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의 휴양은 제법 즐거웠다. 학생들의 불안을 너무 단순한 수로 달래려 하는 게 아닌지, 몇 번이고 뚫려버린 보안체계에 대해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불신이라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근 몇 주간 반복되었던 사고에 대한 학교의 수습 방식에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이곳이 좋은 휴양지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못마땅한 기분과는 별개로 학기중에 주어진 좋은 경험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낮동안 썩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는……. 지금, 숙소에 돌아가지 못하고 해변에 묶여 있었다.
곁에 라쉬는 없었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하면― 밤 시간대엔 입수를 하지 못하니 실내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라쉬가 온종일 모래밭에서 굴러 인절미 떡뭉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몸 씻고 모래를 털자고 하니 죽어도 싫다며 그를 두고 휑하니 도망가버린 게 지금 상황이었다. "야, 네가 튀면 어떡해!"라고 외쳐보아도 쏜살같이 달아난 개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별 수 없이 제자리 붙박인 채 라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쁜 개야. 며칠동안 간식 삭감이다. 모래밭에 펼쳐진 빈 의자에 앉아 꿍얼거리는 덩치는 제법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백호님께 피냐타(야매)를 선물해준지 얼마라고 리 교감님은 다시 죽상을 하며 교내를 돌아다니셨다. 잠깐, 피가나는 건 기분탓인가? 이쯤되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민은 직감적으로 그 피냐타가 한시간도 버티지 못한 채로 터져나갔음을 깨달았다.
오래 버틸만한게 필요했다. 오래 버틸만한... 오래 버틸만한.... 민은 그 고민을 하느라 주말 하루를 침대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정한다, 그냥 벗어나기 싫어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민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민하는 시간의 반은 낮잠이었고 또 반은 구름처럼 흘러가는 무의식이었지만 아무튼 주체가 고민이라 지칭하면 고민이다.
"그러고보니..."
개 한 마리를 패밀리어로 둔 친구가 샀던 장난감이 떠올랐다. 공모양처럼 생겨서 이리저리 굴려야 안에 들어있는 간식이 겨우 한 조각 나오는 장치였다. 그거라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민이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책상에 자리 잡고 한참을 낑낑거려 만든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았다.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신경쓰는 일에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호님이 물건의 의도를 거스르고 반 찢어 놓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겠지만 민은 백호님이 그렇게 무자비한 사람이 아닐 거라 믿었다. 적어도 그렇게 바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에게 고통을 주는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고쳐지지 않았고,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아마도 꽤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토록…? 사감들의 기묘한 특성에 관해선 자세하게 아는 바 없으니 추론할 수는 없었다. 그저 리가 조금이나마 덜 물어뜯기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난번에는 장난감(그것을 장난감이라 부를 있다면 말이다.)을 전달해드렸으니 이번에는 다른 것을 준비해야겠다. 좋은 게 뭐가 있을까, 이번에도 쉽게 답을 얻지 못해 고양이를 키우는 아는 학생에게 물어 힌트를 얻었다. 분명 전에도 백호를 고양이 취급 하지 말자 생각했을 텐데…….
학생은 좋은 집사이자 애묘인이었다. 가끔은 자기 고양이를 위해 고양이용 간식을 수제로 만든다고 했다. 진성 애묘인은 과연 고양이에 대한 사랑마저 남달랐다. 고양잇과 동물이라면 전부 고양이, 고양잇과 신수도 즉 고양이…라 하던데, 기적의 논리였지만 그는 어느새 그 주장에 설복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신 차렸을 때에는 함께 뚝딱뚝딱 리를 살리기 위한 풀코스 간식세트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함께라고 해도 그는 대부분 재료 공수와 보조 정도만 한 게 다였지만. 아무튼 어떻게 도움을 얻게 된 그는 무사히 그것을 리에게 전달했다. 애묘인 학생은 그저 엄지를 척하고 올리며 '고양이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내 지분이랑 감사는 됐다'라고 하더라. 그는 조금 그 학생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자라나는 10대 청소년에게 전자기기를 뺏는 건 사탄도 안 할 짓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사탄을 실직의 길로 내몰았다. 서리는 편지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문명의 이기를 박탈 당한 사람에게 넷*릭스 신작 리뷰를 보내지요. 자필도 아니고 타이핑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괘씸함이 두 배 커졌다. 장난해? 예의 안 지켜? 내가 기숙사로 타자기 택배 시키는 꼴을 봐야겠니?
