의 예의에 가까웠다.
그가 나온 이유는 나름의 체력 증진을 위한 산책도 있겠지만, 마땅히 담배를 피울 장소도 없었고, 방안에서 피운다면 사감 선생님이나 교수님께 걸려 곤란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귀찮은 상황은 딱 질색이다. 적당히 숨을 곳을 찾아 그곳에서 피우는 것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해변 주변을 산책하던 도중, 땋은 물빛머리의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와 팔을 붙잡는다.
"타니아?" "도, 도, 도련님."
한갈래로 굵게 땋아내린 머리와 선물이라도 받았는지 귀 근처로 꽂은 노란 꽃. 참 예쁜 차림이거니 생각하던 그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많은 타니아는 눈물을 찔끔 보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타니아가 진심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날 붙잡고 눈물로 호소하려 드는게냐." "그, 그게, 미관상인 이유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점수 차감은 없어요?!" "그런 규정이 있을 것 같나?" "그,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차려입었길래 뭐든 포용하려 들던 타니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나 싶어 그는 학생들이 경탄과 공포에 찬 탄식을 뱉는 지점을 찾았다. 타니아는 이쪽이라며 그를 질질 끌고갔다.
"제발 너만 알았으면 얼마나 좋니." "그렇지만요.."
그는 리안을 보며 미지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지금껏 공포라고 해도 어릴적의 공포 말고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리안을 보고 완벽하게 부서졌다. 그는 조용히,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안을 구경하던 한 학생이 그를 발견하고 "현궁의 사신이다!" 라는 말과 함께 길이 트이고 시선이 몰리기 전까지는. 그가 입모양으로 작게 욕을 뱉었다. Bloody.
"사감님이 기쁘시다니 저도 나름 뿌듯하네요~ 어머나. 확실히 판이 엄청나게 커질 것 같은데요? 저도.. 청을 거는 것 만으로는, 모자랄 만큼 말이예요."
당연하게도, 주양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렇기에 언제 당신이 사감 자리를 걸고 내기를 걸지 몰라 청 이후로 내기에 걸어볼만한 것을 떠올려내며, 다른 한 켠으로는 자신이 청궁 사감이 되었을때의 모습도 떠올려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꽤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속으로 자화자찬을 연거푸 해댔다.
이어, 조금은 부끄러웠는지 주양은 다시 시선을 슥 옆으로 돌리면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의 뜻을 이해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역시 같은 겜블러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것일까. 결국에는 주양 역시 인외가 아니었으니, 남들이 아예 이해하지 못할 비유는 없는 것일까. 이래저래 낯설면서도 신기한 기분이었다.한 차례 적응되지 않는 기분에 대한 쑥스러움을 느끼고서야 주양은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자각했다. '아. 내가 뺏길 수 없는 내깃돈이라고 강조해서 말했지.' 하고. 어쩐지 청의 반힝이 생각보단 약하다 싶었다.
"어라. 이, 이런 의도로 한 질문은 아니라는 거. 아시죠..?"
항상 밝은 표정이었던 당신이 보기 드물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대화 자체의 분위기도, 꽤 엄숙하게 가라앉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 기분을 느끼며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침착하게 복식 호흡부터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건가.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건 더더욱 이상하다. 어쩌지. 이럴 땐 어떻게 다시 웃게 만들어드려야 하지. 청에게 나좀 도와달라는 구원의 눈빛을 쏘아 보냈으나 청은 시크하게 그 눈빛을 외면했다.
"... 그쵸. 용은 더 늘리기에는 부담스러우실 거고.. 불사조는 오히려 곤 사감님이랑 어울릴거고. 근데 곤 사감님도 같은 이유로 벅차.. 실지도 모르겠네요. 음. 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군요."
곤 사감님의 경우에는 과연 진짜 벅차하실지 의문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당신을 포함한 사감님들이 패밀리어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생각보다 훨씬 심오한 것이었다. 끝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 부분이라면 역시 어떤 수명이 긴 동물을 키워도 당신이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법사의 수명은 긴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이유라면 수명이 긴 동물이라는 부분을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의문을 가진 채. 주양은 다시 킥킥거리며 웃었다.
"어머나~ 아무리 내기를 한 번 했다고 해도. 저는 꽃다운 숙녀라서 갑자기 그러심 좀 부끄러워요~ 찡긋!"
