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준비하려던 하루는 화현의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입니다. 어찌되었든 손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맞으니, 하루는 종종걸음으로 잠시 사라졌다가 시원한 물 한잔을 들고 응접실로 돌아옵니다. 물 한잔을 화현의 앞에 내려놓고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하루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 아직 그 아이는 몰라서요. 그 아이는 이런 문제는 잘 알지 못하니까.. 그사람이 손을 뻗기 전에 제가 막고 싶은거에요. 팔불출이라고 말하실지도 모르지만 그 아이는 순수한 아이니까요. 이런 뒤에서 벌어지는 싸움 같은건 잘 몰라요. 그래서 이런 걸 알기 전에 제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루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현을 향해 눈을 불안한 듯 이리저리 굴리며 말합니다.
".. 전 그냥 그 아이가 이런 것 따위는 모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나아가길 바래요.. 그래서 전 그냥 그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것 뿐이구요.. "
그것만이 자신의 바램이라는 듯, 힘없이 중얼거린 하루는 자신의 손을 불안한 듯 매만집니다.
뭐 사실 이제와서 에릭이 갑자기 "오케이 미안, 그만둠." 이러긴 또 애매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시빌워가 한번쯤은 터지긴 하는게 맞긴 한 것 같아. 서로 진심을 가지고 부딫혀서 묵은 감정이 남지 않도록 다 털어놓고 결판을 짓는게 깔끔하다고 생각해. 다만 그 전까지의 빌드업이 너무 길어지면, 그 묵은 감정이 지나쳐서 독이 될까봐 걱정되서 하는 이야기.
물이 든 컵을 손에 쥐고... 가만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 라고 말하는 것에서 소중한 사람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 에릭 선배의 손길이 닿기 전에.. 막고 싶다. 구해낸다... 흠... 흠... 나도, 카사 씨를 안다. 잘 알아? 라고 묻는다면.. 아니... 의뢰 한 번 같이 갔고, 태양왕 게이트에서 만났고.. 그게 끝인 걸. 하지만, 그 사람은 꽤... 강한 사람이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알고, 때로는 폭발적인 힘을 내기도 하는 사람이다. 정교한 싸움이 아니라 기습, 저돌적인, 난투... 막 그런 용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약하지 않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신다. 원래라면 관련없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지만, 나도 이 사건에 끼게 된 이상... 남일처럼 생각할 수 없는 몸이다. 에릭 선배를 돕겠다~ 고 말은 했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내가 원하는 걸 한다. 즉, 이것도 내가 끼어들어 어떻게 해보고 싶다. 왜냐고????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루 씨. 관련 없는 사람인 제가 말하는 게... 조금 이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그 사람을 너무 감싸는 거 아닐까요?"
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불안하고 몰린 사람일 수록 뜻을 왜곡하여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없게!
"누군가 손을 뻗기 전에 그 사람을 지키고 싶다. 보호하고 싶다. 라는 바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루 씨께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그 사람도 알고 계신가요? 그 사람이 안다면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 그 사람이... 더 슬퍼하거나 더 괴로워하지 않을까요? 누군가,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못된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그것을 당신이 안다면... 제일 먼저 소중한 이와 함께 어떻게 할지 상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하다못해 교사분들에게도 도움을 구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나아가는 것... 그게 정말, 그 사람에게 좋은 걸까요? 그게 지키는 걸까요? 당신의 희생으로 무지에 가까운 순수를 간직한 채, 앞으로 나아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오면... 그가 정말로... 뿌듯해 할까요?"
나는 조금 고급진 룸카페에서 앉아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요 근래 들어서 제일 긴장된다. 어쩌면 태어나서 가장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검귀의 공격을 받아낼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평화로운 장소에서 왜 그러고 있냐고?
틀렸어! 이 곳은 조만간 치열한 결투의 승부장이 된다. 바로, 연인끼리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또 어쩌면, 꽁....냥거리기도 하는....승부장. .....긴장한 나머지 스스로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헛소리가 자중이 안된다.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주자면, 나는 최근에 사귀기 시작한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엔 나누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기에, 이렇게 방을 빌리는 형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떨린다. 왜냐면 그녀는 귀엽고, 나는 연애 경험이 없기 때문이야. 심지어 그녀에게 면목 없는 일을 하나 설명해야 된다는 핸디캡까지 안고 있다. 후후....
나는 힐끔, 포장되있는 박스를 한번 쳐다본다. 거기엔 커다랗고 귀여운 곰돌이 인형이 있다. 또 한번 힐끔, 내 방패 아래에 넣어둔 낡은 검을 본다. 거기엔 사연이 깊은 코스트가 하나 있다. 거기에 지훈이의 어드바이스를 살리기 위해서, 멋있는 정장차림에 머리도 손질하고 왔다. 이것이 오늘 그녀를 위해 준비한 나의 선물. 이걸로 할 수 있을까....!? 부디 기뻐해줬으면 좋겠다. 테이블 아래에 있는 다리는 벌벌 떨리고 있지만, 이건 불안이 아니라 기댐과 설렘이라고 애써 변명해본다.
