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젤린, 에반젤린. 사랑스러운 나의 딸.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한때, 제국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어미의 외모를 빼다박은 그녀는 물결치듯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자신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증오했다. 빛나는 태양 아래서는 검푸른 빛을 띄며 반짝이지만, 밤하늘 아래에서는 새카맣게 물들어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마저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그 머리카락을. 황제가 제 어미에게 반한 이유가 그 신비로운 빛깔 때문이었다고 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황제의 딸로 태어났다. 에반젤린은 원한 적 없었지만 아름다운 어미 덕에 수려한 이목구비에 화장 없이도 앵두처럼 말갛게 빛나는 입술, 유약한 인상을 줄만큼 희디 흰 피부까지, 그녀는 미인의 수많은 조건들을 한몸에 타고났다. 하지만 그 어여쁜 외모조차도 그녀의 눈빛 앞에선 그 힘을 잃는다. 자색을 띄는 눈은 황가의 혈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특징이지만 그녀만큼의 힘을 가졌던 이는 없었다. 제 속내를 감추는 것에 익숙해 언제나 나른한 듯 눈을 내리깐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선이 닿은 이는 홀린 듯이 멈춰설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에반젤린에게는 있었다.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투쟁심,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광기, 분노, 슬픔, 그 모든 것을 억지로 눌러넣은 듯한 눈동자는, 이제는 단 한 사람 앞에서만 풀어진 민낯을 보여주었다.
167cm, 작지 않은 키에 얼핏 마른 듯 보이지만 잔근육이 단련된 몸매에 걸쳐지는 옷은 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갑주일 때도 있었고,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드레스일 때도 있었다. 주로 남성이 입을 법한 르댕고트를 드레스 위에 걸치거나 정장을 입기도 하는 등, 옷차림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 편이다. 장신구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목에 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나는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다. 그녀의 목덜미에 남은 짧은 상흔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에반젤린이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실제의 반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서사는 그녀가 황제의 관을 쓰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당위성을 만들어주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피를 묻혔다. 그것이 그녀의 적이든, 친우든 간에. 자신의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게 설령 피를 묻히는 일이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결단을 내림에 있어선 냉철하고 단호했고, 적에게 맞설 때에는 잔혹하고 지독한 그녀는 대단히 강하면서도 고귀해 보였다. 스스로 보고 있는 시선 끝이 어디에 있든,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저 곧게 나아가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뒤를 따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황제의 관을 머리에 얹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황제였다. 무엇을 하든 거리낌이 없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에반젤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느껴지는 중압감을 떨쳐내며 그녀의 손에 쥐어진 제국의 고삐를 이끌어낼 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이는 단 한 명 뿐이었다.
희미해진 옛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듯 쥐던 어머니, 자연스럽게 뺨을 지나 눈가를 매만지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는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실은 멍청한 여자였다. 황제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지만, 그만큼 싫증도 빠르게 냈다. 어머니는 황제의 사랑을 온전히 독차지 했던 시간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시간속에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에반젤린의 눈가를 쓰다듬던 손길도 실은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의 배로 낳은, 아름다운 자색의 눈동자. 불행하게도 에반젤린은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어머니가 자신을 통해 황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아챌 정도로. 그런 어머니지만 에반젤린은 미워하지 않았다. 미워할 수 없었다. 후궁의 자식으로 태어나 궁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녀의 삶 속에서 반쪽이나마 사랑을 나눠줄 상대는 어머니 뿐이었으니까. 그런 어머니가 죽었을 때, 에반젤린은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오열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렇게, 그녀는 황제가 되었다.
레아, 아슐레아. 에반젤린의 입안에서 매끄럽게 구르는 이름은 어느새 잃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아슐레아의 앞에서는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도 있었고, 피곤에 찌든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슐레아에게도 감춰야만 할 것이 있었다. 이따금 자신의 속을 날카롭게 후벼파는 흉통, 문득 치솟아오르는 열기에 차라리 그녀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 제 옆에 남은 온전한 것이라고는 황제의 관과, 아슐레아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망가지고, 뒤틀리고, 죽어갔다. 그런 그녀를 잃어버린다는 상상을 할 때면 에반젤린은 유리조각을 삼킨 것마냥 목구멍이 달아올랐다. 숨이 막혔다. 소중한 나의 친우, 아슐레아. 그녀는 에반젤린의 유일한 이해자였고, 또한 유일한 약점이었다. 너를 잃을 수는 없어. 너만 없어지면, 이런 괴로움을 느낄 이유가 없을텐데.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입꼬리에 매단 채, 에반젤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슐레아,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갖고 있는 여제에 대한 충성과 비밀스러운 감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열기를 뿜어내는 듯한 정열적인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기사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는 마치 누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머리카락의 관리도 잊지 않아서 그런지 머릿결 또한 윤기가 보기 좋게 흘러서 그녀의 머릿결이 상당히 좋다는 것을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황제의 일과 시간에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곱게 묶은 체로 활동하기에 돋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머리를 풀고 있을 때는 비단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고운 편이다. 아슐레아의 눈은 그녀의 굳건한 마음을 보여주듯,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차가워보인다고 할지도 모를 정도로 날카로워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만큼은 애정과 충심이 가득한 눈으로 변화한다. 그녀는 햇빛을 받아도 잘 타지 않아 기사 치고는 새하얀 피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똑한 코와 앙 다문 붉그스름한 입술, 그리고 오른쪽 입술 아래의 매력점운 그녀가 고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지만 그 고운 얼굴 한켠, 왼쪽 빰 위에 검에 베여 생긴 검상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아슐레아, 본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 가리지 않고 다닌다.
그녀의 키는 174cm의 여성으로서는 장신에 속하지만 기사로서는 작은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아슐레아는 게의치 않는 듯 신체의 단련에 신경을 써서 마른 듯 하지만 필요한 근육은 골고루 붙은 매끄러운 몸을 하고 있다. 몸 곳곳에는 그녀가 기사라는 것을 보여주듯 여자로써는 갖게 되면 상심에 빠질 정도로 곳곳에 검상 같은 흉터들을 가지고 있다. 본인도 조금은 신경을 쓰는 듯 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현실에 수긍하는 듯 하다. 평상시 황궁에서는 잠들기 전까지 제복을 입고 지내지만 잠들 때에는 평범하게 네글리제 같은 것을 걸치고 잠을 잔다. 평상복도 몇가지 가지고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제복이고, 외부 행사 등이 있을 때에는 갑주를 입고 돌아다닌다.
현 황제에게는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의 충심과 믿음,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아슐레아의 충심은 제국 내에서도 가히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황제를 수호하는 최후의 검과 방패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황제를 따른다. 물론 충심 안에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 말고도 연심이 섞여있지만 오롯이 충심이 연심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연심은 갖게 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커졌으면 커졌지 작아지거나 움직인 적은 없을 정도로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황제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
자신의 삶의 가치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황제를 지키고 보필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아슐레아의 우선순위는 자신보다도 한참 위에 황제가 있기 때문에 자신을 아끼지 않고, 황제를 지킬 수 있다면 자기희생을 주저않고 할 수 있는 희생정신과 신념을 갖고 있다. 정말로 자신을 황제의 검과 방패처럼 생각하고 있다.
원래의 성격은 순하고 여린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현 황제를 지키고 보필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부턴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지금의 냉철한 호위기사의 모습을 만들었지만 황제와 있을 때만큼은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는 한다.
귀신같이 사라졌지. 어째서 응애예요? 응애를 데리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은데, 아쉽다. 레아주가 응애인 건 정말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안녕, 아가. 난 오늘 선풍기를 꺼내야지 하고 생각해놓고서 낮에 방이 좀 서늘한 바람에 괜찮은데? 라고 생각했다가 지금 절절히 후회하는 중이야. 잠들 수 있을까. 아직 열대야는 시작도 안 했을 텐데.
이걸 내가 너무 늦게 봐서 만천하에 공개되었어. 하이드 기능 있는 거 난생 처음 알았다. 알았으면 진작 써먹었을 텐데. 안녕, 레아주. 집안일이 좀 있어서 바빴어. 바탕화면에 올라와 있는 아슐레아의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더라고. 양심의 가책이... 오늘도 비 조금 오더니 그치더라. 날은 선선해서 좋은데 밖에 왔다 갔다 해야 할 때 오는 비는 영 달갑지가 않아. 잘 있었어?
아프진 않았어. 레아주는 어때? 별 일 없었구? 날씨도 구리구리한데 컨디션도 안 좋으면 지나치게 처질 수도 있으니까. 기운 좀 빠지긴 했는데 저녁 먹고 하니까 조금 회복 됐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인생이 비몽사몽이야. 답레를 화끈하게 2번 연달아 몰아서 들고 오고 이런 일도 있어야 하는데 또 또 늘어지는 구간이 와버렸어. 내일... 아니면 모레... 안으로 들고 오도록 할게. 레아주는, 자려나.
약속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힙니다. 좀 맞아야 할 것 같아, 나. 미안, 레아주. 나를 때리기는 어려우니까 대신 나중에 에반젤린 뺨이라도 한 번 쳐 줘. 딱밤을 때려도 좋고... 으으. 미안. 몸은 그냥 좀 난조인 것 같아. 아픈 건 없는데 몸이 무겁고 머리가 종종 욱신거리는 정도. 레아주는 별 일 없구?
등장. 밥 잘 챙겨먹고 몸 건강히 더위를 이겨내고 계신가요. 아직 에어컨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날씨라서 다행이야. 레아주가 원한다면 한쪽 뺨정도는 내어줄 자신 있어. 내 주변은, 요새 세상이 흉흉해. 주변에 사기 당했다는 사람도 많고, 무슨 사고도 있다 그러고. 좀 좋은 일만 넉넉하게 일어났음 좋겠는데 말야. 덩달아 기운 빠진단 말이지. 레아주는 별 일 없으려나. 주말은 잘 보냈어?
나는 바보야. 요새 몸 안 좋은 거랑 바쁜 거랑 겹쳐서 못 왔어. 안 왔다고 해야하나. 이럴 때는 자꾸 의식적으로 주변 사람이랑 연락을 끊게 돼.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네. 그래도 나 어디 간 거 아니야. 레아주, 미안. 자야할 시간이 좀 지났는데 또 잠이 깨버렸어. 근황을 보고 하자면... 감기약 좀 받아 먹고, 직장에서는 뭐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직원 좀 더 짜내고 있고, 그런 식이야. 잘 지내고 있을까? 나 진짜 어디 간 거 아니야! 답레도... 아직 쓰고 있을 뿐이구. 으으, 항상 미안해. 레아주. 오늘 푹 자고 내일은 꼭 다시 올게.
항상 이렇게 드문드문 들러서 레아주의 말에 녹아내리는 걸 즐기고는 또 언제 그랬냐는듯 휙 사라져버리고. 확 내다 버려도 모자를 판에 계속 예쁜 말 해주는 거 보면 레아주는 천사가 아닐까. 안녕, 레아주. 퇴근하고 기절했다가 깨어났어. 이놈의 코로나 때문에 여전히 일상이 미묘하네. 코로나가 끝난다고 해서 진급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오늘은 어떤 하루였어?
오늘도 별다른 일은 없었어. 회사에서 개인 면담 같은 게 있어서 간만에 상사랑 얘기 좀 하고, 그러면서 내 성격에 대해서 또다시 자괴감에 빠지고. 개인 평가를 적는데 완전 패기있게 좋게 적어놓고 막상 말은 자존감 쭉쭉 깎아먹으면서 하고 그랬어. 으으, 결국 참지 못하고 콜라 마셨다. 단 거 끊는 거 너무 힘든 일이야. 레아주는 집에서 에어컨 틀어? 난 아직 선풍기로 버티고 있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이고야, 오늘 하루도 고생했네. 그래도 에바주가 자기자신에게 자신감을 갖고 그랬으면 좋겠다! 에바주는 자기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야!! 콜라... 나도 콜라 좋아해서 차라리 제로를 마시자 해서 제로콜라를 마시구 있어. 나도 아직 에어컨은 안 틀어.. 오늘은 날이 평소보단 덥지도 않고, 에어컨은 30도 위로 항상 올라갈 즈음에나 틀지 않을까...! 나도 선풍기에 매달린 상태야.. 여름 싫어..
집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늦게 답장 보내. 안녕, 레아주! 오자마자 자리에 앉아서 뭐 좀 하다가 앉은 채로 졸았어. 꾸벅 꾸벅. 자신감이란 게 참 어려워. 레아주의 말 듣고 조금은 힘낼 수 있을 것 같아. 제로 콜라는 코카콜라 보다는 펩시가 맛있더라. 라임향도 그렇고 그 거슬리는 단맛도 좀 더 잘 어우러지는 것 같고. 30도 위는 너무 빡센 거 아니야? 그렇게 온도 올라가는 지방에서는 정말 숨 막힐지도...
우리 통했어? 제로는 이제부터 펩시인걸로. 앗... 전기세... 전기세 맘 아프긴 한데 어쩔 수 없는 날에는 에어컨 켜야 해. 속이 답답할 정도로 날이 더운 날이 있거든. 진짜 공기가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런 날. 에바랑 레아랑 그런 날씨에 붙어 있으면 에반젤린은 잠깐 멍한 상태로 정신 놓고 있다가 이내 그 더위를 스킨십으로! 이열치열로! 이겨내려고 들 것 같은데. 레아는 어떠려나.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약해지는가. 에반젤린은 잡힌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레아는 강한 사람이다. 죽음 앞에 초연하지는 못할지언정 부상이 두려워 뒤로 물러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이의 입에 자신의 쓸모를 되새기며 가치에 대한 의문이 담긴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어쩐지 연민이 솟아올랐다. 가엽다. 그리고 그런 가여움이, 에반젤린은 기꺼웠다. 생각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에반젤린은 여전히 떨리고 있는 레아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말끝에 옅은 웃음기를 매달며 상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조금씩 떨림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그래야지. 지금 레아는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몸에 불안과 걱정이 깃들어 있으니 쉬이 회복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에반젤린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에반젤린은 손을 들어 레아의 한쪽 뺨을 감싸쥐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뺨이 차게 느껴질 정도로 위험한 기색을 띄었을 때 에반젤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안다면 그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에반젤린은 레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고민했다.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편해진 사이라니. 레아가 깨어난 것에 대한 안도에 이어 조금씩 이어지는 감정의 교감을 기쁘게 여기면서도 에반젤린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순간에는 마냥 행복해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레아의 눈이 자그마한 의문을 품는 것이 보였다. 표정이 굳어있었던 모양이다. 재빨리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쉬도록 해. 아무런 생각 말고."
에반젤린은 레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울고 있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오늘은 모든 일정을 미루고 싶은 생각이 솟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얼른 남은 일들을 처리해버리는 쪽이 더욱 빨리 돌아올 수 있는 길이었다. 도장을 찍듯 마지막까지 레아의 눈을 한 번 들여다본 후에 몸을 돌렸다. 어쩐지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문에 손을 얹은 에반젤린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만을 돌려 레아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도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에, 눈을 맞춘 채로 입을 열었다.
"레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그래. 레아를 안심시켜 주려고 했었다. 너를 내 곁에서 떼어놓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 그 외의 부분에서 쓸모가 없어진다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에반젤린은 하려던 말 대신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로 다독인 후에야 방을 나섰다. 근위기사단장? 검술?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레아의 가치는 그저 그녀가 아슐레아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 말을 건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서로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너는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에반젤린은 레아가 눈을 뜬 직후의 표정을 떠올렸다. 딛고 있는 땅이 곧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불안을 꾹꾹 집어삼키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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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간이 지났다. 피습되었던 단장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동시에 많은 이들의 근심을 덜어준 모양이었다.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보고를 받으며 에반젤린은 뒤이어 전령들이 가져올 소식들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이건 잘 짜인 연극이었고, 또한 자신을 향한 아양이었다. 이런 대범한 계획을 세울 정도로 완벽한 준비를 마친 적이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이건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고, 상대의 세력도 바라지 않던 일인듯 했다. 백작을 내어주는 것이 그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일리가 없었다. 아마 그 위에 있던 이들은 이게 사실상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을 터였다. 모자란 수하를 둔 책임은 윗사람이 지는 게 맞겠지. 레아를 잃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에반젤린은 그 일에 관련된 자들, 그리고 그 자들과 엮여 있는 모두를 부장물로 삼아 제를 지냈을 수도 있었다. 그 이후는, 될 대로 되라지. 하지만 레아는 깨어났다. 한동안은 침대 위에서 요양하는 생활을 해야겠지만 어쨌든 살아있었다. 그러니 이번 일을 직접 주모한 이와 그 배후를 모두 죽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도면, 충분히 자비롭지 않은가. 옳은 방향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자신의 책무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감정적인 위로까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에반젤린은 비밀리에 이안을 불러들여 명을 내렸다. 백작 일가를 처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 뒤를 찾아내라고. 이번 처형을 대놓고 반대할 머저리는 없을 것이다. 일이 진행될 동안에는 조금 여유를 가져도 좋겠지. 어느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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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레아가 잠들어 있다면 그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황제가 숨을 죽인 채로 눈치를 보는 상대라니. 정작 그 당사자가 자신이 버림 받을 것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발걸음까지 죽여가며 침대 옆으로 다가간 에반젤린은 눈을 감은 채로 누워있는 레아를 내려다 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오르내리는 가슴에 에반젤린은 다시금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반젤린은 느린 움직임으로 침대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들이 샘솟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애달프면서도 사랑스러웠고, 불안하면서도 욕심이 났다. 이런 것들을 느끼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에게 버림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이 상황이 에반젤린은 달갑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정상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생각은 또다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검을 쥐지 않아도 좋았다.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제 감정을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이 아슐레아의 가치였다. 레아는 쓸모있는 사람이었다.
바라보고 있자니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게 두는 편이 나을 텐데. 생각과는 다르게 뻗어나간 손이 레아의 이마를 스쳤다. 몸이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일, 욕심을 채우도록 할까.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의 옆에 몸을 뉘었다. 달싹거리는 입술을 다시 다문 채로 아직 잠에 취한듯 몽롱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떠올렸던 생각은 레아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에반젤린은 아슐레아를 사랑하고, 아슐레아도 에반젤린을 사랑한다. 중요한 건 오로지 그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소한 것이리라.
"미안. 내가 깨운 모양이네."
에반젤린은 레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며 말했다. 애써 상황을 파악하듯 흐려진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레아는,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앗. 이상하다. 왜 답을 못 봤지. 잠들기 직전에야 들렀어. 어리광? 좋아. 오히려 그 편이 에반젤린의 취향에 맞을지도 모르지.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몰라서 왔다갔다 흔들리고 있는 중이니까 앞으로 레아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갈리게 될 것 같아. 동반자를 원하는 건지, 끝까지 붙들고 가고 싶은 건지 원.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렇구나. 레아의 행동이 중요하구나. 에바가 도저히 놓치 못하게 유혹을 해버리는 것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이번 기회를 레아를 기사에서 은퇴를 시킬까, 아니면 다시 복귀하는 걸로 할까 고민중이야. 기사로서 아이덴티티가 없어진 레아가 에바한테 매달리는 모먼트도 왠지 보고 싶어졌거든. 레아가 에바한테 매달리면서 계속해서 유혹해서 에바랑 레어가 점점 서로 집착하고 의존하는 관계가 된다거나... 뭐 내 상상에 불과하지ㅏ만. 에바주 좋은 하루 보냈어?
레아의 행동은 항상 중요하지. 에반젤린은 갈대니까 잘 휘어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지금처럼 그냥 옆에만 있으면 되니까 개인의 바람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뭐 이런 헛생각이 더 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은퇴는 너무 갑작스럽지. 나도 복귀하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해. 아니면 이번 사건에 대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후유증을 하나 만들어 준다거나. 레아는 검을 들고 에반젤린을 지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까 그게 없어진다면 또 헛돌 수도 있겠네. 에반젤린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냥 내 옆에만 있어줘, 이거를 좀 비틀어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거든. 그렇다고 해서 매달리고 유혹하는 레아를 거부할 일은 결단코 없을 테지만 말야. 으으. 오늘은 출근 시간을 잘못 알아서 좀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너무 졸려. 레아주도 좋은 하루 보냈는지 모르겠네. 나는 느즈막히 먹은 마카롱이 맛있어서 기분 좋았고,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좀 번거로운 하루였어. 레아주는 어땠을까.
유혹이라. 나는 가련해요, 하면서 대놓고 연기해도 넘어갈 에바인데 말야. 역시 에반젤린이 매달리는 구도도 보고 싶기는 해. 의외로 가장 보기 어려운 관계일 것 같네. 에반젤린이 매달리고 거기에 레아가 튕기고 밀고 당기고 하는 모습이 상상이 잘 안 돼. 나만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레아주, 날 더운데 오늘도 고생 많았어.
앗. 답을 적었는데 잠깐 인터넷 창 닫았더니 전부 날아가버렸어. 이게 뭐람? 아무튼 그런 짧은 애원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아. 매달린다기 보다는 교태에 가까울 것 같지만. 굳이 개과와 고양이과를 나누자면 고양이 쪽이니까. 에바가 그렇지 뭐. 무난한 하루. 무난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일하기는 싫고, 무언가 해야겠다 싶지만 생각만으로 끝나는 그런 평범한 날들의 연속이야. 그래도 이런 글을 적고 의견 나눌 레아주가 있는 건 조금은 특별한 일이 아닐까? 안녕, 레아주. 요즘 아이유 노래를 부쩍 많이 듣는데 방금 굉장히 꽂히는 가사가 있었어. - 엉망이 될 것만 같은 끔찍한 예감이 들어, 귓가엔 마지막 경고같은 이명이 들려, 이런 가사인데 나는 이걸 듣고 굉장히 불길한 이미지를 선택했는데 사랑의 시작에 관한 노래더라. 역시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아. 에바와 레아는 좀 더 밝게 나아갈 수 있게 에반젤린 정신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할까봐.
어서와, 에바주. 아무튼 그런건 가능하구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면서 에바에게 교태를 부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아픈 와중에도 우리 여왕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애쓰는거지. 나도 에바주랑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특별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놓치고 싶지도 않고,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어. 아이유 노래 좋지... 에바주도 모쪼록 좋은 생각만 많이 했으면 좋겠어. 에반젤린 정신개조..응원하면 되는걸까~ 아무튼 좋은 하루 보냈어?
잘 보냈지. 집에 들어가자마자 기절하는 바람에 또 늦게 자고. 이게 한 번 잠들었다가 깨고 나중에 다시 자면 총 수면시간에 영향을 주질 않더라. 2시간 자고 4시간 뒤에 3시간 더 잔다고 5시간 잔 것만큼 개운하지 않아... 그건 레아 마음대로 해도 돼. 아마 레아가 갑자기 더이상 검을 들지 못하게 돼서 자괴감에 빠져 자기혐오 자기파멸 비슷한 면모를 보이더라도 에바는 거기에 맞춰 또 새로운 애정 포인트를 찾아낼 정도니까. 에반젤린 정신개조는 응원만 하면 안 되는 걸? 우리 둘 다 힘내야 해. 언젠가 헤실헤실 웃고 맘편히 사랑할 수 있는 황제님을 만들어 보자고. 점심 잘 챙겨, 레아주.
아이고 에바주... 고생하네..정말..어떻게 해줄 수 없으니까 안타깝다 진짜.. 그나저나 우리 에바는 또 왜 그렇게 사랑스러울까. 정말 너무 좋다. 이래서 에바주도 에바도 좋아할 수 밖에 없어. 답레는...토요일에는 줄 수 있게 해볼게. 열심히 해볼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것 정도 밖에 없네... 같이 힘내자!! 에바주도 점심 잘 먹고 힘내!! 이따 볼 수 있으려나..!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도 만들지만, 반대로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검을 제대로 쥐지도 못하던 소녀를 검을 쥐게 만드는 힘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검을 잘 다루던 여인이 제대로 검을 쥘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그 모범답안은 바로 아슐레아가 아니었을까. 에반젤린을 사랑하기에, 이렇게 다쳐버린 아슐레아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을 품고, 한없이 약해져버리고 말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가치가 사라진다면 에반젤린에게 버림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 사랑받는 이에게 무수한 사랑을 받고 싶지, 외면과 천시를 받는 것은 두려운 그저 한명의 자그마한 여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슐레아는 떨리는 손을 내민 체, 에반젤린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손 위에 에반젤린의 부드러운 손이 감싸졌다.
" 믿어요.. 다른 누구도 믿지 않지만, 당신만은 언제나 믿고 있어요. "
그래서 더 슬프고 절망스러워요. 당신을 너무나도 믿고 있기에, 제대로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답답해서 두려운 것뿐이에요. 그래도 아슐레아는 에반젤린의 손이 감싸오자, 한결 진정이 된 듯 손 끝의 떨림이 사라져갔다. 아직 두렵고, 걱정스러웠지만 에반젤린이 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안정을 가져다준 것이다. 멍하니 에반젤린을 바라보고 있던 아슐레아는 자신의 뺨에 에반젤린의 손이 다가오자 고개를 낑낑대며 움직여 그 손에 자신의 볼을 비비적거렸다. 사랑을 받고 싶은 것처럼, 힘이 약한 자그마한 동물이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열심히도 볼을 비비적거렸다.
"...노력해볼게요. 에반젤린. "
잠시 에반젤린의 얼굴을 응시하면서,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담아 바라보던 아슐레아는 이내 다시 미소를 짓는 에반젤린을 보며 안도했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좀 더 생각이 깊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아슐레아는 온전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렇게 깊숙하게 판단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에반젤린이 건내어 오는 말에, 불안함이 가득한 눈이 떨려왔지만, 아슐레아는 애써 힘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차분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여기서 억지로 에반젤린을 더 붙잡는다면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에반젤린이 방을 나선 후, 고요해진 방안에서 아슐레아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불안정한 그녀의 상태를 보여주듯, 지난 세월간 담아두기만 했던 눈물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에반젤린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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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커다란 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은 어둠에 깊게 깔린 상태였고, 어느샌가 돌아온 에반젤린이 그녀의 옆에 누워있었다. 아직은 체력이 덜 회복된 탓인지, 여전히 몽롱하기 그지 없었지만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에반젤린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아누워, 에반젤린을 마주보고 눕는다.
" ... 에반젤린이 왔는데 자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
아슐레아는 여전히 잠기운이 남아있는 눈으로 헤실거리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평소의 기사로서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한없이 풀린 아슐레아의 모습이었다. 그저 아슐레아의 옆에서 시종으로만 남아있었다면 볼 수 있었을 미소였을지도 모른다. 손을 맞잡는 것으로만은 부족한 듯 서서히 몸을 가까이 한 아슐레아는 살며시 팔을 둘러 에반젤린의 허리를 감싸안고는 몸을 밀착시킨다. 그리곤 에반젤린의 가슴팍에 어리광을 부리듯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소녀같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아슐레아에게는 그저 꿈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인 에반젤린이 이 시간에 자신의 곁에 누워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테니까.
" 에반젤린..저는... 당신이 없으면 이세상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요....당신이 제 삶의 이유이자 중심이에요... "
아슐레아는 교태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에반젤린의 품에서 말을 속삭였다. 꿈속에서도 어떻게든 에반젤린을 자신의 곁에 머물게 만들려는 것처럼 애처롭기까지한 교태였다. 아슐레아는 천천히 한손으로 끌어안고 있던 에반젤린의 등을 매만지며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 당신이 제 몸도, 마음도 다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결혼 같은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폐하의 곁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선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슬퍼요.. 주제넘다는건 알지만... 폐하가 남성이셨다면 저는 폐하의 곁에 좀 더 당당히 머무를 수 있었을까요..? 다른 이들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당당하게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손길을 받고, 당신의 눈길을 받고, 당신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
천천히 품에서 고개를 든 아슐레아는 여전히 몽롱함이 깃든 눈을 한 체 말을 이어간다. 아마도 아슐레아는 직접적으로 여태껏 말하진 않았지만, 에반젤린의 혼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에반젤린이 남자였다면, 자신이 좀 더 당당하게 에반젤린의 곁에 머물 수 있지 않았을까, 에반젤린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좀 더 그의 곁에서 사랑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 그것이 몽롱함에 이끌려 흘려나오고 있었다.
" 저는 다른 아름다운 아가씨들처럼 새하얗고 예쁜 몸이 아닌 상처투성이의 몸이지만,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사랑을 드리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얼마나 외롭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알고 있기에 당신을 외롭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이해하는 것은 저 밖에 없는데... 이 넓은 궁 안에서도 당신을 이해해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다들 에반젤린의 겉모습만 보고, 권력이나 탐내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뿐인데... 당신의 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아요.. "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끌어올려 에반젤린의 볼을 감싸며 물기 젖은 눈으로 호소하듯 말했다. 자신만이 에반젤린의 내면을 알고 있는데, 에반젤린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을 다른 누군가에게 그녀의 곁을 내어주기 싫다는 말이었다. 결국은 에반젤린의 바로 옆에 머무는 것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하나의 욕망. 욕심. 그리고 여태껏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면서 제대로 에반젤린에게 털어놓은 아슐레아의 첫 소원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살며시 입을 맞췄다 떼어낸 아슐레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힘들거라는 건 알지만, 이뤄지지 않을 소원일지도 모른다는건 알지만.. 그래도 이게 달콤한 꿈이라면, 한번쯤은 당신께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완전히 당신의 것이 되고 싶다는 걸..."
