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노을이 지고 있었다. 도시의 번화가 한켠은 어느새 제법 제각기 네온등이며 간판불 등을 키고, 일과를 끝마친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어딘가의 고깃집에선 벌써 판을 벌리기 시작한 건지 웃고 떠드는 소리가 왁자했다. 번화가 뒷골목의 해질녘은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덧 거리는 어느 가게에서 흘러나오고 있는지 모를, 신나는 여름 저녁을 노래하는 가락으로 가득차 물들어가고 있었다.
성헌은 그 즐비하게 늘어선 야트막한 3~4층 건물들의 틈바구니 하나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어스름한 그늘에 등을 기대고 있는 그에게는 따스한 노을도 신나는 음악도 그에게는 하나도 닿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우연하게 그 쪽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자칫하면 성헌을 놓치고 그냥 지나칠 뻔했을지도 몰랐겠다. 가오리핏의 후드집업을 입고, 딱 달라붙는 7부 트레이닝 팬츠를 입고는 운동화를 신고 옆구리에는 스포츠 가방을 끼고 있는 그의 행색은, 어딜 봐도 또 그 꼴보기 싫은 '꼰대' 를 피해 도망나와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로 그는 무심하게,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한 줄도 모르고 가로등 불빛에 의존해 어떤 종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엇에 그리 정신이 팔려 있던지 성헌은 설이 그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오는 줄도 눈치채지 못하고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만 설이 손을 들어 팔뚝을 두드리려 한 때에는, 그 순간에서야 설이 거기에 있는 줄을 알아채고 흠칫 놀란다. 시선이 자기 팔을 건드리려는 손끝으로 휙 튀더니, 설의 얼굴로 튄다. 그리고 그게 백설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나서야 잠깐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짐짓 미간을 구기며 정색하는 척을 한다.
"뭐야 이건. 깜짝 놀랐네."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쪽의 무선 이어폰을 쑥 빼서는 바지주머니에 대강 쿡 쑤셔넣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씨익 웃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종이 머리에, 경기 중계하면서 한번쯤 봤음직한 종합격투기 협회-Furnace FC-의 로고가 잠깐 보였다.
설은 특유의 비웃는 듯한 (실제로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미소를 지어보인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종이 머리에 몇 번인가 봤던 로고가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격투기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도록 성헌과 친구로 지내며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정보를 습득했다. 격투기 협회의 로고도 흘긋 본 것 만으로도 빠르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나야 뭐-"
설은 대답을 끝맺는 대신에 제 손에 들려있는 비닐봉지를 높이 들어 흔들어 보였다. 과자나 젤리, 음료 등의 간식거리가 들어있을 것이 명백해 보인다.
과장되게 유감스러운 어투로 장난스레 대답한 성헌은, 설이 흔들어보이는 봉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식량 비축 중이셨구만." 그러다 설이 손으로 종이를 툭툭 쳐보이며 하는 말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뭐라 별 주저하거나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종이를 톡톡 친 그 손에 그 종이를 쥐어준다.
"뭐, 협회 높으신 분들이 내 경기 잘 봤댄다."
그 종이에는 멀끔한 협회에서 발행한 공문다운 매끄러운 폰트로 인쇄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202X년 X월 X일에 시행된 시합에 대해 본 협회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으나, 최종적으로 귀하께서 보여준 놀라운 민첩성과 테크닉 등을 보여준 점, 그것들을 통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완전무결한 TKO를 받아낸 점 등을 참작해 별도의 불이익 없이 해당 경기 결과를 1승으로 인정해준다는 통보문과, 반칙과 비매너 행위에 대해 여러 가지 편의를 봐줄 테니 '상대 선수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 과 옥타곤 안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좀더 자유로운 행동' 을 주문하는 일종의 거래 제안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저잣거리에서 들고 있다가 언론사의 손에 들어가면 발칵 뒤집어질 만한 문건이라는 것이었다.
종이 너머로, 성헌의 푸르스름한 눈이 그늘 너머로 떠오르는 게 보인다. 성헌은 아주 재밌다는 듯 씨익 웃고 있었다.