하루는 화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을 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과보호일지도 모른다. 카사를 내버려두면, 순탄치는 않을지라도 혼자서라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보호하려고 애쓸 수 밖에 없는 것은..
" 그치만 .. 이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분명 그 아이에게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알 수 있게 해주는 정도는 할 수 있겠죠. "
하루는 사랑이라는 이유를 꺼내들었다. 카사를 사랑하니까, 적어도 그 아이가 이것에 대처할 수 있게 준비가 된 순간까지는 자기가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카사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생각이었다.
" 저도 이 일이 이렇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저도 에릭과는 오랫동안 친구였으니까, 그와 척을 지는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아요.. 될 수 있다면 그가 마음을 바꿔서 다시 이런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길 바랄 정도로요. "
그치만 그가 지금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오만인지 아니면 자기희생인지 모를 것으로 무장하고 악역이 되려하는 그 사람을 저 혼자서 바꿀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하루는 호소를 하듯 화현을 보며 말하다 이내 천천히 숨을 몰아쉽니다.
" ...다시 모두가 이런 방식을 쓰지 않고 영웅을 꿈꾸던 때로 돌아갔으면 해요. 전 적어도 카사 뿐만 아니라 에릭도, 화현군도, 다른 학생분들도 모두 영웅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
제가 바라는 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에요. 하루는 그렇게 말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듯.
나는 오랫만에 공원 벤치에 앉아서 메모장을 열심히 보는 중이었다. 전학 올 때 적어뒀던 계획표를 점검하는 것이다. 허선생 챌린지, 성공. 동아리 가입하기, 성공. 친구 사귀기, 성공. 게이트 의뢰, 성공. 응. 꽤 좋지 않은가? 흡족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본다. 얼마전만해도 여기서 체육복을 입고 뒹굴고 혼자 궁상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왠지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만 가자!
"어라?"
그렇게 의기 양양하기 주먹을 쥐며 파이팅 하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쪼그마한 키. 양갈래 머리. 귀여운 얼굴.....어디서 본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밝고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 위화감이 있어서, 나는 조금 더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에 잠겨야 했다.
아.
떠올랐다. 스스로가 트라우마에 실려 기억속에 쳐박아버렸던 어린 시절, 나는 저 아이를 본적이 있다. 분명히...
사랑. 그 말에 살짝 웃었다. 낭만적인 단어를 듣고, 그 감정에 취해버려서? 아니. 오히려 그 단어가 이해되지 않아서. 누군가를 좋아한다. 라는 감정은 나에게 없는 것 같았으니까. 좋아해! 라는 말도 그저, 호불호의 호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사랑이란 말을 들었으니... 그렇기에, 그녀에게 먼저 말했다. 모진 말이라 들어달라고. 상처입히는 말이니, 무시해 달라고.
"저는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해요. 부모님께 사랑 받지 않았어? 라고 물어본다면... 모성애와 부성애는 받았을지언정, 사람으로써의 사랑은.. 받았을까? 하면서 갸웃거려져요.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 사람을 위해 고통을 감내한다.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을 공개한다? 그동안 당신 스스로가 받을 상처는? 지금도 이렇게 괴로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다고요?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라는 것은... 어떻게 아나요?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당신이 받는 상처는요?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사랑이라 말하는 것이라면.. 저는 사랑을 하지 않을래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인 상대가 자신은 지금까지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통받을 동안에 나는 그저 당신의 품 안에서 살았을 뿐이었다. 라며, 더 큰 상처를 입는다면 어떡해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과보호. 아니면, 집착. "그건, 집착에 가까워 보이네요." ...오늘따라 막 나가는 구나.. 나..
"바라는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해주세요. 가령, 카사 라는 분과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을 하고, 서로의 감정을 이야기 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에릭이라는 분과 대화를 나누어 설득을 하면 되겠지요. 만약, 그 사람이 대화도 설득도 안되는 상황이라면... 다른 방법을 제시하면 돼요. 영웅을 실현시키는 것에는 악당이 필요 없어요. 가디언 아카데미가 왜 있겠어요? 저마다 훌륭한 가디언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잖아요. 즉, 교육. 교육을 통해 영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돼요."
내용물은 없지만, 물방울만 또르르륵 굴러 떨어질 뿐인 컵을 쥐었다.
"아무튼, 힘내시라는 의미도 담아서. 그림을 그려드릴게요. 어떤 게 좋나요? 화제전환 화제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