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게서 무슨 얼굴을 볼지는 스스로 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펠리체의 말에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던 주단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걸려있는 히죽- 하는 능청스럽고 뻔뻔스러운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샐쭉 가늘어진 눈매는 웃음기 하나 없이 암암리에 짙게 가라앉았다. 가려져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겠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단태는 대답없이 그저 능글맞게 웃으면서 풀을 꺽어서 길을 만들 뿐이었다.
원래 목적이 그것이였다는 것처럼. 자기가 자기 입으로 운명의 얼굴이 어쩌고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 고집스러운 아집과 같은 신념에 의문을 품었을테지. 풀을 제치고 보여지는 것은 사람의 발길이 닿은 숲길이었다. 그러니까 아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험심이 충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한 곳?"
자기라던가, 달링이라던가. 낯간지러운 호칭이 잘려나간 채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음이 단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디핀도 마법을 능하게 사용하는 걸 보니 길을 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해왔다는 걸까. 그 백호 기숙사에 있다가 퇴학당한 타 기숙사의 선배-이름이 버니라고 했던가?-를 상대할 때는 마법보다는 몸 쓰는 게 더 익숙해보였는데. 흙길을 밟는 소리만 들려왔다. 딱 두사람 분의 발소리다. 단태는 입을 다물고 걷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펠리체에게 부딪힐 뻔한 몸을 겨우 멈춰세울 수 있었다. "다 왔다고? 자기야. 내 눈 앞에 절벽 밖에 없는데?" 해변에서 보던 것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보이는 바다가 절벽 아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풍경에 단태는 이 후배가 뭘 하려고 하는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고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단어를 겨우 뱉지 않을 수 있었다. 미쳤나봐.
"자기야, 달링. 혹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편이야? 아니면 약간 겁이라는 게 일반 사람들보다 높게 잡혀 있는 편일까? - 내가 태클을 걸 생각은 없는데.."
여기서 다이빙을 했다가 잘못 떨어지면 큰일날 것 같은데. 터무니없는 펠리체의 말에, 단태는 선글라스를 벗은 탓에 꽤나 당혹스러움이 담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길을 도로 내려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다이빙 준비를 하는 펠리체를 한번, 바다를 한번 번갈아가며 보다가 절벽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바다 가고 싶어.....더워 죽어.....o<-< 아니면 현궁....((녹아버린 땃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고 만 그였다. 실례인줄은 알고 있지만 이걸 뱉어내지 않으면 그대로 얼굴이 우스운 꼴이 될테고, 그러면 상대의 민망함을 한층 부각 시킬뿐, 그럼 양쪽에 안좋은 상황이니 그럴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나쁜 놈이 되는 것이 최고다, 라고 이해한 그가 끅끅대며 입을 열었다.
"저희 에스카마리 가문의 절대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모두 니들 마음대로 해라, 대신 책임은 니가 져라.'"
냉막한 그녀의 얼굴에도 그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뭐랄까, 냉막한 얼굴 보다는 상대방의 표정을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잠시간 냉전을 치루는 그녀의 모습에 무표정한 모습에 그는 천천히 온기를 품는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 살짝 검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양분하는, 소위 말하는 쉬잇 제스쳐였지만 그거랑은 다르게 아예 입술에서 뗀 무언가를 강조하는 듯한 자세였다.
"괜찮은 농담이네요, 기억해뒀다가 방송에 써먹을께요."
역시 이곳에 잘 왔다고 생각이 든다. 이곳의 모든 이들은 개성이 넘친다, 음울하다고 생각되는 이들도 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부 자신만의 생동감이었다. 자신은 그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것을 구경하고 그것을 소개하며 그것을 나누고, 때로는 다투며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때로는 비틀린 길을 걸어가는 이들도 있겠지만, 좋았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아무래도 저희 부모님 이야기 들으면 식겁하시겠네요. 결혼식도 안하고 같이 잔 첫날밤에 저희 형을 회임했다고 들었는데요."
어머니쪽이 행동에 옮겼다는 말까지 하면 아예 까무라치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그는 조용히 그녀의 반응을 보았다. 그녀와 자신은 거의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보수적인 집안과 실용주의파 집안, 물과 기름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오히려 물과 기름이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는 그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보고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네, 아마도 좋은 일이 벌어지겠죠?"
기다리겠습니다아, 라고 장난치기라도 하듯이 입을 여는 그였다. 아마 이게 그의 본모습이 아닐까?
((잡담을 올려다보던 땃쥐는 밍주의 금손력과 더위 콤보에 그만 쓰러져버렸다)) 엄청..엄청나다. 우리 어장에 금손이 가득해. 굉장해.....8ㅁ8 다들 맛저하고 집인 참치들은 시원하게 있구 퇴근하는 참치들도 귀가 조심히하자:D 오늘 날씨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야.... 이 땃쥐는 아직 현생 중이다보니 모두의 안전 귀가를 기원할게.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바깥 경치를 구경했다. 그 어느때와 다름없이 태양은 한없이 타오르고 있었으나 불아오는 바닷 바람은 제아무리 여름의 더위라도 살살 녹혀주는 기분이다. 적당한 날씨. 적당한 온도.그리고 이 정도 높이의 창틀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저 멀리를 내다보는 것은 꽤 짜릿한 기분이었다. 밤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언가를 보는 것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중심을 못 잡고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이런 자극적이고 아찔한 감정만을 찾아 다니며, 내기에 목을 매게 된 것이. 분명 처음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내기라는 건 익숙하지도 않았으며 자극적인 상황은 가능하면 피하려 했다. 적어도 그 날의 전까지는 그랬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그러나 언제까지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서 사골마냥 우려먹어질 그 일을 떠올리며 주양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 짧은 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맞아. 그땐 그랬었지."