설은 전의 경기를 '경기'가 아닌 그거라고 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은 종이를 넘겨 받기 전에 손목에 비닐봉지의 손잡이 부분을 끼웠다. 그 뒤에 종이를 넘겨 받은 뒤 찬찬히 내용을 읽어내려간다. 격투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예 이해를 못 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뭐야 이게."
종이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설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한숨과 함께 펴내며 종이를 성헌에게 돌려주었다. 성헌의 웃는 모습에서 경기 녹화본에서 본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본 모습은 격투 선수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래서, 넌 여기에 오케이를 한거야?"
평소에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는지라 무표정에서는 별다른 티가 나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주저 없이 내비친다.
성헌은 고개를 으쓱했다. 알아서 한다... 물론 협회 입장에선 오케이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아직 수정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은 곧 알아서 다른 해결책을 강구하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설의 귀에 어떻게 들릴지는 또다른 문제다. 비열해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이 소년의 얼굴 위에서 서서히 흐려진다. "정말, 뭐냐 이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년은 헛웃음을 웃는다. 허, 하는 소리가 팔자도 좋다.
"난 누가 날 야단이라도 쳐 줄 줄 알았어."
하고, 그늘 속에 기대어서 있는 이 소년의 얼굴이, 평소에는 불그스레할 정도로 말갛고 창백했던 그의 얼굴이 왠지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켕겨서는 누런 똥빛인 것만 같다. 어느덧 비웃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어쩔 줄 몰라 헤매고 있는 부랑아의 무표정이 성헌의 얼굴에 걸려 있다.
으악 성헌주 늦어서 미안해!! 저녁 먹고나서 설거지 하고 있다가 대뜸 가족한테 붙잡혀 나와서 어째선지 지금 밖이야...... 😭 레스 하나 남길 시간 없이 끌려 나왔어 ㅎㅎ...... 집에 도착하자마자 답레 써올게! 지금쯤 잠들었으려나? 만약 그렇다면 잘 자! 성헌주 일어나면 답레 올라와 있을거야!
판이 바뀌었네!! 나도 다시 잘 부탁해! :D 그리고 정주행 하다가 봤는데 성헌주를 피한다니 절대 아니야!! 오히려 성헌주 못 만나는 날에는 슬퍼지는 걸ㅠㅠㅠ 내가 일상 타이밍도 너무 안 맞고, 어장에 올 수 있는 시간도 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네... 정말 미안해 성헌주...ㅠㅠ
"부정할 생각 없어. 부당하고 유치하게 분풀이한 게 맞아. 그 경기, 제대로 했으면 저번처럼 1라운드에 끝났을 경기야."
무표정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설을 마주보고, 성헌은 여전히 역겨우리만치 얄미운 웃음을 입가에 가늘게 걸어놓고 있다. 마치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다. 설이 다그치는 말에는, 숫제 푸흐흐 하고 뭐가 그리 웃긴지... 참다 만 웃음소리를 나직하게 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웃음이 끝날 때에는... 얄밉던 웃음이, 딱 설의 얼굴이 일그러져가는 만큼 씁쓸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하고 싶은 대로... 라고 하기에는 말야, 내게 남은 건 그것뿐이었다고."
남은 것은 그것뿐... 그러고 보면, 성헌은 항상 무언가 행동을 해왔다. 여태껏 지금까지 쭈욱 신체를 단련하면서 격투기 선수로서의 삶을 준비해온 것은 물론이요, 스스로가 마음붙일 만한 일을 이래저래 찾아다니면서 수영장도 다니고, 오토바이 면허도 땄다. 그 또래라면 알지 못할 불량한 장소도 여럿 알고 있다. 물론 평범하거나 불량한 일들 이외에도, 설은 알지 못할 일이겠지만 그는 이런저런 선행도 꽤 해보았다. 길 잃은 아이에게 길을 찾아주거나 언덕을 오르는 할아버지의 짐을 들어드리는 작은 것들도, 몇백만 원에 달하는 선수권 대회 상금을 송두리째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일도 해봤다. 공부는 도무지 적성에 안 맞는 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 이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는 그래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을 상자 열어보듯 하나하나 뒤지고 다녔었다. 당연히 사람은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생물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성헌의 행동에는 무언가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사람이 가질 만한 의지라기보단, 마치 세 시간만 굶어도 아사해버리는 땃쥐의 본능처럼 그는 항상 어딘가에 스스로를 내몰듯이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해온 그 수많은 일들에서,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들에서 성헌은 무엇을 원하다가 실패해왔으며, 남은 것이 이런 짓거리뿐이라고 말할 때까지 와버린 것일까?
