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거의 같은 방향이라고 말한 거고. 시무룩하게 변해버린 당신의 얼굴에, 단랑은 고개를 살살 저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게 맞았다. 그것도 그것이고, 단랑에게는 오늘 귀갓길 내내 평생 생각도 못 해봤을 받아들이기 힘든 일에 고초를 겪은 사람을 상황 종료됐답시고 혼자 보내는 것은 너무 매몰찬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자신과의 만남을 징검다리 삼아 이 세계를 접해버린 것이기에, 당신에게는 가이드가 필요하기도 했고, 기왕이면 이렇게 된 것- 연관이 있는 자신이 그 노릇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단랑의 생각은 그랬다.
"그 노리개가 따뜻해진 게 아냐."
우리의 질문에 단랑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너한테 옮겨간... 기氣라고 하면 될까? 그게 네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이미지대로 그 노리개를 통해서 구현된 걸 거야. 그 노리개, 그러는 데 쓰는 물건이 아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덕분에 같이 그 유충을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됐네."
그 노리개는 아직도 당신의 품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괴이의 막이 부적으로써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예쁜 장신구일 뿐이지만. 그래도 소년에게 말해보면 다시 고칠 수 있기야 할 것이다(아마도). 당신이 다음 번에 건넨 질문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아직 그걸 그렇게 오래 유지하진 못해...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는 감각을 흐린달까, 존재감을 흐린달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단랑의 설명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불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덕분에 쥐어도 뜨겁지 않은 불로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지. 사실 여전히 제대로 다루는 법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익숙해지지 않는 편이 나은 걸까?
“그런 거구나. 추워지고 나서부터 따뜻하게 느껴져서 난 노리개가 경고라도 했던 걸까 생각했어.”
결과적으론 틀린 예상이었지만 상황을 해결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랑의 말에 귀 기울여 듣던 우리가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일찍 나온 몇 번은 함께 등교했던 적도 있겠구나, 짧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 앞으로는 전보다 자주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겠네.”
우리가 웃으며 얘기했다. 질문이 있냐는 말에는 조금 고민했다. 궁금한 건 많았다. 괴이라는 것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 오늘 만난 것처럼 악의를 가진 것들이 많은지,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충치곤... 좀 크지 않았는지. 하지만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궁금한 걸 모두 물어봤다간 단랑을 아주 오래 잡아두어야 할 게 분명했다. 입가에 힘을 주고 계속 생각하던 우리가 단랑을 보고선 물었다.
"아마 네가 무의식적으로 위기감을 느껴서 그랬던 걸 거야. 그게 경고 기능이 있었긴 한데... 네 위기감을 먼저 느끼고 거기에 반응하느라 그게 작동을 하지 않았나 봐."
단랑은 주머니에 손을 폭 찔러넣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들어올려서 보면, 그것은... 매달려 있는 옥패가 까만색인데다 가운데에 커다란 금이 딱 깨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가 당신에게 건네준 것과 상당히 똑같은 노리개였다.
"원래 같으면 여우로 변해서 네 발목을 물고 잡아당겨야 하는데, 나도 이게 뜨거워져서 알아챘거든."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쿡 집어넣었다. ...이야기 한 번 변변히 못 나눠본 소년과 커플 아이템을 갖고 있었다는 건가.
"...그게 뭐하는 물건인지 너한테 정확히 설명을 해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처 정확히 말해주지 못했지만- 괴이라는 건 일종의 밈 전염을 통해 확산되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괴이에 대한 이야기나 사실을 접하면 접할수록 조금씩조금씩 괴이의 세계에 가까워지게 되거든. 너한테 그 영향이 조금이라도 덜 미치게 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마저도 하지 않기로 했었지만, 그 유충이 하필 지하상가에 숨었다가 너와 마주칠 줄 알았더라면... 얘기해 주는 게 나을 뻔했다."
단랑의 말맺음은 조금 씁쓸했다. 괴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괴이의 세계에 가까워지는 것... 단랑이 말한 이제부터 내가 네 눈에 좀더 잘 띌 것이라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의 이야기였다. 괴이로부터 거리를 두고 평범한 삶을 계속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그러나 당신에게선 참으로 별난 대답이 돌아왔다. 별나게 해사한 웃음과 함께. 전보다 자주 마주치게 될지 모르겠다고.
