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이 팔꿈치로 주양의 옆구리를 툭 치며 웃었다. 전혀 아프지 않은, 단순한 친밀감의 표시나- 장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제게 기댄 주양을 단단히 지탱한 휘영이 장단을 맞추려 조금 비틀댔다. 어쨌든, 저도 마시긴 했으니 약간은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약간은 흔들려도 위태롭지 않던 걸음으로 걷던 휘영은 주양의 이야기를 듣더니,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뭐어? 너 같은 사람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고? 눈이 어디가 삐었나!”
겉으로 보면 진짜같지만 전부 거짓말인 걸 알고 하는 말이다. 물론 주양이 청을 쥐었을 때는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하고 잠깐 청의 눈치를 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휘영은 자기가 당한 일처럼 분하게 여긴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바닥에 발까지 구르기 시작했다.
“그 자식 사는 데가 어디야! 당장 쫓아가서 혼쭐을 내주자고.”
가끔은 주먹이 정의실현에 도움이 되는 법도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덧붙이고선 씩씩대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층 빨라진 데다 보폭까지 넓어져 어느새 길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양은 자신이 지금 술 취한 사람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망각하고 결국 풉 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버리고 말았다. 가벼우면서도 선명한 폭소를 터트리며 연극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 사람의 눈이 어디가 삐었냐는 말이 깜빡이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영향이 매우 컸다. 역시 이래서 깜짝 상황극은 재미있다. 상황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예측 불가능한 상대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전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의 감정기복은. 꽤 재미있는 것이었다.
"좋~아, 너같은 친구라면 언제든 믿고 맡길 수 있겠는데! 같이 찾아가자. 찾아가서 부숴버리자~! 주먹과 발길질만큼 더 훌륭한 대화수단은 없을거야!"
주먹이라는 것은 그 어떤 상대에게나 잘 통하는 가장 완벽한 법관의 의사봉과도 같았다. 존재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키도 작지 않은 두 사람이 보폭마저 넓게넓게 진행시켰으니, 그 진행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어느새 길 끝에 가자 주양은 슥 미소지었다. 당신의 예상 외의 모습으로 취한 사람 연기는 진작에 끝났지만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그 끝을 알리고야 만 것은 주양이었으니까.
"자. 그럼 이래저래 해서~ 공씨에게 완벽한 대화를 선사했다는 걸로 마무리! 휘영이 너는 헐리웃 진출해도 될 것 같은데? 연기력이 아주 수준급이었어. 이 집 연기가 아주 맛집이네 맛집!"
헐리웃. 주양이 어디선가 주워들은 단어 중 하나였다. 정작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으나 듣기로는 연기 잘 하는 사람을 기깔나게 뽑아내는 그런 곳이라고 들었다. 정확한 것은 몰랐기에 상상은 여기까지 하고서, 주양은 기대었던 몸을 살짝 떼었다. 여전히 어깨동무를 한 상태로, 기숙사 방향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래저래 모자랄 것 없이 완벽하게 하루를 잘 마무리했으니 오늘 밤에는 그 어느때보다 꿀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모니터 뒤의 사람들이야 그 이후에 이어진 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걸 알테지만.
"슬슬 기숙사에 다 와가네. 오늘 하루는 덕분에 신나게 잘 즐겼어! 너도 신나게 잘 즐겼다면 내가 아주 뿌듯할것 같아~"
조금은 능청스럽게. 그리고 마치 상황을 자신이 먼저 제안한것처럼 뻔뻔스럽게 들릴 뒷말이 이어졌다. 다음에도 지금처럼 신나게 논다면 그 어떤 일이 힘들게 하더라도 금방 떨쳐버릴수 있겠지. 그러다가 뭔가 잊고있다는 생각에 주양은 고개를 갸웃였다. 그러다 제 어깨가 휑하고, 손가락에 세게 꼬집히는 느낌이 들자 그제서야 그 허전함이 뭔지 깨달았다. 맞다. 연극은 진작 끝났으나 청을 놓아주지 않았었지. 머쓱한 기분으로 청을 다시 자신의 어깨에 얹어놓았다. 마치 삐진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이고. 달래주려면 또 한참 걸리겠네.
"그리고. 다음에는 기대해도 괜찮지? 언니. 나는 언니만 믿고 있을테니까~ 부디 날 한껏 만족시켜주길 바랄게~?"
아까의 그 대화를 떠올리며, 주영은 다시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꽤 많이 웃는것 같다면 착각이 아닐 것이다. 허나 웃는 건 좋은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주양이었다.
