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자라면, 어느순간부터 그러한 일이 오니까요. 형님은 지금, 그 간판에 걸맞는 행동을 하신겁니다. 허리를 피시지요."
그는 이전에 약속해주었다. 윤이 어떤 선택을 하던간에 받아들여주기로. 그가 흑을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백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은 백이 되는 것이라고, 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하늘을 보았다. 윤이 말한대로였다. 아무리 사고뭉치들이 가득 모인 청궁이라지만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는 법, 거기에 곧 방송까지 해야한다면 지금 돌아가는 게 맞으리라.
동화학원 중앙격되는 복도에 웬 기린궁 학생이 서있었다. 엄청난 거구의 위압적인 분위기때문인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러고보니, 이곳에서 기린궁 학생들을 만났었지. 민은 소소한 헤프닝을 떠올리며 갈길 가려던 차였다. 갑자기 그 학생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민은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뒤늦게 후회했다.
"거기, 너. 잿빛 머리에 불타는 눈을 하고 있군." "네?"
기린궁 학생은 가까이 보았을 때 더더욱 위압적이었다. 무기 선생님을 연상케하는 덩치에 앙 다문 입은 그보다 무서웠다. 민이 주춤 뒤로 물러서며 되물었다.
"저번에 기린궁 학생들을 도왔다고 들었다. 네가 아주 친절하다더군." "네?" "나를 도와라." "...녜?"
실수로 혀를 씹어버렸다. 민은 이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고 무서워지던 차였다. 기린궁 학생은 그런 민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흘겨보고는 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무기 선생님의 생일로 마법약을 만들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나는 지팡이가 없다. 네가 나를 위해 지팡이를 써주었으면 좋겠군."
아하, 무기 선생님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을 위한다는데 거절할 수 있을리가. 민은 기꺼이 이 무뚝뚝하고 사교성 없는 친구를 돕기로 했다. 냄비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친구는 상당히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에는 펠릭스 펠리시스(*만드는데 6개월이나 걸린다.)를 만들겠다는 말에 다른 마법약을 추천하느라 진땀을 뺐다. 성능이 별로인 건 싫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학생은 비교적 얌전히 민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결국 간단한 상처치료약인 머트랩 용액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이 학생이 정말로 마법약에 재능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물론 배우지 않았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머트랩 용액을 만드는 대부분의 과정을 손봐준 민은 마법약을 완성하고 지팡이를 휘두를때즈음 아주 지쳐있었다. 흐물거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휘둘러준 민은 마법약을 곱게 포장해서 학생에게 건네주었다.
"다음에는... 선물을 사서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직접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래..."
루인의 괴성이 방송부 부실 전체에 울려퍼진다. 저 귀여운 여자의 탈을 쓴 곰탱이를 보는 남자들의 반응은 심란함 그 자체, 분명히 생긴건 멀쩡하다 못해 이쁘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이지만 하는 행동은 완전이 반대의 모습이었다. 물론 외모보다는 그녀의 능력을 보고 뽑은거긴 하지만....
"진짜 부장의 사람 뽑는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니들도 따지고 보면, 제 정상은 아니다." "전 정상입니다만." "차라리 건 사감님이 오리너구리보다 얌전하다 캐라. 그말을 누가 믿냐." "애시당초 여기 정상이 있냐."
그 말에 괴성을 지르던 루인마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랬다, 누구나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이 방송부에는 멀쩡한 사람이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나마 정상인을 따지자면 리안과 케인이겠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을 채용한 시점부터 그들도 제정상은 아니리라.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그러자, 시작하면 쟤도 정상으로 돌아올껄." "생각해보니 쟤도 부장과 같은 과였죠." "오게에에엑..... 부장보단 제가 정상이죠!"
최소한 지금만큼은 아니야, 라는 무언의 시선들이 루인을 향한다. 지금 만큼은 투정도 안부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부장이, 저기서 오게에엑 거리는 여자아이보다는 훨씬 더 정상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정신병자들의 우두머리인 만큼 그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제일 나은건 사실이리라. 그렇게 잠시간의 소동이 끝나고, 순식간에 착석한 그들은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라이브 온 신호에 맞춰 방송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송, 동화 옥음의 MC대작입니다! 은 오늘은 저희가 점심을 다 먹고 느지막한 시간에 찾아뵙게 되네요!!"
순식간에 멘트를 진행하는 와중, 오게에에엑 거리던 루인이 스스로의 행색을 바로하고 천천히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누가 그러던가, 여자는 전부 여우들이라고, 어느새 생글생글 웃으면서 방송준비를 끝마친 루인을 보며, 남자들은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어제의 K군의 감동적인 사연에 이어서 다음 타자는 저희 방송부의 홍일점이자, 코디 담당인 R양입니다!!! 재색겸비의 여인이자, 저희 무대 뒷부분의 일등공신!!!! 입학식때도 그녀가 힘을 쓰지 않았다면 훌륭한 무대가 안나왔을겁니다!! 자 그럼! 우리 R양!!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청궁 재학 2학년생인 R입니다!!! 다들 반가워요!" "R양, 원래 무대 울렁증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많은 분들의 도움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지금은 저번 방송부 무대에 서서도 당당히 있었잖아요?"
그 누구가 누구인지는 말 안해도 알것이다.
