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 복싱에 대해 모른다. 복싱뿐만이겠느냐, 이 나태하신 아가씨는 대다수의 운동에 관심이 없으셨다. 때문에 리안의 주먹질은 모두 같은걸로만 보였다. 애석한 일이었지만 민은 길거리 싸움이나 스파링이나 차이를 느끼지 못할정도로 운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땀 투성이에 어딘가 몰두한 것이 무언가 있겠거니, 홀로 상상할 뿐이었다. 선선히 리안에게 주스를 건넨 후 다시 팔을 갈무리했다. 짐덩어리를 홀로 감당하던 왼손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버지?"
흥미롭네. 작게 중얼거리며 민은 고개를 비스듬히 쳐든다. 작게 벌려졌던 입이 가볍게 웃음을 머금는다.
"그렇게 강하셔요? 아니면 그정도로 혐오해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민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방송용 목소리와 평소의 목소리에 차이가 있다한들 완전히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민은 리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감히 확신할 수 있었는데, 때문에 민은 아까보다 대담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고마우면 사소한 스포일러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요? 오늘 방송말이에요."
민이 느릿하게 덧붙였다. "현궁 신입생들이 휴게실에서 가끔 듣더라고요. 저도 가끔 들어요." 톡톡, 뾰족한 손가락으로 병을 두어번 두드렸다. 느릿한 그 동작은 확실히 이목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신탁을 듣고, 윤이 저쪽이라는 확신을 은연 중에 가지면서, 그 또한 생각했다. 다만 확신이 없었을 뿐,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으로써만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아니길 바랐을까? 이제와서는 알 수 없다. 귓가에 속삭여진 현실이자 진실에 그 모든 것이 날아갔으니.
차갑게 변한 윤, 아니, 그의 얼굴은 그녀가 알던 얼굴이 아니다. 같지 않다. 지금 눈 앞에서 보여주는 단 몇가지의 표정, 몇가지의 말만으로 그녀 안에 있던 '제갈 윤'이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어긋나간다. 다정한 미소 상냥한 말 친절한 행동. 그 전부가 부정되었다. 윤은 멀리 가는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없었다.
한번에 밀어닥친 현실에 그녀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 했다. 어느새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요동치던 감정들이 가라앉고 평상시의 맑은 눈빛으로 돌아온다. 파문이 사라져 차분해진 두 눈에 그를 담고서, 스읍... 숨을 들이킨다. 숨을 내뱉는 대신 말을 내뱉는다.
"올 수 없다면서 올 수 있냐고 묻는 건 무슨 말장난인가요. 제 대답이 뭐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건가요?"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를 듣고도 떨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평소를 연기한다면 그녀는 평소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말은 하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그녀였다. 잠시 고개를 돌리기 위해 떨어졌던 거리를 재차 좁혀 그를 밀어넘어뜨리기라도 할 듯 끌어안는다. 이마와 이마, 코끝과 코끝이 닿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리를 둔 채 말을 계속한다.
"하나 착각을 정정해줄게요. 신뢰했다면 이렇게까지 붙잡지 않았어요. 신뢰하지 못 했기 때문에 붙잡으려 한 거에요. 사라질 것 같은 느낌에 안개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도 있었으니까. 누구나 보이는게 전부는 아니지만 선배는 특히 심했으니까."
안개. 소리없이 나타나 소리없이 사라지는 기상현상. 헛된 일인 줄 알면서도 잡으려 했다. 말이 안 된다면 몸으로, 힘으로라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럴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 전부를 버리라면 버릴게요. 달라면 줄게요. 그러니 가장 가까이에 있게 해줘요." 피의 반쪽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렁이는 금안이 곱게 휘었다. 진심을 담고서.
