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어쩔수 없지. 꼬집는건 안 하는걸로 할게! 우리 여보야가 아파하면 내가 이래저래 미안해질테니까~"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역시 미안해질만한 상황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자신이 그 상황을 잘 풀어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분명 뻘쭘해서 이런저런 말도 못 하고 서있다가 사태를 악화시키는 말이나 한두마디 툭툭 던져대겠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그 성격이 완전히 감추어질 리가 없었다. 그만큼 주양은 자기중심적인 면모가 꽤 강했다. 이것도 자기중심적이라는 단어의 범주 내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는 미묘했지만. 이윽고 주양은 키득키득 웃었다. 역시 자신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 상대와의 대화는 꽤 재미있었다. 이렇게 반론도 받으면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다.
"하긴~ 아무리 꿀벌이라도 가끔씩은 본분을 망각할 때가 있는 법이기는 하니까. 우리 여보야는.. 글쎄다. 본분을 망각하는 꿀벌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 같지만! 그만큼 우리 여보야가 듬직하다는 뜻이라구~?"
오히려 본분에 너무 충실한것같은 모습이라 간혹 주양마저도 새로운 뉴 호칭에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매곤 하는 것이었겠지. 그래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2학년 과정까지 포함하면 벌써 3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알고 지낸 같은 학년의 친구라는 것은 주양에게 충분한 친밀감을 쌓아주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 능청스러운 모습이 끊긴다는 것이 되려 낯설게 다가오면서도, 한 켠으로는 인간미있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역시도 사람인데, 어찌 매번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몇 가지라도 부족할거라는 이야기에 주양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자신이 지금보다 더더욱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전부 익숙해져 아무런 감정기복 없이 평온하게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보단 그렇게 흔들리고 당황하는 편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이 관계를 질리지 않고 잘 이어갈수 있게 만드는데엔 당신의 기여가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어라. 그래~? 그만큼 내가 조금 짓궂은 느낌이기는 하지! 근데 이걸 어쩌나. 나는 말이야, 우리 여보야가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모습도 한번 보고 싶어지는걸~"
눈꼬리가 슬쩍 아래로 기울어지며 잔망스러운 눈웃음을 남겼다. 그렇게 해서 예의 그 수백가지 사랑표현을 받고 한껏 휘둘린다면, 분명 그 순간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지만 뒤이어지는 감정 기복에 대한 만족감은 상당히 클 것이다. 정말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기에는 조금의 용기가 더 필요할테지만.. 사실 안될것도 뭐 있겠나 싶기도 하고.
"그러게~ 분명 내일 날씨도 좋을거야.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는만큼 상쾌하지는 않겠지만 여름의 하늘도 나름 볼 맛이 날테니까, 기대되는걸?"
로맨틱함은 자기 한정. 그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를 더 이어 말하려던 주양의 시선이 잠시 당신에게 머물렀다. 낮이면 몰라도, 약간이나마 선선해진 밤은 당신에게는 아직 춥겠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당신을 바라보던 주양은 곧 당신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 찰싹 달라붙었다.
"여보야! 나 있잖아, 기숙사까지 바래다주면 안 될까~? 응? 혼자 돌아가기는 뭔가 심심하고, 무엇보다 이왕 여보랑 밤산책 나왔는데 마지막에는 각자 갈 길을 가버리면 조금 서운하잖아~ 분명 별님도 아쉬워할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이기적인 말. 아까 전에 안긴 채 흔들리면서 어린애같느니 어쩌니 하던 말이 무색하게도 어린애마냥 어리광을 부리는 것이었다. 추워하는 당신을 현궁으로 바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조금이나마 따뜻한 자신의 기숙사 주변으로까지 함께 발걸음을 옮겨 당신을 좀 덜 춥게 만들어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으나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어딘가 어긋난 모습을 내비치며, 주양은 마냥 웃었다. 자신의 속뜻을 헤아릴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하지 않았다. 진심을 전하지 않으면 평생 모르는 것이 사람인데,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어때! 달콤한 제안이지? 나도 좋고 우리 여보도 나랑 좀 더 대화할수 있으니 좋을거고!"
대화의 방향이 애정으로 급선회한다. 그는 최소한의 예의는 가지고 있었으나 결코 사회성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애정을 바라기엔 지나치게 재미없고, 딱딱하며, 차라리 길가의 돌멩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당신의 대답에 그는 침묵한다. 이 애정이 부모자식간의 정이라면 머글들의 음식에서 가미한 향 정도로만 첨가해줄 수 있겠으나 온전한 것이라면 불가능 할 것이다.
"하하..."