아슐레아는 에반젤린의 손을 자신의 몸에 가져다대며 나지막이 평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에반젤린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에 이것이 꿈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듯 한순간 눈이 커졌지만.
월요일이 후루룩 지나가버렸어. 근데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다가 월요일인걸 까먹은 거야. 그래서 어, 아직도 월요일인가 싶었던 그런 날이었어. 야심한 시각이지만 문안 인사 올리러 왔으니까 용서해 주겠지? 으으, 오늘은 정말 일찍 자야지... 노력해야지. 잠 못 드는 것도 습관성인 것 같아. 오늘 되게 덥더라. 레아주도 이번 한 주 파이팅이야...
맞아, 맞아. 항상 힘내고 있으란 말야. 더위 안 먹게 시원한 것도 잘 챙겨 먹고 너무 더울 때 돌아다니지 말고. 밥도 잘 먹구. 오늘은 그래도 비 와서 선선한 편이었던 것 같은데도 이렇게 더울 일인가. 방안 공기가 후끈해. 근데 더워 더워 하면서 벌써 7월이니까 잘만 하면 에어컨 많이 안 쓰고 여름을 날 수 있을 것도 같고 그래. 레아주도 곧 잘 시간이려나.
며칠 좋은 템포로 왔었는데... 또다시... (!) 날이 엄청 습하긴 해. 지금까지는 내가 밖에 있을 때 비가 타이밍 맞게 자리를 피해줘서 안 맞았는데 이제 어떨지 모르겠어. 출퇴근, 아니, 출근길에만 안 왔으면 좋겠다. 진짜 힘들어, 그러면. 내일만 이겨내면 또 주말이야. 얼른 내일이 지나가버렸으면 좋겠어.
레아주는 어째 볼 때마다 진화하는 것 같아. 귀여움 만렙이야... 나도 분발해야겠다. 오늘 나오면서 느꼈어. 이거 비 오겠구나. 어제 말한대로 타이밍만 좀 맞아줬으면 좋겠네. 솔직히 실내에서 보는 비는 나쁘지 않은데다가 내가 맞지만 않으면 날 좀 선선해지고 좋기만 하거든. 주말에는 쉽니다. 어제는 같은 패턴으로 퇴근 후 기절, 새벽엔 헤메고 그랬어. 금요일이야. 후딱 해치우고 올게. 레아주도 좋은 하루 보내!
똑, 똑. 계신가요? 이제 컨디션 슬슬 회복되는 모양이야. 주말에는 막 장염인가? 감기인가? 이러면서 이리저리 헤메다가 출근하고 잠 설치고 하다 보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 오늘 티백으로 된 얼그레이 냉침으로 우려서 레몬 넣어 먹으니까 맛있더라. 간단하니까 집에서 여름나기용 차로 추천이야. 레아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길 바라.
레아주, 많이 기다렸지. 주말이라 정신 좀 차리고 왔어. 코로나가 진짜 많이 심해지긴 했나봐. 직장에서 확진자 나오고 그래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코로나 검사도 받고 검사 결과도 기다려보고... 다행히 내가 걸리거나 격리하거나 일은 안 생기기는 했는데 더욱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레아주는 별 일 없을까?
엄청 좀 그렇더라, 그거. 줄 서있는 시간이 긴 것도 그렇지만 검사가 미묘하게 아팠어. 레아주는 받아본 적 있어? 아직까지 완전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 가족이 걸렸다는 소리를 못 들어서 솔직히 실감이 안 나기는 해. 만약 양성이 가족 중에서 나오면 우리 집은 진짜 큰일이라 나도 최대한 조심하고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 오늘 아침부터 엄청 이상한 일이 있어서 기분이 좀 그래. 새벽 6시부터 한 시간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인터폰이 자꾸 2초정도 울어. 근데 cctv도 없어서 누가 그러는지 알 수가 없네. 방금도 그랬어. 일부러 장난 치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답레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오늘 마무리 지을 수 있으면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나도 받아본 적은 없는데 가족들이 몇번 받은 적은 있어. 나도 솔직히 가족들 중에는 걸린 사람이 없어서 잘 실감이 나진 않아. 조심하곤 있는데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니까. 무사히 지나가길 바래야지. 그거 인터폰이 고장난 걸 수도 있어. 우리집 인터폰도 누가 막 주기적으로 누르는 것처럼 울려서 뭔가 했거든. 혹시 고장난 건 아닌가 잘 살펴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구... 답레는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게 그렇다잖아. 다 난리인데 바로 와닿지는 않는 그런 느낌. 그렇다고 방심하고 돌아다니면 지금같은 상황 벌어지는 걸 테고. 요새 아침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몸이 무거운 걸 보니 날씨 탓인 건지 건강하지 못한 패턴 탓인 건지. 오늘도 일단 들렀다 갈게. 이놈의 평일. 말해놓은 기한을 못 지킨 내 탓이야. 레아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여름 뿌셔. 얼른 가을이나 와라.
맞아. 날씨 장난 아니야. 거기에 몇주간 꾸준히 배가 아파서 이게 뭔가 싶어. 괜찮았다가 안 좋았다가. 말한 걸 지키지 못하고 살아서 벌 받는 건가. 일기도 쓰겠다고 해놓고 거진 작심삼일 수준이 되었거든. 이번 주 안으로는 꼭 에반젤린을 데려오도록 할게. 이건 반드시 지킬 거야...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품에 기대어 오는 레아의 머리카락을 훑던 에반젤린의 눈에 담긴 기색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익숙한 말이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섞여 에반젤린을 당혹시켰다. 물론 부정적인 쪽의 감정은 아니었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설렘? 흥분?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심장의 고동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평소에도 자신을 향한 열망을 숨기지 못하는 레아였지만 지금의 표현 방식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하늘 높은 곳을 올려다 보는 것 같은 선망은 여전했으나, 기사가 자신의 주군을 향한 충성을 표현하는 듯한 느낌이 섞인 이전과는 달랐다. 그래. 순수한 여인의 시선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고 그 곁에 자리하고 싶은 욕망을 담은 그런 시선. 상대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을 넘어 가지고 싶은, 하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매달리게 되는 능동적이면서도 처연한 감정을 싣고 있는 눈동자는 에반젤린이 알아왔던 레아의 모습과는 상반되었다 말해도 좋을 정도로 달랐다. 이런 눈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었다. 보다 더 포기의 기색이 짙고 숨이 막힐 것처럼 어두운 것이었지만 분명 어머니가 전 황제를 바라보던 시선과 닮아있었다. 에반젤린은 서슴없이 몸을 맞대어 오는 레아를 잠시 응시하다 손을 들어 그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단 한 명 뿐인 나의 이해자. 터무니없는 계획을 듣고서도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던 나의 사랑스러운 동반자. 스스로 정의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그 사실에 기뻐하며 같은 마음이었다 속삭여주는 너를 아무런 의지도 없이 멀찍이서 황제를 지켜보다 말라 비틀어진 어미와 비교하는 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 괴물과는 달라. 에반젤린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며 레아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고마워, 레아."
그렇게 말해줘서. 자신이 외롭게 지내왔다는 건 순전히 레아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에반젤린은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외롭지 않았던 이유가 되어준 이가 하는 말에 어떤 반박을 댈 수 있을까. 품에 안긴 레아의 몸이 흐느끼듯 가볍게 떨리다 이내 차츰 잦아들었다. 에반젤린은 좀 더 힘을 주어 끌어안은 채 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네가 품은 마음은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진실된 울림을 담은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제법 괜찮았다.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그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부수어 오로지 내 곁에서만 존재할 수 있도록, 나만을 의지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파괴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지게 만들려고 한 적도 있었다.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고, 바라던 형태로 레아가 마음을 전해오는 지금의 상황은 자신이 바랐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켠에 붙은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에반젤린. 이게, 네가 원하던 거잖아? 레아는 몸도 마음도 연약해져 있었다. 자신에게 매달려 사랑을 갈구하는 것으로 제 마음을 얻어내려는 지금의 태도는 그저 우발적인 것일 수도 있으나 에반젤린은 원한다면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도 있었다. 이전처럼 검을 휘두를 정도로 건강해질 수는 없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사로서 살아갈 수 없다면 자신에게 가치가 없다고까지 생각하던 레아에게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믿으라고 말했던 게 자신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순전히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레아도 원하고 있었다. 에반젤린은 그저 손을 뻗어 가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원하던 대로, 영원히.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마땅히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이고.
에반젤린은 등을 토닥이던 손으로 어깨 부근에 늘어진 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이내 그 목덜미를 쓸어올려 턱을 손끝으로 쥔 채 레아의 눈을 마주했다. 옅은 울음기와 당혹이 어린 눈망울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것도 잠시,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아예 집어삼킬듯 머금은 입술의 메마른 감촉에 혀를 세워 훑은 에반젤린은 자연스럽게 벌어진 틈새를 밀고 들어가 레아의 입안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한없이 느리고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이던 레아의 손이 에반젤린의 등을 당겨 안았고, 그 손에 힘이 잔뜩 실릴 때까지도 에반젤린은 키스를 이어갔다. 레아의 손톱이 등을 찌르듯 세워졌을 때야 에반젤린은 입을 떼었다. 서로의 입안에서 섞인 타액이 길게 늘어쥐고 빈 공간은 거친 숨결이 가득 메웠다. 호흡을 고르며 몸을 들썩이는 레아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흐드러져 있었다. 에반젤린은 그런 레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빨아들였다. 짧은 교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좀 더 가까이.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의 모든 것을 원했고, 그런만큼 더욱 갈구했다. 마치 공기가 사라진 공간에 던져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목이 말라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레아의 체향, 체취, 그 모든 것들이, 그것들만이 에반젤린을 숨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 갈증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무방비한 모습으로 제 앞에 늘어져 있다는 사실에 에반젤린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너를 원해. 품에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자신을 달래기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었다. 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싶었다. 몸을 섞고, 시선을 맞추고, 어디로도 떠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너도, 그걸 원하잖아.
에반, 젤린. 짧게 끊어내듯 토해진 자신의 이름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들었다. 문득 시선이 닿은 레아의 어깨와 목 부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건 정도 이상의 힘을 주었기 때문에 새겨진 게 틀림없는 자국들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어간 힘을 느낀 에반젤린은 퍼뜩 놀라 레아를 놓아주었다. 이건, 무슨 일이지. 에반젤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코앞에 있는 레아의 얼굴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폐하.
그렇게 부르는 소리가 겹쳐 들렸던 것도 같았다. 에반젤린은 눈을 깜빡였다. 이전, 황궁에서의 전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몸에 걸친 갑주가 무겁지도 않은 건지 부드러운 몸짓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아슐레아와 옥좌에 앉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 보는 아슐레아의 눈은 담담하면서도 강한 힘을 품고 있었고, 그만큼 빛나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그 눈이. 한순간에 지나간 풍경이 흩어지고 다시금 현실이 제자리를 찾아들었다. 레아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과 떨리는 자신의 손. 에반젤린은 그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었다. 기사로서의 레아는 그렇게 중요치 않다고? 자신의 사랑을 원하고 옆에 있기를 간청하니 그것을 들어주겠노라고? 에반젤린은 직전에 자신이 떠올렸던 생각들을 돌이켜 떠올렸다. 어째서 너를 내게서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가. 내가 왜 너를 사랑하게 되었던가.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아슐레아는 앞길을 밝히는 빛이었으며 과거의 자신을 딛고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준 구원이었다. 그것을 폄하하고 짓밟으려 했다는 사실이, 에반젤린은 견딜 수 없었다. 구역질이 났다.
"...미, 안. 미안해. 레아."
시야는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것처럼 흔들렸고 뻗은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허둥지둥 레아의 눈가와 목을 쓸어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이런 마음을 품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에반젤린은 제 안에 들어차 있던 끔찍한 감정들을 차마 토해내지도 못한 채 숨을 삼켰다. 울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네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내가 바라보는 너의 가치는 흐려지지 않노라고, 그렇게 말했어야만 했다. 제어하지도 못할 비열한 감정으로 레아를 품으려고 들었다는 사실이 에반젤린의 심장을 옥죄고 들었다. 기어코 솟아오른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된 에반젤린은 레아에게서 떼어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마치 이렇게 하면 레아의 시선 앞에서 도망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가린 채, 에반젤린은 울었다. 이러려던 게 아니야. 나는 어머니와는, 선황과는 다르다. 달라야만, 그랬어야만 했는데.
늦었지. 결국 약속했던 기한조차 넘겨버렸네. 한 번만 더 용서해달라고 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지만, 그래도 용서해줘. 글도 지금의 날씨도 분위기가 많이 흐려. 주말은 잘 보냈을까. 레아주, 보고 싶다.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 이번 글도 잘 부탁할게. 나중에 답레 적기에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얘기해줘.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늘도 좋은 밤 되길 바라.
답레 즐겁게 읽었어. 에바가 슬프게 우는 건 나도 마음이 다 아프다.. 역시 에바는 자신감 넘치게 웃는게 최고인 것 같아. 부담스럽진 않아. 다만 어떻게 쓰면 좀 더 좋은 답레를 줄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긴 하네. 내 손이 열일 해줘야 할텐데. 일단 좋은 하루 보냈길 바라.
오늘은 내가 먼저 갱신한다는 게 시간이 또 이렇게 되어버렸어. 딱 레아주가 잠들었을 타이밍인 게 아쉽다. 나도 얼른 다시 자러 가야지. 적을 때는 항상 혼자 뭔가 폭주하면서 적고 나서 끝나고 나면 아차, 이러면 레아주가 이어가기 너무 어렵지 않을까 하면서 수정할 부분 둘러보고는 하는데 매번 어렵게 토스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울적해. 이번이 마지막 자기반성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레아주의 능력을 믿으면서 무책임하게 토스하도록 할게. 이제 평생 달달하게 가는 거야. 할 수 있겠지, 에반젤린? 레아주, 오늘도 고생 많았어.
숨이 굉장히 거칠어. 레아주의 콧김이 여기까지 전해져, 는 농담이고. 그렇다고 울면 안 돼. 기쁜 순간이잖아.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못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몸은 좀 나아졌어. 요새는 잠을 깊게 못 자서 몽롱한데다 직장을 때려치고 싶은 순간이 자꾸 찾아오는 게 문제지만 전처럼 안 좋은 건 없네요. 레아주는 어때? 날도 엄청 덥고 비도 정신없이 쏟아지고 코로나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까 꼭 몸 조심해야 해.
앗. 목표가 에반젤린이 아니라 나였어? 나는 좀 더 조신하게 울 수 있을지도 몰라. 오늘부터 노력해볼게. 답레는 혼자 질주하는 브레이크 없는 80t 폭주기관차 에반젤린이 잘못한 거니까 짧게 받아쳐줘도 좋아. 다음 호흡은 나도 좀 더 짧게 가져올 수 있... 있을 거야. 다른 건 모르겠고 날이 진짜 너무 더워. 제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보오오오옴 엶 가아아아아아아을 결 이렇게 사계절 만들어주면 안 될까 싶어, 정말.
에반젤린은 진작 아슐레아한테 맡겨뒀지. 그러니까 내 목표는 에바주야. 울지 말고 웃어줘. 웃는 에바주가 좋아. 음... 좀 더 고민해볼게. 힘내라고 빨리 써주고 싶은데 내 머리가 더위를 감당하느라 바쁘네.. 나도 보오오오옴 엶 가아아아아아아아아을 결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 여름 시러..
짝이 딱딱 맞네. 좋아. 나야 레아주랑 얘기할 때면 언제나 방긋방긋 웃고 있는걸. 물론 내 마음속의 죄책감이 맥스 상태일 때는 예외야. 이래뵈도 눈치 많이 보고 있으니까 나 버리지 말고 예뻐해 줘야 해? 여름이 제일 싫어. 더우면 두뇌 회전도 느리고 몸도 느리고 다 느려터진데다 더 더워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툭툭 던져 줘. 에어컨도 한 번 틀기 시작하니까 자꾸만 리모컨으로 손이 간다. 온도도 내리기 시작하니까 방이 냉골이 될 때까지 돌리게 되더라. 이럴 때는 냉수 한 잔 마시고 자야해.
그래서 그런 걸까. 자꾸 이렇게 우울한 쪽으로 빠지는 나도 참. 저녁 먹었는데도 컨디션이 회복이 안 되는 걸 보면 오늘은 정말 일찍 좀 자봐야지. 후욱 후욱... 숨소리가 거칠어, 레아주. 그렇게 좋은 거야? 사실 나도. 아, 큰일났어. 요새 말이 잘 안 나오는 거 있지.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어려운가봐. 말이 정리가 잘 안 돼... 지금도 답을 빨리 달아야지 하면서도 무슨 말 하지 하고 멍 때렸었어.
천천히 적으시면 됩니다. 쉬는 날은 또 돌아오기 마련이고... 일할 때 읽어도 그건 그것대로 기분 전환에 도움이 돼서 좋아. 언제 읽어도 좋다는 뜻이야. 잘 쉬었지. 잘 쉬었는데 쉬는 날이 끝나니까 잠이 쏟아지고 있어. 놀고 있어도 더 놀고 싶은 모양이야. 레아주는 어땠어?
에바가 무릎베개? 누워있는 입장이지만 그건 굉장히 귀한 씬이네. 오자마자 사랑해라니. 나 바로 퇴장해버리고 말아... 사유는 심장마비야. 오늘도 여전히 졸려. 졸린데 잠들 때 되면 귀신같이 각성하면서 다시 깨어나고 또 졸리고의 반복이야. 얼른 아슐레아 볼이나 만지작 만지작 하면서 에반젤린도 재우고 나도 자고...
앗... 심폐소생술은 금지야. 나를 두 번 죽이는 거나 다름없어. 그래도 이렇게 얘기 한 번씩 나누고 가면서 좋은 기 받아 가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괜히라니? 내가 좋아서 오는 건데 그렇게 말하면 나 슬퍼. 오히려 자주 못 오는 내가 미안하지. 레아주도 항상 기운 내고, 이러다 보면 여름도 금방 지나갈 거라고 믿어. 날이 좀 선선해지고 나면 대체로 기운이 나는 하루가 자주 찾아오지 않을까. 자야해. 잠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시간이야. 레아주도 너무 늦지 않게 자야 한다? 좋은 밤 보내구 내일 봐.
등장! 나도 레아주를 너무 너무 좋아해. 오늘은 좀 더 솔직한 것 같은데, 나. 내 하루는 항상 무난하지. 무난해서 탈인걸. 오늘은 날이 습하진 않아서 기분이 좀 낫다. 그래도 역시 에어컨 선풍기 콤보는 무시무시한 것 같아. 집을 벗어나고 싶지가 않아. 빙수도 먹었더니 뽀송뽀송한 느낌이야. 레아주, 잘 있었니?
안녀엉, 레아주. 어제... 어제는 그냥 그랬고 오늘은 기분 좀 좋은 편이기는 해. 기분 좋은 날이 드물다니 나 대체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흑흑. 레아주는 어때? 주말 잘 보내고 있어? 난 오늘 정말 별 거 안 했어. 별 거 안 했는데 왜 답 안 했느냐고 한다면 자고 멍 때리느라 그랬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
아냐, 힘들지 않아! 앞으로 며칠간은 좋지 않을까? 적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좋을 예정이야. 월요일이 오지 않는다면 말이야. 보고 싶었어, 레아주. 잘 쉬고 있어? 뭐 하면서 보냈어? 답레는 천천히 줘도 괜찮아. 언제나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어. 이 두근거림이 식기 전에 주는 게 항상 고마울 뿐이야. 나는... 아무튼. 저녁은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오늘은 집안 행사 비스무리한 게 있었거든. 어차피 코로나라서 인원수는 한정되어 있지만 말야. 레아주는 어때?
며칠간은 좋다니 다행이다. 내일까지라는건 주말이여서 그런건가..! 그래도 좋을 예정이라니 다행이야. 나는 올림픽 좀 보고 하면서 누워서 쉬고 있었지. 나도 에바주 답레를 보거나 기다릴 때 두근거리는걸 보면 둘 다 참 비슷한 것 같아. 아무튼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나도 배부르게 잘 챙겨먹었어. 에바주도 잘 먹었다니 다행이야~! 이대로 푹 쉬는거야. 시원하게!
앗. 맞아. 주말 한정이야. 주말은 왜 이렇게 짧은 걸까. 쉬어도 쉬어도 더 쉬고 싶은 이 마음. 근데 요즘은 정말 정말로 출근하기가 싫어서 내가 내 마음이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야. 왜 이렇게 일하기 싫은 건지를 모르겠어. 올림픽 재밌어? 안 그래도 이래저래 이슈가 많던데. 나는 양궁 보고 감동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보지는 않았어. 배구였나? 그게 완전 재밌었다던데. 레아주, 오늘도 좋은 하루.
자신의 눈가와 목을 쓸어내던 에반젤린이 울음을 터트리며 사랑한다는 말을 되뇌이자, 한순간 아득해졌던 정신을 되돌린 아슐레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에반젤린의 손을 떼어내곤 눈가를 매만져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방금전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변해버렸던 그녀가 의아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어쩌면 에반젤린의 손아귀에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에반젤린의 손에 죽는 것이었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저는 그것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의 손으로 저를 죽이려 하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겸허히 그 손에 죽음을 맞이할겁니다. "
당신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결국 아슐레아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천천히,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슐레아는 이번에는 반대로 에반젤린을 덮치듯 눕혔고, 에반젤린의 아름다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곤 입을 맞춘다. 에반젤린이 해준 것처럼, 눈물 맛과 달콤함이 뒤섞인 입맞춤을 하며 에반젤린의 입안을 휘젓는다. 한손으로는 살며시 에반젤린의 가슴을 움켜쥔 아슐레아는 몸을 뒤엉키게 한 체로 입술을 떼어내곤 내려다본다.
" 에반젤린,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무엇을 하던지 저는 다 이해하고 품을 수 있어요. 저는 당신의 것이니, 그저 울지말고 저를 봐주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저를 눈에 담고, 손에 쥐고 몸을 갖고 마음도 가져가서 당신만을 바라보게 해주세요. "
그거면 충분해요. 아슐레아는 조용히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고 살며시 고개를 파묻어 에반젤린의 목덜미를 희롱했다. 지금은 그저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아무런 고민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에반젤린을 기쁘게 해주려 성치 않은 몸으로 에반젤린을 희롱했다.
" 자신을 자책하지 마세요. 그냥 제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을 기억해주세요. 당신이 한순간 무언가에 휩쓸려 제 목을 조르더라도 저는 그것을 당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에반젤린의 얼굴을 매만져주며 속삭인 아슐레아는 이내 힘이 빠진 듯 옆으로 털썩 누워버린다. 고개만 살짝 돌려 에반젤린을 응시하던 아슐레아는 눈을 마주한 체 에반젤린의 손을 꼬옥 잡고는 나지막히 속삭였다.
에바주의 답레에 비하면 짧디 짧은 답레야. 해주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목을 조르던, 가학적인 행동을 하던 아슐레아는 자기만 사랑해준다면 뭐든 괜찮다는 말이야. 그것 또한 에반젤린의 사랑일테니까. 아무튼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 에반젤린이 조금이라도 덜 고뇌하게 말이야. 주말은 늘 짧지..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오늘도 좋은 하루야. 식사는 잘 하고 있지?
맞아. 오늘 점심은 장어야. 그래서 기운이 좀 나나? 에반젤린에게도 먹여야겠다. 순애보 아슐레아 좋아.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해서 덩달아 아슐레아에 대한 감정 포함 전부 이리저리 흔들리는 에반젤린과는 아주 딴판이야. 어떤 취향이라도 받아줄 수 있다면 설마 정말 여왕님과 그렇고 그런 관계로... 농담. 답레 고마워. 잘 읽을게.
아직 멀었어? 나는 어쩌다 보니까 기회가 왔는데 맞을까 말까 고민 많이 하다가 그냥 맞기로 했어. 다른 사람들은 맞고 싶어서 난리라는데 안 맞는 것도 웃긴다 싶어서. 부작용 얘기 들으니까 조금 겁나긴 하지만... 별 일 없길 바라고 있어. 나는 오늘 저녁 일찍 먹고 일찍 자려고 준비했는데 결국 잠들기는 실패했어. 내 수면 시간은 어디로... 그러다 보니까 레아주가 잠들 시간이 와버렸네. 같이 자러 가자. 레아주, 오늘도 좋은 밤.
맞고 나서 생기는 부작용이나 아팠던 사람들 후기 하도 많이 들으니까 뭔가 계속 신경 쓰여. 이제 슬슬 팔이 좀 무거워지는 거 있지. 맞을 때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 대기 엄청 하더라. 여기랑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은. 맞아. 쉬는 날에 맞춰서 맞기로 한 거라서 지금은 집이야. 자기 싫은데 약 먹고 그냥 미리 자버리라는 말 때문에 곰곰히 생각 중이었어. 레아주는 밖이야?
음, 아무래도 다들 힘들었다고 하는거 보니까 나도 맞을 시기가 다가오니까 신경쓰이더라. 알았어, 좀 더 일찍 가둬야겠다. 정 힘들 것 같으면 미리 약 먹고 푹 자버리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 다들 어느정도 무기력증 정도는 있다고 하는거 보니까 말이야. 나는 곧 들어갈 것 같은데 아직은 밖이야. 에바주는 집이라니 다행이네.
벌어진 입새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는 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심장 어림을 긁어대며 비집고 올라오는 것만 같은 통증이 일었다.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너를 곁에 두는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놓아주었어야만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에반젤린의 머릿속을 지배했고 냉철한 이성은 후회 앞에서 간단히 집어 삼켜졌다. 그 순간, 눈가를 가볍게 쓸어내는 손길에 에반젤린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고 레아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하면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어 레아의 손길을 떨어내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벼운 고갯짓 한 번조차 버거울 정도의 탈력감에 에반젤린은 입을 다물었다.
당신의 손으로 저를 죽이려 하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겸허히 그 손에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에반젤린이 흔들리고 있을 때면 언제고 중심을 붙잡아주던,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옆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한 목소리에 에반젤린의 몸에 일던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휘몰아치던 생각들이 전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마도 방금 전의 모습이 내 본질에 가까운 모습이겠지. 입으로는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결국엔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이다. 만약 나 때문에 네가 죽어, 내 곁에서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레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 감정과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고 레아를 떠나가지 못하게 잡아두는 것도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믿어준다는 사람을 두고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자기혐오에 질식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에반젤린의 생각을 뒤엎듯 이어지는 레아의 행동에 머릿속에서 이어지던 생각의 선이 잠시 끊어졌다.
입술을 겹치며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행동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처음부터 욕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문득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에 에반젤린의 잇새로 짧은 교성이 새어나왔다. 마치 생각을 끊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치고 들어온 감각에 에반젤린은 무심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너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으로 되뇌이는 사랑의 말보다도 확실한 눈빛에 에반젤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혐오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에 나왔던 문구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이 몰려 마치 얼굴이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에반젤린은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간지러움과 동시에 불에 닿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쓰다듬고, 더듬어 쥐는 손을 잡아챌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에반젤린은 시트를 손에 쥔 채로 눈을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황제가 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완벽한 무력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원하고 있는 자신이 마치 완전히 굴종한 애완 동물의 꼴과 같다고 느껴졌다. 사실 크게 다를 바 없을지도 몰랐다. 내 모든 감정의 꼭대기에 앉아 그것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건, 너 뿐이니까.
이어진 행위는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에반젤린에 몸에 가득히 실려있던 힘을 빼내기에는 충분했다.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자 자신을 바라보는 레아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모습에 에반젤린은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지만 입술을 짓씹는 것으로 그것을 참아내었다.
"레아."
볼을 쓰다듬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친 채로 웃는 얼굴은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스러웠고, 또 사랑스러웠다. 에반젤린은 이 이상의 감정이 자신에게 존재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을 느꼈다. 언제나 함께 해주겠다는 너의 각오를 내 멋대로인 생각으로 짓밟은 꼴이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멈추지 않을 불안과 끝없는 탐욕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도가 필요했다. 다시는 너를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곁에서 떼어 두는 것이 최선일 터인데, 이제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간신히 납득했다. 그렇다면, 나는.
"…결혼할까."