"그랬으면 좋겠어?"
씁쓸한 심정과는 별개로 그는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괴이라는 것은 종류가 아주 다양해 괴이에 대해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던가, 악의를 가진 것들도 많지만 사람들이 활발히 살아가는 생기가 가득한 장소에 침투하는 놈은 드물다던가, 새로운 대책을 준비해 주겠다던가, 성충이 된 다른 차원의 벌레 신을 보면 그게 유충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던가... 그러나 당신이 건네온 질문은 전혀 의외의 질문이었다.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이라는 말은 당신의 두 가지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자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인사해도 되냐고. 피했던 시선을, 단랑은 당신에게로 가만히 되돌렸다. 빨간 눈이 깜빡인다.
여우로 변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단랑의 말을 듣는 우리의 표정은 내내 아주 신기한 것을 접한 사람처럼 보였다. 단순히 부적 같은 용도일 줄로만 알았지, 직접 여우로 변하기까지 할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날 봤던 것처럼 하얀 여우였을까? 이상한 호기심이 따라 붙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응, 그때 편지로 말해줬던 것처럼 말이지? 지금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아까도 도와주러 와줬잖아. 해결도 잘 됐고.”
오지랖에서 나온 괜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단랑의 말이 이상하게 자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얼떨결에 전혀 모르던 세계와 연결되긴 했어도 그게 누구의 잘못이라곤 생각 않는 우리였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난 만나면 반갑고 좋을 것 같아서.”
물론 그러려면 내가 더 일찍 다녀야겠지만, 덧붙인 우리가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기색은 가시고 조금 더 친밀한 웃음으로 바뀐다.
“그럼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날엔 내가 먼저 인사할게.”
어쩌면 가까워질 리 없었을 텐데. 우리는 이 낯선 세계가 두렵기도 했지만 새로운 관계를 열어준 것 같아 조금 즐겁기도 했다. 우리의 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가벼운 걸음은 얼마 남지 않은 집까지의 거리를 빠르게 줄여나갔다.
물론 일종의 부적은 맞았다. 다양한 기능이 있었을 뿐. 원래대로라면 당신을 괴이한 일들에게서 서서히 밀어내는 물건이었지만... 지하상가에 숨어있던 그것이 일을 그르쳤다. 비록 그것은 퇴치되었고, 지하상가의 이용객들이 그것에 해코지를 당할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지만, 당신의 발목은 평범한 세계의 이면에 또 한 발짝 깊숙이 내딛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 말대로, 우선은 최선의 형태로 해결된 것이 맞긴 하다. 얼마든지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었으니까.
"그래?"
당신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은 날아가고 웃음만이 남자, 단랑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려다 말았다는 느낌. 그것이, 왜인지... 비단 당신에게뿐만 아니라 단랑에게도, 무언가가 시작되어버리고 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느낌에 단랑은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조금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엄마나 할아버지한테 쟤를 소개시켜줬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사서 엄청 놀림받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랬으면 좋겠네."
하고 단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웃고 있으니, 조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웃는 표정은 제대로 지을 수 있는 게 신기햇다.
"조심히 들어가. 내일 봐."
희한하게도, 주말에 본가에 한번 들러볼 일정보다, 내일 학교에서 당신을 만날 모습이 좀더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래저래, 무언가 낯선 게 시작되는 느낌에, 단랑은 현관으로 발을 뻗는 당신에게 막연히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다.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편지 내용은 아마 "안녕. 막상 이렇게 또 편지를 보내려니 기분이 이상하네. 혹시 오늘 방과후에 시간 괜찮아? 만나서 이야기할 일이 있어. 심각하거나 한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야. 오늘 방과후에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언제가 괜찮은지 적어서 나한테 편지해 줘." 정도였을 것 같네요. 그리고 교실에서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면, 단랑이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그맣게 끄덕, 하면서 눈짓 보내고..
학교에 마법처럼 금빛으로 바랜 햇살이 내려앉으면서, 활기와 생기로 가득찼던 학교가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는 시간. 미술실로 가는 복도를 걷노라면 며칠 전 그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그때와는 조금 달리, 초대를 받아서 가는 길이다. 점심시간 때, 책상에 놓여있었던 익숙한 필체의 쪽지. "미술실에서 만나" 라고 적혀 있는.