실의에 빠져있던 서리를 일으킨 건 웬 이상한 생물체 하나가 현궁 근처에서 날뛴다는 소식이다. 서리는 소식을 전해준 친구를 빤히 바라보다가 박수를 쳤다. 어그로 5년이면 맨날 당하기만 하던 애도 무언가 시도를 해보는구나 언니는 정말 뿌듯하다, 뭐 그런 심경을 담은 박수였다. 서리는 진심으로 친 박수였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는 받아들이지 않고 짜증을 냈다. 아 왜 저래 진짜. 아니이 나는 그냥 뿌듯해서 그렇지.
"진짜라니까?" "그래?"
되묻는 얼굴이 어쩐지 불길하다…….
"어." "그럼 그거 구경하고 올테니까 잘 놀고 있엉."
그리고 십 분 뒤.
"이게 진짜네."
서리는 친구의 말이 개구라가 아님을 몸소 확인하고 만다.
사실은 사실인데 이거를 뭐… 어떻게 해. 공격해? 동물학대 아닌가 이거? 서리는 사람에게는 조금 매정할지 몰라도 동물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한 21세기 소시민이었다. 그 동물의 범주가 남들보다 큰 게 특징이라면 특징인. 지팡이를 까딱이며 고민하던 서리가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게 동물은 아니지?
해변가에 온 두번째 날이자 새로운 멤버가 온 첫날이었다. 최소한의 휴식은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험하게 굴려먹는 몰골을 보아하니 오늘도 쉬기는 글러먹었다 생각하면서 입이 댓발로 튀어나온 루인,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송 첫날이라 그런가 아현의 표정은 밝기 그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1년전 자기들을 보는 것인지 그들의 표정이 아련해지는건 덤이었다.
"우리도 저랬었지." "파릇파릇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니들 나이 나보다 덜 먹었잖냐. 여기서 내가 제일 연장자야, 이놈들아." "나이 많이 쳐먹었다고 부럽수다." "왜 떡국 먹은 횟수로다가 서열 정하는 시대가 언젠데....." "..... 아현아." "네, 부장님." "네가 우리 부의 미래다."
아현을 붙잡고 청승을 떠는 자신들의 부장을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라보는 3명, 그리고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적응이 되지 않는지 아현은 눈을 끔뻑이기만 한다. 그들이 그렇게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며 오크통에서 술 비스끄무리한 맥콜을 퍼마시며 꼬치구이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아~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송, 동화 옥음의 MC대작입니다! 벌써 일주일의 절반이 날아갔네요, 해변가의 일정은 잘 즐기고 계신가요?"
조금은 여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천천히 바닷바람을 타고 흘러간다.
"어제는 저희도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방송을 못한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이번 돌아오는 4일부터 7일 새벽! 저희가 가벼운 라이브 콘서트를 하루에 5분 정도 준비할 예정입니다! 혹시 즐기고자 하시는 분들은 해변으로 한번 나와주세요!!" "?!" "라이브요?! 부장님!? 저희 금시초문인데요?!" "아니 알고는 있지만 그거 문화제때 아니었어요?!"
동화옥음 지방방송이 사방으로 항의를 터트리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직 아현만이 어떻게 해야할지 어버버 거리고 있을뿐이었고 리안은 그들의 표정을 보며 즐김 반, 진지함 반으로 방송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간 저희가 좀 활기차게 논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편안한 노래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로 바닷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돌이킬수는 없다는 것일까, 루인과 케인이 동시에 지팡이를 들어올리자 파도소리와 함께 바닷내음이 가득한 소리가 천천히 울려퍼지고, 그가 천천히 눈을 감고 목을 가다듬는다. 반주는 필요 없었다. 오직 이 자연스러운 소리가 가장 훌륭한 반주였으니까. 그와 동시에 지친 뱃사공의 노랫소리가 천천히 하늘 높이 울려퍼진다.
"An old man by a seashore At the end of day(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자락 해변가의 노인) Gazes the horizon With seawinds in his face(바닷바람에 얼굴을 맞으며) Tempest-tossed island Seasons all the same(폭풍에 시달린 섬, 계절은 항상 같고.) Anchorage unpainted And a ship without a name(칠 벗겨진 정박지의 이름 없는 배 한척....)"
바다의 청량한 싱그러움보다는 조금은 오래되고 노쇠한 뱃사람의 심정을 노래하듯 그의 느긋하고도 지친듯한 목소리하 하늘 너머로 퍼져나간다.