무심코 튀어나온 말은 정말로 아무런 생각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것이라 에반젤린은 순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저번 주 내로 주겠다는 말은 지키지 못했지만 아직 출근을 안 했으니까 한 주의 시작이 아닌 걸로 치고 세이프... 는 안 될까? 주말 간에는 컨디션이 영 안 좋았어. 그래도 막 심하게 앓은 건 아니지만 아직도 팔이 무거워. 레아주, 레아주. 오늘도 좋은 밤 보내고 다음 주에 봐. 이번 한 주도 함께 있어줄 거지? 잘 부탁해.
그러게. 우리 둘 다 파이팅 하자. 으, 집안 문제 때문에 속이 자꾸 꼬이네. 여력이 안 생긴다고 해야하나.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별로 없다. 마지막 말은 에반젤린의 대뇌가 일을 하지 않으면서 튀어나온 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레아라면 어떨까 생각하고 반응해주면 될 것 같은데? 아마 말하고도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진짜 결혼시켜버릴까?
해결되기는 요원한 일이니까 계속 고민만 해보는 거지. 가족끼리의 갈등이라거나... 뭐 그런. 다시 한 번 파이팅. 앗, 그렇게 발랄하게 예스를 외쳐버리면 얼떨결에라도 결혼해버려야겠는데? 이러다가 진짜 반란 일어나는 거 아닌가 몰라. 처음부터 개방적인 세계관으로 가서 연애부터 결혼까지 프리 패스 시켜줄 걸 그랬어. 흑흑. 그나저나 결혼이라니... 그러면 레아는 이제 하고 싶은 것만 해. 돈은 황제님이 벌어올 거니까. 살림은... 물론 수많은 시종들이.
아니면 이래저래 돌려보다가 정 안 될 것 같으면 제국이고 뭐고 다 버리고 떠나버리는 거야. 에반젤린이 에반젤린이 아니게 되어버렷... 모쪼록 이제 알콩달콩한 이야기 나올 수 있게 분위기 잡아보도록 할게. 으으. 요새 그런 쪽의 당 충전이 필요한 상태야. 얼른 레아를 붙잡고 엎치락 뒤치락 데이트 하고 이것저것 ()
갱신! 좋은 토요일! 주말 잘 보내고 있어? 요새 잠을 퓨즈가 꺼지는 것처럼 자는데 그렇게 잠들면 원래 오래 잠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되게 짧게 자고 깨버린 후에 잠이 잘 안 와... 나는 오늘 간만에 외출... 인데 너무 귀찮아. 약속 생기는 건 좋지만 휴일에 나온다는 행위 자체가 피로해. 아냐. 그래도 좋지만. 레아주는 뭐 하고 있을까. 추신. 제국을 버리고 떠나는 루트는 끝이 안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가 궁금해.
어서와 에바주. 나는 백신 맞고 와서 늘어져 있어. 이거 생각보다 몸이 무거워지네. 원래 잠은 푹 자야 하는데. 오늘은 일 하는건 아닌 모양이구나.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네. 왜 끝이 안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냐면.. 에바가 제국을 버려두고 떠나더라도 그 뒤를 잇는 사람이 살아있는 혈통을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을 할 리가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아, 맞아. 백신. 괜찮아? 보통 첫날에는 팔이 아프고 밤이나 그 다음 날에 아픈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 맞은 팔에 얼음찜질 꼭 계속 해주고 푹 쉬어. 괜히 열나거나 머리 아프거나 하면 약 먹고! 앗. 그런... 아마 근데 에반젤린이 황위에서 물러나면 그 자리는 이미 잊혀졌지만 슬쩍 지나친 남은 황자가 차지하지 않을까. 원래는 그쪽이랑 대립각을 세우고 싶었는데 영 애매하더라고. 이번에 국혼 얘기가 나오면서 등장시킬 예정이었지만 더 큰 사건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걱정 마. 아슐레아는 내가 지킨다. 마음 딱 놓고 도망쳐버릴까?
아슐레아는 에반젤린의 손을 움켜쥔 체 조용히 들려오는 말을 듣는다. 결혼을 하지 않겠냐고 물어오는 순간, 감격에 벅차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듯 했지만, 여기서 자신이 입을 다물면 안된다는 것을 아슐레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그리고 신기하다면 신기하게 알 수 있었다. 분명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아슐레아는 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조용히 감싸쥔 에반젤린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 살며시 그 가녀린 손가락을 고운 입술로 물어보이며 지그시 에반젤린을 응시한다. 차마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지만, 그저 눈빛으로 말할 뿐이었다. 저도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그 누구에게도 그 곁을 내주는 것이 아닌 언제나 자신이 옆에 있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리듯 손가락을 오물거리는 것은 그 갈망을 조금이나마 에반젤린에게 전하고 싶은 아슐레아의 욕심이었다.
" 분명 쉬운 길이 아닐거에요, 폐하.. 아니 쉽지 않을거야, 에반젤린. "
왠지 지금만큼은 폐하와 기사로서가 아닌 아슐레아와 에반젤린이라는 연인으로서 말을 해야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는지 아슐레아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도 눈 앞에서 고운 숨소리를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앞으로 자신 때문에 가시밭길을 걸어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욕심을 접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자신이 물러선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게 아닐까.
" 나는 에반젤린에게 칼을 겨눴던 반란의 주동자의 딸이자 누나니까 모두가 반대할지도 몰라. 게다가 황제가 대를 잇게 만들 왕족 남성과 혼인을 하지 않고, 같은 동성의 호위기사를 반려로 삼는다면 분명 다들 칼을 뽑아들 생각을 할지도 몰라.. "
그만큼 고되고 힘든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마치 에반젤린이 황제가 되기 위해 걸어왔던 핏빛의 길들을 다시 한번 걷는 것과 똑같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은 눈 앞의 사랑스런 에반젤린을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 하지만 무엇이 일어나든, 이 길의 끝에 파멸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할지라도.. 나만은 너와 함께할꺼야. 사랑하니까, 나에겐 너 뿐이니까. "
망설임 없이 자그마한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그 안에 담겨진 달콤함을 맛본 아슐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떼어내곤 속삭였다. 천천히 흐트러진 에반젤린의 옷을 벌리면서 두사람의 새하얀 살을 맞대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서 전해지는 그 온기에 아찔함을 느끼면서.
" 너와 나는 둘이서 하나가 되는거야... "
그래줄거지? 아슐레아는 새하얀 에반젤린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어주며, 에반젤린을 유혹하듯 나긋하게 속삭였다. 이젠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평일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정신을 놓아버린 에바주야. 레아주는 잘 있었어? 이번 답레는 레아의 그윽한 멘트 덕분에 내일 일어나서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아. 이제 드디어 기둥서방 아슐레아와 열심히 돈 벌어오는 에반젤린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건가 (??) 으으, 벌써 잘 시간이라니. 심지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마음이 몹시 괴로워.
레아주, 미안! 주말에 못 올 것 같다고 미리 얘기했어야 했는데. 잘 보냈어? 난 어디 좀 다녀올 일이 있어서 갔다가 아까 들어와서 기절했어. 직원 수 줄어든 것 때문에 일이 바빠지니까 주말에도 정신 없는 게 계속 이어지는 것 같네. 으으, 미안해. 다음 주엔 답레도 들고 올 수 있도록 할게. 오늘도 굿나잇이야. 잘 자. 레아주.
그러게. 요새 왜 이렇게 바쁘지. 추석 되면 좀 한가해지려나... 미안. 레아주. 기운 내고 있어. 항상 좋아해. 오늘도 이런 시간이야. 요새는 꿈은 거의 안 꾸는데 잠이 너무 줄어서 힘들어. 왜 이렇게 잠들기가 어려운지. 레아주는 잘 지내고 있어? 더위가 좀 많이 가셨어. 이제는 감기를 조심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
맞아. 확 그냥 도전해버려? 거리두기 4단계따위는 이겨내고 새로운 직장을... 찾기 어려울지도. 끙. 나도 보고 싶었구. 오타가 자꾸 나서 계속 고치고 있어. 요새 왜 이러나 몰라. 자판이 덜덜 떨려. 레아주도 많이 바빴어? 이게 바쁜 시기인가봐. 항상 이맘 때부터 연말까지는... 아니. 그냥 사시사철 바쁠 때는 바쁜 것 같기도 하고. 날이 많이 선선해진 거 하나는 되게 위안이 돼. 오늘은 잠을 좀 더 자서 컨디션이 비교적 괜찮은 편이야. 레아주는?
걱정 마. 아프진 않으니까. 이게 좀 지쳐서 그런 거지 어디 막 아픈 건 아니고, 어. 괜찮아. 몸을 막 써서 그래... 움직이기 귀찮아... 레아주도 어디 아픈 곳 없지? 안 좋으면 병원 바로바로 가야 한다? 며칠 전에 주변에서 아픈데도 병원 안 간다는 사람 있어서 엄청 뭐라고 해준 참이었거든.
몸은 괜찮습니다... 일하다 자잘하게 다치는 것만 빼면 말야. 주변에 인사 쫙 돌린다는 게 또 놓쳤어. 내일은 당일이라 더 바쁠 텐데 말이야. 그래서 레아주한테 가장 먼저 인사하러 왔어. 레아주,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코로나 때문에 좀 잔잔한 명절이지만 그래도 남은 한 해 동안 행복한 일 가득했으면 좋겠어.
응. 정말로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좋은 의미로 심장 두근거리는 일도 함께 말야. 여유라고 생각하니까 되게 막막한 거 있지. 다음 달부터는 신입도 가르쳐야 하는데 이게 어떤 일인지와는 별개로 그냥 뭔가... 쭉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자신감이 엄청 떨어졌어. 그래서 더 정신이 없나봐. 미안, 미안. 주말은 잘 보냈어? 연휴 기간은 쭉 쉬는 거야? 레아주는 어디 멀리는 안 간다고 했었던가. 벌써 함께한 기간이 이렇게 오래 됐네. 새삼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맞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웃을 일이 많은게 좋잖아? 나는 뭔가 그 미래를 멀리 생각하면 누구나 다 그럴거라 생각해.그러니까 좋은 일만 생각하고 기분 좋게 나아가는게 좋을 것 같아. 한치 앞도 모르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에 우울해지기엔 시간이 아쉽잖아. 그치? 응, 연휴동안은 푹 쉴 것 같아. 나도 고맙게 생각하고 애틋하게 생각해.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고 싶구..
웃을 일이 많으면 좋지. 그렇게 많을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힘들 때도 이따금 웃으면서 살 수 있을 만큼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 집에 있는 선풍기가 말을 안 들어. 내가 분명 타이머를 맞춰서 돌려놨는데 그냥 계속 돌아가버린 거야. 그래서 덕분에 감기를 획득했어. 레아주는 환절기에 꼭 조심해야 한다? 애틋하게 생각한다는 말 되게 마음에 박혀. 나는 계속 이런 패턴이라 미안한 마음이 더 커서 그런가 봐. 이런 식으로 뭐랄까. 평상시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 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레아주 덕분에 할 수 있게 돼서 항상 고마운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 느낌. 나도 더 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해. 정작 필요한 말은 주고 받질 못 하고 있네. 답레... 써올게. 원래 빨리 쓰면 또 잘 써지는데 이렇게 자꾸 미뤄지다 보면 내가 썼다가 막히면 지우고 그래서. 누가 보면 단편 하나 쓰는 줄 알겠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항상 고마워.
맞아, 너무 많을 필요도 없고 적당히 웃으면서 살 수 있는 만큼이여도 충분하지. 감기 걸리면 안되는데.. 약 잘 챙겨 먹고 푹 자서 얼른 떨쳐내자.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구, 우리 스레가 에바주에게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해. 나도 항상 이렇게 와주는 것에 고마움을 갖고 있으니까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줘. 답레는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을게 . 나도 늘 좋아해. 오늘도 마무리까지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어.
무수히 많은 적의 군세 앞에 홀로 섰던 때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 당황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이어갈 재간이 없어서 입을 다물다니. 에반젤린은 자신의 상태가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며 아슐레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다가 이내 그조차도 포기한 채로 시선을 내리 깔고야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웠다. 생각없이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불길이 타오르듯 넘쳐 흐르는 감정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잡아먹을 것처럼 자신을 훑어내리는 아슐레아의 시선 때문이었다. 손을 잡아들어 손가락을 입에 무는 행위는 어찌 보면 손등에 입 맞추는 기사의 맹세와 다를 것도 없는데도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에반젤린의 얼굴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다를 게 없기는. 에반젤린은 스스로 변명하고 싶어 계속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손을 거두었으나 귓가로 스며드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에반젤린, 그저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도 에반젤린은 무언가에 붙잡혀 묶인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알았다. 심장 어림, 아니, 그보다도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렁임과 홧홧함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리 경험이 적은 자신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사랑, 성욕,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쉽게 이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르는 감정이 제 안에 있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그것이 핏줄에 내재된 미치광이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분명히 모든 것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무분별한 감정의 표출이 종국에는 너를 가둬둔 채 시들어 가게 만들고 네 삶을 지옥과도 같이 만들 것이라고. 그리고 거기에 네 의지따위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종속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다. 보다 더 큰 감정에 파묻혀 질식하게 된다면, 그 감정의 크기를 견주어 보게 된다면, 가둬지는 건 나겠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감각에 에반젤린은 숨을 삼켰다. 기뻤다.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다 감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네 감정의 크기가 기뻤고, 몇번이고 다시 확인 받고 싶어하는 자신에게 질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기뻤다. 아슐레아의 앞에서라면 자신의 이름마저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네게 사랑 받는 나. 자신의 존재마저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감정이 전부 제 것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하나가 되는 거야.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은 몸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스치는 손길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운 것도 같았고, 칼날에 베인 것처럼 선뜩하기도 했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에반젤린의 몸은 크게 흔들리며 움찔거렸다. 자꾸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숨을 감출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터져버릴 것처럼 부푼 감정이 제 몸까지도 부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더, 가까이."
이전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의 끝에서 에반젤린은 레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그 몸을 꽉 끌어안았다. 흣.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교성에도 아랑곳 않은 채 에반젤린은 레아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조금만, 더. 이윽고 한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머릿속을 희게 만드는 감각이 에반젤린의 몸을 휩쓸었다.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야. 다음에 이어갈 내용은 내가 한 번 더 적을까 싶은데, 괜찮을까? 해야할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잘 안 풀리네. 지금은 속이 이상하게 아파. 숨을 이상하게 삼켰나... 그리고 지금 쓰는 말들도 뒤죽박죽이야. 취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지. 어쨌든, 오늘도 좋은 밤! 잘 자구 내일 봐, 레아주.
나 왜 주중에 답을 했다고 생각한 걸까. 꿈 꿨나? 미안해, 레아주. 직장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좀 바빴어. 이제야 주말이네. 그동안 잘 지냈을까? 나는 백신 2차 접종까지 마무리 했는데 머리가 좀 무거운 것 빼고 아직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아서 걱정을 좀 덜었어. 레아주는 별일 없을까.
어제 감기 기운 비스무리한 게 조금 있길래 걱정했는데 크게 아프진 않았어. 좀 길게 잔 정도? 피로가 쌓이기는 했나봐. 아직도 목이 좀 칼칼하다. 다음 주도 거의 똑같기는 한데... 나도 자가격리 들어가고 싶다. 혼자 살았으면 진짜 자가격리 하고 싶네. 다음 주야? 레아주도 아마 별일 없을 거야. 오히려 아픈 사람 보다 멀쩡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더라.
그래도 약 먹고 쉬니까 나아지더라. 무사히 넘긴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제 완전히 방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코로나에 대해서 마음 좀 놔도 좋지 않을까? 사람 만나는 것도 여유 좀 생기려나. 어차피 그럴 일 자체가 별로 없긴 해도. 레아주도 무사히 넘어갔음 해. 마스크... 평생 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긴 하는데, 얼른 전부 나아졌으면. 또다시 평일의 시작이야. 괴롭다. 이번 달에는 이런저런 행사가 많아서 벌써 돈도 모자르고 정신력도 모자르고. 주말은 잘 보냈었어? 답레 하나 더 주기로 해놓고서 이렇게 또 미뤄지게 되네... 짤막하게 적어서라도 얼른 주도록 할게. 바람은 기분 좋게 부는데 날벌레나 모기가 아직도 보이는 것 같아서 의아한 새벽이야. 오늘도 좋은 밤 보내구, 내일 보자.
약 먹고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네. 너무 코로나에 대해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도 좋지. 그게 맘처럼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도 아마 별일 없이 넘어가지 않을까 싶긴 해. 물론 아직은 지켜보ㅓ야 하겠지만. 나는 잘 보냈어. 그러니까 에바주도 잘 보내길 바래. 답레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괜찮아. 맞다!아무래도 우리 수위가 좀 올라갔던 느낌인가봐. 사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아니니까 앞으로는 좀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아. 나도 신경써서 일상을 돌리도록 할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자.
내가 없는 사이에 일이 있었구나. 저도 죄송하단 말씀 드릴게요. 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아주에게도 미안해. 혼자서 해결하도록 둬버렸네. 요새 다른 일에 신경 쓰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계속 못 들리고 있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이러면 곤란한데. 미안... 이번 주는 잘 보냈을까.
스레를 지켜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한테 너무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고 있는 거지. 그래서 미안해. 좀 더 자주 들여다봤으면 혼자 사과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기준이 좀 애매했나. 아슬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할게. 항상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일이 터지는 것 같아. 내일이면 직장에 터졌던 코로나 폭탄 문제가 좀 진정될 참이야. 어쩜 이렇게 뭐가 꼬이는지. 뭘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생각치도 않았던 일이 툭 튀어나와서 가로막는 기분이야. 좀 지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을까, 레아주. 미안해서 이런 인사 전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돼. 백신은 괜찮았어? 부디 별 일 없었기를 바라.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 금방 또 올게. 잘 자.
새로운 날이 밝았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에반젤린에게 있어서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날이기도 했다. 더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으니까. 에반젤린은 예복을 갖춰 입고 회의실로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간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국의 찬란한 태양, 에반젤린 셀린느 황제 폐하 드십니다.
수많은 허례허식과 불필요한 관례들을 없애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온갖 수식언과 왕림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여 표현하는 것 또한 그랬다. 이게 최소한의 예식이라는 시종장을 말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에반젤린도 포기한 부분이었다. 문이 열린 넓은 틈 사이로 들어선 에반젤린의 걸음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빠르고 곧게 옥좌를 향해 나아갔다. 황궁 내부와 각종 부서를 담당하는 관료들과 귀족들이 모두 모인 곳이었다. 그러나 대전 안에 자리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깊게 숙인 채여서 에반젤린의 시야에 걸리는 것은 그들의 정수리 뿐이었다. 에반젤린이 옥좌에 엉덩이를 걸치고 문이 닫힐 때까지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장내를 훑듯이 둘러본 에반젤린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고개들 들지.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는 모습은 마치 그들에게 걸려있던 마법이 풀리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에반젤린의 말 한 마디면 저들은 다시 주문에 걸린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 자세 그대로 몸을 굳히리라.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크지는 않은지 걱정하겠지. 이게 바로 권력이었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존재란 이다지도 커다란 것이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그런 것에 휘둘리지도, 짓눌리지도 않을 정도의 강단을 갖춘 사람이었다. 초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이 귀족들에게 더한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반젤린은 덤덤한 투로 말을 꺼냈다.
오늘부로 황궁에 내린 경계령을 해제한다.
근위기사단장의 피습에 대한 처분이 내려진지 3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는 황궁으로 끌려들어왔고, 주동자인 백작과 그의 일가는 황궁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 조만간 그들의 목이 잘려 성앞에 내걸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대귀족들은 황제의 숨겨진 힘인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고, 남들보다 권력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운 이들 또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지나치게 경직된 현재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소한 후에 그 빈틈을 노리려는 것일 테지.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표정을 지워내는 가운데, 에반젤린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확제를 대신할 축제를 열지. 기간은 일주일 뒤부터 한 달간 진행하는 걸로 하겠다.
이 또한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으나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장내를 짓누르던 공기의 무게가 한층 가벼워진 것처럼 몇몇 관료들과 귀족들이 숨을 토해냈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황궁에서의 일이 제국 전체에 퍼져나가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경직된 분위기와 긴장은 자세한 사정 보다도 빠르게 알려지는 법이다. 신민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고, 적절한 조치였다. 물론 황제의 본심이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전에 자리한 대다수는 안도하고 있었다.
준비하도록. 보고는 관련 청의 대신들에게 받는 걸로 하겠다. 이상.
받들겠습니다. 합창하듯 이어진 귀족들의 화답과 다시금 숙여진 고개를 내려다 본 에반젤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과 같은 걸음걸이로 대전을 벗어났다. 그 뒷모습조차 눈에 담기 어렵다는듯 떨어진 시선들은 에반젤린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올라오는 일이 없었다.
.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생각해 축제를 다시 열겠다고 말은 했으나 에반젤린의 속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였다. 기사단장의 직위는 해지되지 않았지만, 축제의 시작에 맞춰 건재함을 드러낼만한 공적인 자리에 설 정도로 레아의 몸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병상에 누워 있을 레아의 모습을 떠올리는 에반젤린의 눈빛이 새파랗게 빛났다. 백작 일가의 심문은 이안 슈펠리드가 직접 맡고 있었다. 그 휘하의 일원은 필요하다면 고문쯤이야 눈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해치울 정도로 단단한 이들이었으니 머지 않아 결과가 나올 터였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들에게서 얻어낼 사실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혹시 또 모르지. 의외의 순간에 커다란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심증이야 잔뜩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제국은 녹록치 않았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어떤 순간에 어떤 일로 잃어버리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분명 이번 일을 저지른 배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만약에 그 꼬리라도 잡아챌 수 있다면 에반젤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하리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슐레아와.
'결혼할까.'
쉽게도 튀어나왔던 말이 다시금 삼키고 나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 사건의 배후와 축제, 그 외의 대소사를 생각하는 와중에도 에반젤린의 머릿속 한켠에는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포기할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황제가 되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만약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먼저 후계에 대한 일이 발목을 잡을 것이었다. 입양? 하급 귀족가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황족의 방계를 데려오는 것조차 문제가 될 여지가 있었다. 에반젤린은 정말로 불가능하다면 따로 씨를 받아 후계자를 잉태할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 후에 외척으로 성장할 여지가 있는 첩의 가문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정리하면 되지 않겠나. 지나치게 폭주하는 생각에 에반젤린은 쓰게 웃었다. 아슐레아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바닥에 깔리니 이런 생각조차 쉽게 가지를 치고 자라나게 된다. 또다시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구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며 에반젤린은 레아가 머물고 있는 별궁을 향해 걸었다.
느리지만 조금씩 풀어지는 분위기를 눈치라도 챈 건지 맑게 개인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말을 타고 달리면 생각이 쉽게 정리되기도 했다. 제법 매섭게 스치는 바람을 맞다 보면 머릿속의 잡념이 사라지고, 골몰하던 문제의 해답이 그 결을 타고 들어오는 것처럼 여겨진다.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또다시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애써 잡아채며 에반젤린은 걸음을 재촉했다. 필연적으로 정원을 가로지르게 되어있는 구조의 별궁이었다. 황궁과 이어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넓게 펼쳐진 정원이 마치 어떤 자연 경관 안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역대 황제들이 그러했듯 에반젤린 또한 특별히 마음에 드는 곳이기도 했다. 허락 받지 않은 이는 근방에 접근조차 할 수 없고, 내부에는 어떤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져 있어 특별한 징표를 지니지 않은 이는 별궁에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에반젤린은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궁에 가까워질수록 에반젤린은 조바심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레아를 보고 싶었다. 아니. 가능하다면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진정해. 에반젤린은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며 정원을 벗어나 궁 앞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걸음을 늦췄다. 그곳에 레아가 있었다. 혼자서 몸을 일으키기는 어려운지 수행하는 시녀가 끄는 의자차 -휠체어- 에 몸을 기댄 채였다. 에반젤린은 아까와는 다르게 느린 속도로 한 걸음씩 레아에게 다가섰다. 시녀와 그 옆에 함께 하던 기사들이 허리를 숙이는 사이 에반젤린은 레아의 앞에 선 채로 웃었다. 그곳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마주할 수 있는, 눈부시도록 환하게 빛나는 미소였다.
응. 그러면 될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하루야. 괜히 들어간 술 덕분에 졸린데 잠이 안 와. 레아주는 오늘 하루도 잘 마쳤을까. 나도 레아주랑 레아 정말 정말 좋아해. 아슐레아 최고야. 좀 더 많은 걸 보여줘야 하는데... 오늘도 고생 많았어, 레아주. 잘 자.
앗. 나도 모르게 레아주라고 나메에 적고 있었어. 나도 언제나 좋아해. 이제 진짜 코로나 판데믹이 잦아드나봐. 일이 너무 바빠. 솔직히 너무 우울해... 으으, 레아주. 벌써 토요일이 끝이야. 잘 있었어? 잘 지내? 날 추운데 어디 아픈 곳은 없구? 따뜻한 거 잘 챙겨 먹고 겨울 간식도 이제 슬슬 나올 때니까 챙겨 먹구. 좋아하는 거 있어? 아무튼, 레아주. 오늘도 고마워. 답레는 천천히 줘도 괜찮아. 여기까지가 갱신.
실시간 이야기? 언제나 마음속 깊이 교감하고 있다... 오늘은 그렇게 바쁘지 않았는데 잠을 오래 오래 잤어. 쉬는 날 잠을 좀 몰아서 자거든. 지나치게 오래 자나? 그래도 뭔가 다른 걸 하는 것 보다는 컨디션에 도움이 되는 기분이야. 레아주는 뭐 하면서 보냈을까. 지금도 좋은 시간 보내고 있나.
나도 보고 싶었고, 좋아해. 많이 그래. 이제 슬슬 코로나 관련해서 제한되었던 것들이 풀리는 바람에 그나마 조금 느긋했던 것에 적응해버렸던 몸이 과부하가 걸리는 중이야. 코로나... 나쁘지 않았을지도.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 아무튼, 일이 좀 더 바빠져버렸어. 레아주도 바쁘다니까 괜히 안쓰럽고 더 기운 냈으면 좋겠고 그래. 으으. 파이팅이야. 답레는 천천히 적어줘. 주말에 좀 쉬어야 하면 넘어가도 되는 거고. 걱정 마.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으면 해.
언제나 몸을 움직이는데 익숙했던 아슐레아였지만, 휠체어 위의 생활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좋은 모습일지, 아니면 안 좋은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이렇게 지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번 망가진 몸은 지난 날의 고생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회복이 더뎠으니까. 아슐레아도 처음엔 조급한 마음을 먹을 뻔 하기도 했지만 지난밤의 에반젤린을 떠올리면 자신이라도 흔들리지 않고 옆에 있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애써 현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수하 기사들의 도움과 에반젤린이 붙여둔 시녀들 덕분에 번거롭거나 한 것은 없었지만, 역시 자신은 이렇게 얌전히 앉아있는 것이 익숙치 않다는 것을 몇번이고 느끼고 있었다. 햇살이 밝은 정원에 나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에 입가에 조심스레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곤 그 발소리의 주인이 확실해졌을 때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
몸이 잘따라주지 않아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하는 휠체어 위에서의 인사였지만, 에반젤린이라면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차분히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 저도 그러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날이 화창하니.."
기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모두 다시 열을 맞춰 정원을 빠져나갔고, 휠체어를 끌어주던 시녀 하나만 남아 두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슐레아는 시녀도 내보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남겨두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의중이었기에 살며시 눈웃음을 띈 체 에반젤린을 올려다 보았다.
" 폐하, 산책은 둘이 하는 것이 좋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아이도 같이 데려가는 것이 좋으시겠습니까?"
자신의 휠체어를 끄는 시녀가 갓 궁에 들어온 신입이라는 것을 에반젤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가벼운 대화를 나누어 알게 된 아슐레아였기에, 바싹 긴장을 한 시녀를 배려하듯 가볍게 손을 뒤로 움직여 시녀의 손을 매만져주며 상냥하게 에반젤린에게 물음을 던진다. 에반젤린이 보라는 것처럼 대놓고 만진 것은 어쩌면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슐레아만 알 사실임은 틀림없었다.
으응. 미안. 내년에는... 꼭 퇴사해야지. 그럼 더 오히려 더 바쁠려나. 으으. 레아주는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자꾸 잠이 모자란 것만 빼면 다 그냥 그래. 조금 답답하지만 언제나와 비슷한 정도. 날이 한순간에 겨울이 되어버렸어.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지만 그건 무리니까. 레아주도 잘 챙겨입고 다녀. 감기 조심해야 한다?
같이! 막! 이야기! 일 진짜 너무 바빠. 코로나 끝났어? 말도 안 돼. 항상 멍해... 나도 레아주랑 이야기 하고 싶다. 실시간 대화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만... 이번 주는 어땠어? 별 일 없었어? 잘 보냈는지 모르겠다. 항상 궁금해 하고 있어. 자꾸 늦게 들어오고 하니까 미안해서 답도 못 하고.