그는 작게 실소했다. 아가라고 불렀다는 이유가 애정의 방향을 돌린 이유란다. 생각이 깊어진다. 평소와 같이 확실히 '미쳤군. 확실히 미쳤어.' 같은 말로 잘라내고 밀어내야 하는데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을 동정하는 것도 아니고, 양심통도 아니다. 이기적인 이유다. 당신에게서 과거의 그가 겹쳐 보인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비스크돌과 엉클 톰을 모조리 잃었던 그가.
"내 네게 정을 준다 하여도 겉치레의 흉내 뿐이지. 자네가 그 안의 환멸을 견디긴 어려울 것이야."
쿠키를 내려다보는 당신의 모습에 다시 겹친다. 엉클 톰, 이게 뭐야? 그렇게 물었을 때, 엉클 톰은 호탕하게 웃으며 머글의 캔맥주를 들이켰다. 그 살집있는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그 또한 비슷하게, 앙상한 나뭇가지와 같은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하며 나직히 답했다.
"ours role a either one. 줄여서 Oreo."
이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를 위한 마법의 과자다. 과자와 그 사이의 재료가 섞인 크림. 단 둘만 있는데도 기가 막히지? 그럼에도 서로의 맛은 단 한가지 뿐이지. 뭘 그리 경중을 재려 하냐, 샬럿. 네가 어느 길을 가든 나는 네가 대견하다. 그 빌어먹을 화신인가 뭔가 하는 자리도 괜찮고, 나처럼 사냥꾼의 길을 걸어도 괜찮지. 비스크돌 앞에서 오레오를 베어물고 깔깔 웃던 그가 떠올랐다. 문법도 뜻도 엉망진창인 말이 좋았다. 겉치레의 애정, 비어있으나 어조만은 애정을 흉내내려 하던 말이 당신을 향한다.
평소같았으면 바로 쳐죽여버리겠다고 말했겠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레오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상대는 그 용서받을 수 없는 저주를 마구 사용하는 이들중 하나였으니까. 레오는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넓직한 바위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알지. 그때 네 입으로 얘기했으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한게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내가 직접 겪은게 아니고 내가 직접 본게 아니라면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는거야. 막말로 여기서 내가 너한테 나도 저주로 사람을 몇이나 죽였다고 말하면,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너는 내가 무서울까? "
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는 어느정도 긴장하고 겁을 먹고 있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버니를 만나겠다고 아무런 계획없이 무작정 여기까지 왔을때부터 물러서는 길 따윈 없었으니까.
" 그래서 버니, 아즈카반은 어떤곳이야? 디멘터가 우글거린다는 말은 들었는데. "
별다른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일단은 주제를 환기시키고 적대시하고 있는 벽을 조금 내리려는 생각이었다. 대화주제로는 조금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레오는 지난 번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선배와 후배였지. 그런 놀이에 어울렸었지. 레오는 이히히,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수업얘기를 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 얼마전에 신비한 동물 돌보기 수업을 들었었어. 어둠의 마법 방어술이랑 비행술도 듣고 싶었는데 수업은 하루에 하나만 들을 수 있더라고. 되게 비효율적이지않아? "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도 그녀의 발로 걸어서 왔으니 그걸 말로 대답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보니 어정쩡하게 말해버렸지만 다시 말하는게 귀찮다. 윤이 어느 정도는 알아서 생각하겠지라고 맡겨놓고 등에 닿는 쿠션에 몸을 기댔다. 푹신함은 둘째치고 어딘가에 기대니 훨씬 편해지기는 했다.
그녀는 걱정이 담긴 윤의 말을 들으며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그를 보았다. 평소보다 창백해서 그런지 시선도 어딘가 멍해보인다. 윤이 부상에 대해 언급하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한 손으로 다쳤던 옆구리를 감싼다. 조심스러운 손짓이 행여나 더 벌어질까봐 신경쓰는 거 같기도 하고, 부상당한 그 순간이 떠올라 침울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괜찮냐는 말에 즉답을 하지 않는 것도 그녀의 행동을 더욱 그렇게 보이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녀였지만 윤이 기절했을 때를 말하며 고맙다고 하자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선배였으니까 그런거에요. 선배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안 했어."
평소와 같이 낮은 목소리가 그 말을 하는 잠깐은 더욱 낮게 깔린 것도 같다. 그녀는 윤이 가져온 물을 밀어놓고 방석에 기대고 있던 몸을 움직여 윤에게로 가까이 했다. 말이 가까이지, 단순히 거리를 좁히기만 한게 아니라 그에게 팔을 두르고 몸을 밀착시켰다. 이른바 포옹이란 거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말하며 고개를 숙인 윤을 그렇게 안아버리며, 예의 그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