"혼내주길 바란다... 글쎄... 지금껏 단 한 번도 혼나본 적이 없어서 말야. 자기 기분 안 좋다고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건 꽤 많았지." "그래서 내가 정말로 잘 아는 일도 그런 짓거리들뿐이야." "그런데 이것 참 웃기네. 그래서 그런 짓을 했더니, '잘한다. 더 해라.' 래."
"오늘은 집에 와보니 꼰대가 내 방에 들어와서는 그 서류를 꺼내서 읽고 있더라." "그 인간이... 그 서류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어찌되었건 그게 안정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일이면 OK.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법' 이랜다."
답레만 올려두고.. 낮잠을 좀 자고 올게.. 더운 낮에는 활동이 어려우니 사막식 생활패턴을 구사하는 수밖에(?) 채성헌 이 녀석. 주인이 조커 좀 다시 봤다고 어려운 녀석이 됐구나... 그리고 이건 TMI지만, 성헌주는 당근을 싫어해. 브레이크 밟을 필요 없으니 마음껏 직구 파이어볼 팍팍 던져줘..
오히려 설주야말로 성헌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당근을 흔들어줘. 이 녀석에게는 분명히 해답지가 있고 그것은 이해 가능한 txt로 준비되어 있으며 그것은 성헌이를 대하기 힘든 소꿉친구에게 무료로 제공됩니다.
남은 것이 그것 뿐이었다는 말에 설은 말 없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설이 아는 성헌은 살짝 엇나갔을지언정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엇나감에 있어서는 복잡한 가정사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설은 성헌을 탓하지 않았다. 사실, 그 누구라도 그를 탓하지는 못했을테지.
"남은 것? 링 위에서 상대방 농락하고 모욕 주던 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뭐라 할 생각은 없어. 아까 말했듯이 난 어차피 격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하고." "근데 그건 네 선택이었어."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있고, 그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난번의 그 경기의 흐름마저 불가항력이었는지는, 글쎄. 설은 성헌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곤 앞머리를 쓸어넘긴다.
"화풀이가 필요하면 차라리 나나 다른 애들한테 하지 그랬어." "생판 남한테 그러지 말고."
너 잘 아는 애들. 가정사가 복잡한 건 알고 있다. 그런 집에서 자라나는 기분은 모른다. 그래서 무어라 말하는 게 정답일지는 알 수 없었고, 모르는 일에 도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고, 오빠 네 일에 껴들고 싶지 않은데-"
설은 성헌의 손에 들려있을 종이를 손가락으로 탁탁, 튕기려 한다.
"-이거, 난 오케이 아니야. 전혀 잘한 짓이라고 생각 안 하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 다 개소리지. 그건 그냥 양아치야." "그리고, 난 양아치랑 친구 안 해."
여기에 오케이하면, 난 너 안 볼 거야.
// 답레가 많이 늦어졌다 미안해! 사실 실수로 한 번 날리는 바람에 다시 써오느라...... 😭 그리고 솔직히 어떤 식으로 대하는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답을 먼저 봐버리면 반칙하는 느낌이 들어버려서 일단 그냥 설이가 자연스럽게 보일 것 같은 반응으로 써오긴 했는데, 혹시 여기에 이어가기 곤란하다 싶으면 말해줘! 반응 바꿔서 새로 써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