자기소개 아니야? 주어가 바뀐 것 같은데. 매번 같은 얘기의 반복이지만 이렇게 늦게 답 줄 때 미안하고 레아주가 지쳐서 떠나버릴까 싶어서 항상 겁 먹어 있으면서도 레아주가 대답해주면 반짝 기분 좋아져. 응, 그래. 못난 상대지만 이렇게 함께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나도 별일은 없어. 감기가 올락말락 하는 것 말고는 다 괜찮아.
에반젤린은 가장 먼저 레아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있을 때 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건강도, 그리고 기분도 마찬가지였다. 은근하게 드리워진 녹음과 산뜻한 날씨는 사람을 부드럽게 만드는 법이었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선 에반젤린은 겹쳐진 두 손을 느릿한 시선으로 훑었다. 이렇게까지 매만지고 있으면, 시녀가 불쌍하지 않은가? 어쩐지 레아의 속이 들여다 보이는 것만 같아 에반젤린은 웃었다.
"그대의 몸이 이러니 함께 가야함이 마땅하지만... 많이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레아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진 마당이다. 그런 몸으로 요양하고 있는 곳에 보내졌다는 것만으로도 신원은 보장 받았다는 의미였다.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니 이제는 몸을 떨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는 시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어 레아의 손에서 빼낸 에반젤린은 그 손을 천천히 허공에 놓아주었다.
"꿇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워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자연스럽게 엎어지려는 시녀의 몸을 말로 지탱한 에반젤린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어조로 명령했다. 떨어진 명령이 반가웠는지 허리를 깊게 숙인 후에 돌아서는 발걸음에 실린 부담이 줄어들어 보이는 것은 제 착각일까. 무엇을 잘못한 것도 없고 시중인들에게 엄하게 대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이리도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드는 에반젤린이었다. 아마도 전장의 기세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보다는 많이 유해진 에반젤린이었지만 황궁은 황제조차도 옅은 긴장을 머금게 만드는 공간이었으니, 그런 기세를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위압감을 주는 기세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레아와 단둘이 남은 지금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시녀의 뒷모습을 일별한 에반젤린은 이번에는 레아의 손목을 감싸쥐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대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에반젤린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쥐고있는 손목에서 올라오는 옅은 떨림에 에반젤린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감히 짐을 놀리려고 들다니. 장난기 섞인 투로 한 번 더 귓속에 흘려넣듯 속삭인 에반젤린은 레아의 귓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도로 허리를 편 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여 보이는 것이었다.
"그럼, 갈까."
뒤이은 레아의 반응을 지켜보며 에반젤린은 직접 휠체어를 끌려는 듯이 그녀의 뒤로 움직이려 했다.
라고 적어놓고 잠들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유동적은 무슨... 레아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나는 바보인가? 답은 길이를 줄이고 티키타카를 빠르게 주고 받는 것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어. 억지로 일어나게 해봤자 좋아할 에반젤린이 아니니까 얌전히 앉아서 할 수 있는 다른 걸 시도해보자 (?) 맨날 똑같아. 으으, 피곤해. 뭔가 상큼함을 추가해줄 그런 이벤트가 필요해. 레아주는 어때?
정확히는 일어날 순 있는데 힘이 드는거지만 말이야. 헤헤, 자주 주고 받으면 나야 기쁘지. 에바도 자주 보고 에바주도 자주 볼 수 있을테니까. 앉아서 할 수 있는거라...정원 풀밭에 앉아서 시간 보내기..? 막 에바 품에 안기듯 앉아선 레아가 막 부끄러워 하는거야. 맨날 자기가 지켜주는 역할이었는데 반대가 되는거지..레아는기쁘면서도 막 부끄러워 하구..
귓가에 속삭이곤 입을 맞춰주는 에반젤린에게 얼굴과 귀를 연한 분홍빛으로 물들인 아슐레아가 작게 속삭인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의 검으로서만 곁에 존재할 때에는 긴장을 푸는 순간 에반젤린의 안위에 무슨 일이 생겨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씩 에반젤린에 대한 마음을 자각할 때에는 자신의 마음이 혹여 에반젤린에게 보여져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에반젤린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버려서 도저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긴장을 푸는 순간 바보 같은 얼굴로 에반젤린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귀족들이 에반젤린을 귀찮게 만들진 않았나요? "
아까 시녀의 손을 만져주던 것처럼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주려는 에반젤린의 손을 살며시 감싸주며 부드럽게 물음을 건낸다. 황제가 휠체어를 끌어주는 사람은 이세상에 통틀어 자신 밖에 없을거란 생각을 하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은 덤이었다. 에반젤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사실이 무력해진 아슐레아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듯 했으니까. 그래서 이시간이 앞으로도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 저는 요즘은 검도 쥐지 않고, 앉아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요. 에반젤린을 생각하면 얼른 제가 다시 검을 잡고 복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에반젤린의 곁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으면 제게 주는 애정이, 걱정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
아슐레아는 가느다란 손끝으로 살며시 에반젤린의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올려다본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이세상의 미를 전부 홀로 가져버린 것만 같은 그 고귀한 모습을 눈에 담은 아슐레아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어보인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에반젤린의 눈동자에선 애정이 묻어나고 있었으니까.
" 그럴수록 그 애정을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에반젤린이 무척이나 바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래저래 요며칠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아요. 제가 좀 더 먼저 제 마음을 에반젤린에게 보여주었다면 좀 더 빠르게 이런 감정들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전에는 이런 마음이 드러나면 원래 있던 관계마저 부셔지고 멀어질거라 겁을 먹었으니까 생각도 못 했지만.. "
그때의 자신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까.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듯 잠시 입술을 깨물던 아슐레아는 이내 기사로선 잘 지어보이지 않던 베시시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분명 일요일인가 월요일에 꼭 답레를 적고 새로운 기분으로 한 주를 맞이해야지 싶었는데 그냥 망상이었어. 안녕, 레아주. 이런저런 이유로 예정되어 있었던 휴일들이 잘리고 막 써왔던 몸이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덕분에 돈이 술술 나가는 중인 에바주야... 눈물. 잘 지내고 있을까?
쾌적하지는 않은데 한 주가 착실하게 지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안도하고 있어. 지치게 만드는 일이 이것저것 생긴 탓에 조금 처지기는 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힘들 때일수록 무언가 마음가짐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요는, 주말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는 거야. 좀 더 자주 보러 오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내가 맞게 가렸나?
순간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서 당황했어... 으으, 여러모로 미안. 오늘도 결국 참지 못하고 늦은 저녁 먹고 쉬던 중이야. 먹은지는 좀 지났지만 그래도 일찍은 못 자겠네. 이러고 버티면 막상 자야할 때는 잠이 제대로 안 오더라니까. 주말... 답레도 주말까지 들고올게.
풀어지는 것도 좋은데 말야.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떠버린다. 이렇게 손쉽게 움직이는 게 마음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한 켠으로 일축하며 에반젤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 비하면 기력이 떨어진 것이 확연히 드러나면서도 보다 나긋한 맛이 생긴 레아의 목소리를 음미하며 산책을 하고 있자니 잡다한 고민쯤은 바람에 날리듯 흩어져버렸다. 간만의 휴식이었다. 자신의 손을 감싸쥐는 레아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몸에 쌓여있던 피로마저 옅어지는 것만 같았다.
"귀찮았지."
전부 때려치고 싶을 정도로 말야.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도 레아의 앞에서 뿐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불경하다고 느낄만한 발언을 뻔뻔하게 내뱉으며 에반젤린은 이어지는 레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에반젤린은 한순간 멈칫했던 것을 무마하듯 눈을 깜빡였다. 복귀라. 필요하다면 해야겠지. 여러가지 문제들을 한순간에 일축시킬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레아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면, 다른 길을 선택해도 좋지 않을까. 또다시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생각을 붙들며 에반젤린은 자신을 돌아보는 레아의 눈을 마주했다. 맑게 빛나는 레아의 눈이 기어코 남아있는 자신의 음습한 속내를 비추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에반젤린은 이어지는 레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한 걸음씩 옮기던 걸음을 천천히 멈추었다.
"좀 더, 욕심내도 좋아."
이 감정도, 이 시선도, 이 손길도. 전부 레아, 너의 것이니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만약 마음에 공간이란 것이 있다면 에반젤린의 마음에는 빈 곳이 하나도 없어 다른 누구에게도 나눠줄 수 없을 정도였다.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뻐근해질 정도의 감정을 네가 아닌 누구에게 품을 수 있을까. 에반젤린은 아직도 얹혀져 있는 레아의 손을 부드럽게 거머쥐며 달래는 투로 말을 건넸다.
"그 순간이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돌아갈 수도 있었던 일이니까."
그러니까, 모든 게 잘 맞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안에 내재된 자기 파괴적인 욕구를 알고 있었고, 그것이 레아를 향한 감정과 합쳐졌을 때 어떤 작용을 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 전에 레아가 자신을 붙들었으니. 에반젤린은 레아의 손을 다독이며 미소 짓는 레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홀릴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이어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맞춰버릴 정도로. 에반젤린은 고개를 숙이며 레아의 손을 그녀의 허리춤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앉아있는 레아의 몸을 그대로 감싸 안는 동시에 입술을 깊게 빨아들이며 키스했다. 슬며시 눈을 감으며 제 입술에 맞닿는 감촉을 즐기는 한 편, 숨결 한 줌이라도 놓칠세라 집요하게 틀어막는 입맞춤이었다. 잡고 있는 레아의 손에 힘이 실리는 걸 느낀 에반젤린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볼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이는 건, 숨이 찬 탓이려나.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특유의 미소를 지은 에반젤린은 다시 한 번 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았어?"
얘기해. 그런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나 진한 입맞춤 직후에도 느껴지는 아쉬움을 감추며 에반젤린은 방금 전 레아의 행동을 흉내내듯 눈꼬리가 휘도록 접으며 웃어주었다. 이 산책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이 떠올라 에반젤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레아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런 짧은 산책에도 레아는 피로감을 느낄 터였다.
아아니, 내가 늦게 가져온 걸 뭘. 그렇게나 오래 됐나? 이렇게 꾸준히 연락 주고 받는 거 너무 신기해. 응. 좋아. 이번 겨울도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연말이라 많이 바쁘지. 코로나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나라 분위기가 다 그런 것 같아. 와중에 일은 바쁘구. 이럴 때는 따뜻한 거, 단 거 잘 챙겨먹고 쉬는 게 최고야. 레아주도 쉴 때는 푹 쉬어...
우리 꽤 오래 됐어. 조금 느릴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길게길게 오래오래 보면 좋은거잖아. 난 그래서 되게 기쁘게 생각해. 그리고 앞으로도 더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어. 에바주도 같은 마음이면 좋을텐데. 맞아, 바쁘기도 한데 주변도 어수선해서 참 그래. 에바주는 잘 쉬고 있어? 나는 편하게 쉬고 있어.
" 풀어지면 겉잡을 수 없이 어리광을 부릴 것만 같아서요. 기왕이면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
에반젤린의 말에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조금은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자신이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은 모습을 에반젤린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이정도의 긴장은 얼마든지 감수 할 수 있었다. 물론 종종 긴장을 완전히 풀고선 어리광을 부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기분 좋은 긴장이란 것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에반젤린의 손을 가볍게 감싸쥐곤 천천히 산책을 나아간다.
" 후후.. 귀족들은 항상 에반젤린을 귀찮게 하곤 했죠. 특히나 요즘 같이 뒤숭숭한 때에는 특히나 더 그럴테니까요. "
그래도 때려치는건 곤란하니까요, 후후 - 하고 말을 덧붙이며 웃음을 이어간다. 에반젤린을 귀찮게 만드는귀족들이 누군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몇년 전부터 에반젤린의 옆에서 지켜봐온 것들은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래서 그 귀찮음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이 좀 더 빠르게 복귀를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마는 아슐레아였다. 크게 도움은 안될지도 모르지만 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테니까.
" 그렇게 말해주면 저 더 욕심낼거에요. 이렇게 맞잡은 손도 절대로 놓치않고 오래도록 에반젤린의 곁에 있을거에요. "
자신을 달래듯 말해오는 에반젤린을 보며 상냥하게 눈웃음을 지어보인 아슐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장 무언가 서둘러 한다고 하더라도 잘될 것은 없으니까, 지금 당장 쥘 수 있는 것부터 쥐면서 익숙치 않은 욕심을 부려보는 것. 그것이 지금 자신이 에반젤린의 곁에서 해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가 이렇게 자신을 보아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소중한 순간을 좀 더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은 것은 이미 아슐레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에반젤린에게 빠져있단 증거였을 것이다.
"있잖아요, 에반젤린."
진한 입맞춤을 나누곤, 자신을 따라하듯 눈꼬리를 접어 웃어보이는 에반젤린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아슐레아는 이내 아쉬운 듯 옅은 한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채곤 천천히 입술을 연다. 방금전까지 에반젤린의 입술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있는 촉촉한 입술은 더욱 분홍빛이 짙어진 것 같았다.
" 아직 그렇게 지치지 않았는데.. 에반젤린이 괜찮다면 좀 더 예뻐해주셔도 괜찮아요. 마침 여긴 아무도 없고 앞에는 앉아서 쉬기 좋을 잔디밭이 있으니.. "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는 에반젤린의 손을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아주곤 아쉬워 하는 에반젤린을 유혹하듯 입술을 핥아보인 아슐레아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 늦었지만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레아주. 연휴가 주말이랑 계속 겹치는 게 너무 아쉽다. 이브인데 뭔가 특별한 약속 있었을까? 모쪼록 좋은 밤 되었으면 해. 나는 이제야 숨 좀 돌리는 중이야. 그리구 오늘 밤에는 와인과 함께 레아주의 답레를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
연말은 연말이라 바쁘고 연초는 연초라 바쁘고 여름엔 날 더워서 생기는 이슈 때문에 바쁘고 어디로 도망갈까. 돈 많은 백수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심정이야. 잘 쉬고 있었어? 이번 크리스마스는 지인짜 아무런 감흥이 없다... 토요일이라 더 그런 것 같아. 그게 좀 아쉬워. 어디 가서 트리도 좀 보고 그랬으면 좀 나았으려나. 레아주는 어때. 크리스마스 좋아해?
돈 많은 백수는 모두의 워너비지.. 이래저래 바쁜 모양이네. 나는 잘 쉬고 있었어. 나도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감흥이 없어서 묘해. 그래도 에바주랑 이브를 보내게 되서 다행이야. 크리스마스는 딱히 의미를 크게 두진 않아서 휴일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번엔 주말에 껴있어서 그것도 아니네... 그래도 에바주랑 함께니까 무진장 기뻐!
건물주, 돈 많은 백수, 졸부집 3세... 으으. 헛된 꿈 꿀 시간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난 당장 오늘이 우울한데 어쩌겠어. 크리스마스가 특별했던 때도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지. 나 너무 늙어버렸나 봐. 나도 레아주랑 이브에 연락할 수 있어서 기뻐. 둘이 대화하고 있으니까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단어가 조금 더 빛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구. 주말에 껴있는 거... 아웃이야... 신정도 끼어있던데, 대체공휴일은 어디로? 아무튼, 나도 보고 싶었다는 말이야. 오늘은 천천히 자려나?
손님도 있고, 일도 있고, 생일도 있고,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다. 새해는 그냥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구나 하는 생각만 들고 감흥 없는 줄 알았는데 알게 모르게 마음이 어수선 했었나봐. 출근이 정말 죽도록 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다시 정상 루틴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새삼 반갑네. 레아주는 별 일 없었어? 뭐, 해돋이를 봤다거나. 그런 거 생각도 못했어, 이번에는. 제야의 종도 안 치고 말야.
감기처럼 골골대는 그런 건 없는데 허리나 손목 이런 게 좀 안 좋아서 힘들어. 일하고 사는 게 답답한데 집중이 잘 안 되는 바람에 레아주도 자주 못 찾아왔네. 으으, 미안해. 새해씩이나 됐는데 같은 인사만 자꾸 주고 받아서. 답레는 이번 주말 안으로 꼭 꼭 들고 올게. 날이 묘하게 추워지지가 않네. 슬슬 눈 올 때가 됐나? 레아주는 눈 좋아해?
맞아. 쉬어야 낫지. 아니. 운동을 해야 낫지. 일단은 일이 바빠져서 만사가 귀찮으니 어쩔 수 없구. 최대한 버티고 버티다가 퇴사를 한다거나 이것저것 고려 좀 해보고 그 다음엔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눈 오고 나면 금방 녹아서 더러워지기도 하고 길도 얼어서 그건 힘들더라. 특히 정류장 같은 곳에 질척질척하게 쌓여있는 거, 으으. 하지만 눈 자체는 좋아. 펑펑 쏟아지는 것도 좋고. 맞는 건 적당히 좋아하고 보는 건 완전 좋아. 여러모로 설레지 않아? 물론 쌓이는 걸 보기는 어렵지만 잔뜩 쌓인 것도 좋아해...
이어지는 레아의 대답에 일순간 에반젤린의 표정이 흔들렸다.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재빨리 수습한 에반젤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렇다면야."
변했다. 레아가 변했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에반젤린이었다. 물론 나쁜 쪽의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지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당황시킬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당황스러운 이유는 그런 레아의 모습이 자신의 본능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다 못해 꽉 쥔 채로 주물러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아니, 설마 놀아나고 있는 건가. 내가? 에반젤린은 레아의 몸을 부축해 바닥에 앉혀주었다. 여자 한 명쯤 뜻대로 옮기는 것은 에반젤린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짧게 잘린 잔디와 적당히 그늘을 만들 정도로만 늘어진 정원수들은 이곳을 가꾸는 정원사의 노력이 보통의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레아의 몸을 정원수에 기대어 앉힌 에반젤린은 마찬가지로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옷자락에 드는 풀물 정도는 감수할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었다. 좀 더 넓은 공간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랬다면 아마 지금 느끼는 상쾌함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자유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바닥은 푹신했고 바람은 가벼웠다. 에반젤린은 바닥을 짚은 레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말했지만, 조급해 할 필요 없어."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일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에반젤린은 레아가 그런 일에 신경을 쏟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본인의 건강을 회복하고, 그동안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몇번을 이렇게 얘기하더라도 레아가 자신의 책임에 대한 부담과 부채감을 완전히 놓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실은 제 감정에 솔직하게 구는 레아의 모습이 달가웠던 만큼, 이런 시간이 쭉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더 크기는 했다. 병약한 모습이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할까. 에반젤린은 레아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맞춰 끼웠다. 깍지를 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레아의 손이 자신의 손 안에 틈새 하나 없이 쥐어져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에반젤린의 욕심은 쉽게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갈증이 났다. 모른 척 웃었다. 에반젤린은 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미소지었다.
마주친 시선의 간격이 좁았다. 가볍게 키스했다. 에반젤린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맞대오는 레아가 좋았다. 이정도의 관계로도, 어쩌면 만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말한대로 조금 더 욕심내주었으면 좋겠다. 그 욕심이, 자신의 것과 닮아있기를 바랐다.
평화로운 것 같기도 하고 괴로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애매해. 똑같지, 뭐. 결국에는 일 얘기야. 드디어 주말이다. 잠을 주말에 몰아서 자는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영 어려워. 창가라서 그런가 일어나자마자 춥더라. 어디 나갈 생각 하나도 안 들어. 레아주도 주말 잘 보내!
항상 레아주가 얘기해주는 것과 동일하지만 답레는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줘도 괜찮아. 나도 일에 정신 팔리거나 감정적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가 잦아서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말야. 감기 기운 있는 거 아니야? 항상 몸조리 잘해. 쉴 때는 쉬어줘야 해. 물론... 나도 잘 안 지키고 있지만... 아프지 마. 요새 백신 패스 때문에 난리던데 밖에 돌아다닐 때는 더 더 신경 쓰구.
자신도 예뻐해주길 바란다는 에반젤린의 말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분명 에반젤린을 알지 못할거라고 아슐레아는 생각했다. 알았다면 분명 저런 말을 던지지 않았을테니까. 몸 깊숙한 곳에서 열기가 조금씩 오르는 것만 같았다. 가볍게 키스를 하곤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듯 불꽃이 일렁이는 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자로서의 고양감이 샘솟았다. 이만큼 사랑받고 있다. 이 제국의 유일한 왕좌, 이 왕궁의 유일무이한 주인, 그리고 자신과 삶의 반절 이상을 함께 해온 에반젤린이 자신을 몸소 원하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슐레아의 고양감을 채워주기엔 충분했다.
" 폐하야말로, 에반젤린이야말로 참고 있는거 아닌가요? "
아슐레아는 나른한 것처럼 게슴츠레 눈을 뜨곤, 에반젤린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왠지 에반젤린이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는 끈을 자신이 손수 풀어주고 싶었다. 에반젤린은 무언가를 두려워하여 이 끈을 온전히 풀지 못 하고 있었지만, 아슐레아는 에반젤린이 어떠한 모습이 되든 사랑하고, 보듬어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사랑이자, 온전히 마음을 준 이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이었다.
" 저와 폐하, 저와 에반젤린이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주고 받았을 때부터 느꼈는걸요. 에반젤린이 무언가를 막으려는 것처럼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
여전히 에반젤린의 눈을 피하지 않고, 살며시 힘을 주어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두려워할 것 없다. 망설일 것 없다. 당신은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황제이니까. 그대는 오직 하나뿐인 마음의 주인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연인이었으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당신이 두려워 하는 그런 것마저도 자신은 몸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 저에게만은 참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에반젤린을 보여주세요. 이 왕궁 안에서 저만큼은 에반젤린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맘 편히, 솔직하게 지낼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요. "
안 그럼 당신이 망가져버릴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은 삼킨다. 에반젤린은 완벽했다. 문무 모두 완벽히 견비한 황제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또하나의 인간이었으니까. 쌓이고 쌓이면 망가져버릴지도 몰랐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쓰러져버리는 것을 아슐레아는 원하지 않았다.
" 저를 믿는다면 , 그렇게 해주세요. 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이렇게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을테니까요. "
중간에 생존신고 분명 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안 올라가있지... 미안해, 레아주. 나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머릿속에 온통 이직과 퇴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 뿐이라 손에 잡히는 것 없이 계속 눈만 돌리게 돼. 레아주는 잘 지내고 있어? 진작 얘기했어야 하는 거지만 답레 고마워. 내가 너무 느린 템포로 들려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힐링되는 일이 있다는 게 참 기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일상적인 부분은 똑같아! 그냥 내 머릿속에서 고민중인 것 뿐이지. 잠이 조금 모자라고, 얼른 퇴근이 하고 싶은 그런 나날. 오늘은 뭐가 있었을까.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조금 걸었었고... 저녁에 혼자 먹은 와인이 맛있었어. 이렇게 말하니까 나 되게 느긋하게 사는 느낌인데. 으으. 레아주는 오늘 어땠어? 날이 아직도 점점 추워지더라. 별 일 없지?
나는 레아주가 있어줘서 기뻐. 떠올리고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쁘고. 그만큼 미안하고. 명절은 잘 보냈어? 나는 남들보다 연휴를 좀 빨리 끝내게 되어서 오늘까지 여기저기 좀 돌아다니고 출근 준비도 하고 해야할 것 같아. 어디는 눈이 펑펑 온다던데 여기는 쌓이지도 않고 깜깜 무소식이야. 그쪽은 어때?
원래는 오늘까지 연휴였어야 하는데 내 휴일은 어제가 마지막이었던 관계로 뭔가 아쉽게 됐어. 조금 더 길게 쉬고 싶은 이 마음. 혹시 우리가 비슷한 경위도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 날씨가 비슷하더라구. 누군가 뭘 적고 갔는데... 뭔가 싶어서 일단 가렸어. 비밀번호 헷갈려서 혼날 뻔 했네. 레아주는 연휴 마무리 잘 했을까 몰라. 기대만큼 푹 쉬었어? 이제 곧 겨울도 안녕이야. 얼른 다음 연휴가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좋은 밤.
레아의 대답은 에반젤린이 원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더욱 유효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의 연인은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입가에 매달린 쓴웃음은 어느 정도 속마음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었다. 아니면 알아주기를 바라고 티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부끄러운 일이되,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나가 되고 싶다. 마음도, 생각도 손쉽게 알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존재마저 겹칠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다. 절대로 떨어질 수 없도록 만들고 싶다. 제 마음이 이다지도 술렁해지는 것을 보면 솔직해진다는 말은 놀랍도록 약해진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이 틀림 없었다.
"눈치가 늘었군."
아니면 지금껏 보다 둔한 척을 하고 있었던 걸까. 에반젤린은 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자세 그대로 턱끝을 끌어올려 눈을 맞추었다. 흔한 입맞춤 보다도 질척하게 얽혀드는 서로의 시선이 에반젤린의 심장을 자극했다. 박동 한 번에 삶을, 박동 두 번에 사랑을.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 뿐인데도 온몸 가득 벅차오르는 이 감각이 에반젤린에게는 너무도 소중했다. 그래서 망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돌이켜보면 자신의 노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결과를 이루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레아의 말을 듣는 편이 좋지 않을까. 분명 자신보다도 현명한 사람일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조금, 욕심을 부려볼까.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의 손을 맞잡은 채로 몸을 돌려 그 품안에 파고들었다. 다른 손은 땅을 짚어 몸을 지탱한 채로 마치 아이가 어미의 사랑을 갈구하듯 그렇게 레아를 올려다 보았다. 그저 보았을 뿐인데도 순순히 숙여드는 고개가 달가웠다. 역시, 눈치가 늘었다니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에반젤린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온 세상을 어루만지듯 흐르던 바람이 에반젤린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났다. 그것에 흔들리는 풀꽃의 소리가 제가 머금은 레아의 숨소리와 섞여드는 것이 좋았다. 맞닿은 곳에서 옅게 일어나는 온기가 좋았다. 또다시, 그런 순간이었다.
"너와 함께 하는 매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
에반젤린 셀린느가 아슐레아 리네스트를 사랑한다. 이보다 선명한 현실은 없었다. 레아와 함께라면 자신이 발 딛은 현실을,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미래마저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에반젤린은 웃었다. 거울을 봤다면 놀라버렸을 정도로 말간 미소였다.
늦지 않...? 늦은 건 또다시 나였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퇴근이 늦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 허리도 빠질 것 같고 으으 이렇게 또 주말을 낭비하게 되는가 싶어 아기님 귀엽지 나만의 작은 아기님 에반젤린이랑 아슐레아 사이에 진짜로 아기님이 생기면 얼마나 귀여울까 외모는 에반젤린 성격은 아슐레아면 레아가 어마어마하게 치이겠지 그 반대면 에반젤린은 애가 얼굴은 천재인데 성격이 좀 재수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아무튼, 그렇게 주변 사람 닦달하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지
어... 애 입장에서는 상처가 될 수 있...? 아닌가? 역시 에반젤린과 본인 사이에서 나온 아이라도 언제나 에반젤린이 우선이구나 에바주 입장에서 조금 그리고 미묘하게 감동했어 하긴 에반젤린도 레아와 자신 사이를 묶어주는 존재로써의 가치를 더 높게 칠 것 같긴 해 레아가 그런 말 하면 뿌듯하면서도 떨떠름할 것 같지만... 붉은 머리에 요요한 눈을 가진 아이 자꾸 상상되네
앗 뭐가 됐든 귀여운 이야기야... 좀 더 잔잔하고 편안한 분위기여도 좋고 우당탕탕 육아일기여도 즐거울 것 같은데 차라리 동성결혼이 보편화된 세계관에서 즐거운 인생을 설계하는 로코 분위기로 해버릴걸 그랬나? 흐 () 레아주, 주말 잘 보내고 있어? 나는 바로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어 우당탕탕 하는 건 나였구...
눈치를 늘었다며 입을 맞춰오는 에반젤린을, 아슐레아는 지그시 응시하며 그녀를 받아들인다. 서로의 입술이 덮여지는 와중에도 교차하는 그 시선은 아슐레아의 가슴에 벅찬 감정을 채워주기엔 충분했다. 이렇게 서로를 가까이에서 마주 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축복 같은 일이라는 걸 새삼스레 한번 더 느끼고 만다. 그래서 더욱 더 눈 앞의 에반젤린이 걱정 탓에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황제는, 그녀의 연인은 그렇게 움츠러들 존재가 아니었다. 이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빛이 나야할 사람이었다.
" 저 또한 제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에반젤린의 곁에 있고 싶답니다. 영원토록 이 자리만은 그 누구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아.. "
품에 파고든 에반젤린을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속삭인다. 정말이었다. 놓치고 싶지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에반젤린의 옆은 자신의 것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 이토록 자신을 원하는 에반젤린을 보고 있노라면 아슐레아는 기쁨이 차오른다. 이토록 자신을 바라고 있다. 이토록 자신을 원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의의가 이렇게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다.