"크으 자신의 약점을 극복한 여인!! 멋집니다! 자 그럼, 오늘 고른 선물은?!" "에.... 제가 고른 물건은..... 장미꽃 머리핀이네요! 잘 어울리나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그 순간, 콰직-소리와 함께 케인이 게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평소 그녀가 신고다니는 하이힐의 힐 부분이 그대로 케인의 발등에 직격해버린 것이리라. 서둘러 응급조치를 하는 잭을 보며 한숨을 내뱉은 리안은 서둘러 수습을 하기 시작했다.
"네.... 정말 잘 어울리네요!"
아니, 정정한다. 살기위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정말로요? 대작님의 말이니 믿을께요!"
말은 그리했지만 루인은 굳이 따지자면 미녀였다. 2학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성숙미와 더불어 아직 피지않은 꽃봉오리같은 풋풋함이 올라오는 외모는 묘한 밸런스를 자아내고 있고, 더불어서 외모는 확실히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내부가 남자보다 더한 짐승이라 문제지.
"그럼 자 R양?코멘트 읽어주시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보자....
'안녕하세요! R언니! 전 지금 백궁 2학년에 재학중인 여학생입니다! 어 음..... 아무래도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거 같아서, 이름은 노코멘트!!' "
남자-남자에 이어 이번엔 여자-여자라는 의외의 조합이라는 것일까, 그들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짜증을 팍팍내는 그녀를 팝콘 한사바리 가져다 두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 ' 사실 R양을 무대에서 처음 본 건, 저번 1학년들 입학식때 그 무대 위였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여자도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답니다. 사실 제가 지금 R 언니라고 부르는 이유도, 저랑 같은 학년이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멋짐에 반해서라고 해야 할까요?'
어머나.... 사연의 주인공 분도 어디까지나 가능한 이야기인걸요?
'집안에서 항상 억눌리고 하다보니까 솔직하게 무언가를 할줄 몰랐던 저에게 있어서, R 언니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그걸 보고 저 또한 저만의 길을 가야할 거 같다고, 이번 학년 끝나고 집에 돌아갈 일이 있다면 당당하게 부모님에게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저에게 그러한 계기를 주고 용기를 준 R 언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열의 장미꽃이 새겨진 머리핀을 선물합니다!' " "오!! 동급생의 편지입니다!! R양은 과연 어떤 반응을?!"
다들 실망의 눈초리다. 왜 죄다 가챠 박스가 대 성공인거지? 이왕이면 '우호옷!! 루인쟝 다이스키!!' 이런 내용이 나와야 재미있을텐데라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루인은 숨을 몰아쉰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음, 솔직히 당황스러워요. 이런 편지를 받는거 자체가 상당히 처음이라서요. 사실 저희 집안이 워낙 자유분방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음..... 네, 죄송해요. 뭔가 조언을 해드리는건 어렵네요. 하지만 말이에요. 지금 이미 결심을 하시고 발을 땅에 딛으셨잖아요? 지금의 신청자 분께서는 이미 많은 것을 움켜쥐신 거에요!! 꿀릴거 없어요!! 자신이 믿는 길이라면 그 길을 따라 올라가세요!! 결말이 어떻든 간에 손에 쥐고 날아오르는건..... 신청자 분이시니까요!! 선물 감사합니다!!" "네!! 여성 답지 않게 박력 넘치는 R양의 답변, 정말 잘 들었습니다!! 이걸로 저희 선물 소개 방송 2일차는 끝!! 오늘 저녘은 저, MC 대작의 선물 소개가 있을 예정입니다!! 어제 못한 방송까지 모두 Heart!! Burning!!그럼!! 대바이!!"
그렇게 방송이 끝나고, 그들이 각자의 휴식을 갖기위해 물러나는 순간, 리안이 등받이에 등을 파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마 어제 수업때 있었던 일을 복기하고 있는 것이리라.
"붉은 별이 겹쳐지는 흉성의 기, 그리고.... 어째서 칼 교수님은 그 말을 듣고 그냥 조용히 넘어간것일까...."
그의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바둑판이 그려진다. 자신이라면 다음 수는 어떻게 둘것인가, 하지만 그는 천재가 아닌 노력하는 범재였다. 고민만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저녘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답하며 윤의 말에 답한다. 실제로도 그리했다. 언제까지 달고 있을수 있는 간판도 아닌데 거기에 집착하고, 또 그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해 파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게 보면, 최소한 윤은 자신의 간판에 어울리게 행동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윤의 푸념에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천천히 멈춰서서 그의 말에 답변했다.
"그런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형님은 형님, 형님 어머니는 형님 어머니니까요. 어디에서 누구에게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어요. 지금 형님이나 저나 땅에 발을 딛고 잘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렇게 답하면서 천천히 걸음을 재차 옮기고는 천천히 입에 지퍼를 잠그고, 자물쇠를 채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형님은 그런 사람이야. 오히려 형님은....
"뭐 그래도.... 차라리 형님이 에스카마리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면...."
훨씬 더 좋은 모습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자신과도 같은 천방지축이 되지 않았을까,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며, 그는 가볍게 입을 열어 보였다.
"아, 이번에 천문학 수업을 들었습니다, 만은 거기서 들은 정보는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제 귀는 현궁이랑 기린궁 빼고 다 달려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의 부원들은 각각 청궁, 주궁, 백궁에 포진되어 있었다. 그는 일부러 9할의 진실에 1할의 거짓말을 흘림으로서 윤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