//슬슬 길 끝이기도 하니까 막레! 휘영주를 너무 오래 잡고있던것 같아서 미안해지는걸. 아무튼 긴 시간 일상 돌리느라 수고 많았어~! :D
" 그렇지? 조금 다르지만 나도 그래. 말로만 들었으니 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네가 무섭다거나 하진 않아. "
크루시오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오는 조금 움츠러들고 말았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고통이었으니까. 차라리 죽여달라고 이야기 할 정도의, 그런 고통이었으니까. 레오는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마치 나쁜 생각이 떨쳐나가지길 바라는 몸부림처럼.
" 그럼 디멘터의 키스도 당해봤겠네? 어우.. 유감이다. 진심이야 "
레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인과응보다. 죄를 지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다만 레오는 버니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도, 아즈카반에 수감되었던 것도 별로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감을 표하고 진심이라고까지 말했지만 그게 그리 무게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인사치레정도. '주인님'이 거기서 꺼내주셨다. 멍하니 이야기를 듣던 레오는 뭔가 번뜩이는 것을 느꼈다. 주인님이 아즈카반에서 꺼내주셨다. 주인님이, 아즈카반에서.
사건기록. 조금 멍하니 풀려있던 눈이 순간 또릿하게 떠졌다. 아즈카반에서 탈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알고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것을 성공시켰다면 분명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있을것이다. 왜 이걸 이제서야 생각해낸거지. 레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이후에 수업에 관한 버니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떠올랐으니까. '그렇구나-' 하고 응대한게 전부였다.
" 아니. 버니 선배님한테는 조금 더 심화과정을 듣고싶네요. "
여전히 바위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레오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한다고 했지. 학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로는 부족하다. 이전처럼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당해버리느니 한 번이라도 몸을 비틀어볼 찬스라도 잡아야하니까.
환멸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교육받은 것임을 알릴 의무는 없다. 당신의 말에 그는 눈꺼풀의 간격을 가늘게 좁힌다. 부네, 이매, 초랭이와도 애정 없이 다 한다고? 추종자는 어지간한 콩가루겠거니 싶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도 다를 바는 없다. 담배의 불을 붙여달라 하면 우르르 몰려오지 않나. 제발 자기가 죽으면 염습을 맡겨달란 뜻이겠지만. 그는 숨을 고른다. 머리가 묵직하다. 혀를 가볍게 찬다.
"중과 친한가 보군. 더 묻진 않으마."
하나 더 먹겠단 말에 그는 쿠키를 집어올리려다, 당신의 말에 멈칫한다. 그때의 감각이 기어올라와 뒷목에 서늘하게 소름이 돋는다. 저 멀리서 달링이 날개가 간지러운지 한번 퍼드덕 거리고는 부리를 벌린다. 영리한 까마귀는 주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대로 횃대에서 날개를 펼치며 내려와 쿠션에 자리를 잡는다. 죽은 새처럼 몸을 옆으로 뉘이며 눈을 감는다. 누군가는 편안한 잠을 청하며 오늘따라 고요한 주말이다. 고요한 정적을 깨듯 그가 나직히 고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닌 보통의 목소리로. 본연의 것은 느긋한 성자의 것과 같았다. 죽음과는 상반되는 나긋한 목소리가 아닌가. 다만 목에 핏대가 벌써 올라온 것을 보니 이정도도 힘에 겨운 것이 틀림 없다.
"아가, 너는...가벼운 버릇을 좀 고쳐야겠어."
여러가지를 생략한 말이었다. 가벼운 몸, 입을 구제할 방법을 찾는다든지, 혹은 애정을 갈구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무의식의 방어기제를 고쳐내겠단 뜻일 지도. 확실한 것은 그가 친절하다 해도 후자만치 상냥한 사람은 아니란 것이다. 남을 신경쓰기엔 우린 너무 멀리 와버렸지 않은가.
"이리 온, 더 가까이."
그가 한 발치 가까이 다가간다. 침대의 매트리스가 희미하게 들썩인다. 분홍빛 시선이 암울히 가라앉는다. 신체의 접촉을 꺼리는 이유는 필히 있기 마련이다.
"사탕과 달리 쿠키는 어떻게 먹는 지 모르겠는데."
그는 쿠키를 입에 물며 팔을 뻗는다. 당신을 끌어안으려는 듯 팔을 목에 두르고, 가까이 밀착한다. 벌써부터 온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뼈가 드러나듯 앙상한 몸. 등골은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 것 같고 속은 뒤집힐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쿠키를 문 잇새로 가볍게 속삭였다.
자신의 볼을 꼬집는다던가 하는 건 학원에서나 가능한 일이였다. 아니, 나주 본가에서도 가능은 하지만. 어찌됐든 단태에게 자신의 볼이 꼬집힌다는 것 자체가 경험하기 힘든 것이였다. 꼬집는 건 안하겠다는 주양의 말에 단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전혀 아프지는 않아도 꼬집히는 기분은 꽤 묘한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아픈 건 싫은걸." 뻔뻔하게 능청스러운 표정이다. 아픈 게 싫다니 고통은 익숙한 것이면서. 약해빠진 반응을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단태는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달링, 내가 본분을 망각하지 않는 꿀벌로 보이는 거야? 역시 달링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거 아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한테는 듬직하게 보여야하는 법 아니겠어?"