" 얼른 나을게요. 그래야 다시 한번 저의 황제가 예전처럼 더욱 더 찬란한 빛을 발할테니. "
살며시 아슐레아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상냥하게 속삭인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그녀의 옆에 서고 싶었다. 더 예쁨 받고, 더 예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분명 지금 둘의 마음은 같을거라고 아슐레아는 생각했다. 그래서 몇번이고 자신을 바라보며 지어보이는 말간 미소에, 보답하듯 얼굴 여기저기에 부드러운 입술을 맞춰주었다.
"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모든 것은 에반젤린의 뜻대로... 알았어요? 그거면 된답니다. "
자신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말간 미소를 지어보이는 여인의 기둥이 되어주자고 아슐레아는 몇번이고 다짐하며 눈을 맞추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이마를 맞대곤 웃음 흘린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 한동안 출근은 안 했는데 몸이 생각보다 회복하는데 오래 걸리나봐. 감기가 끈덕지게 들러붙어 있어서 좀 귀찮았어. 지금은 괜찮아. 아직도 날이 쌀쌀하네. 으으. 다시 출근할 생각 하니까 우울해졌어. 레아주도 잘 지냈다니까 다행이다. 답레는, 내가 자꾸 늦어져서 텀이 밀리니까 덩달아 템포도 같이 밀린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다음 상황을 좀 짜볼까? 어떤 전개가 좋으려나.
감기가 엄청 끈덕지게 들러붙어 있어. 심할 때 보다야 훨씬 가볍지만 만성피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약 꾸준히 먹고 있는데도 안 떨어지네. 아프기 전에는 약 챙겨먹기도 뭐 하니까 레아주는 비타민이라도 열심히 챙겨먹어. 아프면 안 돼. 오랜만에 일상으로 복귀하니까 진통 겪는 중이야. 환자분, 일하기 싫어병 말기입니다. 에유를 하게 된다면 레아주는 어떤 내용으로 하고 싶어? 난 가벼운 분위기도 좋을 것 같은데. 물론 꼭 그것만 좋다는 건 아냐.
나도 그래. 가벼운 감기 정도라서 크게 막 아픈 건 아니야. 일하기 싫어병은 일단 몇주, 몇달 내로 요양 예정이야. 지금 배경으로 육아하면 스포니까 (??) 다른 배경으로 하는 게 좋겠다. 좋은데? 현대 배경으로 김에바와 박레아의 육아일기... 이게 아닌데. 아무튼 조금 더 얘기해보자. 재밌을 것 같아.
요양 예정이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맞아, 지금 배경으로 육아하면 스포일러 막대하니까 다른 배경으로 해야지. 김에바와 박레아의 육아일기 ㅋㅋㅋ 뭐가 됐든 재밌을 것 같아. 육아일기가 아니더라도 그냥 신혼일기라던가, 좀 더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둘의 모습이라던가..아무튼 좋을 것 같아. 기대돼.
맞아... 얼른 하고 싶어, 요양. 자유로운 연애. 아니면 그런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캠퍼스 배경이라거나 서로 다른 직장을 가진 직장인이라거나. 아니면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라거나. 육아 이전에 가벼운 연애스토리 그려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 편이 시작하기 쉬울 것 같고. 그러면 다른 배경 연애 에유라고 치고 어떤 설정이 가장 마음에 들어? 일단 예시는 세 개지만 다른 설정도 괜찮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엄청 부유한 집안의 금지옥엽 레아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에 알바 몇탕씩 뛰다가 결국 레아네 회사로 취업한 에바...
진짜 해보고 싶은건 한가득이다.. 다 즐거울 것 같아서 쉽게 고르기 힘들어. 뭐가 좋을까 뭐가 좋을까. 육아 이전의 가벼운 연애스토리는 어떨 것 같아? 둘이 고등학교 까진 유치원부터 같이 다니다가 대학에서 떨어져서 연애를 하니까 둘 다 은근히 걱정도 하고 그러는거지...!
어쩌다 청춘 멜로 드라마를 봤어서 그런가. 가벼운 연애 내용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아예 고3 시절부터 그려봐도 좋을 것 같고. 뭔가 걱정 없는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꽁냥꽁냥이 보고 싶다. 만약 그런 내용이라면 레아주는 레아를 어떤 성격으로 쓰게 될 것 같아? 나는 여러가지로 고민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좀 더 밝은 느낌의 고민을 하는 에반젤린으로 만들어 줘야지.
응응, 서로 대학이 떨어지니까 괜히 질투도 하고 다른 친구들이 껄떡댈까봐 걱정도 하고 하다가 만나면 엄청 꽁냥거리기도 하고.. 레아 성격은 활발하고 굉장히 밝은 '척' 하는 아이? 속에서 잔걱정도 많아서 맨날 에바 주위에 다른 애들이 달라붙는거 아닐까 걱정도 하고 상처 같은 것도 은근히 받지만 맨날 밝은 척 하는 아이 같이..?
좋은 오후. 주말 잘 보내고 있어? 피부가 기분따라 완전 푸석푸석해... 레아가 밝은 척 하는 아이라고 하니까 뭔가 미묘한데. 그래도 에반젤린에 관련된 게 아니라 인생을 살아오면서 크게 다치는 그런 경험이 있는 게 아니라면 됐어. 물론 그런 설정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레아가 힘든 건 너무 슬프니까. 그럼 에바는 어떻게 할까. 기왕 에유로 넘어가는 거니까 지금 이미지랑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굴려보고 싶은데. 난 처음에 현대 배경이라고 생각하니까 적당히 못 살고 적당히 기구한데 좀 억척스럽게 노력하는 이미지를 떠올렸었거든.
응응, 좋은 주말이야. 에바주는 잘 지내고 있어? 밝은 척이라는게 마냥 어두운게 아니라 그냥 성격 그 자체가 엄청 활발한 건 아닌데 그런 척 한다는 정도라서! 어두운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에바 그런 모습도 되게 좋을 것 같아. 뭔가 생활력도 엄청날 것 같구 레아가 잔소리도 좀 들을 것 같은데?? 재밌겠다!
에바의 잔소리... 은근히 잔소리 듣기 싫어하는 레아도 귀엽겠다. 말투가 너무 확 달라지면 이상하려나. 거의 이름만 남게 되는 느낌일 것 같은데? 근데 그래도 재밌을 것 같아. 레아주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컨셉으로 가도 난 좋아. 스타트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충 설정만 짜놓고 던져볼까? 소꿉친구인 것도 좋고 우연히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된 것도 좋고 현재 배경은 대학인지, 뭐 회사인지 그런 것들. 아. 회사도 재밌겠다. 사실 에바랑 레아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더라도 나는 설렐 수 있을 것 같아.
막 잔소리 시작되려구 하면 에바한테 애교 부려서 무마하려고 하는 레아도 나올 것 같아. 음, 근데 에유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어. 재미도 있을 것 같구. 음, 설정만 짜고 가볍게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 일단 본편처럼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소꿉친구인데, 지금은 대학이나 회사는 갈라졌지만 동거는 하는 중인 그런 모습이라던가. 나도 어떤 모습이든 다 설렐 것 같아. 에바랑 레아의 이야기라면 말이야.
소꿉친구 설정 넣고 본인이 하고 싶은 과거 얘기를 막 집어넣으면서 서로 설정 만들어줘도 재밌을 것 같고... 그러면 소꿉친구는 확정. 아예 유치원 시절부터 만났던 걸로 하자. 좋은데? 일단 성인은 됐다 치고 대학생이냐 직업을 나누느냐를 정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원작 설정을 따라서 연상연하를 나눌지 아니면 뭐, 동갑으로 할지도 생각해 보고 정하자. 만약 두 살 차이가 난다면 아닌 척 하면서 에바가 매번 같은 학교로 따라서 진학한 거고 레아는 엘리트여서 매번 좋은 학교로 가버리는 바람에 에바가 노력해서 따라 가는 느낌으로 () 동거는 어떨까. 어느 정도 틀 잡히면 둘 중 하나가 동거하자고 제의하는 부분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아.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그 때부터 쭉 함께 해왔던 걸로? 아니면 한 번 비틀면 중간에 잠깐 멀어졌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상황이 맞아서 동거하게 되는 것도 좋고. 나이랑 직업 정도만 정하면 나머지 상황은 되는대로 끌어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늦은 건 괜찮아. 꾸준히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걸린 건 아니지만 직장이 코로나 때문에 완전 난리라 좀 피곤해. 이제는 진짜 주변 사람들 다 한 번씩은 걸렸다 낫는 느낌이야. 레아주는 별일 없어?
아무래도 익숙한 게 더 마음이 가지. 나도 낯선 것 보다는 익숙한 게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좋게 느껴지더라고. 코로나는... 가족 문제가 해결 되니까 이제는 직장에서 난리야. 돌아오는 4월만 힘내야지.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 이름은 어떻게 할까? 배경은? 우리가 익숙한 느낌으로 하려면 이름을 바꾸면 되고, 그냥 이것저것 섞어넣은 세계라면 이름은 그대로 가도 되고... 바꾸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안 바꾸면 그것대로 보기엔 좋을 것 같은데. 레아주는 어떻게 생각해?
뭔가 우리가 익숙한 건 한국인데 한국 배경에 외국 이름이면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랬어. 그냥 대강 평행우주의 한국 비슷한 어딘가로 하면 될 것 같아. 시작은 내가 적을게. 어, 나이는 어떻게 할까. 십대도 끌리고 성인인 것도 끌리는데. 십대라면 어차피 학생이니까 따로 생각할 필요 없지만 성인이라면 직업도 한 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고. 그리고, 나도 보고 싶었어.
음, 나도 바꿀까 해봤는데 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캐릭터 이야기가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그냥 적당히 평행우주 같은걸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나이는 음... 스무살 초반의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는 나잇대면 좋지 않을까 싶어. 한명은 미리 취업을 했다고 해도 좋을 것 같구? 에바주도 보고 싶었구나. 기쁘다~
응. 좋아. 새삼스럽게 떠오른 건데 아슐레아 이름 정말 좋은 것 같아. 부를 때 어감도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날 것 같은 이름. 그럼 기왕 하는 거 스무 살, 스물 두 살로 할까? 아니면 스물다섯, 스물일곱. 만약 대학생이라고 한다면 레아는 어떤 과를 지망할 것 같아? 에반젤린은 완전 예체능 계열이거나 의외로 돈에 집착하는 안전제일주의 느낌으로 무난하게 취업할 수 있는 과거나 할 것 같은데.
에반젤린도 좋은걸. 레아주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잘 표현하진 못하겠지만 이름부터 뭔가 주변에 반짝이가 날아다니는 느낌. 음... 스물 둘, 스물 넷은 어때? 한명은 갓 취업핶다던지 해도 좋을 것 같고. 레아는..음.. 예체능쪽이지 않을까 싶어. 물론 평범한 곳을 택랑지오 모르지만?
방금 전에 들렀었네. 늦어서 미안해. 무슨 봄 맞이 프로모션을 한다면서 이것저것 겹치는 바람에 너무 정신이 없더라. 원래 계획은 한 3일 전에 아예 스타트를 끊어서 짠 하고 들고오는 거였는데 실패해버렸네. 이렇게라도 안 남기면 더 미뤄지게 될 것 같아서 왔어. 으, 미안. 잘 지냈어, 레아주?
진부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는 그 진부한 멘트마저 사람을 들뜨게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지는 모양이다. 대학교의 입학식이었다. 조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강당 안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단상 위에 올라선 총장의 첫 마디에 집중하는 아이들도 있는 한 편, 얼른 식을 마쳤으면 좋겠다는 듯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에반젤린의 경우에는 전자에 속했다. 꿈이라. 거창한 말이었다. 꿈보다는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반젤린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았다. 일단은 장학금을 받아야겠지. 그리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기왕 대학에 들어왔으니 교수를 통해 직장을 구하는 것도 좋겠다, 까지 이어진 생각의 끝에 에반젤린은 조금 좌절하고 말았다. 꿈이라고 하면 뭔가 좀 더 상큼한 느낌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이렇게 삭막한 사람이었나. 자신을 애늙은이라고 놀리며 누가 엄마인지 모르겠다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 그럴 리가. 코끝을 찡그린 에반젤린은 이어지는 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연설에 집중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요.
말투는 덤덤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과연, 대학의 총장쯤 되면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많은 사람의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제법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에반젤린은 잘 알고 있었다. 전교 회장을 맡은 탓에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 앞에 서서 떠들어야 했던 지난 기억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무신경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던 자신이었지만, 그런 순간을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어찌 됐건 긴장한 티를 내면 지는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총장님도 나랑 비슷할까? 생각이 자꾸만 쓸데없는 공상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어쩌면 자신도 들떠있는지도 몰랐다.
이어지는 연설은 뻔하지만 와닿는 내용 그 자체였다. 학교는 그런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 있으며, 꿈의 완성까지 함께 해주겠다는 게 요지였다. 사람들이 죄다 일어나서 박수를 칠 때까지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에반젤린은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킨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박수를 쳤다. 처음이라서 그래, 처음이라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낯선 공간이었지만 에반젤린은 잘 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자신감의 기반은 자기 자신의 노력이었지만 그 외에도 있었다. 낯선 곳이지만,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 이곳에 있었으니까.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강당을 벗어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에반젤린은 지난 추억속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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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가?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동그랗게 떠진 눈이 오늘따라 멍청하게 보였다. 턱을 괸 채로 올려다 보고 있으려니 창문에서 비쳐드는 햇빛 탓에 자연스럽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쩔 수 없다며 멋쩍게 웃는 얼굴이 얄미웠다.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슐레아는 그런 걸로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쩐지 멍한 기분이었고, 그 탓에 제대로 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반쯤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우리가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이삿짐을 싸는 걸 도와주러 와서 선반에 올려진 잡동사니들을 박스에 담는 지금까지도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종종 보러 온다는 말이 현실성이 없게 느껴질 정도로 먼 곳이었다. 그 정도면 사실상 지구 반대편이랑 다를 게 뭐람? 고등학생 혼자서 여행을 떠날 수도 없는 거리였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면서 그래놓고, 뭐? 연락을 자주 하면 돼? 물론 아쉽고, 어쩌면 슬프기까지 한 건 아슐레아도 못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가 심통부리지 않을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안 가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정신차려, 에반젤린. 네가 애야? 부모님의 직장이 통째로 바뀌어버린 탓에 진학하는 학교도 그쪽으로 맞췄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했지만 그 사실을 제일 먼저 나에게 얘기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놈의 입은 왜 자꾸 제멋대로 움직이나 몰라. 박스에 테이프를 칭칭 감는 와중에도 삐죽이는 입술 끝을 애써 끌어내리며 평소처럼 덤덤하게 굴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언니. 자주 쓰지도 않던 호칭까지 불러가며 이어지는 말에 스며든 옅은 울음기를 부끄러워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는 나보다도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고, 그렇게 떠났다. 연락은 이어졌지만 옆집에 붙어살 때 만큼은 아니었다. 텀이 길어질 때도 있었고, 그 이유가 내게 있을 때도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해서였다. 같은 대학에는 원하는 과와 사정을 맞출 수 없어 진학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지역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니까. 처음 이 사실을 말했을 때 놀라워하던 목소리가 생생했다. 물론 시간이 지난 덕분에 나는 담담한 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쪽 일정이 바빠진 탓에 오자마자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뤄진 날이 오늘이었다. 입학식 당일. 늦지 않게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끊어진 연락에 보채고 싶지 않아 외면하던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익숙한 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컬러링이 이어지는 시간마저도 억만년처럼 길게 느껴지던 순간, 답이 들려왔다.
어디, 야?
웅성거리는 소음에서 벗어나고자 밀려든 사람들을 비집고 출구로 나서며 묻는 말에는, 숨기지 못한 기대가 묻어나왔다.
언제나 어른처럼 똑부러지던 그 아이가, 아주 오랜만에 어린 아이처럼 옷소매를 붙잡고 물어오듯 던져오는 그 말에 나는 그냥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아이에게 내가 안 가면 안되냐고 부모님을 붙잡고 울고 불고,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반항도 해봤다고 말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분명 이 아이도 슬플테니까. 나만큼 슬플테니까, 이 이상의 슬픔이란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가고 싶지 않아, 내 삶에서 네가 떼어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는데 괜찮을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 아이 앞에선 태연하게 연기를 했다. 살면서 내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이삿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면서 계속해서 눈길을 주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울 것 같았으니까.
안 가면 안 돼?
그러고 싶어. 나도 그러고 싶어. 네가 졸업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혹여 그 사이에 네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생길까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내 삶에서 네가 내 곁에 있었던 시간이, 없었던 시간보다도 많은데. 가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부모님을 붙잡아서 계속해서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차라리 너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그게 널 망칠 걸 알기에, 너와 날 더욱 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게 될 것을 알기에 그럴 수가 없어. 그러다 네가 마지막으로 매달리듯 물어오는 그 말에 묻어난 울음기에 난 결국 연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아, 간신히 참았는데. 네게 짐을 하나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는데. 한없이 모자란 나는 결국 네 앞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듯한 얼굴을 해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서둘러서 네 곁을 떠났다.
그렇게 너와 헤어지고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공부도 힘들었고, 네가 없는 시간들도 힘들었고, 낯선 환경에 나홀로 떨어졌다는 사실도 너무나도 괴로웠다. 네가 보고 싶어, 네 목소리를 들을 때면 언제나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 너와의 통화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싫은 건 아니었다. 사실은 너의 목소리를 듣고난 후엔 외롭고 슬펐지만, 그래도 힘이 났다. 내가 나로서 버틸 수 있는 건 너와의 연락 덕분이었으니까. 그렇게 너와 살던 곳에서 떠나 하루하루 적응해나갔다. 연락이 뜸해진 건 서로의 사정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역시 힘들었다. 그래도 대학 발표가 있던 날에는 휴대폰을 꼭 쥔 체 하루를 보냈다. 연락이 올까? 나 같은건 이미 잊은지 오래라서 연락따윈 오지 않는걸까. 하루에 한번씩 너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할 때마다 불안했다. 너와 함께 해온 세월은 길지만, 내 빈자리는 오래 걸리지 않아 채워질까봐 불안해서 몰래몰래 너의 사진을 살펴왔다. 그러다 네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에 하루 종일 울어버렸다.
이제야 다시금 너와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네 옆자리는 내 자리였는데,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기뻐서, 기뻐서 하루 종일 울어버렸다.
*
나 지금 왔는데.
입학식을 맞이해서 북적이는 건물 앞에 서서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곤 네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재잘대며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잔뜩 긴장한 체로 말라가는 입술을 적셨다. 그래도 입학식이니까, 왠지 차려입어야 할 것 같아서, 일을 할 때 챙겨입는 캐주얼한 정장을 걸치고 왔는데 이상하진 않을까. 괜스레 어깨에 걸친 숄더백을 고쳐 매기도 하고, 검정색 정장 자켓을 매만지기도 하면서 머뭇거리다 네게 전화를 걸어. 가족들이랑 같이 와서 나를 볼 시간 따위는 없는데 괜히 나 혼자 들뜬 것은 아닐까. 내 모습이 볼품 없어서 나를 봐도 실망한 기색을 내보이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들이 몰아친다. 그래도 네가 날 보면서 웃어줬으면 좋겠어. 예전처럼 날 대해주지 않아도 날 보며 웃어주면 정말로 행복할텐데.
지금 강당 앞이야. 사람 되게 많네, 역시..
들고 있던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진다. 네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오기 전에 화장실이라도 한번 더 가서 머리는 이상하지 않은지, 화장은 괜찮은지 확인하는게 좋을까. 자꾸만 입 안이 말라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면접 같은 걸 볼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널 기다리는 몇분이 이렇게 초조한지 모르겠어. 그러다 난 얼음처럼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어. 사람들을 비집고 그 사이에서 나타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잊을 수 있을리가 없는 네 모습이 보였을 때 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어. 아, 큰일이야.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 .... 오랜만이네 "
천천히 스마트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곤 네 앞에선 널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걸까, 역시 이상하지는 않았나? 안녕이라고 웃으며 반기는게 맞았을까? 어색한 미소를 지어서 네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꽃다발을 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한걸음, 네게 다가서서 천천히 꽃다발을 내밀어. 역시 난 널 놓치고 싶지 않아.
괜찮아. 난 에바주가 잊지 않고 와주는 것만으로도 늘 고맙고 기뻐하고 있으니까. 에바주는 무책임하지 않으니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5월엔 좀 더 자주 볼 수 있으면 기쁠 것 같아. 기대하고 있을게. 난 잘 있으니까 내용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이야기 해보자 기다릴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길 바라.
항상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응. 정말로. 이런 말로 내 감사함이 다 전해질지가 의문이야. 연락이 중간중간 끊어지는 건 나인데도 말야. 레아주 덕분에 얻는 게 많은 것 같아. 어, 일단 적었던 건... 연애중인 건 아닌 설정인데. 오히려 새 시작이면 이쪽이 낫지 않을까 싶었어. 뭔가 시도하기에도 말야. 그리고 에반젤린은 위엄을 많이 벗어던진 것 같지? 아직 다잡지는 못했는데 이래저래 원래 모습보다는 좀 이리저리 튀는 걸 그려보고 싶었어.
늘 잘 전해지고 있는걸. 음, 대충 그런 것 같아서 마음속에 감정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답레를 써봤어. 에반젤린의 저런 모습도 신선하고 참 좋은 것 같아. 에바가 뭘 하든 좋겠지만. 레아는 아직은 본편이랑 비슷한 것 같지만.. 에바 앞에선 그럴 수 밖에 없지. 오늘 하루 잘 보냈어?
이런 걸 일상적인 일이라고 전하기에는 역시 미안함이 크지만, 그래도 레아주가 내 일상 속에 함께 하고 있다는 건 알려주고 싶어. 이제 겨우 하나 주고 받았을 뿐인걸. 다르든 같든 아무려면 어때. 레아는 언제나 사랑스러우니까 그걸로 됐어. 응. 좀 멍한 하루였어. 졸린 탓일까. 레아주는 어땠어?
그럼. 먹는 낙으로 사는걸. 그것도 조만간 땡이지만 말야. 일 관두면 좋은 걸로 잘 챙겨 먹고 그래야지. 날이 미묘하게 더워. 그래서 미묘하게 선풍기랑 에어컨이 필요해... 애매한 날씨 참 싫다. 아예 더우면 확 에어컨 틀어버릴 텐데. 이럴 때 감기 걸리기 딱 좋긴 하지? 이번 주도 이제 겨우 절반이야. 일이 바쁘니까 시간이 금방 간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훅훅. 레아주는 좋은 하루 보냈어?
솔직히 얘기하면 기대만큼이나 걱정도 컸다. 2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얼굴 한 번 못 본 채로 흐르기에는 긴 시간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알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 아슐레아가, 언니가 낯설게 느껴질 리가 없잖아. 내심 불안함을 감추며 건넨 말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그래.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한 번에 몰려나온 탓에 우글거리는 입구를 벗어나 재빨리 고개를 들었을 때 제일 처음에 눈에 들어온 게 너라는 사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학생들을 기다리느라 넓게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거짓말처럼 네가 내 눈앞에 서있었다. 한 사람만 보인다는 거,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새빨간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제법 어울리는 정장 차림.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미소가 마음에 걸릴 틈도 없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거의 달리다 싶은 속도로 한달음에 다가선 에반젤린은 덥석 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길을 잃은 꽃다발이 제 등 뒤에서 흔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이토록 속에 담아둔 마음이 컸을 줄은 몰랐었다. 대담하게 끌어안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품 안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자 급격하게 돌아오는 정신에 에반젤린은 머릿속으로 이 다음 대처를 맹렬히 고민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결국 내뱉을 수 있었던 건 담백한 말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말은 더 없었다. 응, 보고 싶었으니까.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에반젤린은 스스로 칭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애도 아니고, 왜 안겨들어선. 아니. 반가우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새삼스럽게 내외할만한 사이도 아닌데 말야. 그래도 된다 파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파가 나뉘어 에반젤린의 머릿속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사이에 몸의 주인은 담대한 척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갈등을 끝맺었다. 여전히 품에 허리를 안은 채로 빼꼼 고개만을 들어올린 에반젤린의 시야 앞에 불쑥 들이밀어진 얼굴에 흠칫 놀란 것도 잠시, 양 입꼬리를 말아올려 태연한 척 미소 짓는 것에 성공한 에반젤린은 또다시 자신을 칭찬했다. 새 학기, 여러 장소에서 모였을 또래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 갈고 닦은 연기력과 꾸준히 이어온 마음 공부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에반젤린은 침을 삼켰다.
오늘이면 끝이야! 인수인계도 끝났고, 끝, 끝. 끝은 새로운 고민의 시작이라지만... 한동안은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그리웠어, 레아주. 늦은 연락 미안해. 감기 걸렸었구나. 지금은 다 나았을까? 많이 아팠던 건 아니야? 약 먹고 조심해서 보내. 지금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타자가 많이 흔들렸나봐. (농담) 내용이 좀 짧아서 미안해. 하지만 이제는 꾸준히 답 줄 수 있도록 노력... 으으, 너무 뻔한 말이지. 아무튼, 보고 싶었단 뜻이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이따 다시 봐.
으응. 이제 바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들 말고 내가 스스로 챙겨야 하는 것들 밖에 안 남았어. 퇴사... 기분이 싱숭생숭해. 뭔가 어색하고 말야. 괜찮다니까 다행이다. 모쪼록 몸 조심해. 이제 마스크 벗고 다녀도 된다는데 여전히 대부분은 쓰고 다니는 걸 보면 뭔가 안심이 돼. 나는 밖에서 쓰고 다니는 거 나쁘지 않다 파여서. 레아주는 얼른 벗고 싶으려나? 난 여행 비스무리하게 놀러 왔어. 느즈막히 온 거라 좀 피곤하네. 레아주는 좋은 하루 보내고 있니?
오늘은 내가 갱신. 휴일 잘 보냈어? 오늘까지 사이에 끼었으니까 쭉 쉬었으려나. 어린이날 기념하기엔 너무 늙었지만 그래도 5월 5일만 되면 뭔가 기분이 좀 다른 거 있지. 하지만 내가 다른 애들 어린이날 챙겨주기 시작하면 더이상 달갑지 않을 것 같긴 해.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나도 레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 시간 맞는 일이 이제는 조금 더 많이 있을 것 같은데. 레아주가 귀찮을 정도... 까지는 아니구. 잘 있었다니 다행이야. 나는 지금 놀다 와서 몸이 축축 처져. 어디든 멀리 다녀오는 일은 쉽지가 않네.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레아주는 연휴 동안 푹 쉬었어? 주말까지 이어지는 거니까 아직 끝나기엔 멀었지만 말야.
귀찮을 일은 없을텐데 말이지. 그렇게 자주 볼수록 나야 더 좋을테니까. 놀다 왔구나. 바삐 지내다가 놀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지. 에바주가 잘 놀고 온 것 같아서 다행이야. 어젠 잘 쉬었고 오늘은 할 일 하면서 틈틈이 보는 중이야. 에바주는 주말에도 잘 쉬려나?
그래주면 나야 고맙구. 항상 미안한 마음이 더 컸으니까... 이 답도 아까 저녁 먹기 전에 했어야 했는데. 집 들어와서 이것저것 정리 하고 손님 와서 저녁 먹고 하니까 또 시간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주말에는 다음 주를 대비한 계획을 세우고 어버이날이라 사람들 모여서 식사하고, 뭐 그럴 예정이야. 계획 없이 살면 큰일날 것 같아서 준비해야겠어. 집에 오니까 굉장히 노곤하다. 하루종일 자도 밤만 되면 졸립다니까. 레아주는 요즘도 비슷한 시간에 자?
뭐랄까. 낮에 정신이 깜빡깜빡 꺼졌다 들었다 하면서 졸다가 밤에는 한 번 깨면 제대로 못 자고 잘 때는 쭉 자고 그래. 어버이날에 뭐 특별히 준비한 거라도 있어? 나는 뭘 해야할지 몰라서 매번 꽃 사들고 와서 다 있을 때 인사만 하고 그래. 남들처럼 막 이벤트 준비하거나 그런 게 너무 어려워. 정성이 모자란 탓이야...
조심스럽게 부르니 멍하니 날 바로는 너, 너도 나처럼 날 본 순간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유달리 나만 그런 것일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애써 미소를 지은 체 널 바라보며 서있었다. 뭐라도 하는게 좋을까,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보는게 좋을까, 아니면 살가운 말 한마디라도 용기내어 던져보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망설일 때, 무언가 따스한 게 내 품에 다가와 안겼다. 오랜만에 내 품에 파고든 널 처음에는 어색함에 허공에 머물던 팔을 움직여 천천히 감싸안았다.