레오는 지팡이가 잘못됐나? 하고 지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지팡이는 이상이 없었다. 단순히 사용자의 마음의 문제였으니까. 증오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싫은것, 혐오, 증오, 분노 모두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다. 하지만 그걸 갑자기 해보라고하니 잘 안되는 것일지도 모르지. 레오는 자신의 뒤에 버니가 다가오자 순간 흠칫했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 후배님이 아니라 레오라니까.. "
지팡이를 쥔 손이 힘없이 따라서 올라갔다. 귓가에 목소리가 속삭여질때 레오는 한 차례 더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어? 라는 말. 레오는 엇, 하는 소리와 함께 과거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전의 그 상황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몇 번을 공격해도 쓰러지지 않던 그것. 고통스러워하던 교수님의 표정. 공격당했던 제 친구들. 함께 달려나갔던 이도 있었고 공격을 당해 쓰러진 이들도 있었지. 그래서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크루시오라는 말을 들었을때 잔뜩 겁을 먹어버려서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았지. 그래서 무슨 생각이 들었었냐면, 무슨 생각이 들었었냐면.. 무슨 생각이 들었었냐면..
" 죽이고..싶었어.. 나처럼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보고싶었어. 고통을 주고 싶었어.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는 꼴을 보고싶었어. "
아, 이런 마음이었구나. 한 번 감았다 뜬 눈이 빛났다. 이번엔 확실히 될 것 같다는 느낌보다도 그 때 그것이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지팡이를 쥔 손을 잡고있는 버니의 손 위로 레오는 자신의 남은 한 손을 가져가 잡았다.
오늘의 방송 소재는 본인이었다. 정확히는 자신과 자신이 뽑은 선물이 바로 오늘의 방송 소재였다. 벌써 케인과 루인이 한 시점부터 자신이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들도 한차례 소동을 벌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잘 마무리를 짓지 않았던가, 부장인 입장에서 그들처럼 징징대기는 싫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선물을 하나 뽑아 들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근데 왜 하필이면 고른게...
"야, 이거 주작 아니냐." "주작님은 주궁에 계시고요." "..... 그 주작이 아니지 않냐?" "지금 제 주작님을 목욕하신겁니까." "모욕이겠지, 그리고 주작이 그 주작 아니라고." "곤 사감님한테 고스란히 전합니다." ".... 부장님의 업보인거 같은데요." "..... 내가 어쩌자고 저런 놈들을....."
잭의 한마디에 그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처음 맞이했을때는 분명히 제법 멀쩡한 놈들을 골라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냥 죄다 언덕위의 하얀집에서 탈출한 놈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본인은 알까, 지금 그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본인이고, 여기서 그 우두머리인 본인이 바로 제일 비정상인 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자그마한 소동이 끝나고 다시금 둘러앉은 그들은 진지하게 라이브 온 지시와 함께 리안의 맑은 목소리가 재차 울려퍼졌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송, 동화 옥음의 MC대작입니다! 일주일의 첫 스타트인 월요일, 지금 잘 마무리 하셨나요?!"
낭랑한 목소리가 청량하고도 후텁지근한 밤하늘을 타고 날아올라 간다.
"최근에 방송부에 여러가지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다보니 방송 주기가 조금 불규칙해진 점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녘 힐링도 없이 무더위를 이겨내가며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정말 대단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 기세로 나아가시는 겁니다!" "아, 땡땡이 치고 싶다." "방송중이에요, 아조씨!!"
동화옥음 지방방송이 울려퍼지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흔들림 한점 없이 그는 조용히 선물을 내려다 보았다. 한 소녀가 건네준 꽃모양의 브로치,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는 잠시간 숨을 골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렇게 과한 관심을 받아본게 언제였더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따뜻한 느낌에, 그는 더이상 망설임이 없다는 듯 방송 멘트를 부드럽게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자 오늘, 드디어 여러분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제 순번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직접 소개하게될 행운의 주인공은 과연 어느분이실까요!! 자 그럼!! GOTCHA!! 오늘의 사연 들어갑니다아아!!"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브로치에 묶여 있던 쪽지를 펼쳐낸다. 그 감각에 그가 천천히 사연을 조용히 읽어내려가고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킨뒤 최대한 평온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사연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MC 대작 선배님, 이번에 새로 백궁에 입학한, 천 아연이라고 합니다. 신입생이다 시피 1학년생이고요. 눈이 안보여서 글이 똑바로 안 써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아연 후배님, 아연 후배님의 글씨 너무 이쁩니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요.