안그래, 스위티? 다시금 단태는 주양에게 자신의 어깨를 가까이 맞대고 헤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동들은 3년하고 반 동안 이어지는 것들이다. 물론 처음에는 단태의 일방적인 찬가와 치댐이 어우러져서 밀어붙히는 경향이 강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예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과연 주양이 익숙해진 것이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는 반응에 단태가 진짜야- 하는 말을 덧붙히면서도 같이 낄낄 웃었다. "달링, 스위티~ 허니버니~ 키티~" 잔망스러운 눈웃음을 보이는 주양을 향해 단태가 느물느물하게 입을 연다.
"정말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보고 싶은거야?"
꽤 다정다감하게 느물한 목소리로 소근소근거린다. 하늘이 저렇게 맑아서야 보름달도 밝게 뜨겠네. 보름달이 밝게 뜨는 건 좋지만 보름이 가까워지는 건 질색인데. 이번에도 기숙사에서 꼼짝없이 박혀 있어야겠다. "오, 미안해. 자기야- 잠깐 생각 좀 하느냐고 대답을 못했네." 단태는 미안하다는 듯 샐쭉- 하니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던 것을 내려서 주양을 바라봤다. 고개까지 비스듬히 기울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미안해보이는 기색이다. 그 사과는 곧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는 주양의 행동에 의해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단태는 부러 조금 휘청거리는 자세를 해보였다.
"별님이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달링이 나랑 조금 더 있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어느쪽이든 나야 우리 자기랑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좋지만?"
단태는 역시나 뻔뻔하리만치 능청스럽고 능글맞은 어조로 헤죽헤죽 웃으며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찰싹 붙어 있는 주양을 눈만 움직여서 바라봤다. 허리에 있는 주양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게 끌어안고 흔들어줬던 것과 똑같은 태도였다. 선선한 밤바람이 불고 있으니 주궁까지 가면 조금 낫겠지. 그래도 평소라면 어느정도까지 동행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서로 헤어졌을텐데 바래다달라는 주양의 말이 조금 의아스럽기는 했기에 단태가 조금 길게 주양을 바라봤다가 시선을 돌렸다. "바래다줄게. 자기야." 단태는 자신의 허리에 감싸져 있는 주양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고 자연스럽게 풀어낸 뒤 걸음을 옮겼다.
//더 바빠지기 전에 답레 올리기 클리어 했다! 땃쥐는 이제 월요일에 잡아먹히러 간다......
아픈 건 싫다는 이야기에 주양의 표정이 느글느글 풀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이전까지는 여보자기 하며 동등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그 말 한 마디에 마치 슬하에 동생이라도 둔 사람마냥 헤벌레하게 풀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을 아래로 본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친구는 친구이지 않은가. 어려 보인다고 얕잡아보는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동생같다는 느낌이 안 드는것도 아니었기에. 주양은 미소를 지은 채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픈 건 싫다는 당연한 말 한 마디가, 당신을 귀여운 동생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그저 주양이 자애로울 뿐이었는가. 아니면 그것 역시도 어딘가 살짝 어긋난 주양의 애정표현 중 하나였는가. 자애로움은 주양과 거리가 굉장히 멀테니 후자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으구. 우리 여보야가 그렇다면 아프게 안 할게! 볼 꼬집는건 안 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어, 웃음을 터트리는 평소의 당신다운 모습에 곧 풀리기는 했다만 다정하게 달래주듯이 말하는 모습은 꽤 숙련된 것이었다. 자신과 꽤 안 어울리는 모습을 한번 내비치고 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오호라~ 너무 잘 알고 있는건가? 기쁜걸! 물론 너무 많은 걸 알면 다친다지만.. 우리 여보야한테는 좀 다쳐도 상관 없을것 같아. 나도 여보야한테 듬직한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까, 같이 힘내보자?"
스위티. 생각해보니 이것도 평소 자신에게는 쓴 적 없는 호칭이었나. 깊이 파고들지 않은 채 주양은 슬쩍 팔꿈치로 당신을 콕 찔렀다. 세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살살, 친구끼리의 장난에서 으래 그랬듯이 취하는 제스쳐 중 하나였다. 매번 바뀌어가는 호칭을 들으며, 그 상황에 맞게 자신의 반응을 은근슬쩍 바꾸어 보여주는 것 역시 이 상황을 더 오래 즐기기 위한 일종의 변칙성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괜히 심오하게 굴어봐야 이득은 없다. 친구끼리의 사이는, 가볍고도 편하게 즐길수 있는 게 나았으니까. 물론 무거운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 짐을 덜어주는것도 친구로써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긴 한다만.