아아, 얼마나 이 온기를 그리워 했던가. 얼마나 이 온기를 가지고 싶어했던가. 하지만 나는 이 아이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나라도 씩씩하게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립고 외로워서 몇번이고 널 보러 달려가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그렇게 버텼다. 그리고 지금 그 인내의 대가를 돌려주는 것처럼 네가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작게나마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 자신도 보고 싶었다는 그 말을 하는 널 나는 좀 더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었구나. 나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였구나.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너는 알 수 있으려나.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네가 품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있어서 나도 그저 말없이 널 품에 강하게 안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조금 느껴지긴 했지만, 오늘은 큰 행사가 있는 날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시선이 많지는 않았다. 다들 제각기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내 품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네 향기를 만끽하며 네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귀엽게 고개를 뺴곰 내밀어 미소를 지어보이는 네가 조용히 물어오는 그 말에 나는 조금 용기를 내어 이마를 맞대었다.
" .. 그럭저럭 잘 지냈어. 보기에도 그래 보이지 않아? 나름 단정하게 차려입었는데. "
천천히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한손을 들어올려 네 뺨을 어루만져주며 상냥하게 속삭인다. 이러지 말고 조용한 곳에 가서 너와 좀 더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 시간을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몇번이고 소중한 보물을 어루만지듯 네 뺨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눈을 마주했다. 정말이지, 네 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반짝였다. 나만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탐낼만한 아이, 그게 바로 너였다.
" 일단 입학식은 마무리 된 것 같은데... 음, 다른 곳으로 갈까..? 여긴 사람도 많고... 오랜만에 봤으니까.. "
뺨을 어루만지다 천천히 손을 내려 네 손을 꼭 잡고는 자그맣게 속삭였다. 너무 속보이지는 않을까. 나만 널 독점하고 하고 싶어서, 이런 지나가는 시선들도 네게서 떼어내고 싶은 것은 너무 추해보이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가슴은 두근거리다 못해 미칠 듯 뛰어대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품에 안긴 네게 그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너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럴 수 밖에 없는건.
오늘은 하루가 완전 순식간에 지나갔어.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뤄왔던 방 청소를 했거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청소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완전 뒤집어 엎고 전부 털어내고 닦아내고 하다보니까 하루가 끝나버렸네. 어지러워라. 레아주, 주말 잘 보내고 있어? 답레는 조금 뒤에 읽어볼게. 또 설렌다.
실은 자주 하더라도 금방 갈 것 같기는 해. 정리할 게 많더라고. 음, 일단 책이 너무 많아. 밀린 책도 좀 읽어야겠다. 이제는 시간이 있으니까. 안녕, 레아주. 좋은 오후야. 요새 날씨가 괜찮은 것 같아서 산책 나가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 이럴 때 집앞이라도 돌아다녀야지, 싶다가도 잠깐 또 앉아 있으면 멍해지고 그래.
좋은 오후. 산책 대신에 다른 운동을 시작했어. 얼마나 운동을 안 하고 살았는지 조금만 해도 진이 쭉쭉 빠져. 근육통 안 오게 조절하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 너무 심하게 하는 것도 곤란하니까. 몸을 좀 챙겨보려구. 워낙 막 써서 그동안 안 좋았던 거 해결하려면 오래 걸릴 것 같아. 레아주, 오늘도 좋은 하루.
슬그머니 닿는 온기, 품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 조금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키가 조금 큰 것 같은데. 안겨드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 이후에 고개를 드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로 부끄러웠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웃고 있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딱 그 두 배 정도 부끄러웠다. 침착하자. 속으로 되뇌이며 한숨을 뱉은 에반젤린은 이제야 아슐레아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음, 역시 키가 조금 큰 것 같은데. 인상도 좀 달라진 것 같아. 어쩐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니, 어른이 맞지. 그리고 이제는 나도 성인이고. 아슐레아가 입은 정장을 한 눈에 훑어내린 에반젤린은 물끄러미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려던 시선을 애써 잡아끌었다. 학교에서는 무조건 교복이었고, 그 외의 외출은 동네 남자애들이 입는 옷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던 일상이 한순간에 끝나버리면서 부랴부랴 사들였던 옷 중의 하나였다. 그마저도 무난한 셔츠에 무난한 바지, 거기에 벨트가 전부. 귀걸이라도 꼈으면 조금 나았을까. 한 단 풀어내린 단추와 목에 맨 얇은 초커가 에반젤린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코디의 한계였다. 나름 깔끔하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갖춰입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에 돌아가던 고개를 잡아끄는 손길에 흠칫 놀란 에반젤린은 아슐레아가 아직도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
뺨을 감싸쥐는 손길이 너무나도 나긋해서 에반젤린은 소름이 돋았다. 분명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오히려 좋은데도 그랬다. 뭐랄까. 예전하고는 너무 다르다고 해야할까. 무심코 손을 잡아 끌어내리려던 찰나, 아슐레아가 먼저 움직여 에반젤린의 손을 잡아챘다. 방긋 웃는 얼굴은 여전히 자신의 기억속의 아슐레아와 다르지 않았다. 착각인가? 그렇겠지. 대꾸할 타이밍을 놓친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의 손 안에 쥐어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학교 주변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잘 몰랐다. 자취와 기숙사 사이에서 벌어진 엄마와의 말다툼과, 결국 꺾어낸 이후에 생겼던 자취방에 얽힌 이런저런 문제 덕분에 정신없이 이사를 마쳤던 데다가 별로 많지도 않은 짐을 정리하고 난 다음 날이 바로 입학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계약했던 방에 생겼다던 문제는 업자의 실수였었다. 사과의 의미로 조금은 더 넓은 곳을 좋은 조건에 들어갈 수 있었다지만, 이렇게 급하게 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지금의 요지는 에반젤린은 자기가 다닐 학교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예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 적당히 옮길만한 장소도 알 수 없었다.
어디로.
어디로 갈까, 하고 말하려던 순간 에반젤린은 자신의 뱃속에서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그러고 보니까 어제 저녁도, 오늘 아침도 제대로 먹은 게 없었던 것도 같았다.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이미 제 몸은 짜증을 있는대로 부리고 있었다. 나만 들은 거겠지? 들린 건 아니겠지?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슐레아의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눈치를 살피며 에반젤린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원작(??)처럼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 전이라는 느낌으로 적고 있어. 서로의 시선이 다른 것도 재밌지 않을까? 레아주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괜찮지. 요새 막 돌아다니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 웃긴 건 일을 안 하고 있는데도 뭔가 막 컨디션이라거나 근육통이나 뭐 그런 게 확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거? 그럭저럭 일하는 게 나았던 거 아냐? 싶기도 해. 레아주는 잘 있었어?
음, 지금은 감정의 차이가 느껴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구나. 레아는 지금 사실 늘 강한 척 해왔지만 예전부터 에바한테 의지하던게 컸는데 떨어져 지내는 동안 밝아 보여도 꽤나 몰리기도 한 상태라서 에바보다 더 열렬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인 것 같긴 해. 음, 그래서 몸관리는 평소에도 잘 해줘야 하는거라서..아무튼 쉬는 동안엔 잘 챙기도록 하자. 난 잘 있었지~ 건강하다구~
근데 아마 생각보다 더 빠르게 빠져들 것 같아. 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에반젤린이 사랑하는 건 아슐레아 뿐이니까.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두근두근. 아직 조금은 애같은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건강하다는 말 참 듣기 좋다. 뭔가 되게 상쾌한 느낌. 나도 좀 더 건강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
내가 너무 빤하게 굴었나? 레아가 그렇게 나와준다면 얼마 안 있어서 바로 항복하고 말 거야. 밀당도 조금 해보려고 했지. 역시 직진이 더 나으려나. 고민을 좀 해볼게. 건강. 맞아. 그래야지. 으으. 오늘도 운동 가야지... 답레는 천천히 줘. 나도 빨리 줘야지, 하면서 자꾸 타이밍을 놓치게 되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레아주.
그런 거야? 맞아. 그게 좋은 거야. 레아주도 언제나 레아주 마음 가는대로 해줘. 뭐가 됐든 서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응. 레아주, 주말은 잘 보냈어? 어둑해진 이후로는 날씨가 참 선선해. 근데 날이 더워지는 거랑 별개로 밤이 너무 빨리 찾아와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벌써 이렇게 어두워, 하고. 요새 채소만 엄청 먹었더니 조금 물리기 시작했어... 여름에는 어떡할지 고민도 좀 해봐야지. 레아주는 뭐 하면서 보냈으려나.
응응 고마워. 에바주가 그렇게 늘 말해줘서 편하게 쓰고 있어. 물론 이번엔 답레가 좀 늦어지고 있지만.. 응응, 주말에 원래는 계획이 없었는데 갑자기 생겨서 답레도 못 쓰고 시간을 보내버렸어. 답레는 조금만 더 기다려줘. 밤이 빨리 오면 하루가 더 빠른 것 같아서 참 애매해. 그래두 별 수 없지 않나 싶기도 하구.. 나는 외식도 하고 좀 먼 곳 까지 나가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야 느긋하게 쉬는 중이야. 에바주는?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게. 이전보다는 자주 새로고침 누르면서 말야. 주말에 뭔가 일정이 잡힌다는 거, 되게 좋은 일인 것 같아. 평일은 보통 정해진 일을 하는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니까. 일상의 조미료라고 해야하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무런 일정이 없는 주말도 좋아해. 편안한 휴식과 사색 느낌이라면 말이지. 으으, 시간이 녹아내려... 너무 빨리 간다. 잘 다녀왔어? 고생 많았네. 나는 별다른 일은 없었어. 그냥 뭐라도 하려고 생각만 잔뜩 하고, 오늘은 산책 좀 다녀온 게 다야. 일찍 자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잠드는 게 여전히 쉽지 않아... 그래도 다음 날 급한 일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못 자게 되는 건가? 오랜만에 노래 추천, 노래는 아니긴 한데. 인생의 회전목마 피아노곡에 모닥불 타는 소리 섞어놓은 영상 좋더라. 나중에 한 번 찾아봐.
고마워, 그래도 내일에는 올릴 수 있도록 노력 해볼게. 에바주를 많이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걸~ 나도 아무 일정 없는 주말 좋아해. 뭔가 일정이 있는 주말이랑은 많이 느낌이 달라서 매력이 다르달까. 난 잘 다녀왔어. 근데 별다른 일 없는 주말도 좋은 것 같아. 평화롭고 느긋하다는 증거니까 좋은 일이지. 응응, 찾아서 들어볼게. 밤에 찾아서 듣고 있으면 에바주랑도 어느정도 공유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려나? 그거 기분 좋을 것 같다
꼬르륵 소리가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던 나에게 들리지 않았을리가 없었다. 그런 소리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너에게 푹 빠져있다는 증거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 푸흐 하고 작게 웃음을 흘리면서도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고 네 손을 부드럽게 조물거리며 속삭여준 나는 가볍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네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좋을까. 좀 더 네 마음을 붙잡고 싶었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내가 네겐 내 마음처럼 생각보다 반갑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마음에 남아있어서 그런걸까.
" 어디로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면 좋으려나.. "
물론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네가 이곳에 온다면 데리고 가야지 하고 생각해두고 알아봐둔 곳은 꽤나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날부터 그런 곳에 데려가는게 좋은 생각일까 하는 의문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왠지 조금은 더 날 의지해줬으면 하니까, 그럴 마음이 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고민을 하던 찰나,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왠지 어색한 듯 눈을 굴리고 있던 네 손을 끌어당겨 나와 좀 더 거리를 좁히게 만들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백합의 향이 흘러나오는 듯한 숨결과 함께, 내가 나름대로 괜찮은 생각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그 생각이 흘러나왔다.
" 나도 여기 근처에서 자취하는데.. 내 방 가서 먹을래? 안 그래도 이것저것 요리 하려고 사다둔 상태라서.. 너만 괜찮다면 가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지금은 너와 단 둘이 있고 싶어. 다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너와 시간을 공유하고,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욕심이지만 너의 체온과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나홀로 만끽하고 싶어서 조심스럽게 널 바라봤어.
" .. 물론 부담스럽거나 하면 좋은 곳 알고 있으니까 거기로 가면 되니까 걱정말구..! "
왠지 긴장이 되어서 나는 수줍은 듯 눈을 굴리며 널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해. 정말이지, 네 앞에선 어째서 이렇게 긴장이 되는걸까.
왜 이러는 걸까. 아슐레아에게 잡힌 손에서 마치 정전기가 통하듯 찌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은근히 손 이곳저곳을 매만지는 탓에 에반젤린도 덩달아 손가락을 꼬물거리게 되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걸까. 사람이 반가우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 모양이다. 어쩐지 납득이 되지 않는 변명을 속으로 떠올리며 에반젤린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닭살이 돋은 것 같기도 하고.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 보던 시선을 끌어올리자 아슐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그 시선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이던 에반젤린은 이어지는 아슐레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 자취해?
애초에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갔던 탓에 혼자서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의 말이 제법 놀라웠다. 학교랑은 거리가 좀 있는 건가? 물론 일부러 멀지 않은 학교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근처라고 할 정도면 어쩌면 서로 오가기 좋은 곳에 살게된 걸지도 모르겠다. 옆집에 살던 것만큼 가깝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한 때의 추억이 떠오른 탓에 에반젤린은 들뜨는 기분을 숨기지 않은 채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딘데? 가까워? 가봐도 돼?
그래봐야 같은 동네, 아니면 옆동네 정도겠지만 비슷한 위치에서 생활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에반젤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안 그래도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걱정했었는데 아슐레아가 멀지 않은 곳에 산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응. 모르는 건 물어보면 되니까. 옛날처럼 붙어다니다 보면 금방 낯익은 동네가 되지 않을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들이 에반젤린의 긴장을 한꺼풀 벗겨주었다. 아. 아니지. 언니도 바쁘겠구나. 에반젤린은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나도 이제는 어디까지나 아슐레아와 동등한 성인이고 대학생이니까. 역시 내 생활은 내가 챙겨야지. 일련의 생각이 한순간에 스쳐가며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뭐가 됐든 지금은 일단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세상에. 남의 자취방이라니. 언제부터 혼자 산 거지? 취향은 많이 바뀌었을까? 방은 내 방보다 클까? 어린애처럼 두근두근거리는 심정을 슬쩍 감추며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아주. 좋은 오후야. 주말 잘 보내고 있어? 오늘은 점심에 사과를 먹겠다고 깎았는데 과일은 또 왜 이렇게 못 깎는지 자괴감 들고 괴로웠어. 반쯤은 칼이 안 드는 탓이라고 생각할래. 에유 답레는 적을 때마다 고민되는데 너무 깨발랄해서 이미지 망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한참 생각하게 돼. 이번에는 느낌표에서 특히 그랬어. 결국에는 하고 싶은대로 했지만 말야! 아무튼 레아주, 남은 주말도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
근데... 어... 좀 많이 못 깎인 했어. 오히려 과도 말고 좀 큰 칼로 자르는 게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아예 조각조각 얇게 떠서 먹었지 뭐야. 에바 이미지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야. 성격 부분에서의 수위 조절도 좀 필요할 것 같아. 그래도 막 밝은 모습 보여줄 기회도 많이 없었으니까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응, 좋은 주말. 식습관 고친다고 이것저것 조절하고 있으려니 단 것만 계속 먹고 싶어져서 좀 멍해. 레아주도 저녁 잘 챙기구.
왠지 조각조각 얇게 떠서 사과 먹는 에바주가 귀여울 것 같아. 에바 이미지가 나쁜 적은 단 한번도 없는걸.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 음, 정말로 좋은 것 같아. 본편에서도 에바가 밝은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에바주 식습관 고치는거 쉽지 않지. 그래도 포기하지 말구 힘내는거다? 에바주도 저녁 잘 챙겨!
다행이었다. 네가 들뜨는 그 모습에, 괜한 걱정들과 우려는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버려서 나도 모르게 한결 편안해진 미소를 지어보였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지금 눈 앞에서 지어보이는 그 미소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가. 사진 속에 있던 너는 늘 웃어보이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왠지 나를 향한 미소는 아닌 것 같아서 외로움이 커졌는데. 이렇게 내 눈 앞에서 웃고 있는 널 보고 있노라면 여태껏 품고 있던 근심과 걱정들이 모두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아아, 그 탓에 나도 모르게 한순간 널 넋을 놓고 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네가 내 얼굴을 보며 어딘가 붉게 물들어 있는건 아닐까.
그래, 어서 가자.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널 보며 두근거리고 다시 한번 이 타오르려는 이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서 나는 잡고 있던 네 손과 깍지를 껴 잡고는 성큼 성큼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불어오는 바람이 얼른 내 뺨을 식혀줬으면 좋겠다. 따스한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내 두근거림을 가려줬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어째서일까. 결국 나는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걸까. 또각또각, 평소에는 잘 신지도 않던 구두의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얼른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에서, 너만을 내 눈에 담고 싶었으니까.
여기서 가까우니까 정 뭐하면 내 방에서도 지내고 그래도 괜찮을걸.
너만 괜찮다면 나는 얼마든지 좋으니까. 사실은 오래도록 내 방에 머물러줬으면 하는 내 바램을 네가 알아주길 바라면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식으로 널 내 곁에 두고 싶었으니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네 곁을 지킨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조금 앞장서서 걸어가며 길을 알려주던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널 바라보곤 눈웃음을 지어보여.
고등학교 생활은 어땠어? 막 연애도 해보고 그런거야?
내가 곁에 없던 나날 중에 네 곁에 혹여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자리를 차지했을까봐. 그것을 견제하듯, 하지만 겉으로는 그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네게 물음을 던져.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그리고 이젠 대학생이니까 장난스럽게 물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집이 멀지 않았으니까 대화도 이어갈겸 질문을 던지곤 장난스레 널 바라봐. 아아, 하지만 그런 와중에 네 입에서 해봤다고, 아니 지금도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나올까. 그게 무서운 건 내가 겁쟁이란 증거겠지.
오래 못 들렀어. 레아주, 그동안 잘 지냈어? 답레는 오늘 내일 안으로 줄게. 나는 그동안 어떻게 하면 정신 차리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훅 지나갔네. 결국 마땅한 답은 못 찾았지만... 계속 뭐라도 해봐야지. 레아주는 그동안 별일 없었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
답레 어제 쓰겠다고 생각하고 타이밍을 놓쳤어... 얼른 마무리 해서 올릴게. 응. 오늘 날씨는 좀 선선하더라. 이러다 진짜 한여름 푹푹 찌는 날 되면 숨 막혀서 어떻게 살아. 벌써 에어컨 안 트는 공간은 답답하더라. 게으른 탓이야. 별별 생각이 다 들어. 원래 무교였는데 종교를 믿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니까. 뭘 열심히 마음 잡고 살려면 내가 중심을 잡아야 되는데 어렵더라. 조만간 먹으려고 수박 사왔어. 수박 좋아해?
답레는 편히 줘. 얼마든지 기다릴테니까. 맞아, 오늘은 좀 선선하네. 더워질거 생각하면 걱정이긴 해. 음, 종교를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한데, 또 정말 끌려서 마음을 주는거 아니면 종교 갖는 것도 쉽진 않더라. 수박 좋아하지. 방금도 먹었는걸? 에바주도 맛있게 먹도록 해. 오늘은 어땠으려나?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한 걸 보면 정말 가까운 모양이다.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에게 잡힌 손에서 힘을 뺀 채로 느슨하게 깍지를 끼고 걸었다. 자기 방에서 지내자는 얘기는 같이 살자는 얘기인가? 생각해보면 룸메이트에 대한 기대를 했었던 적도 있었다. 혼자서 살기는 어려울지도 모르니 같이 지낼 동급생을 찾아보면 어떨까, 또는 기숙사가 있다면 그곳에서 생활하면 어떨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건 역시 갑갑하고 어려울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근거리기도 했다. 아슐레아 정도면 함께 살기에 좋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 의외로 금방 익숙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조금 어색하기는 한데, 아마 그건 언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겠지. 근데 원래 살던 동네에서 보던 연상들은 이렇게까지 어른스럽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슐레아가 그들보다 좀 더 성숙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렇게 큰 동네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가.
아까보다는 여유가 생긴 에반젤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도시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세련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다르기는 달랐다. 일단은 사람이 훨씬 많았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던 에반젤린은 아슐레아의 물음에 그쪽을 돌아보았고, 또다시 눈이 맞았다. 뭔가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시선인데. 착각일까?
어, 연애...
그런 달짝지근한 게 내 인생에 있었던가. 학창시절에 연애 한 번 못해봤다고 후회하기에는 기회가 여럿 있었는데도 그것을 걷어찬 건 에반젤린 본인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학교 생활이 너무 바빴던 거였고, 둘째로는 남자친구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분명 함께 있으면 자주 웃고 즐거웠던 관계도 있었지만 친구 이상이라는 느낌은 여전히 뭔지 알 수 없었고, 또 단둘이 있을 때 은근히 바라보던 시선들은 이상하게 낯간지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고백을 몇번 거절한 이후에는 그렇게 대놓고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고, 덕분에 철벽 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었다.
남자친구, 있는 게 좋았을까?
쪼끔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건넨 답에 묘한 표정을 짓는 아슐레아를 보며 에반젤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근데 이렇게 멀리 올 계획이 있었으니까 역시 사귀지 않기를 잘했어. 장거리는 안 되지, 장거리는. 어쨌든 유사한 경험들을 제외하면 진짜 연애는 전무했던 에반젤린은 여기저기서 줏어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아, 이 근처야?
골목을 꺾으며 조금씩 느려지는 아슐레아의 걸음걸이에 에반젤린은 그쪽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돌리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근히 그런 걸 유도하고 있기는 해. 인내심 테스트 시키기. 에바는 정말 모르고 나는 모른 척 하기. 새침한 척 애교부리기. 이런 느낌. 오늘은 너무 많이 자서 머리가 아파. 왜 이렇게 많이 잤지...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반복해버렸어. 저번에 수박 얘기했던 거 생각나니까 다시 먹고 싶다. 근데 은근히 단 수박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 씨가 너무 많은 것도 많고 물맛 나는 것도 많고. 화채 만들어 먹고 싶다. 뭔가 수박 화채는 생각만 하면 땡기는데 막상 제대로 해먹어본 적은 손에 꼽아. 소설이나 만화에서 너무 많이 본 탓일까. 아무튼, 레아주는 잘 쉬고 있어?
게다가 분명 있으면 내 마음이 아팠을테니까. 나는 네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 다행이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네 옆자리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서. 그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난 분명 질투했을거야. 질투하고, 어쩌면 원망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것만큼 힘든 일이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잠시 그 생각을 하며 나아갈 즈음, 집이 가까워졌고 나는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천천히 입술을 떼.
응, 내 자취방은 여기니까 잘 기억해둬. 앞으로도 잘 찾아올 수 있어야 하잖아? 어렵진 않지?
학교랑 가깝다는 이유로 네가 내 방에 자주 찾아왔으면 좋겠어. 가깝다는 이유 때문에 널 몇번이고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을 수 있을테니까. 주변을 둘러보는 널 귀엽다는 듯 응시하다 이제 들어가자는 듯 천천히 잡고 있던 손을 흔들어보여. 부드러운 손, 고향을 떠나올 때 아쉬움을 삼키며 잡았던 그 손의 감촉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네 손을 꼭 쥔 체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하나 하나 올라가면서 혹시라도 네가 내게서 멀리 떨어질까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얼마나 올라왔을까. 501호라고 적힌 문 앞에 선 나는 일부러 네게 보여주듯 번호키를 누르기 시작해.
좀 계단이 많긴 하지? 그래도 안은 좀 넓어서 여기로 정했어.
비밀번호가 네 생일이라는 걸 너는 눈치 챘을까. 챘으면 좋겠는데. 사실 봐줬으면 해서 일부러 네게 보여주듯 눌렀는데. 그냥 말해주면 되는 걸 이렇게 알려주려는 건 내가 겁쟁이라서 그런거겠지. 그도 그럴게, 생일로 했다는 걸 말하면 네가 혹여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게 무서우니까. 나는 늘 겁쟁이처럼 굴게 돼.
자, 들어와. 배고플텐데 고생했어. 가서 손 씻고 쇼파에 앉아있을래?
내 원룸은 쇼파와 침대로 가볍게 거실과 자는 곳이 적당히 나뉘어 있었다. 왠지 원룸이라지만 그정도의 구분은 필요할 것 같아서 신경썼는데 어떠려나. 아무튼 누군가를 데려온건 네가 처음이라서 설레기도 해. 나는 갑갑한 정장자켓을 벗어내며 네게 부드럽게 말을 걸며 눈웃음을 지어보여.
아하하, 역시 그런거구나. 그게 보였거든. 레아가 애 좀 타겠는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겠지. 맞아, 수박 고르기 쉽지 않아서 매번 조심하게 돼. 가끔 정말 단 수박을 골라서 사온 날은 괜히 기분도 좋고 그러고. 난 잘 쉬고 있었어. 에바주는 오늘 하루도 잘 보냈을까?
오랜만이야, 레아주. 잘 지냈어? 요새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하더라. 장마의 시작이라더니. 울적한 계절이 돌아왔네. 이제는 어디 나가기도 애매해진 것 같아. 우산 하나씩 챙겨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 어쩐지 삭신이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이가 너무 들었나.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공부거리도 좀 찾아보고 평소에 못 땄던 자격증 같은 것도 준비하고 있어.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많은 걸 하는 것 같은데... 실은 별 거 아니기는 해. 레아주는 그동안 뭐 하면서 지냈을까.
에반젤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걸어온 길과 집 주변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정말 가깝네. 애초에 학교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코앞에 자취방을 구한 자신과는 달리 아슐레아는 통학이 미묘하게 귀찮을 정도에 집을 구한 모양이다. 나라면 귀찮아서라도 좀 더 학교에 딱 붙어있을 것 같은데. 덕분에 내쪽에 더 가까워졌으니까 좋은 일인가? 잡힌 손이 앞뒤로 흔들흔들 하는데도 아랑곳 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노려보는 에반젤린이었다. 집이 생각보다 좀 커보이는데. 입학도 자취방 계약도 모든 게 부랴부랴 이뤄진 탓에 처음 올라왔을 때 방을 보고 퍽이나 실망했더랬다. 아니, 뭐. 작은대로 아늑해서 좋기는 한데. 그 생각은 아슐레아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조금 부정적인 쪽으로 돌아섰다. 방이 생각보다 꽤나 컸다. 엄청난 차이는 아니지만 1.5배 정도는 커보이는데. 나름 있을만한 가구들을 전부 넣고도 넉넉해 보이는 공간이 조금은 부럽게 느껴졌다. 세상에. 소파도 있어?
레아 집 진짜 크다.
본가에 있을 때는 허구헌 날 서로의 집에 들어드는 사이었지만서도 혼자 사는 공간에 들어오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뭔가 방 보다도 사적인 것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기분. 입을 약간 벌린 채로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에반젤린은 자신을 쳐다보는 아슐레아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도 넓어. 샤워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자신의 집과는 역시 비교되는 곳이었다. 아까 뭐라 그랬더라. 여기서 같이 지내자고 했던 것 같은데. 진짜 그러고 싶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에반젤린은 수도꼭지를 열었다. 문득 통에 꽂혀있는 칫솔이 눈에 들어왔다. 본가에서는 서로의 집에 칫솔까지 놔둘 정도였는데, 여기는 한 개네.
화장실도 깨끗해. 부럽다.
수건에 손을 슥슥 닦아내고 화장실에서 나오자 아슐레아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소파에 앉아있으란 말은 들었지만 슬쩍 뒤로 다가가 까치발을 세워 아슐레아의 어깨 위에, 정확히는 얼굴이 반쯤 묻히는 위치에 머리를 턱하니 갖다 댄 에반젤린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자꾸 귀엽다 귀엽다 소리 들으니까 원래 내용에서 나오는 모습도 어딘가에 반전미로 숨겨두고 싶은 심정이네. 캐릭터 이미지가 너무 반대인가? 물론 듣기 좋아. 그리고 어른스러운 레아도 멋있어. 이번에는 에반젤린이 좀 끌려가 볼까, 하다가도 그래도 역시 레아는 손에 붙잡고 살아야지 싶기도 하고. 운동으로 확 땀 흘리고 나면 오히려 괜찮은데 그냥 밖에 나가서 걷고 있으면 너무 더워. 항상 카페나 편의점 가고 싶고 그래. 날도 습하고. 이제 슬슬 에어컨을 틀 때가 다가오는 것 같아. 선풍기로는 한계야.
아냐아냐, 귀여운 면도 있을 수 있는거지. 본편에선 단지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라던가. 앞으로 진행되면 볼 수 있지 않을가 싶기도 해. 사실 지금도 에바가 레아를 단숨에 맘만 먹으면 휘어잡을 수 있을텐데. 저래봬도 약한 레아야. 에바 한정으로. 맞아.. 난 슬슬 에어컨도 키고 그러는 중이야. 더워..