미술실 문을 드르륵 열어보면, 그래, 거기에는 당신이 기대하고 있던 그 소년이 있을 것이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단랑이, 미술실의 투박한 나무 스툴에 앉아있다가 당신에게로 그 빨간 시선을 들어올리고. 다만... 소년의 허리춤에는, 당신이 그때 보았던... 왠지 엄청나게 푹신푹신할 것만 같은 여섯 가닥의 꼬리가 흘러나와서는, 강아지풀 흔들리는 마냥 살래살래 흔들리고 있다. 머리에는 예의 그 여우귀가 돋아 있고.
"응, 왔구나."
눈이 마주치면, 단랑은 당신에게 반갑게 인사해온다. 얼굴에 딱히 웃음기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표정없는 얼굴에 조금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늘 신발장에 있던 쪽지가 오늘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볼세라 잽싸게 쪽지를 챙긴 우리가 종이에 쓰인 글자를 찬찬히 읽고선 작게 웃었다. 막상 학교 안에선 인사 정도 하는 데면데면한 사이처럼 굴면서 이런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어쩐지 즐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자주 웃고 있는 우리라서 수업이 마치기 전까지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딱히 수상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늘 기분 좋은가 보네—. 하는 말 정도만 들었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느릿느릿 짐을 쌌다. 누구보다 빠르게 집에 갈 준비를 하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곧바로 하교하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다른 반 아이들로 북적대는 복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 우리가 슬그머니 교실 밖으로 나왔다. 조용하지만 즐거운 기색이 담긴 가벼운 걸음이었다. 미술실 문을 열었을 때는 우리가 예상했던 상대가 있었다. 그날은 어쩌다 보게 된 거지만 오늘은 알고 보는 단랑의 모습은... 꽤 폭신해보였다! 작게 움직이는 꼬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우리가 뒤늦게 말했다.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한 얼굴을 하며 단랑을 보았던 우리는 저도 모르게 다시 꼬리를 바라봤다. 아차, 하는 얼굴로 민망하게 웃은 우리가 뺨을 긁적였다.
“미안, 꼬리가 멋있어서. ...이런 말 실례인가? 그랬다면 미안해.”
그제야 본 목적을 떠올린 우리가 단랑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을 근처에 내려놓은 우리가 바른 자세로 앉아 단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단랑의 여우꼬리들이 살랑, 하고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와 흔들린 건지, 그가 가볍게 흔든 건지, 산들바람이라도 한 차례 쓸고 지나간 마냥 부드러운 하얀 털들로 뭉쳐진 꼬리가 한 차례 찰랑였다.
"그래서 평소에 내놓고 다닐 때도 있었는데.. 넌 이제 이게 보이나 보구나."
그날 그 모습을 봐버린 게 어떤 계기가 되어버린 걸까. 단랑에게서 지금껏 못 보고 지나치던 어떤 면모가 당신 앞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여섯 꼬리를 사르륵 늘어뜨리고는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당신의 등 뒤의 한 지점을 가리키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밀어서 잠금해제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옆으로 슥 밀듯이 움직였다. 그와 함께 등 뒤로 미술실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왜인지, 뭐라고 해야 되나. 할 말이 있다고 쪽지로 방과 후에 아무도 없는 미술실로 불러내고는, 게으르게 기우는 금빛 햇살이 비쳐드는 미술실에 단 둘이. 청춘 로맨스에서 흔히 고백 장면이 나올 때 이런 배경을 즐겨 사용하지 않던가...? 당신이 눈을 반짝이며 건넨 질문에, 단랑은 용건을 꺼냈다.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을 좀 내어줄 수 있나 해서."
일반적인 고교 청춘 로맨스라면 확실히 데이트 신청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랑은 그 분위기에 초를 쳤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당신의 머리... 정확히는 머리 위를 가리켰다.