.. 더럽게 안 어울리는 연기에다가 찡긋 하며 굳이 입으로 그 소리를 표현하며 한쪽 눈을 찡긋이는 것을 보다 못한 청이 헛구역질을 했다. 내가 청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시키는 대로 귀를 가까이 가져다댄 주양의 표정은 곧 서서히 얼어붙었다. 아무리 가까이 가져가도. 필히 들려야만 하는 소리가.
".. ㅅ.. 사감님. 이것도 장난.. 이죠..? 헛걸 보고 들은 건 새벽에 저택에서 있었던 일 정도면 충분한데.."
저도 모르게 비밀로 해 두려던 이야기가 새어나왔으나,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아무리 그래도 심장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는 장난이 있을 리 없지 않겠는가. 자신은 아직 그 저택에서 헤매고 있는 건가. 너무 놀라 심정지가 온 나머지 골든타임인가 뭔가 하는 걸 놓치고, 자신마저도 이 저택의 망령이 된 건가. 사감이 되는 비밀. 그렇다면 분명 다른 사감님들도. 이건 역시, 귀신? 아니. 그렇지만 모든 유령은 주궁을 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곤 사감님은 뭐란 말인가.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 어... 쉽게 추측을 못 하겠는걸요. 그. 그래도 사감님들은 살아 계시는 거.. 잖아요? 유령이나.. 맞다. 인형 같은게 아니라. 사람으로써 말이예요. 으..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나..."
그 어느 쪽도 쉽사리 추측할 수 없었다. 예상 외의 사감이 되는 비밀에 방금 전 청궁 사감이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마음에 들어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졌다. 리 사감님을 본다면, 분명 유령이나 인형은 아니다. 피도 흘리고. 상처도 입고..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그러니까 주단태는 평소와 같았다. 펠리체에게 붙잡혀서 빠질 때 자연스럽게 내뱉었던 욕설이나 물에 빠진 이후 바로 고개를 내밀고 던졌던 구수한 방언은 착각이라는 듯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펠리체의 잘못인가한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단태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서 털어냈다.
죽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펠리체의 말에 머리의 물기를 좌우로 흔들어서 털어버리던 단태가 어련할까 하는 표정으로 펠리체를 바라봤다. 결론만 보자면 위험한 지대는 아닌게 맞았다. 무지하게 깊기는 했지만. 죽으려고 하는 행동이 아닌 것도 맞았다. 무지막지하게 깊기는 했지만.
"다음에는 나처럼 따라온 사람에게는 앞뒤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안그러면 내가 자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단히 오해를 할테니까 말이야."
기왕 동행하는 사람이 자기처럼 스릴과 물놀이를 같이 즐길 줄 아는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고. 단태는 꽤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고는 이어지는 펠리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파랗게 변화한 건 아니여서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곧 파랗게 질려버릴 수도 있다. 이놈의 체질은 단한번도 도움이 안된다. "아직까지는 괜찮지만 말이야." 지팡이를 다시 집어넣으면서 단태는 모래사장으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펠리체처럼 자연스럽고 느긋한 헤엄과 비교될 만큼 볼품없는 헤엄으로 움직였다고 해야 옳았다.
"자기야 친해지려면 헤엄을 잘 쳐야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니 좋은 징조라고 볼 수 있겠네."
렝주랑 첼주 안녕! 아이고.. 역시 더위가 문제라니까 문제. 힘냈으면 좋겠구.. (토닥토닥)
383Riahn- Valentine, face the cosmic horror
(dzGB4FtZN2)
2021-07-02 (불탄다..!) 21:16:34
뒤쪽에 고고고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기세를 보며 다들 움찔 거린다. 자신의 패션 센스(?)가 매우 뛰어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가판대로 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받아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하지만 그걸 정면으로 마주했던 아이스크림 점원은 공포를 제대로 직면한 것인지 잠시간 어안이 벙벙해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질뿐이었다. 주변에서 뭐라 그러건 말건 자신이 잘 어울린다 생각하면 문제가 없다 생각한 것인지 그는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물론 그 걸음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디 사는 기어나오는 혼돈마냥 무서운 걸음이라는게 문제였지만.
-"현궁의 사신이다!" "!"
그 말에 그가 홱 고개를 돌린다. 그러한 그의 두눈에 비친것은 선남선녀 한쌍, 조금은 피폐해보이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런 극독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마성의 아름다운 남자와 부드럽고 현숙한 이미지의 여인을 바라보며 그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말그대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 누가, 특히 방송인의 피가 흐르는 그가, 저러한 특종을 놓친단 말인가. 그 순간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코스믹 호러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이는 언제나 통제를 받으며 살아오는 평범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지금의 리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수 있으며, 이 상황에 빠진 사람은 쉽게 판단력이 흐트러지고 포기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고 한다. 지금의 발렌타인이 겪는 현실이 지금 그러하리라. 그리고 그 순간 그 호러의 결정체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뭣쫌 여쭙께요!! 멋진 선남 선녀분!!"