안 하던 공부도 좀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날은 덥고 그래서 진이 좀 빠지기는 했어. 운동을 하고 있는데도 일할 때 보다 체력이 모자란 것 같은 거 있지. 이상하네. 기운이 좀 나야 정상일 것 같은데 말야. 역시 집이 최고야. 그래도 오늘은 어제랑 다르게 날씨가 좀 더 선선한 것 같은 기분이야. 레아주, 좋은 하루 보내!
아아, 갑자기 그런식으로 다가오면 나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내 맘을 네게 전해도 될 것만 같아서 바보 같이 두근거리는데. 너는 거리낌없이 그렇게 거리를 좁혀오는구나. 네게 나는 이런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이라는 걸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내게 마음을 품고 있는걸까. 그 생각과 두근거림에 잠시 대답을 못 하다 다시 손을 움직이며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가 두근거리는게 티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재료를 준비하던 것을 내려두곤 내 뒤에서 있는 네 두손을 내 손으로 앞으로 끌어당겨 잡아. 마치 백허그를 하는 것처럼.
나 자취 시작하면서 요리 연습 많이 했거든. 예전에 집에 있을 때는 잘 못 했는데 그래도 이제는 네게 해줄 정도는 되는 것 같아서.
마치 연인처럼 부엌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어가. 잠시 잡았던 네 손은 내 복뷰를 감싸안게 만들어두곤 다시 재료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해. 딱히 어려운 음식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괜히 부끄러워 고개도 돌리지 못 하고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해. 내가 여태껏 자신을 생각하면서 연습해왔을거라곤 생각도 못할 네게 먹이고 싶어서.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줄 수 있지? 배고플텐데. 언니가 그래도 맛있게 해줄테니까.
도마 위에서 칼이 규칙적으로 내는 소리 속에서 나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 지금도 너와 맞닿아있는 등에서 전해져 오는 네 온기마르로도 난 몇년만에 정말로 편안함을 느껴. 심장은 두근거리고, 왠지 체온도 오르는 것 같지만. 기분 만큼은 분명 하늘을 떠다닌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어.
...왠지 신혼 부부 같은 느낌이야. 후후.
마치 장난처럼, 농담처럼. 너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말을 네게 흘리며 나는 애써 태연히 손을 분주히 움직여. 그저 장난 같은 말들을 되풀이하며 내 마음을 돌려돌려 전하려는 건, 내가 겁쟁이라는 증거겠지. 기름을 두르고 야채를 볶고, 먹음직스런 계란옷을 만들고 밥과 볶은 야채를 계란으로 싸서 깔끔하게 그릇에 올리는 동안에도 나는 너와 나눌 이야기들을 몇번이고 고민해.
다 됐다, 이제 가서 먹자.
.... 좀 더 오래 걸리는 걸 할 걸 그랬나 싶었지만, 나는 아쉬움읗 삼킨 체 돌아서선 널 향해 미소를 지어보여. 먹음직스런 오므라이스가 올려진 그릇과 함께.
이게 자취생의 여유라는 건가. 아슐레아가 주방에 서있는 모습은 그다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어울렸다. 하긴 돌이켜보면 어떤 상황에 뭘 하든 나름의 멋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신기할 것도 없긴 하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요리쯤이야. 아. 이건 좀 아닌가. 한때 미래의 애인을 그리며 쿠키니 케이크니 하는 것들을 시도했다가 수두룩히 말아먹었던 것을 떠올리며 에반젤린은 입맛을 다셨다. 어느새 아슐레아의 손에 잡혀 허리를 감싸안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키 차이 때문에 조금 불편하기는 한데,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좀 힐링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잘하네. 뭐 만들어? 아. 오므라이스?
예전부터 계란으로 만든 건 뭐든 곧잘 먹기도 했었고 별달리 상에 차리는 것 없이 간단하게 먹고 치우는 걸 좋아하던 습관 때문에 자주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러고보니 아슐레아의 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꽤나 자주 나오던 메뉴였지. 보드라운 계란에 감싸안긴 볶음밥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에반젤린은 군침을 삼켰다. 으으, 배고파. 원체 배고픔이니 더위니 하는 자잘한 불편함들을 잘 견뎌내는 성격이라 몰랐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걸 보니까 갑자기 급격하게 배고파진 기분이 들었다. 아슐레아를 끌어안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은 에반젤린은 그녀가 돌아보는 모습에 음식의 완성을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배고프긴 하다.
너무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헤 벌린 채로 웃으며 접시를 들고 돌아서는 아슐레아의 뒤를 따랐다.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기 전에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인데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케첩을 챙겨오는 아슐레아의 모습에 에반젤린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니. 그냥. 옛날 생각 나서.
워낙 눈치가 빠른 탓인가. 서로의 표정과 시선에서 아, 지금 어떤 기분이구나, 또는 뭐가 필요한가보다 하는 것들을 잘도 읽어내고는 했었다. 내 눈치와 아슐레아의 눈치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경향이 있기는 했다. 주로 필요에 의한 것들은 내가 잘 챙기는 편이었고 감정적인 것들은 레아가 잘 읽어내는 편이었지 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며 은근히 웃고 있는 아슐레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 왜 그렇게 보지. 내가 딴생각을 너무 길게 했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굉장히 묘한 웃음이었는데, 에반젤린에게는 익숙한듯 익숙치 않은 표정이었다. 숨을 돌리는 것처럼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에반젤린은 잠시 내려두었던 숟가락을 손에 쥐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이미 기대감만으로도 반쯤은 만족하고 있었는데도 첫 한 입을 넣자마자 에반젤린의 입에서 맛있다는 탄성이 튀어나왔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맛이었다. 갓 만들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요리, 잘하네요. 중간중간 한 마디씩 던지는 것도 잊은 채 식사를 이어가는 에반젤린이었다.
자신... 자신감 길러내는 거 너무 어려운 일이야. 요새 자격증 공부도 하고 겸사겸사 취업도 슬슬 알아보려는 사이에 알바도 찾고 하는데 영 입맛에 맞는 일도 없고 이력서도 어렵고 돌아다니기도 어렵네. 바쁜 와중에 날은 덥고... 못 이기고 에어컨 틀기 시작했어. 안녕, 레아주. 잘 지내고 있어?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는 게 내 복이겠지. 그런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말야. 항상 고마워, 레아주. 에어컨 너무 자주 틀면 뭔가 뭔가 곤란할까봐 껐다 켰다 조심 중이야. 환기도 좀 해야겠고... 아직까지는 모기가 많이 없어서 다행인데. 오히려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모기가 없나? 신기하네. 원래 이쯤이면 엄청 괴로워야 정상인데 말야. 그나저나 새 직장이라니. 바쁘겠다. 적응은 잘 되어가? 답레는 느긋하게 기다릴게.
에바주라면 잘할테니까. 난 믿고 있구 응원하고 있어. 나도 에바주 덕분에 늘 힘내는걸. 에바주 에어컨 잘 하구 있네. 모기는 내쪽은 좀 있던데..좋겠다. 부러워. 적응은.. 좀 힘들긴 한데 애쓰고 있어. 답레 여러번 읽으면서 힐링하구..답레는 내일 중엔 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오늘은 어떠려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늘 음식의 간을 맞추거나 할 때에는 늘 에반젤린의 입맛에 맞춰서 연습을 해왔으니까. 꼬치꼬치 어떤 것이 좋은지 캐묻고 알아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에반젤린과 함께 보내면서 눈과 머리에 담아둔 기억들을 이용해서 준비해둔 것이었다. 입맛을 사로잡는다, 사소한 듯 하면서도 누군가를 사로잡는데에 큰 영향이 될법한 여소였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편하게 말해줘. 내가 더 해줄테니까.
널 위해서라면 몇번이라도 해줄 수 있으니까. 널 위해서 홀로 이곳에 떨어져서 준비하던거니까. 네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을 그 말을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마음이 혹시나 밖으로 티가 나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어쩔 수 없겠지. 지금도, 그리고 오늘 재회 했을 때에도 두근거리는 가슴은 그대로 였다.
오늘은 예정 같은 거 있어?
턱을 괸 체 맛있게 먹으며 재잘대는 널 바라보다 눈웃음을 짓곤 말을 이어가. 조금이라도 네가 이곳에 더 머물렀으면 해서. 일정이 없다면 짧다면 짧은 오늘 하루는 나와 보내줬으면. 영화를 보는게 좋을까, 아니면 예전처럼 침대에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너랑 하고픈게 너무나도 많았는데 막상 널 보니끼 머리그 하얗게 변해서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아.
나는 딱히 별다른 일은 없는데.
내가 말을 걸어 눈이 마주친 네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상냥하게 말을 던져.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어떻게 할래? 라고 묻는 것마냥.
직장은, 이제 좀 나아졌으려나. 힘들긴 해도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일은 레아주가 하고 싶었던 일이야?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직장 자체에서 보람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어느 정도 할만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거든. 그래서 그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니까 너무 크게 방황하게 돼. 뭐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를 정도로 말야. 영 정신없는 여름이야. 좀 더 활기찬 느낌이면 좋았을 텐데. 잘 지내고 있어?
생각보다 내가 배가 많이 고팠나 봐.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오므라이스를 응시하던 에반젤린은 간간히 이어지는 아슐레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는 몇입 남지 않은 음식에서 시선을 떼며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웅얼거렸다.
예정?
움, 그런 건 없는데. 기껏해야 남은 방정리, 그리고 학교 생활 때문에 찾아봤던 이런저런 정보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정도? 그러고 보니 내일쯤에는 우리 과 신입생들 단합회 같은 게 있다는 것 같았다.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는 크게 활동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터라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내일은 바쁠 것 같지만.
대답을 마치고 일단 눈앞에 남은 것부터 해치우고 보자는 심정으로 남은 오므라이스를 싹싹 긁어 입에 밀어넣은 다음 얌전히 숟가락을 접시 위에 올려두었다. 아, 잘 먹었다. 완전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 에반젤린은 엉덩이를 앞으로 쭉 뺀 채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손깍지를 껴서 배 위에 올려둔 채로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아슐레아가 자신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아 시선을 맞추자 웃는 낯 그대로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트는 모습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다른 일 없다는 말은 좀 더 있다 가라는 얘기로 알아들으면 되는 거겠지?
오늘은 모처럼 만났으니까 레아랑 좀 더 놀다 갈래.
서로의 자리가 비어있던 시간 동안 채워져있는 많은 것들을 공유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앞으로는 그 이상으로 많은 시간들을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함께였다. 일단은 먹은 것부터 치우고 볼까? 분명 말부터 꺼내면 자기가 하겠다고 할 아슐레아의 모습이 선해 에반젤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접시를 집어들고 개수대로 향했다.
좀 더 놀다가겠다는 너의 말에 답하려던 나는 후다닥 일어서서 설거지를 하러가는 널 보며 당황스런 얼굴을 해. 정말이지, 내가 할거라는 걸 어느새 알고 있던걸까. 잽싸게 그릇을 챙겨 일어난 네가 설거지를 시작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피식 웃어보여. 하긴 너는 언제나 똑부러지는 아이였지. 이따금 내 생각보다 앞서 나가선 행동하는 널 보며 언제나 감탄했던 것 같은데. 그새 잊고 있었던걸까.
그럼 나는...
갑작스레 손이 비어버린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뭘 입는게 좋을까. 기왕이면 너한테 잘 보일 수 있는거면 좋을텐데. 고민, 또 고민을 하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옷장으로 가. 스르륵, 너에게도 옷을 벗는 소리가 들릴까? 어쩌면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걸치고 있던 옷이 풀려선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해두곤 옷장을 여유롭게 열어. 손가락으로 옷들을 매만지다가 새하얗고 커다란 박스티를 꺼내. 그리곤 평소에 잘 입던 검정색 돌핀 팬츠도.
마치 티 한장만 걸치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서, 조금 과감한가 싶기는 했지만 왠지 아무래도 상관없단 생각이 들어. 나와 같이 있는게 에반젤린, 너라서.
설거지는 다 했어? 도와주지 않아도 돼?
옷을 갈아입곤 한걸음, 한걸음 사뿐히 너에게로 다가가 네 어깨에 턱을 가져다대곤 장난스레 물어봐. 예전처럼 자연스레 허리춤을 두팔로 끌어안기도 하면서 너와 거리를 좁혀가. 다시 예전의 거리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렇게라도 서두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봐. 너무 과감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지만, 널 너무 오래 기다려서 내가 참을 수가 없나봐.
다 했으면 나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 이야기 좀 해줘, 응?
네 귓가에 사근사근 속삭이면서 괜히 기분 좋아서 웃음소리가 자꾸만 새어나와. 지금 너와 보내는 시간이 꿈만 같다는 건 너는 알까.
레아주, 잘 지내? 나는 집안 사정이 있어서 다른데 신경 쓰기가 좀 어려웠어. 아니. 지금도 조금 어려워. 어디에서든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일 정말 좋지 않다는 거 알지만 쉽지가 않아서. 다른 걸 하기 어려운 기간이 길어질지 의외로 빨리 끝날지는 모르겠어... 답레든 답이든 기회가 되는대로 줄게. 만약 이런 식으로 연락 없을 때 기다리는 일이 어렵다면 편하게 얘기해줘. 항상 미안해. 고맙구.
밥을 얻어 먹었으면 설거지라도 하는 게 예의지! 고무장갑을 슥슥 끼고 시작한 설거지는 싱거울 정도로 쉬웠다. 음식 만드는 사이에 틈틈히 정리까지... 대단하다, 레아. 티비 같은데서 나오는 레시피를 따라 해보겠답시고 혼자 있을 때 슬쩍 요리를 시도해봤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아무리 깔끔하게 하려고 해도 결국엔 이것저것 너저분하게 늘어져있던 기억 뿐이었다. 혼자 살려면 마냥 사먹을 수는 없을 테니 이제는 연습을 하기는 해야할 텐데. 레아한테 배워볼까? 그것도 좋겠다. 근데 이런 거 괜히 물어보면 자기가 해주겠다고 할 것 같은데. 어쩐지 오늘따라 자신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레아의 행동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고개가 기울어지던 찰나, 어깨에 턱하니 올라온 레아의 얼굴에 에반젤린은 움찔 떨었다.
으, 응? 다 했는데, 거의.
애초에 할 것도 없었구. 이런 스킨십은 옛날에 내가 종종 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레아가 원래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했나? 어쩐지 묘하게 긴장됐다. 손을 멈추면 이상해 보일까봐 애써 접시를 헹구며 마무리 하던 찰나 이번엔 한술 더 떠 허리를 감싸오는 탓에 에반젤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새 옷도 갈아입고 온 모양인지 등에 닿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뭐래니, 나. 귓가에 사근사근 속삭이는 레아의 목소리에 흐흣,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목을 움츠린 채로 부랴부랴 설거지를 완전히 끝낸 다음 고무장갑을 벗어 걸어둔 에반젤린이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한 것은 아직까지 제 등에 붙어있는 레아의 얼굴이었다. 저기, 좀 가까운 것 같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 공부했지.
내가 여기 올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아? 평소에 챙기기 힘들던 봉사니, 학생회 활동이니 하는 것들을 하느라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뭐, 결과가 좋으니 결국 옳게 된 노력이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에반젤린이 작년의 고난과 역경을 떠올리며 성취감에 사로잡히려는 그 때, 다시 한 번 레아의 숨이 귓가를 간질였다. 정말, 왜 이렇게 붙는 건지. 싫은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이제 나도 성인인데, 아직도 레아 눈에는 애로 보이나? 그렇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냥 뭐, 다 했어. 연애는...
이 얘기 아까도 하지 않았나? 인생에 한 번 뿐인 학창 시절에 연애 한 번 못 해보다니. 어쩐지 서러웠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왜냐면 캠퍼스 생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과제에 취업에 시험에, 걱정 많은 제 성격에 마냥 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겨보자는 당찬 포부를 품은 에반젤린이었다. 설거지는 끝난지만 왜인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라 에반젤린은 그대로 개수대에 손을 얹은 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파티도 해보고, 동아리도 가입하고 싶어. 음, 친구들 생기면 자취방도 데려와서 놀아보고 싶고. 아, 조금 좁으려나? 클럽은... 시끄러운 건 별론데. 한 번은 가볼까 싶기도 해.
연애는 괜찮은 사람 보이면 하지 뭐. 내가 누군데? 그렇게 한창을 재잘거리며 떠들고 있는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에반젤린이 레아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표정이 경직되어 보이는 건 착각인가.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에반젤린은 조금 당황한 탓에 질문으로 말끝을 얼버무리며 허리에 올려진 레아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어 덮었다.
레아는 어땠어?
나 없는 동안 안 보고 싶었어?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사는데. 나 몰래 애인도 사귄 거 아니야? 에반젤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세워 레아의 손등을 살살 간지럽혔다.
나는 어땠더라. 너의 물음을 듣고 나는 미소를 띈 체 잠시 입술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 누구나 즐거울거라 말했던 대학생활이 즐겁지 않았다곤 못 하겠지. 분명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교수님들도 괜찮으신 분들이고, 선배, 후배들도 다들 좋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살짝 흘러버렸다.
『 즐겁기는 했는데.. 뭔가 허전하기도 했어. 』
조금 솔직했을까. 허전했다는 나의 말에, 너는 어떤 생각을 할까. 너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릴까? 아니면 그냥 누구나 말하는, 누구나 언제고 느낄만한 아쉬움이라고 생각할까. 그냥 저 길지 않은 말에 '네가 없어서 외로웠어.' 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될텐데. 이게 뭐라고 입술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는지 몰라. 그래서 그냥 바보 같이 웃어보였어.
『 애인은... 사귀지 않았어.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
눈에도 안 들어와서, 라는 말은 그저 말 끝을 흐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정말 누굴 보아도 친구 그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내가 남자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학창시절에 알던 사실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다른 여자아이들도 친구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네가 내 마음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아차린 건 나도 놀랐으니까. 큰일이라고 생각했어. 이러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떠나버리면 난 앞으로 쭉 홀로 살게 될테니까. 결국 난 머리 속에 떠올리는 건 너 뿐일테니까.
울컥 솟아오른 감정에 웃던 낯, 그대로 입술을 살짝 깨물곤 손등을 간지럽히던 네 손을 살며시 움켜잡아. 간질간질,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네 손을 조심스럽게 고쳐잡아. 결국엔 살며시 깍지를 껴잡고는 널 바라봐.
『 그리고 보고 싶었어, 많이. 한동안 보러오지도 않았으면서 뭔 소리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보러가면 더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 못 갔어. 』
입술을 깨문 체로, 쓴 미소를 지어보이며 네게 슬쩍 내 마음을 비춰. 내가 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야.
으으, 답이 늦었어. 당일에 바로 써서 줬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 밖으로 좀 나도느라 정신이 없었네. 나는 그 때도 지금도 별일 없이 있어. 오늘은 모처럼 이리저리 구르다 와서 좀 피곤한 느낌. 그리고 좋은 노래 찾아들으면서 힐링하고, 뭐 그런. 레아주는 월요일인데 어떻게, 너무 피곤하지 않게 보냈으려나 모르겠다. 좋은 날이었음 해. 답레는 오늘 내일 중으로 올릴게.
하나 둘 얘기를 꺼내면서도 어쩐지 자꾸 어두워지는 레아의 안색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뭔가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하긴, 짧은 시간이 아니었으니 레아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을 터였다.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조금이지만 먼저 어른이 되었으니 아직까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고민들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고심하며 힐끔힐끔 안색을 살피던 에반젤린은 또다시 훅 마주쳐 오는 레아의 시선에 무언가 들킨 것만 같아 흠칫 놀라는 한편, 깍지 낀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래.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데. 고민이 있으면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을 것이고 어떻게든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주면 되는 거잖아.
나도 보고 싶었어. 많이.
억지로 웃어보이는 것만 같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에반젤린은 이왕 눈을 맞춘 김에 아예 대놓고 레아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여전히 잘생겼다. 예쁘다고 해야할까. 옛날에도 레아 좋다는 애들 참 많았었는데. 돌이켜보면 그중 태반이 여자애들이었지. 걔네들이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알 것 같은 얼굴이란 말야. 일단은 눈이 정말 사기였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기만 해도 그윽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인상이 뚜렷하면서도 분위기는 또 묘하게 처연해보이는 것이... 에반젤린은 또다시 이어지는 쓸데없는 생각을 후다닥 내치며 잠시 끊겼던 대답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보러 왔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고민 안 해도 돼. 그거 말고도 다른 고민 있으면 나한테 다 얘기해. 혹시 알아?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 맞잡은 손에 힘을 준 채로 열심히 자신을 어필하며 깜빡거리는 에반젤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무래도 조금 덜 놀고 더 열심히 해야할 모양이다. 그래도 역시 연애는 하고 싶지만! 그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꾸준히 끌고 가는 프로젝트로 삼아야지. 아직도 한발 앞서 나가고 있는 레아의 고민을 들어주고 이것저것 도움이 되려면 자신감 있게 나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레아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에 연애를 못한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레아도 남자친구 없었던 것 같은데. 음, 확실히 없었지. 있었는데 모를 자신이 아니었다. 그럼 그 부분에서는 내가 더 앞서 나갈 수 있을지도?
그래도 애인 없으니까 나랑 놀기는 더 편하겠다.
그치? 뭔가 되게 어른스러운 연애를 할 것 같은 이미지여서 만약 애인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대하면 좋을까 하는 망상도 해봤던 에반젤린은 오히려 더 좋다는듯 입술을 모으며 찡그리는 것처럼 웃었다. 집도 가깝고 애인도 없으니 바쁜 일만 없다면 만나는 것도, 연락하는 것도 더욱 쉬운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들 보는 눈이 없나봐. 어떻게 우리가 아직도... 아니, 레아가 아직도 솔로야?
아무래도 자신의 프로젝트에 레아도 끼워주어야 할 모양이다. 나중에 더블 데이트 같은 것도 할 수 있으려나. 그런 모습은 어쩐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냥 둘이 놀러다니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에반젤린은 깍지 낀 손에 다른 손을 포개어 쥔 채로 끌어당겼다. 그 탓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눈으로만 배시시 웃으며 에반젤린은 말을 마쳤다.
좋은 오후. 오늘은 부지런하게 필요한 물건들도 찾아다니고 간식도 챙겨 먹고... 하고 나니까 몹시 졸려. 모기가 있을 날씨가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남았더라. 자려고 누우면 귓가에서 소리가 울리는 탓에 잠 엄청 설쳤어. 한참 싸우고 나니까 잠이 안 오더라... 눈물. 답레는, 에반젤린 이미지가 너무 미묘한가 싶어 고민하고 있어. 어쨌든 레아와 레아주에게 아무것도 모르면서(진짜로) / 꼬리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
같이 노력하자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내 마음을 눈치채고 날 떠보는 건가. 아니면 딱히 의도한 것 없이 힘내라며 해준 말일까. 네가 기분 좋게 웃으며 해주는 그 말에, 내 마음은 갈대같이 흔들려. 좀 더 들이대도 괜찮은걸까. 그러다 이 관계가 무너지면 어쩌지. 아니, 다 알고선 지금 나에게 기회를 주는 걸지도 몰라. 베시시 웃는 너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널 내 쪽으로 끌어당겨.
『 같이... 노력해야지. 』
근데 나는 네 옆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네 사람이라며 서있을 그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과거에도 내 자리였고, 지금도 내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곳에 다른 사람이 있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구역질이 올라와. 날 추하고 더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젠 어쩔 수 없어. 널 향한 마음이 커질대로 커져버렸으니까. 그래서 네 말을 되새기듯 중얼거리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어. 날 보며 웃는 네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는 걸 상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확 힘을 줘서 널 끌어당겨버려. 네 품으로 기울어져 들어오는 널 받쳐안은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여.
『 그럼 우리 둘이 연습해볼까? 』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안되는 제안에, 속으로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겉으로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어. 점점 더 밝아지는 미소를 지으며 너와 이마를 맞대. 둘이 내뱉는 호흡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리에서 나는 말라가는 내 입술을 혀로 핥아 적시곤 말을 이어가.
『 둘 다 해본 적 없으니까, 연애 같은거. 둘이 연습해보면... 어떨까? 』
두근두근, 심장이 세차게 울리는 게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켜. 연인이라면 단숨에 입을 맞췄을 거리에서 네게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진 나는 떨리고, 자꾸만 피하려는 눈을 네 눈과 마주한 체 네 입술이 열리길 기다려..
같이 노력하자. 솔로로 지내기에는 레아가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은근슬쩍 편승해보려는 의미의 말이었는데, 알아챈 걸까? 아니면 내 말이 좀 이상했나? 레아의 품에 갇힌 것처럼 안긴 채로 에반젤린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고개 숙인 채로 생각을 이어가려고 해도 자꾸만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에 하나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와중에 쉽게도 들어올려진 시선 끝에 담긴 레아의 눈빛이 묘하게 이글거리는 느낌이 들어 어지럽게 돌아가던 머릿속 생각은 쉽게도 끊어져버렸다.
어, 음, 레아.
뭘까. 뭐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그 틈을 얻는 것은 요원한 일로 보였다. 맡닿은 얼굴에 스치는 레아의 숨결이 뜨거워서, 그러니까. 자신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행동을 취하기에는 그 이상으로 레아가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애 연습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걸까. 그러니까, 연인들이 하는 경험들을 미리 같이 알아보자는 말이겠지. 그게 이렇게 긴장할 일인 건지. 둘이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에반젤린이 처음 겪는 일들 중 상당수는 레아와 함께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연애 연습 같은 말로 포장하지 않아도 앞으로 같이 있으면서 할 게 많을 텐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럴까?
뭔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조금은 안절부절하며 몸을 꼼지락거리는 에반젤린의 귓가에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따라 꿀꺽. 그런데도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긴장하게 되는 건지. 맞닿은 레아의 몸이 뜨끈뜨근했다. 열이라도 나는 걸까. 이런 순간에도 레아는 잘생겼네, 따위의 생각이 떠오르자 한순간 에반젤린은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뭐 이렇게 긴장할 일이라고. 레아도 처음인 일에는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지. 둘 다 노력파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에반젤린의 결정은 쉬웠고, 이어지는 말도 쉽게 흘러나왔다.
해보지, 뭐.
연애 연습. 근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무슨 뜻이야, 레아? 긴장이 풀리면서 품에 끌어안긴 몸이 간질거리는 탓에 짤막하게 소리내어 웃은 에반젤린은 꿈틀거리며 그 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레아는 쉽게 풀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라서 반가운 건 마찬가지지만, 역시 오늘의 레아는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뭔가 엄청, 솔직해졌어. 에반젤린은 레아의 그런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간지러워, 응?
내가 그렇게 좋아? 답지 않게 엄청 솔직해졌네, 레아. 애써 고개를 숙이며 이번에는 그 품 안으로 좀 더 깊게 파고든 에반젤린은 레아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한 번 웃었다. 어쩐지 레아에게서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위기감이 들정도면 어쩐지 좀 더 놀려주고 싶어지는걸. 내가 너무 못됐나? 그래도 본 이야기랑 다르게 부드러운? 좀 더 새침한 느낌으로 놀릴 테니까 용서해 줘. 결국에는 일편단심이니까 말야. 잘 지냈어, 레아주? 너무 늦은 시간이야. 다른 의미로 너무 늦었기도 하고. 그간 별 일 없었을까. 오늘도 좋은 꿈 꾸기를 바라.
알고서 이러는걸까, 아니면 모르는데도 이러는 걸까. 전자던 후자던 에반젤린은 정말이지 요망하다는 말에 제일 알맞는 사람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품으로 더 파고들며 예쁘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너는 그야말로 달콤한 꿀 같아서, 나는 한마리의 꿀벌이 되서 그 달콤한 향에.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입술이 자꾸만 말라가는 것이 느껴져서,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게 돼.
응, 좋아. 사랑해.
그래도 어차피 '연애연습'이란 걸 하기로 했으니까 네 물음에도 거침없이 속에서만 내뱉던 대답을 망설이지 않고 꺼내. 너는 이걸 그냥 연습에 심취해서 내뱉는 대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너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물론 그와 별개로 가슴은 연신 두근거리고 있었지만.
사귀는 사이면 이럴 때 뭘 할까?
품에 파고 든 네 얼굴을 바라보니 다시금 네 숨결이 느껴져. 따스하고 달달한 네 숨결이 닿을 때면 가슴 한켠에 저릿한 감각이 전해져. 사귀는 사이라면 분명 이럴 때 입을 맞추지 않았을까. 아마도 일말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너와 입을 맞추고, 너의 달콤함에 젖어 한참을 버어나지 않았겠지. 근데 연습 중에도 그렇게 망설이지 않고 해도 되는건지, 막상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니 머뭇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이 거리에서 네게 물음을 던져.