오늘은 늦어도 너무 늦었죠... ㅇ<-< 주무시고 계시겠네요...... 어떻게 이틀 연속으로 이런 악재가. 8.8
우리의 여우귀는 실제로 머리에 여우귀가 돋아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에요(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괴이와 접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심상에 이미지로 남았는데, 우리의 안에 깃들게 된 마력(마력이라고 표현하는 게 전달하기 쉬울 것 같네요)이 그 이미지대로 마치 진짜인 것처럼 물리적 환상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할까요. 괴이와 근접했을 때 반응해서 나타나게 될 거에요. 단랑이의 여우꼬리처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요.
보통의 사람은 보지 못한다는 단랑의 말에 우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기뻐하는 건 확실히 아닌 듯 보였으나 슬픔이나 짜증의 기색이라기에도 애매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속은 꽤 시끄러웠다. 그날 미술실 앞을 지나간 걸 후회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괴이와 엮인 게 달가운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테니까. 살랑이는 꼬리를 본 우리는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우리는 단랑이 제 뒤를 손으로 가리키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를 돌아보자 부드럽게 문이 닫힌다. 누구에게 들킬까 살금살금 들어와놓고 문을 닫지 않았다니. 바보 같은 실수에 괜히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 끝을 꼬았다.
“미안, 문 닫고 왔어야 했는데 조심성이 부족했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상황 꽤 낭만적이다. 단랑의 뒤로 저물어가는 해는 따뜻한 빛을 내고 있었고,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따금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거기에 조용한 미술실에 단 둘뿐이라니. 누군가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게 우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단랑이라면 더더욱. 단랑이 괜찮다곤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단랑에게 약간의 부채감이 있었다. 비밀과 꼬리 때문에. 그 부채감은 단랑의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이고 어떤 일에도 협조할 마음을 먹도록 도왔다. 단랑의 물음에 우리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주말 이틀 다 괜찮아.”
우리가 귀가 있을 만한 자리를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도 최선을 다 하기로 약속했으니 했던 말은 지킬 생각이다.
“그때 지하상가에서 나왔던 곳 있잖아. 거기가 너희 집이랑 우리집 중간쯤 되나? ...다른 곳이면 말해줘! 내가 그쪽으로 갈게.”
말한 우리가 다시 무언가 굳게 맘 먹은 듯한 표정으로 단랑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아니... 그건 내가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방 얻어서 사는 하숙집." 단랑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우리 집 본가는 기차를 두 시간 넘게 타야 돼. 예성시에 있거든. 그래서 아마 너희 댁 부모님한테도 말씀을 드려야 할 거야."
예성시라고 한다면, 남부 지방에 있는 두 도의 경계선쯤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남해와 접해 있는 관광도시였다. 남부 끄트머리까지 내려가려면 확실히 기차로 두 시간 정도는 소요될 것이다. 단랑이 제의한 여행길이라는 건 꽤나 먼 길이었다.
"빨리 가는 방법이야 있지만 그건 어지럽고 불편하니까 논외로 두고.."
뭔가 좀 떠올리기 꺼림칙한 걸 떠올린 듯 단랑의 미간에 조그만 실금이 스쳐갔다. 당신의 머리 위에 달린 그 귀와, 그의 등뒤에 흔들리고 있는 몽실한 꼬리들만 아니었으면 해수욕장이 유명한 예성시로 놀러가는 즐거운 주말 피서 여행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그 귀와 꼬리들이 아니었으면 이 소년과 이렇게 빨리 안면을 트지도 못했을 테니,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을 이런 데 갖다붙여도 될까.
"네가 그렇게 멀리 가는 게 안된다면, 본가에서 어르신을 모셔올 수도 있으니까 곤란하다면 언제건 말해줘..." 하고 말을 끝맺으려던 단랑은, 당신의 심각한 표정에 따라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적였다. "글쎄,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복채나 새전 삼아서 뭔가를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유부초밥이라면 사족을 못 쓰시니, 유부초밥을 가져가면 어떠려나."
늘어진 꼬리가 하나로 겹쳐지나 싶더니, 이내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고개를 들어보면 여우귀는 온데간데없이, 단랑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평소의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고. 머리를 만져보거나 거울을 보면 당신의 여우귀도 사라졌을 것이다. 단랑은 추가적인 용건이 있는 듯, 당신에게 다른 질문을 꺼냈다.
"맞아... 우리 너 혹시, 이전에도 이상한 걸 봤다거나, 굿 같은 걸 받아봤다거나 한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