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프 아델횔드가 꼽기로, 수업이 없는 날에도 일상을 얼마든지 분주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학원생활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학원 부지는 눈 닿는(관용적인 의미에서) 모든 곳이 혈기에 미친 십대 학생들로 가득한 장소다. 그러니 거창하게 노력할 것도 없이, 주변에 귀를 기울이기만 해도 어디에서나 소소한 사건사고나 떠돌아 한가로울 틈이 없다. 시간이 영영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울적한 침묵, 몇 달을 내리 이어지는 지겨운 밤, 상대할 사람 하나 없는 따분한 시간…… 따위와 비교하자면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차라리 건설적이니. 방 안에서 창문만 열어두어도 한만스레 시간을 죽이기에는 적격이었다. 때마침 멀지 않은 근처로부터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덩이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쳐 바스러지는 소리. 어디선가 학생 여럿이 눈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밭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이윽고 비명에 가까운 웃음을 크게 내질렀다. …아, 이건 좀 시끄러운데. 그렇다 해서 그들을 쫓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직 어린 학생들인 것 같기도 했고. 환기도 충분히 했으니 슬슬 창을 닫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아이들의 방소 아닌 다른 소리가 섞여들었다.
한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멈칫하자 곧바로 라쉬가 소리를 길게 빼며 기묘한 높이로 끊어 울었다. 그 짐작 가는 의미 전달에 그가 허공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부엉이?"
그러자 답하듯 새가 곁에서 낮게 울었다. 아, 그랬지. 이즈음이면 슬슬 편지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손을 내밀자 가벼운 무게의 상자가 올려졌다. 안에 든 물건들은 짧은 편지와, 무엇인지 모를 덥수룩한 것. 손을 대보니 손 안에 감도는 형태가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은은한 향기, 싱그러운 식물의 감촉은…… 틀림없이 가장 찬란한 계절의 선물이다. 미드솜마르의 화환. 그러고보니 올해 하지 축제가 어제부터 오늘까지라 했던가. 맥락은 이해하겠으나 편지에 동봉되기엔 뜬금없는 물건이라, 그는 우선 상자에 함께 담긴 편지를 개봉했다.
[부고가 없으니까 잘 지내고 있는 거겠지. 낮에 비가 좀 오긴 했지만 햇살이 참 좋더라. 축제를 기념하며, 타지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네게 만개한 여름의 축복을 보낸다. 꽃은 따로 빼두고 잘 말려서 보관해둬. ─6/25.
추신.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생일도 잊고 지내지는 마. 이번에도 딸기 케이크 보내주려다 지겨울까봐 취소했다. 부엉이가 시간을 얼마나 잘 맞출지는 모르겠지만…… 이르게 도착한다면 못 읽은 척 편지 덮었다가 당일에 다시 읽고, 늦게 도착한다면 용서해줘. 생일 축하해. 선물은… 미안, 돈 없어서 화환으로 때운 거 맞음. 그래도 그거 내가 만든 수제다?]
어쩐지 본문보다 추신이 더 길다. 시작은 짧게 쓰려 했겠지만 점점 말이 덧붙어서 길어졌겠지. 황당하지만 우스운 심정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편지를 쓴 말투부터 내용,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건성인 듯하지만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마디 두터운 손가락이 비어 있는 편지의 아래쪽 면을 훑었다. 자신을 밝히는 말이 쓰여 있어야 했을 자리. 그는 무명으로 감춰둔 발신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로비사.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한다니까."
언제나 그렇지 않은 척 굴어도 로비사는 그에게 다정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그 노력에서 간절함이 읽힐 정도로. 저 먼 북반구 끝자락에서부터 이곳까지 날아오려면 비행이 꽤 험난할 터인데도 생화로 엮은 장식물은 절화 당시의 생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형태가 온전한 꽃잎과 시들지 않은 향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필시 마법적인 보존을 거친 것이리라. 화환은 익숙지 않은 누군가의 손에 만들어진 듯 얼기설기 엉킨 엉성한 모양을 하고 있고, 크기를 잘못 재었는지 사람의 머리에 쓰기에는 둘레가 다소 작았지만 그 서투름이 오히려 진실되어 기꺼웠다. 그는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꽃향기에 제 곁에서 남몰래 코를 킁킁거리던 라쉬의 머리를 긁어주었다.
"누나가 준 선물이야, 향기 좋지?"
호기심 가득한 라쉬의 길쭉한 주둥이 앞에 꽃다발이 내밀어진다. 처음에는 냄새를 맡게 해주는 것처럼 기다리다가, 그가 곧이어 자연스럽게 개의 목에 화환을 걸어주었다. 그만은 비록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알록달록 다채로운 장식과 개의 흰 털은 제법 깔끔하게 잘 어우러졌다. 졸지에 눈 뜬 채 코를 베인 개는 한순간 어안이 벙벙했으나 별달리 기분이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라쉬가 고개를 갸웃하며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귀 주변을 간질이는 잎이 간지러운지 몇 번쯤 머리를 털었지만 라쉬 역시 아는 이름이 나오니 반가운 듯했다.
편지는 결국 발신자가 걱정한대로 이르게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배달원이 예상한 것 이상으로 성실했던 탓이다. 빠르게 날아오느라 수고가 많았을 부엉이에게 먹을 것이라도 내놓아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건실한 새는 물건을 전해주자마자 쉴 틈도 없이 날아가버린지 오래였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다 읽어버린 편지를 책상 위에 엎어두었다. 부탁한대로 아직은 생일이 아니니 못 읽은 척 해주자.
한눈이 팔렸던 사이 바깥에서 뛰놀던 학생들은 사라졌다. 사위는 다시 잔잔한 고요에 잠겼다. 잠잠하지만 적막하지만은 않은, 촌설의 아늑한 침묵이다. 다시금 방 안에 평온이 감돌 무렵, 별안간 그가 기습적으로 라쉬의 이마에 머리를 부볐다. 고개를 들고 검은 머리칼에 하얀 털 몇 가닥이 숭숭 붙은 채로 짓는 웃음이 마냥 밝았다.
레오의 행동을 친절함이라 표현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닐거다. 제3자가 듣는다면 분명, 그건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사실은 그렇겠지만 그녀에게는 그것도 친절함의 일종으로 보였다. 다른 이득이나 손해를 따지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해 타인을 돕는 것. 그 날 그 자리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했던 그녀와 비교해보자면 너무나 친절하게 보였다. 친절하고 상냥해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버리고 싶을 만큼.
"지금 들었으니 앞으로 들을 일이 더 생길 수도 있을거에요.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라니까요."
그 말 역시 이럴 때 쓰는게 아닌 거 같지만 담담한 말투가 농담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한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여태 빈말,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입을 다문 적은 있어도 하는 말에 거짓된 감정은 없었다. 거짓이 아닐 뿐, 일지도 모르지만.
얼마간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조용했던 듯 하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 미미하게 번갈아 울렸다. 늦은 저녁, 곧 밤이 되는 시간. 바깥에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조용하고 적막했기에 툭 하고 내뱉는 말도 잘 들릴 수 밖에 없었다.
"......"
나쁜 사람은 아닌거 같다. 저를 보며 그렇게 말한 레오를 보는 눈에 금빛이 유난히 선명하다. 눈을 곱게 휘어 웃는 레오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심이라는 유리판에 덮인 은판은 곧 그녀의 얼굴이다. 그 얼굴에 조용히,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위선을 행한 적은 있지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는걸요. 레오의 순수함에 비하면 저는 글러먹은 인간이에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그녀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한점 부끄럼 없이 그저 솔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