허나 오늘은. 조금 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볼까. 같은 걸 계속 회상한다고 한들, 감정 기복이 클 리가 없다. 인간답지 못한 모습이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머릿 속에서 책이 펼쳐지듯, 그때의 기억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펼쳐진다. 그 누구보다 순진하며 무해했던 사촌동생.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훨씬 평범한 사람이었던 자신. 외동이었던 자신은 늘 친동생이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으며, 간혹 철없이 동생이 한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투정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보다 한두살정도 어렸던 사촌동생을 절대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그 아이의 보호자인 양 누구보다 더 아끼며 잘 챙겨주고 그런 만큼 그 아이 역시도 주양을 잘 따랐다. 서로 그렇게 투덕거리는 일 없이 마냥 화목하게만 지냈다.
탄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검고 붉게 물들어버린 다음 장이 펼쳐진다. 아직도 그 아이의 눈빛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여리고 작은 민들레를 시들게 만든 것은 그 어떤 용서받지 못할 저주도, 그 어떤 무기도 아니었다. 단 네 마디의 마법 영창. 레라시오. 타오르는 불꽃. 지옥같은 열기 앞에서 그리도 무참하게 꽃봉오리를 미처 개화시키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말았던 것이다. 시들어버리는 것은 자신이어야만 했는데. 어째서. 그런 무자비한 짓을 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는 직계 측의 사람이 시선에 들어왔다. 방계니까. 그래서 죽였다. 그것이 대답일 뿐이었다. 같은 가문원끼리의 전쟁이라는 것은, 어른들이 마냥 입으로만 떠들어댔던 마법사 전쟁의 상황보다도 훨씬 참혹한 현실으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서로 잠시 평화롭게 지내자는 약속을 한 뒤에도. 모든 게 하나하나 전부 아니꼬울 뿐이었다. 더는 삶을 이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이 무의미한 삶을 나아갈 바에야. 차라리.
다시. 페이지가 한참 뒤로 넘어가다 멈춘다. 멀쩡한 듯 하지만, 군데군데 검은 재가 흉물스럽게 자취를 남긴 그 장. 그렇게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이 아이가 자신의 곁으로 와 주었다. 청. 앙증맞은 주황 부리와 어린 티를 벗어내지 못한 뽀송한 깃털이 매력적이었던 귀여운 아이. 직계는 그저 조금만 더 지나면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방관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걱정된 삼촌이 늦게나마 주양에게 건내었던 새로운 동생이었다. 그 존재 앞에서. 주양은 마냥 웃었다.
'.. 청. 청이구나. 네가..'
'내 다른 동생..'
기쁘지 않다. 더는 그 무엇도 자신의 기분을 풀수 없다. 조금이나마 더 어렸다면 그저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이미 철은 너무나도 빨리 들어버렸으며, 세상에 대한 마음의 문은 굳게 걸어잠가져 있었다. 입에 발린 이야기는 그저 역겨울 뿐이었으며 이 애 대신 진짜 내 동생을 살려내라고 악을 지르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한다고 한들, 과연 시들었던 민들레가 다시 피어날까. 뿌리조차 뽑혀나간 자리엔 그 무엇도 남지 않았을텐데.
그렇기에 울지 않았다.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주양은 청을 안고 웃었다. 어긋난 미소. 그러나 그 어느때보다 환한 미소. 동생이 돌아올 수 없다면. 그렇다면 네가 내 동생이 되어 영원토록 내 곁에 남아주지 않으련. 소중한 존재가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평범함을 벗어나 살아있어야만 하는 무언가를 느꼈으니. 내 위험한 여정에 함께하며, 언제든지 내던져지지 않으련. 내게 내가 살아있어야만 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 멈춰서는 안될 감정 기복을 가져다주며 평생을 그렇게. 그렇다면 나 역시, 네게 모든 것을 쏟아줄테니. 내가 언젠가. 그 놈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되갚아줄 때까지. 너와 나의 생이 허락하는 끝까지. 우린 서로를 이해하고 갈망하며 지내게 될 거라고. 한 없이 속삭이며, 주양은 웃었다.
책의 마지막 장이 맥 없이 덮어지며 한없이 길어지기만 했던 생각의 막을 내리고 주양은 눈을 떴다.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신 나머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이마 위에 대고 그늘을 만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 저 아이는 한결같구나. 체급조차 신경쓰지 않고 갈매기들과 싸움을 붙으며 꽤 멋지게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머글들은 이럴때 야광봉이라는 걸 흔들던데. 지금만큼은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청, 이겨라 이겨~ 너가 이긴다는 데 너를 걸테니까! 지면 큰일난다~?"
닿지 않을 목소리. 하지만 어떻게든 닿을 목소리.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유지하며, 대상 없는 내기에 청을 걸어 뭔가 미묘하면서도 충분히 즐길만할 스릴을 느낄 뿐이었다. 주양의 시선이 갈매기와 싸움이 붙은 청을 벗어나 슬쩍. 허공을 향했다.
지금쯤이면 너는. 그 곳에서라도 찬란하게 피어나 너의 한을 달래고 있겠지. 그러니. 이젠 그저 내가 행할 모습만을 지켜봐주길. 모든 건 너의 복수만을 위해 진행되며, 나는 복수가 끝났다고 나아갈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맬 멍청이가 되지 않을테니. 지금의 날 보면서, 부디 만족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