"Sea without a shore for the banished one unheard(해변도 없는 바다, 들어본 적 없는 추방된 사람) He lightens the beacon, light at the end of world(그가 등대를 키니 세상의 끝을 비추네) Showing the way lighting hope in their hearts(마음 속에 있는 희망의 길에 빛을 내리고) The ones on their travels homeward from afar.(기나긴 여정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네)"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적막한 공기가 쓸쓸한 분위기와 함께 모닥불의 온기를 강조시키는 것일까, 아까의 불평은 온데간데 없이 그들은 리안의 노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clr black gray>"This is for long-forgotten Light at the end of the world(오랫동안 잊혀졌던 빛은 세상의 끝을 비추고) Horizon crying, The tears he left behind long ago(수평선은 울고, 그 눈물은 과거로 남겨두었네).....
어느순간이었다. 그 노래를 알고 있는듯 아현의 목소리가 상큼하고도 부드러운 화음을 넣기 시작했다. 마치 전설상의 세이렌과 뱃사공이 화음을 엮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The albatross is flying, Making him daydream(알바트로스는 백일몽을 꿈꾸며 날고 있네) The time before he became One of the world`s unseen(영계의 세계에 들어가기 직전,) Princess in the tower, Children in the fields.(성탑에 사는 공주 들판의 어린이들....)"
해변을 타고 노래가 넘실거린다. 그들은 서로 진지한 방송태도는 가져다 버린듯 꼬치구이와 맥콜을 마시며 건배를 하고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마치 세상의 끝을 본 여행자들의 말로와도 같은,느낌이었다.
"Life gave him it all An island of the universe.(그들에게 모든 생명을 주신 이 우주의 섬이여.) Now his love`s a memory, a ghost in the fog(지금, 그의 사랑스럽던 기억들은, 안갯속 유령같으니) He sets the sails one last time, Saying farewell to the world(그는 마지막으로 돛을 내려 놓으면서 세상과의 이별을 고하네) Anchor to the water Seabed far below(닻이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 앉고) Grass still in his feet And a smile beneath his brow.(푸른 목초지가 아직 그의 눈 아래 보이고 그의 미소는 눈썹 밑에 가라앉으니....)"
조금은 지친 듯한 그들의 목소리엔 일견의 편안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일을 마친 자들의 화음이었다. 마치 귀신들 마저도 안식을 찾을, 그런 편안한 목소리였다.
"This is for long-forgotten Light at the end of the world(오랫동안 잊혀졌던 빛은 세상의 끝을 비추고) Horizon crying, The tears he left behind long ago(수평선은 울고, 그 눈물은 과거로 남겨두었네)"
과거로 잊혀져간 그들의 목소리가,
"So long ago(아주 오래전에 ...)"
바닷바람과 두 사람의 목소리에 흘러 넘친다.
"So long ago(아주 오래전에...)"
마지막을 장식하기라도 하듯 두사람의 목소리가 하늘높이 울려퍼진다. 자장가이자 진혼가였고, 지친 뱃사공의 노래이자 안식을 위한 세이렌의 노래였다.
"This is for long-forgotten Light at the end of the world(오랫동안 잊혀졌던 빛은 세상의 끝을 비추고) Horizon crying, The tears he left behind long ago(수평선은 울고, 그 눈물은 과거로 남겨두었네)"
그렇게 아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아현의 화음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리안은 가볍게 아현의 어깨를 두드려줌으로서 최고였다고 속삭여준뒤 밝은 목소리로 엔딩 멘트를 치기 시작했다.
"저와 함께 훌륭한 화음을 넣어준, MC 천양에게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하루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며 저희는 인사드립니다!! 그럼 대바이!!""
그렇게 방송이 끝나고 그는 천천히 모닥불에 불을 넣으면서 꼬치구이를 하나 입에 물었다. 사뭇 진지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다들 긴장하며 그의 입을 주목했다.
게는 여전히 죽지 않았고 서리는 먼지를 잔뜩 먹었다. 지친 얼굴로 서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으, 이게 뭐야. 재미도 없고. 나만 힘들고. 학원에 사람은 많고 서리가 꼭 저 꽃게를 잡아야 하는 건 아니다. 정 안되면 교수님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뭐. 순식간에 포기한 서리는 지팡이를 후드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냥 아무나 데려와서 걔나 좀 놀려먹을 걸 그랬어. 산발이 된 머리를 결국 정돈하지 못한 서리가 투덜거리며 기숙사로 돌아간다. 선빵은 아무래도 내 적성이 아닌 거 같아. 특정 인물들이 들으면 반박을 할 소리도 뻔뻔하게 덧붙이면서.
