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생각은 제가 보기엔 중2병이거든요. 라고, 나는 신랄하게 덧붙였다. 악당은 그렇게 무른게 아니니까. 내가 영웅이 되고 싶다고 결심하게 만든 계기인, 과거의 그 사고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비참하고, 끔찍해서, 지금도 나는 가끔 기숙사에서 구역질한다. 영웅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사상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그가 그렇게 상냥한 성격이라면.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참히 난도질 할 수 있을리가 없고, 그렇게 한다면 끔찍하게 후회하게 되겠지.
누군가가 상처입고 후회해야 만들어지는 영웅 같은건 절대로 납득 할 수 없다. 누군가가 상처입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영웅이 되고자 하는 나에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할 수 없다.
"과연, 이해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구나. 사실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면 의견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걸 말하기 위해선 하루의 자해까지 털어놓아야 한다. 나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에게 충분히 고마웠으니까.
"그래도 아끼는 후배라면, 한번쯤은 대화를 나눠보세요. 요즘....힘들어 보이더라구요."
내가 아르바이트 하러 갔을 때, 사진 얘기를 꺼내자 그는 단박에 하루 팬클럽이냐고 반응했다. 그 말은 사진으로 인해 카페 평판이 떨어지거나 논란이 생기는데 나름대로 적잖이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겠지. 친한 선배가 달래주러 가면 그의 정신적 위안에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나는 간단히 조언했다. 이걸로 본의 아니게 카페에 쳐들어가서 다툰 값은 조금 갚은거야, 에릭 점장. 남은 값은 사태가 다 해결되고 나서 아르바이트비로 갚을게.
나는 별로 그를 비난할 마음이 없었다. 사실 오히려 조금 찔리는 마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루를 돕겠다고 했으나, 거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를 완벽하게 맹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상을 알기 위해 이것저것 참견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게 실망할까? 배신감을 느낄까? 슬퍼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조금은 가슴이 아프고, 확고하게 에릭을 믿는 그의 의리가 멋있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를 최근에 만났다며, 후배에 대해서 말해줬다는 모습을 보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릭 점장, 당신은 이제와서 악당 연기를 하기엔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네. 내가 모를 뿐이지, 당신이 상냥한 성격이라면 분명 좋아해주는 사람은 더욱 많을거야. 그러니까 그러면 안되지. 영웅을 만들기 위한 발판 악역으로 소모되어 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무슨 기분이겠어.
"아하하. 확실히, 고집이 세보이더라구요."
말로 설득하면 분명 최선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 제일 좋다. 그러나 나는 직전에 그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고집부리다가 서로 의념기를 부딫히는 사태까지 갔다. 요컨데 그도 어지간한 고집쟁이란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주변에서 말렸을 때 설득 되었겠지.
그러니까.
"거기에 동감해요. 자기가 악당이 될 수 있을 줄 아나본데, 그건 악당을 너무 얕보고 있는거죠. 최선을 다해서 박살을 내줄겁니다. 너는 악당 같은거 되지 못해. 그렇게 말해줄거에요. 네 앞가림이나 잘 하라고."
유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지만, 이래보여도 고집 부릴 땐 포기 안한다. 나는 철저한 열등생이다. 청월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나와, 가디언이 어울리는지 의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겁쟁이. 그런 나라도 어설픈 악당 놀이를 깨부술 수 있단걸 보여주마.
그녀가 테이블 위에 무릎꿇고 올라갔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표정에서 이어지는 돌발 행동은 시무룩해져 있던 나에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이후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상냥한 손길과, 이어지는 경직되지 않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그녀는 그대로 테이블에 앉아 나를 보다가, 자연스럽게 내 곁에 달라붙었다. 우리가 사귀었던 그날 밤 같다. 휴우, 하고 긴장되있던 몸과 마음이 늘어지는걸 느낀다. 그 날 그렇게 두근거리고 긴장되었던 밀착이, 지금은 어쩐지 날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녀의 체온과 박동이 느껴지고, 서로의 거리감이 좁혀지는게, 나는 비로소 평소대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방금 조금 고양이 같았어."
따라서 나는 어색하거나 씁쓸한 미소가 아닌, 평소처럼 부드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어루 만졌다. 그야말로 새침스러운 고양이를 어루만지듯, 너무 지나치고 과격한 접촉에 놀라지 않도록 신경쓰면서도 상냥하게 애정을 표시하는 것이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덤덤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학생으로써, 열등생으로써, 뒤늦은 출발을 했던 나는 조바심이 생겨서 부장님에게 무례를 저질렀다고. 고민하던차에 OwO의 조언에 의해 그녀가 곰돌이 인형을 좋아한다는걸 듣고, 사과를 위해서 선물을 해주고 싶다고. 다만 연인을 사귄 직후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게, 오해의 소지도 있을 뿐더러 네게...면목이 없기에 사과하고 싶었다고. 당황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진솔하게 털어 놓았다. 한심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런게 나인걸 어쩌겠는가. 그런 만큼, 솔직한 감정도 부끄럽지만 가장 끝부분에. 그녀의 눈을 마주치면서 털어놓았다.
"...우리가 사귄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서희 널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오해가 생길만한 부분은 숨기고 싶지 않았고. 내게 부장에게 그런 의도는 전혀 없으니까. 그래도 서운하게 만들었다면....정말 미안해."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섭섭해할까봐 선물을 준비해왔지만, 이 부분은 아직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사과하면서 동시에 선물로 달래준다던가는, 너무 치사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