'사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입학하는 거에 대해서 반대를 하셨어요. 눈이 안보이는 제가 뭘 따라갈수 있겠느냐고.... 그래도 저는 제 의견을 굽히지 않고 단 1년만 지내보고 돌아오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답니다.' '그러던 와중 입학식 전날, 우연히 동화 옥음을 듣게 되었고, 입학식때 귓가로 제 빛이 내리쬐는걸 느낄 수 있었어요. 아,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 뒤로 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동화 옥음을 듣고 있었답니다.' '이런 기회가 있었다는 것도 친구를 통해 들었어요. 그래서 제게 삶의 새로운 의미를 준 방송부 선배님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이렇게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
스태프 진 일동이 전부 침묵에 잠겼다. 시각장애인이라고 얼마나 우려와 동정을 받았을까, 하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런 싸구려 감정이 아닌 진실되고 조금은 더 빛이 나는 말이었다. 그 말을 전할 수 있는 건 오직, 여기서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어.... 미안해요. 미안해요. 저 지금 잠깐 울었어요. 정말로 미안해요. 머뭇거린 점. 이제 괜찮으니까, 응, 이제 답변 해드릴께요."
리안의 눈가로 살짝 눈물이 맺힌다. 대견했다. 그래, 이렇게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는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어. 그 마음에 답변해주지 않으면 안돼, 그것이 내 방송인으로서의 프라이드!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전 방송인으로서 얼마나 제가 잘 해왔는지, 드디어 1차 시험을 통과한 기분이네요. 아연 후배님, 아연 후배님은 제게 시험관이셨고, 그 시험에 대해 합격점을 주신거에요. 후배님은 지금 스스로의 운명에 도망치지 않고 맞선 겁니다. 그 용기는 그야말로 인간이 낼수 있는 최고의 용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냥 이대로 해주세요. 아연 학생은 무얼 하던간에, 최고가 될꺼니까. 이것으로 오늘 방송은 끝이에요. 다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대바이!!"
방송이 끝나고 여운이 가시지 않은것일까, 그들은 잠시간 조용히 있었고.... 조금 소강이 되자 그는 천천히 잭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다가 자신의 땀을 모두 닦아내고서야 좀 정신이 돌아온 듯 그가 웃음을 터트려보인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쵠에 각 궁에서 보내오는 선물의 양이 제법 된다고는 들었는데 진짜 그렇게까지 인기가 퍼졌을 줄은 상상도 못한 그였다. 괜시리 뿌듯하기까지 한 걸까. 그는 잠시간 호박주스를 재차 한 모금 머금은 뒤, 민의 질문에 천천히 답하였다.
"제가 아는 한, 가장 강한 남자죠. 정신, 근력, 마법실력 모두다 제가 아는 한 절대로 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남자. 언젠간 제 꿈은 그 남자를 뛰어넘는겁니다."
그가 천천히 미소를 머금는다. 증오, 고통, 자신의,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절대로 지지 않는 백룡의 남자가 증오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호박주스를 넘기면서 쓰게 웃었다. 이미 받은 선물을 물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뭐 못밝힐 것도 없긴 한데.... 그는 이내 졌다는 듯이 손을 펴보이며 입을 열었다.
"음..... 제 순번이 돌아온 선물 가챠깡?"
그러고서 그는 뭐 더 밝힐게 없다는 듯 가볍게 트레이닝 복을 한 꺼풀 벗었다. 화익 하고 열기기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그가 개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생각 난 듯이 천천히 한손을 허리에 얹고 집사처럼 우아하게 인사를 해보인다.
"소개가 늦었네요. 리안 다이사쿠 에스카마리라고 합니다. 또다른 이름은..... 말 안해도 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