타겟이 정해지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저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변명이나 자질구레한 설명 따위를 하지 않는 건 역시 그녀가 너무도 당당하고 당당해서라 말할 수 있겠다. 원래 그런 걸 잘 안 하는 성격인 것도 한몫했겠지만. 고개를 저어 물을 터는 단태를 보며 금안이 깜빡깜빡, 소리없이 여닫힌다. 아무렇지 않은 시선으로 단태의 시선을 받아내는 모습이 굉장히 뻔뻔한 고양이 같기도 하다. 사고 잔뜩 치고 뻔뻔한 고양이.
"다음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상황이 와도 선배한테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할 거에요."
그 뻔뻔한 태도를 이어갈 것인지 대답의 내용이 참, 기가 막히기 충분하다. 저 정도면 반성이 없는게 아니라 그냥 심성이 나쁘다고 해도 될 정도다. 단태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걸요. 헤엄 못 친다고 물놀이 못 하는 것도 아니고."
평정을 가장한 듯한 단태의 말에 대답하면서 그녀는 헤엄을 계속했다. 그녀의 태도나 대답이 어찌되었건 지금은 나가는게 우선이었다. 힐끔 돌아보았을 때 단태가 오고 있는게 보이긴 했지만 어쩐지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춥다고 하더니 그새 몸이 굳은 걸까. 그녀는 느릿하던 헤엄을 멈추고 단태와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바로 옆에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등을 보이며 말한다.
"업히세요. 선배. 그게 훨씬 빨리 나갈 수 있을거에요."
업히래도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등에 얹히라는 거였지만. 이거나 그거나 비슷하니까. 속도를 맞춰주느니 이게 나을거 같아서 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주변에 사람도 없어 누가 볼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는 이미 여러번 설명하였듯 남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공은 공, 사는 사를 확실히 구분지었다. 그중 후자인 사적인 일을 만드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데다, 그마저도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재미없는 그가 이런 사적인 일에 나타난 것은 드문 일이었고, 학생들은 이 상황을 놓칠 수 없는 기회라 생각했다. 한 청궁 학생의 목소리를 이후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끝내 당신이 있었다.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에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오픈숄더형 옷을 입고있던 타니아의 드러난 어깨가 아니라, 옷자락이 있는 팔을 손으로 감싸며 곁으로 끌어당겼다.
"도망쳐야겠지?" "어..네?"
리안 다이사쿠 에스카마리. 모를 리가 있나? 그가 잠들만 하면 MC 대작이라며 동화 옥음을 진행하면서, 입학식에서 그렇게 큰 무대를 벌였는데. 그 사실만 알면 좋겠지만 그는 당신의 눈빛에서 아주 익숙한 모습을 떠올렸다. 바로 그의 패밀리어, 달링이었다. 그가 장난을 친답시고 이리저리 콕콕 찌르면 머리를 뱅뱅 돌리며 아악 소리를 지르곤 하는데, 그때 보이는 조류 특유의 광기로 가득 찬 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 발렌타인의 입장에서도, 조류 집사의 입장에서도 당신은 미지와 공포 그 자체였다.
"어. 와." "거절하겠네."
그는 타니아의 손을 잡는다. 조용히 두어걸음 뒷걸음질을 치다, 그대로 달리려 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타니아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기 전까지는. 그는 타니아를 내려다봤고, 타니아는 매력적인 녹색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타니아?" "도련님은 지금도 몸이 안 좋으신데 달리시기까지 하면 숨이 차서 주저 앉고, 쌕쌕거리고 그러시잖아요."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는겐가?" "저는 그 꼴은 못봐요! 이 뜨거운 모래 위로 쓰러지면 도련님께서는 당연히 처연한 분위기를 가지겠지만!! 얼굴과 붉어지셔서 입안도 촉촉해지겠지만!! 그 모습과 다크서클이 함께 어우러져서 가히 장관이겠지만!!!!!! 저는!! 절대!!! 남에게 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어요!!! 왜냐면 그건, 그건...! 저만 보고 싶다고요!!" "타니아? 타니"
아? 그는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타니아가 그를 번쩍 안아든 것이다. 그의 두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안긴다는 것은 가정할 일이 없었고, 공주님 안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화창한 날, 아름다운 해변이 드리운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