분명 여러가지가 있긴 할텐데.
노골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지만, 돌려말하는 한편으론 네가 내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선을 넘으려고 하니 폭주하디 시작한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목이 타서 나는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켜. 왠지 내 숨결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기분탓일까.
잘 지내고 있어. 요새 이래저래 시간 흐르는 게 급했는지 그저께 빼빼로데이 어쩌구 하는 것도 남이 알려줘서 알았지 뭐야. 예전엔 이런 거 미리미리 알고 소소하게 챙기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었나. 으, 슬슬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지는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든 시간이 이어지고 있어. 감기인지 비염인지 근근히 달고 살게 되는 것 같고. 벌써 일요일이라는 게 놀랍다... 답레는 오늘 내일 중으로 올릴게. 레아주는 이번 주도 잘 보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쓰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서로 다른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레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에반젤린은 자꾸 멍해지려는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연애 연습이라고 했으니까 이건 연인 사이에서 하는 그런 말인가? 직설적으로 쏘아진 말은 이렇게까지 사람을 당황시키는 법이구나. 레아를 사랑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쩐지 에반젤린은 쉽게 같은 답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그 단어에 담긴 뜻이, 진득한 울림이 무언가 다른 것만 같아서 그랬다.
으응. 그렇구나.
그 와중에 아직도 레아의 품에 안겨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반젤린은 선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내려앉았다. 작게 쿵 소리가 울릴 정도로 부딪힌 엉덩이가 아팠지만 와중에 레아와 부딪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에반젤린은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이 계속해서 안긴 채 마주 보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깜짝 놀라면서 튀어오른 움직임 때문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어, 어, 그러게. 여러가지가...
있겠지? 근데 이럴 때가 무슨 때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시간이 남아서 놀고 있을 때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집에서 데이트를 할 때? 그것도 아니라면 방금처럼 딱 붙어서 마주 보고 있을 때? 문득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소설, 영화, 드라마, 아무튼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러 로맨틱한 장면들에 에반젤린은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억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아무래도 오늘의 레아는 이상하다. 그리고 연애 연습이니 뭐니 하는 걸 순순히 수긍하고 있는 자신도. 못 할 건 없겠지만, 그리고 레아랑 붙어있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문득 시선을 위로 들자 아직도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아를 마주한 에반젤린은 홱 고개를 돌렸다.
어디 나갈까? 내일부터는 또 바쁠 텐데.
아니면 어, 집에서 쉬어도 좋고. 뭐 하지, 이제? 황급히 말을 쏟아내는 에반젤린의 얼굴이 열꽃이라도 핀 것마냥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 어쩌지. 나는 부끄러워 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널 보며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켜.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그 행동 하나하나다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너는 부끄러워 할 때 그런 표정과 그런 눈, 그런 손짓을 하는구나. 이런 것도 하나하나 소중해서 나는 모두 다 내 머릿속에 담아둬.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있자. 예전처럼 내 다리 사이에 앉아 기대서 티비도 보고.
열꽃이 핀 것처럼 붉어진 널 눈에 담은 체로, 나는 좀 더 다가가기로 마음 먹어. 마음 한켠에선 너무 다가가면 안된다고 외치는데, 그렇게 얼굴을 붉힌 체로 아쩔 줄 몰라하는 널 보면 욕심이랑 함께 짓궂은 생각이 샘솟아.
사귀는 사람들도 그런거 자주 하더라. 꼭 안고선 불도 다 끄고 영화 보기라던지.
태연하게 너와 그런 것을 하는게 당연한 것처럼 부드럽게 속삭여. 그리곤 내 품에서 벗어났던 네 손을 다시금 잡아 내게로 끌어당겨. 이젠 어쩔 수 없어. 너루향한 내 마음을 숨기는 건 이제 못 할 것 같아. 고삐 풀린 이 마음을 막을 방법이란게 존재하긴 할까? 그렇게 널 품에 끌어당겨 안기게 만들곤 고개를 숙여 널 응시해.
영화 보자. 나 에반젤린이랑 영화 보고 싶어. 그래줄거지?
속삭임과 함께 열기를 머금은 숨이 네게 닿는게 느껴져. 어떻게 할래? 나는 네가 보일 반응을 한번 더 기대하면서 입술을 내 혀로 적시곤, 침을 삼켜.
그러니까 이건, 연애를 하면 이렇게 해야겠다 하는 건가? 훗날의 누군가는 참 좋겠다.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친구도 있고. 연애 연습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제대로 된 경험도 없다고 해놓고서는 완전 열심히, 그리고 묘하게 능숙한 느낌으로 들이대는 레아 때문에 정신이 가물가물할 정도인 에반젤린은 어물거리며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 응. 그럼.
뭐 보지, 영화? 아니. 근데 정말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돌이켜보면 예전엔 제가 먼저 스킨십을 시도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뒤에서 앵기는 건 일상다반사고 툭툭 건드릴 때마다 은근히 피하는 것처럼 움찔거리던 건 레아였는데. 지금 이 모습은 낯설다 못해 조금은 인지부조화가 올 정도라고 해야하나. 아니, 물론 내가 건드릴 때도 레아가 그걸 싫어서 피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누군가와 몸이 닿는 게 어색하다는 느낌? 긴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질 정도였어서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무, 무슨 영화 볼까?
집에서 보자는 거겠지? 번듯한 티비가 달려있을 정도로 큰 집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싶었으나 자꾸만 끌려가는 몸이 아슐레아의 품 안에 묻히는 바람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분명히 손을 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다른쪽 손이 이곳저곳에 스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맨살도 아닌데. 그 손이 날개뼈 부근을 스칠 때쯤 소름이, 정확히는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에반젤린은 몸을 부르르 떨며 레아의 품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보지? 공포? 아니면 액션?
나 영화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최근에 뭐 나왔지? 그나저나 묘하게 덥지 않아? 문을 다 닫아놔서 그런가.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태연한 척 하는 와중에도 한쪽으로 몰리는 감각에 에반젤린은 애써 레아를 외면하며 소파로 몸을 던졌다. 집에서 보면 결제해야 하나? 그러면 그건 내가 해야겠다. 밥도 얻어 먹었으니까. 횡설수설 말을 주워섬기며 소파 끄트머리에 안착한 에반젤린은 자신의 자세가 단정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애써 느슨하게 몸을 풀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람?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한 키 차이 탓에 다리 사이에 낑겨 앉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은, 그럴 수는 없지. 속으로만 하는 심호흡을 마친 에반젤린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건들며 레아를 불렀다.
수면 패턴이 엉망이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노력 중이야. 언제든 푹 잘 수 있는 사람인데 그냥 잠을 제대로 안 자고 놀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냥 잠들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더라고. 날씨가 이상해. 어쩔 때는 또 그렇게 춥지도 않은 것 같고, 껴입고 나갔더니 덥기도 하더라. 주말 잘 보내고 있을까?
큰일이야. 부끄러워 하는 네가 너무 귀여워. 네가 보여주는 모습들이 내가 예전에 널 향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하던 모습과 비슷해서 귀여우면서도 혹시나 하는 희망이 생겨버려. 저렇게 의식을 하는 것을 보면 역시 너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희망.
음, 우리 같이 공포 영화 보던 것도 꽤 오래 된 것 같으니까 공포로 하자.
나는 옆자리로 부르는 네게 다가가며 부드럽게 대꾸를 해줘. 사실 지금 영화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그저 네가 연애 연습이라는 명목 하에 열심히 들이대면 너도 혹시나 날 향한 감정에 아름답게 꽃을 피워주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다가갈까 싶어. 그래서 나는 네 옆에 그냥 앉는게 아니라 슬그머니 몸을 기울여. 그리곤 네 다리를 베고 슬그머니 티비쪽으로 돌아누웠지.
자, 리모콘. 여태 네가 고른 영화들이 재밌었으니까 이번에도 기대할게.
그러다가 자연스레 널 올려다 보는 자세로 돌아누워선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어보여. 어때, 두근거려? 어때, 너도 내가 끌려? 나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물으며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어보여. 아아, 이렇게 올려다보니 참 예쁘다. 너도 그런 생각을 하려나?
난 에반젤린이 고른 영화들이 참 좋더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네 손을 살며시 내 손으로 감싸 리모콘을 쥐어주며 상냥하게 말한다. 일부러 손을 맞대고 싶어서 리모콘을 쥐어준 건 비밀로 해야겠지만.
이상 기온 때문에 난리라던데. 제주도는 27도래. 제주도로 떠날까? 그나저나 레아의 대담한 스킨십이 걱정이야. 에반젤린은 아직 응애인데... 이건 좀 그런가. 모르는 척(정말 모름) 컨셉으로 계속 안달나게 만들고 싶은데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무튼 레아주, 이번 주도 파이팅이야.
오늘 엄청 춥더라. 아, 겨울이구나 하고 느끼게 만드는 날씨였어. 손이 시려워서 꺼내놓기가 어려울 정도야. 피해갈 수 있으면 감기같은 잔병치레는 피하는 게 좋지. 조심할게. 레아주도 조심하기. 음, 어느쪽이 더 안달나려나. 에바가 너무 튕기나? 그래도 나는 한동안은 더 튕길 생각인데. 잘은 모르지만 좋으면서 괜히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으,겨울이야 겨울. 집 나갔던 겨울이 돌아온거야. 나도 조심할테니 에바주도 조심해. 일단 레아는 안달이 나기엔 열심히 들이대기 시작했으니까 에바만 남은게 아닐까. 에바주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어떤 에바든 나는 좋으니까. 저녁도 잊지 말고 잘 챙겨먹어, 에바주.
한 번 내뱉은 말은 줏어담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후회가 됐다. 하필이면 다른 선택지는 내버려두고 공포에 꽂힐 건 뭐람. 공포 영화를 못 보는 건 아니지만 깜짝 놀라게 하는 부류에는 약한 에반젤린에게 호러는 즐겨볼 만한 장르는 아니었다. 여름날 밤에나 종종 찾아보는 정도고, 어두운 곳에 가면 문득 생각나게 된다는 점에서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리모콘은 던져졌으니 고르는 건 제 몫인걸. 같이 영화를 보는 게 좋은 건지, 장르가 공포인 게 좋은 건지 아무튼 눈을 반짝인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레아 덕분에 한숨은 속으로만 내쉰 에반젤린은 이리저리 영화 목록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어떤 게 좋으려나.
좀비? 아니면 오컬트? 영화 고르는 센스는 레아쪽이 좀 더 좋으면서 이렇게 떠넘기다니. 레아가 고르는 것들은 대부분 평타는 치는 편이었고 자신은 모 아니면 도에 가까웠다. 이게 보고 싶다! 하고 골라놓고서 후회가 막심했던 경우도 있었고 몇번이고 다시 찾아볼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영화가 좋을지 고르는 사이 음침한 포스터를 이것저것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에반젤린은 지금 이 상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걸로 할까? 에반젤린이 고른 것은 나름 최근에 나온 영화로 인터넷을 둘러보다 제목을 몇번 봤던 기억이 있었다. 공포인듯 아닌듯 무거운 분위기로 압박하는 영화처럼 보였는데, 대체로 이런 것들이 놀래키는 요소가 적었던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음, 이정도면 꽤나 합리적인 선택 아닐까. 무작정 시작 버튼을 누른 후에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하려는 때에 레아가 은근히 몸을 붙여오는 게 느껴졌다. 어, 어쩐지 손이 움직이는 게 좀 묘한데. 또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반젤린은 재빨리 움직여 방의 불을 껐다.
여, 역시 공포는 불 끄고 봐야지.
암, 그렇고 말고. 슬그머니 레아의 옆자리에 다시 앉은 에반젤린은 이번엔 자신이 먼저 레아의 손을 붙들어 쥔 채로 살짝 거리를 두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오늘따라 몸이 민감하다는 생각을 하며 에반젤린은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 영화, 소개 내용이랑 뭔가 다르지 않나? 분명 잔잔한 분위기일 것만 같았던 영화는 장면이 한 번 전환되기 무섭게 시종일관 어둡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기어코 튀어나온 깜놀 장면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떤 에반젤린은 무심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한 번 더 놀라고야 말았다. 놀랐다기 보다는, 부끄럽다고 해야할지. 영화 대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맞은 시선 탓이었다.
혹시나 헷갈릴까 싶어 이야기 하는 거지만 마지막 문장은 에반젤린 혼자 생각한 거야. 요즘 너무 시도때도 없이 졸려. 졸린 건 맞는 건가. 병든 닭이 떠오르는 일상이야. 단 거 없이는 못 버티겠단 말이지. 그나저나 공포영화라니. 레아주는 좋아해? 나는 쥐약이야. 근데 무서운 거 못 보는 사람들이 괜히 더 호기심 갖는 거 알아? 자꾸 그런 거 찾아보고 종종 생각나고. 밤에 어두운 길이나 복도 같은 곳에서 생각나고 후회하고 나중에 또 찾아본다니까.
내가 보려고 하면 그쳐 있고, 한 번 더 나가보니까 그쳐 있고. 요즘은 어디 잘 안 나가니까 아예 펑펑 왔으면 싶기도 해. 너무 못된 생각일까? 완전 가득 쌓인 눈 보고 싶다. 어쩐지 그런 거에 로망이 생긴단 말야. 공포영화를 안 무서워 해? 레아주... 강하구나. 나는 나보다 더 무서워 하는 사람이 같이 있으면 괜찮은데 혼자서는 도전할 용기가 안 생기더라.
이런, 조심조심 보고 있던 것이 걸려버렸다. 좀 부끄러운데, 그래도 네가 눈치를 완전히 챈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야. 그래도 다음부터 좀 더 조심하기로 할까.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도 잠시, 토끼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놀란 널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맞잡은 손을 마사지하듯 주물러주면서 반대쳔 손을 뻗어 네 뺨을 매만져준다.
괜찮아? 많이 무서워?
네가 거리를 두려고 해도, 미안하지만 내가 가만히 둘 수 없어. 그도 그럴게, 이렇게 널 향한 마음을 맘껏 표현할 기회가 얼마나 오겠어. 네가 날 의식하게 만들 이런 천금 같은 시간이 다시는 내게 안 올지도 모르는데 놓칠 순 없지. 그래서 나는 네가 눈치 채기 힘들게 자연스레 다가가서 네 어깨를 감싸줘.
너무 무서우면 내 어깨로 눈 가려도 돼. 난 괜찮으니까.
네 어깨를 살살 쓸어내리며 다시 티비로 시선을 옮겨. 마치 널 걱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공포 영화를 보기 시작해. 비명소리나 놀래키는 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내 감각은 네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그 손끝에 몰려서 아무렇디도 않았다. 그저 너에게서 느껴지는 감촉을 소중히 기억할 뿐.
앗. 나는 내리면 좋겠다는 거였는데. 역시 못된 심보가 맞았네. 그럼, 건강하게 잘 있지. 날이 추워지니까 점점 동면에 드는 것처럼 컨디션이 잦아드는 기분이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일요일인 건 좀 그렇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좋으려나? 공휴일이 주말이랑 겹치는 건 진짜 별로야. 지금의 나는 상관 없겠지만 이왕이면 하루 미뤄서 월요일이었음 어땠을가 싶네. 레아주도 집에 있기로 했어? 좋은 생각이야. 나가려면 이브에 나가야지. 물론 나는 이브에도... 이하 생략.
내가 너무 분위기를 편향되게 만드는 주제를 골랐네. 자학 비슷한 의미였는데 말야.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응. 그 때도 와서 안부 인사 남겨야겠다. 컨디션이 하락세야? 그럴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해. 한 번 떨어지면 쉽게 올리기 힘들거든. 연말이니까 더더욱 몸관리 잘해. 뭐가 됐든 대부분 바쁜 시즌이잖아. 레아주는 어떠려나. 공휴일 하루하루가 소중한 삶이라니. 그게 더 나을지도. 나는 오늘이 어제인지 내일인지 잘 모르겠는 일상이라 이건 이것대로 좀 슬퍼져.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벌써 신년이네. 시간이 진짜 빠르다.
음음, 눈이 싫은건 아닌데 출근할 때 미끄러워서 조금 힘들어서 말이야. 응응, 조심할게. 그래도 나름 신경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구. 그러게나 말이야. 에바주 본지도 되게 오래 된 것 같은데 지금도 보고 있어서 참 기뻐. 정말로. 에바주랑 올해도 함께라 행복해.
그러게. 신기할 정도로 오래 되기는 했어. 그래서 좋아. 더 고맙기도 하고. 응. 신년에 다시 하게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답레는 더 늦지 않게 줄 수 있도록 할게. 너무 빤히 보이는 말인가? 아무튼 말야. 요새 겉도는 대화밖에 못 하는 인간이 된 것 같아서 좀 서럽기는 해. 흑흑.
그런 건 아니고 뭔가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때 실속있는 대화를 못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레아주랑 대화할 때 그렇다는 뜻은 아니야. 응, 그런 건 아니구. 요새 뭔가 얘기하는 게 어렵게 느껴져서 그런가봐. 외전? 즐거워. 너무 내 맘대로 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걱정이 될 정도야. 에반젤린의 원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져서 레아주가 오히려 어색할까봐 걱정이지. 레아주는 어때?
음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매번 실혹있늠 말만 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그냥 편하게 생각하는게 좋을 것 같아. 이런건 심각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끝이 없더라. 즐겁다니.다행이야. 나도 즐거워. 레아가 말과는 반대로 너무 들이대서 별로인건 아닐까 싶어서 걱정이지만.
물론 나는 실없는 대화도 좋아하지만 나랑 얘기 나누는 사람들도 그래야 할 텐데 하는 걱정에 가깝지. 레아주도 좋다니 다행이야. 그냥 가볍게, 산뜻하게 라는 느낌으로 즐기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까 들이대는 것도 레아랑 에바가 밀당하는 것도 마음 가는대로 적으면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좋아하거든. 나중에는 에반젤린이 치대고 레아가 놀리고 있는 거 아냐? 그것대로 좋을지도. 레아주, 이번 주는 잘 보내고 있을까. 슬슬 몸이 적응하고 있나봐. 추위가 조금 줄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물론 밖에 나가면 바로 헛소리 하지 마 인마 하는 날씨지만...
응응, 나도 그렇게 즐기려구 하고 있어. 다행이다. 에바주가 좋아한다니 다행이야. 에바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고 말이지. 그것도 좋겠다. 여러가지 모습이 보고 싶기는 해. 나는 잘 보내고 닜어. 날씨.. 너무 변덕스러워서 고생이라니까. 이럴 때 감기 조심해야해. 알았지?
뭐가 다행이야.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디폴트에 가까운걸. 레아주가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내 마음이 다 놓일 정도야. 응. 감기 조심해야지. 오늘 안 그래도 좀 위험할 뻔 했어. 요새 코로나도 아직 난리더라. 한 번 걸렸으니 안전하겠지 하기에는 이래저래 많이들 걸리더라구.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답레 줄 수 있도록 할게. 얼른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안해. 오늘도 좋은 밤 되길 바라.
뭐가 다행이야.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디폴트에 가까운걸. 레아주가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내 마음이 다 놓일 정도야. 응. 감기 조심해야지. 오늘 안 그래도 좀 위험할 뻔 했어. 요새 코로나도 아직 난리더라. 한 번 걸렸으니 안전하겠지 하기에는 이래저래 많이들 걸리더라구.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답레 줄 수 있도록 할게. 얼른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안해. 오늘도 좋은 밤 되길 바라.
아, 레아주한테 답장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이름을 레아주로 적을 뻔 했어. 이래저래 바빴어. 바쁘다긴 뭐 하고 집안에 행사가 있어서 그럭저럭 시간 보냈지. 신년 맞이 잘 했어? 나는 올해는 작년과 또 다른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레아주도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바랄게.
맞아. 무엇보다도 건강이지. 건강한 삶, 건강한 일상이 되기를 바라. 시간 쭉쭉 간다. 역시 새해맞이는 한순간이지. 1월 1일 지나가면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니까. 레아주는 어때? 오늘 내일만 있으면 또 주말이야. 얼른 푹 쉬었으면 좋겠다. 항상 펑펑 놀고 있는 내 얘기는 아니구.
사실 영화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아서 오히려 더 놀란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같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도 어쩐지 레아가 자꾸만 더 가까이 붙는 것 같아서 당황한 거라고도. 어깨에 얹힌 손이 몸을 잡아당겨 자연스럽게 레아에게 머리를 기댄 채로 영화를 이어 보면서도 자꾸만 그쪽을 힐끔거리게 된다는 것도 그랬다. 한 번 더 옆을 돌아보았을 때 마주친 눈에 흠칫 놀란 에반젤린은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뭔가, 평소랑은 조금 다른데. 근데 뭐가 다른 건지를 모르겠어. 숨을 들이켤 때 스며드는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편안한 공기에 에반젤린은 천천히 몸의 긴장을 풀어냈다.
영화는 제법 반전이 있는 결말로 끝났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쳐다보던 에반젤린은 어깨를 슥슥 매만지는 손길에 고개를 푹 숙이며 숨을 내쉬었다. 영화가 재밌었는지 어쨌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연애 연습이 대체 뭘까. 평소에 함께 시간을 보내던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인데도 자꾸만 긴장하게 되었다. 아마도, 레아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이겠지.
재밌었어?
여전히 레아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로 에반젤린은 물었다. 편안한데, 눈을 뜨면 다시 마주치게 될 레아의 시선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레아는 별 생각 없는데 괜히 혼자 어색해 하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을 때, 계속 그런 자세로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맞춰오는 시선이.
레아?
역시 다르다.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것 같은데, 분명 그런데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레아의 얼굴에 에반젤린의 심장이 옅게 뛰었다. 현실은 역시 소설과는 다르다. 연애 소설 속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에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들을 대입시켜 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 설레는 걸까? 태연해 보이는 레아의 표정에 에반젤린이 입술을 삐죽이며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연애도 뭐, 별 거 아니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자신의 표정도 레아처럼 태연해 보이길 바라며, 에반젤린은 그렇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해야할지. 취업하고 자리를 찾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어. 아직까지는 크게 잔소리 하거나 압박 주거나 하는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너무 늦어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 답답하기는 해. 새해 복 많이 받아, 레아주. 연휴는 잘 보내고 있어?
연초라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물론 가장 큰 건 내 마음 문제지만 말야.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어. 나도 잘 쉬고 있지.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고 먹고 인사하고 또 먹고 그랬더니 속이 안 좋더라, 눈물. 그래도 연휴라 그런가. 길거리도 훨씬 한산한 느낌이야. 명절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멀리 안 가는 건 진짜 복이라고 생각해. 왔다갔다 하려면 엄청 고생일텐데. 레아주도 떡국 잘 챙겨 먹었나 몰라.
잘 쉬었지. 나만 노는 게 아니라 모두가 노는 분위기니까 어쩐지 마음이 더 편하더라. 웃기지? 연휴 내내 수도 때문에 난리였어. 날씨가 엄청 춥긴 추운가봐. 자꾸 배관이 얼어 터져서... 으으. 이보다도 추운 날씨일 때도 잘 살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나 몰라. 레아주도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 진짜 답도 없더라, 날이. 요새 집에서 자꾸 물 끓여 마시는 습관이 들었는데 뭔가 나이 든 기분이 들지 뭐야.
물은 거의 사다 먹어서 끓여 먹을 필요는 없긴 한데, 매번 차 타서 마시거나 커피 마시거나 하기는 좀 그렇고 따뜻한 물은 먹고 싶고. 그래서 끓여서 마셔. 엄청 금방 식더라. 난방비도 그렇고 여러모로 번거로운 겨울이다 싶어. 곧 지나가려나? 이 기세면 한 3월까지 계속 추울 것 같던데. 나는 다시 어디 안 나가고 집에 꼭꼭 숨어있어. 이번 주까지는 그러지 않을까 싶어. 레아주도 나가려면 장갑 끼고 핫팩이라도 하나 챙겨서 다녀. 밖에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걱정될 정도야...
태연함을 뽐내려는 듯 물어오는 너의 말에, 왠지 발끈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이 흘러나온다. 아아, 진정해야지. 귀엽잖아, 저런 모습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면서 아닌 것처럼 구는 저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너는 알까. 나는 그래서 방긋 미소를 지으며 네가 벌린 거리를 따라잡듯 움직여 네게로 붙는다.
아직 다 안 해봤는데? 영화에서도 나온 것들도.
그러니까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했더라. 영화 속 주인공들은 남여 커플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쇼파 위에 올려진 네 한손 위에 내 손을 얹으며 서서히 거리를 좁힌다. 아! 이제 기억났다. 그러니까 그 커플도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봤지. 영화를 보곤 덤덤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이 맞고. 나는 천천히 네게 다가가 몸을 밀착시킨다. 그리곤 이마를 마주 대곤 살며시 부비며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속삭인다.
여기서 입을 맞추던데. 그것도 안 해봤어.
어떻게 생각해? 그리 말하는 것처럼 속삭이곤 네게 눈웃음을 지어보여.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내 마음을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내 안의 충동과 맹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겉으론 태연하게 웃어보이고 있지만 말야.
큰일이 있었네. 하던 일은 잘 마무리 됐어? 이직... 이직 그거 너무 어렵더라. 알바라도 많이 뛰어봤으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까. 뭔가 이전에 하던 일도 잘 마무리 하고 다음 직장에도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들어가고 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고. 모쪼록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잘 지내고 있었어. 요새 미세먼지 엄청나던데 마스크 꼭꼭 끼고 다녀. 감기 걸릴라. 답레도 잘 읽을게.
뭐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지... 나도 요새 시간 녹이는 대신 일거리 하나 만들어서 하고 있더니 하루하루가 참 빠르게 흐른다. 그래도 뭔가 유의미하게 시간 쓰는 기분을 되게 오랜만에 느끼고 있어. 이직한 직장 분위기는 어때? 잘 지내고 있으려나. 슬슬 날이 좀 풀리는 것 같아. 바깥이 그렇게 춥지 않더라. 잘 지냈어?
자꾸 이런 식으로 휘둘리면 곤란하다. 에반젤린, 정신 차리자. 애초에 멀쩡한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능숙하게 리드하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라는 걸 에반젤린도 알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이렇게 상대의 행동 하나에 과할 정도로 놀라고 반응하는 건 싫었다. 연애 안 해본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너무 애같잖아.
뭘, 뭘 해봐?
아니. 연애 안 해본 걸 어쩌라고! 슬그머니 손을 겹쳐잡는 것도 은근히 엉덩이를 끌어 붙이며 나에게 몸을 밀어오는 것도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과 연달아 다른 작품의 주인공이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었다. 아니. 내가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그, 너무 가깝지 않아?
속으로 얘기한다는 게 입으로 내뱉어 버렸다. 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인지 얼굴에 닿는 숨이 엄청 뜨겁게 느껴지는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는 레아는 역시 예쁘고, 눈이 반짝반짝 해서. 차마 손으로 밀어낼 수는 없어서 한 얘기였는데도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물러서지 않는 레아의 모습에 에반젤린은 숨을 삼켰다.
흣.
오히려 묘한 소리를 내버린 탓에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뭘 이렇게 부끄러워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닿을락 말락 맞대고 있은지 고작 이십 초쯤 지난 것 같은데 두 시간은 지나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끝끝내 떠올리지 못한 에반젤린은 서로의 이마를 맞대어 붙인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유명한 가수더라. 노래 대체로 다 마음에 들어. 심심할 때 해석하고 같이 한 번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답레 조금 지지부진한 게 아닌가, 너무 튕기는 건 아닌가 싶어서 신경 쓰이는데 그렇다고 확 저질러버리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걱정되고 반복이야. 눈물. 무난한 게 오히려 좋더라. 레아주에게 소소하면서 즐거운 일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
잘 지내고 있었으면 됐어. 나도 잘 지내고 있었어. 미적미적 뭔가 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근면성실은 진짜 어디다 버리고 왔나봐. 정신개조가 시급하다는 생각 하면서 지내고 있어. 눈물... 그래도 근황 주고 받을 수 있으니 기쁘다. 뭔가 즐거운 일은 있었어? 바쁘고 정신 없으면 정신적으로도 엄청 지치게 되니까 일하는 중간에도 소소하게 좋은 일 생겼으면 좋겠다. 응원할게. 나는 요새 커피가 많이 늘었어. 근데 묘하게 이전보다 잠이 잘 오는 것 같아서 이상하더라. 대화가 영 두서가 없었는데 답레도 금방 써서 줄게!
답레를 준다고 하고서 시간이 훌쩍 지났네. 뭔가 자꾸 간단한 인사만 주고 받게 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쉽게 적지를 못했어. 나름 오래 이어진 연이라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 요 며칠 꽃이 엄청 피었더라. 곧 다 져버린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질만큼. 날씨도 슬슬 따뜻해지고 있어. 레아주도 평범하지만 따뜻한 일상 보내고 있기를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