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있는 초콜릿 상자는 3개. 그렇다면 망설일것 없이 전부 다 들고 가면 되는것이다. 남겨봐야 몇차례 더 왔다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만 생길테니, 지금 남아있는것부터 빠르게 가져다주는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나 초콜릿 상자를 놓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꽉 붙들고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의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느리게 갔다가는 무더위에 초콜릿이 전부 녹아 못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이번에도 신속하게 의무실의 문을 열고서 주양은 상큼하게 웃으며 한쪽 눈가를 찡긋였다.
"오늘도 신속하고 정확한 주궁 서비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부인께서 부탁하신 초콜릿 상자 가져왔어요~"
택배사의 로고가 붙은 볼캡만 쓰고 있었다면 영락없는 택배기사로 보일 멘트를 치고서 한 팔으로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서 눈 옆에 가져다댄다. 초콜릿 상자를 한 쪽에 얌전히 내려놓으며, 주양은 뿌듯한 마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의무실을 나왔다.
지금 속으로는 뭘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자기를 좋아하는 후배가 사랑을 고백해오고,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남자 후배는 자신의 결정이 뭔진 모르겠지만 무슨 결정을 내리던 간에 인정해주겠다 하고, 거기에 가문은 자기에게 관심은 커녕 개짓거리라도 안하면 다행인 상황인데....
라온을 들렸다 오는 길이었다. 코트처럼 보이는 검정색 두루마기 안의 교복과, 대충 묶은 머리를 보면 거창한 외출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신 품에 칙칙한 종이팩이 들려있었는데, 민이 양팔로 지탱하고 있을정도로 크기가 꽤 컸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지르려던 민이 돌연 멈추어 섰다. 시선 끝에 열심히 운동을 하는 소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민은 저 소년을 안다. 동화옥음의 주인공 아니신가. 확신은 없었지만 그게 민의 충동을 막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열심히 복싱-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을 하는 소년에게 불쑥 팔을 내밀었다.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는게?"
툭 튀어나온 메마른 팔이 작게 흔들린다. 딸랑딸랑 흔드는 손에는 어느새 호박주스가 쥐어져 있었다. 라온에 들린 것 같다더니 당과점에서 이것저것 사온 것 같았다. 분명 말 섞어본 적 없는 사이일텐데 친근한 척 말거는 폼이 퍽 천연덕스럽다.
수 많은 벌레가 우수수 지나다니는 꼴. 레오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다. 다리가 네 개 보다 많은 것들은 도저히 정이 가질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받을 수 없는 저주를 사용하는 버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임페리아투스 저주. 상대방을 자신의 의사대로 조종할 수 있는 주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격이 다르다는건가.
" 아니.. 그렇게 말은해도 이게.. "
뜬금없이 증오라니. 레오는 일단 시키는대로 지팡이를 들었다. 크루시오. 크루시오. 마음속으로 주문을 몇 번이나 되내여보고는 후 - 하고 심호흡을 했다.
" 쓴다고 바로 잡혀가지도 않을테니까.. 좋아..! 크루시오! "
파직, 하고 지팡이가 튀기는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증오가 문제였던 것인가. 눈 앞의 것을 죽이겠다는 증오의 마음. 레오는 심호흡을 하곤 다시 주문을 외웠다. 파직, 하고 지팡이가 튀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증오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 그러니까 그 증오의 마음이라는게.. 처음본 벌레에 그런 마음이 있어야하는거야? 어떻게 집중시켜야해? "
그때 당시, 시체에게 주먹질을 했을때와 최근 케인과 스파링을 했을때를 복기한다. 확실하게 최근들어 허술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상황이 많아지고 있었다. 벤투스를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주먹은 텔레폰 펀치(위력은 강하지만 궤도가 눈에 보여서 회피하거나 카운터 당하기 쉬운 주먹)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최근 케인과 싸웠을 때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 보다는 거의 임기응변식의 싸움만이 많이 있었다. 참고 자료는 차고 넘쳤다. 어렸을때부터 자신은 아버지가 출연하던 복싱경기를 즐겨 보았다. 쉬는 시간만 되면 아버지가 주먹을 휘두르는 주먹을 보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어떻게 힘을 실어내는지 계속 봐왔으니까. 심지어 실제로 아버지가 계속 휘두르시던 주먹도 보지 않았던가.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림자의 형상이 거구로 변해간다. 케인? 아니다.
'아버지.'
그가 목표로 하는 백룡이 그자리에서 자신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한번에 풍압이 느껴질 정도의 위력적인 주먹, 분명히 잽이라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뻗어나오는 주먹은 슬러거 못지 않은 위력이었다. 분명히 상상이었지만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움직임이 기민해진다. 순식간에 주먹을 박아넣었지만 오히려 역으로 주먹이 얼굴에 꽂히는 상상이 그대로 그의 안면을 덮쳤고, 그 상상이 풀리는 순간 그의 옆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허억!!"
헛바람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다. 단 30분, 30분밖에 하지 않은것 같은데 그의 전신은 땀범벅이었고, 그는 그대로 허리를 숙인뒤 그대로 숨을 몰아쉬면서 땅바닥을 보았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일까,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그대로 바닥을 적신다. 소녀가 건넨 호박주스를 천천히 입에 머금고 그대로 천천히, 한모금씩 목구멍 너머로 넘긴다. 그리고서야 그는 천천히, 소녀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러면 됐습니다. 그걸로 된겁니다. 가시기 전에 하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세계는..... 운동경기와는 다릅니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기어서 새로운 선택을 이룰수 있는거죠. 이제 당신이 가려는 길은 그 어느 순간보다 어두울 껍니다. 선을 넘은지 오래지만, 그 마지막 선을 넘어설 준비가 되셨다면.... 가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