"오호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시던가. 아마 이 언니가 저 너머로 도망치면 우리 꼬맹이는 들어올 엄두도 못 낼걸~?"
킥킥 웃으며 아까 도망쳐온 어둠 저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허나 다시 저기로 도망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차라리 치고박고 싸우면 몰라도 뺄 사람은 아니니까. 그 이전에 아까 그 그림과 다시 눈을 마주치게 된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어떻게 될 지 몰랐다. 담력훈련을 괜히 하자고 했나 싶었으나, 여기까지 왔는데 애매하게 빼는 건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주양의 자존심이 용납을 못 했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높으면 안 된다.
손을 얌전히 당신의 가슴께에 올려놓으며 주양은 반대편 복도를 바라보았다.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교감 선생님, 만약 이 사실을 알면 저 학생들은 대체 내 저택에서 뭐 하는건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분명 그림은 잘못 본 것일 가능성이 크다. 두려움은 때론 헛것도 가리지 않고 보여주기 마련이었으니. 허나 지금은 그 사실조차 망각할 만큼 저 어둠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 좋지. 너의 이해를 바라면서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 같았다면, 지금의 이 내기는 시작하지도 않았을걸~? 어머. 우리 꼬맹이, 언니의 다리베개가 꽤 편했나봐? 응?"
능글맞게 웃으며 당신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마치 정말 어린애를 대하듯한 손길이었으나 그 의도는 다정함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었다. 언니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최대한 그 모먼트를 이용해먹어야지 하는 주양 나름대로의 도발이었다.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주양은 그런 당신을 빤히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이면 모를까, 항상 내려다보며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상대를 올려다보는 가분은 썩 좋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자신이 내려다봐야 직성이 풀렸기에 주양은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야 좀 높이가 맞네. 당신을 내려다보며 씩 웃는 폼이 꽤 얄미웠을지도 모른다.
"오케이, 좋아. 역시 꼬맹이라면 안 뺄줄 알았어~ 그리고 말 안 해도 일어날 생각이었다구. 언니보다 키도 쬐만하면서 명령하지 말아줄래?"
다시 약간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래. 이래야 평소다운 모습이지. 아까의 위화감은 그새 사라진 지 오래인 채, 제법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잠깐의 휴식과 어느정도 잡은 것 같은 승기로 두려움은 약간 지워진 상태였다.물론 어디까지나 주양 혼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이열, 맨날 때리기만 할 줄 아는애가 왠일로 현명한 생각을 다 했담~ 설마 1층까지 가서 쫄튀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되면 내기는 내가 이기는거다~?"
말은 충분히 얄미웠으나 결국 그 의미는 당신의 의견에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아까 복도 끝으로 갔을때도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그림이 변한 것 빼고는 아무 일 없었으니 이번에도 분명 그렇게 무난무난하게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생각과 현실은 다른 것이니, 또 그런 상황들이 닥친다면 꽤 불안해 하겠지만. 괜히 드는 긴장감과 전율에 주양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아까 전같은 침착함만 유지한다면 내기는 이길 수 있다고 한참 자기세뇌를 하고 나서야 다시 한 걸음씩 뗄수 있었다.
"아. 그리고 무서우면 언제든 언니라고 불러도 돼. 이 언니는 우리 꼬맹이가 그렇게 불러주는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봐주면서 넘어갈 생각이 있으니까?"
학교였다면 혼자서도 잘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낯선 장소다. 모래밭에는 정돈된 인도도 표지도 없고, 감각도 둔해져 위험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버리고 갈 수 있어. 빈정이 상해 아씨오를 써버릴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라쉬를 물건처럼 함부로 휙휙 불러오는 것은 할 짓이 못 된다. 그렇다고 제 쪽에서 멋대로 돌아갔다간 그때는 라쉬가 미아가 될지도 모르고. 결국엔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정말로 곤란하다면 마법으로 길을 찾아 돌아가거나, 해변에서 밤 산책하는 사람이 한둘은 있을 테니 그들을 붙잡아 물으면 될 일이다. 하릴없이 기다리고만 있었지만 심히 곤란한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체감상 20분 정도 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그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탄내가…… 인상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데 약간의 지체가 있었다. 도술과는 연이 없으니 평상시에는 무기를 마주칠 일이 적었던 탓이다.
"안녕하세요."
간결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비딱하게 대충 하고 있던 자세를 바르게 돌렸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빠릿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은 학생의 본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