"궁금해지기는 하니까! 만약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여보야가 하는 일인데 내가 이해하지 못 할 리가 있을까~? 좀 더 파고들자면 그 생각을 한 여보야의 모습이 보고 싶은것도 있지만?"
결국에는 전부 자신의 흥미 위주일 뿐이었다. 그것을 감당하는 것은 미래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 뒷일에 대한 걱정은 눈꼽만큼도 남아있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당신에게서 비쳐 보이는 미안해보이는 기색에 주양은 괜찮다며 당신의 어깨에 슬쩍 볼을 부볐다. 어차피 자신은 굳이 반응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의미 없는 잡담만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게다가 이렇게 멋진 밤하늘이라면 잠시 대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래 밤산책을 나온 목적대로 바람을 쐬며 여운을 남겨도 괜찮겠지 싶었다.
"이런이런. 들켜버렸네~? 거기까지 알아챈 이상 절대 중간에 돌려보낼순 없지. 여보야는 꼭 나랑 같이 기숙사까지 가줘야겠어!"
손을 토닥거려주니 이번에도 자신이 동생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같이 기숙사까지 이동한다면 쌀쌀했던 기분도 조금은 풀릴 것이며, 자신이 기숙사로 돌아오고 당신도 당신의 기숙사로 가는 동안 자신에게 방해받았던 밤 산책을 조금이나마 더 즐길수 있을거라는. 나름 획기적인 플랜을 떠올리고서 마음에 들어하며 속으로 그런 자신에 대한 자화자찬을 이어가는 중이었으니, 지금만큼은 반응이 오래 걸려도. 어린애 취급을 받아도 상관 없겠다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좋아! 여보야가 허락도 했겠다, 이번 행선지는 주궁! 주궁입니다~"
어디서 주워들은건지 꽤 경쾌한 목소리로 전철 안내방송. 혹은 어디 시골버스에서나 들릴 법한 안내방송을 따라하며 주양은 뿌듯하게 웃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여기서 주궁까지 가려면 얼마 걸리지 않으니까, 시간을 걱정할 일도 없었다.
디멘터의 키스. 그녀는 몇 번의 키스가 예약되어 있었을까요. 그걸 당한 적이 없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 심화? '
되묻던 버니는 곧이어, 굉장히 뒤틀린 미소를 지었습니다. 금지 된 저주를 가르쳐달라니, 그녀가 재미있다는 것처럼 푸흐흐 소리를 내며 웃었습니다.
' 진심이야? 미리 말해두는데, 난 실습 위주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중과 저 학교 사람들을 버니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기쁜가봅니다. 그녀는 레오에게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전부 엿먹일 수 있어 ' 레오, 너도 그 저주들을 써야 한다는 거야.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안 가르쳐 줄 거야. '
특별하게 생각해준다는 것이 과연 좋은 방향일지, 그저 순수한 마음일지. 한번쯤은 의심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그 말을 믿는다는 전제가 붙었을 때의 가정일지니. 그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의심도 무엇도 필요하지 않을거다. 뿐만 아니라 어떤 말도 더는 의미가 없어지겠지.
그 날의 상황을 기억하냐는 물음은 말만 놓고 보면 별 의미 없어보인다. 어째서 기절하게 되었는지도 확인차 묻는구나 싶게 보인다. 별거 아닌 말이 기묘한 분위기에 물들어 조용히 의미가 변질되어간다. 그 물음의 대답을 들으며 그녀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렇군요."
구구절절한 설명 끝에 그녀가 내놓은 말은 그게 다였다. 짧고 간결한 한마디는 윤이 한 말을 납득한 것처럼 보였을거다. 하지만 스물스물 움직이는 손이 과연 정말 납득한걸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하얀 손이 윤의 등을 자근자근 짚으며 움직인다. 손끝이 옷 위를 꾸욱 꾸욱 누르며 위치를 바꾸는 걸 선명하게 느껴지게 한다. 한 손은 허리로 내려가 감싸고 또 한 손은 위로 올라와 윤의 뒷목에 손끝을 짚는다. 옷 위, 혹은 살갗이 닿는 부분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은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팔을 움직임으로써 자세가 바뀌어 더 달라붙은 모양새로, 어느새 윤의 어깨에 턱을 기댄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중얼거렸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게요. 선배는 거기 왜 나왔던 거에요?"
거리가 좁혀진만큼 음량을 줄인 목소리는 바닥을 기는 안개 같다. 쓸어내렸던 손을 올려 윤의 붉은 머리칼을 살살 어루만지며 재차 묻는다. 그 날의 신탁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