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을 떼어주자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춘심을 바라보며 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듯, 상냥하기 그지 없는 웃음소리였다. 그러다 춘심이 다가와 소맷자락을 가볍게 붙드는 것을 느낀 하루는 눈이 잠시 동그랗게 변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조심스럽게 그 손가락을 풀어선 하루의 손가락 하나와 춘심의 손가락 하나를 엮어줍니다. 왠지 아슬아슬 해보이면서도, 소맷자락을 붙들었을 때보다는 단단해진 두사람의 고리였습니다.
" 좋아요, 그러면 날씨도 좋으니까 밖을 좀 더 걷는게 좋을 것 같아요. "
고개를 살짝 들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춘심에게, 하루는 상냥하게 대답을 돌려주며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새하얀 구두를 신은 늘씬한 다리가 앞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걸음의 목적지는 공원의 산책로, 날도 좋아서 사람들이 종종 지나가기도 하는 깔끔한 길이었습니다.
" 그동안 잘 지냈어요?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
하루는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춘심을 바라보려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춘심을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라는 것이 춘심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차분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 저는 요즘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춘심양이랑 걸을 수 있는게 기뻐요. 상쾌하기도 하구요. "
춘심양도 그렇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루는 그렇게 속삭이며 입꼬리를 단아하게 올려보입니다. 그녀의 말은 한점 거짓말이 없다는 듯, 망설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춘덕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뾱뾱 거리는 발과 함게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에선 달걀 깨는 소리와 가루재료를 계량하는 소리. 화기를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 나는 필요한 대화를 하기로 마음 먹고...
"그 사장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춘덕아.. 미안.. 너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근로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내 잘못 아니야.
"근로계약서도 작성하고, 제가 법적으로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도 작성하고 아까와 똑같지만 주 근로시간이 저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줄어드니까 근로시간도 합의를 봐야 하거든요..."
하지만, 선밴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요? 그러니까 사장이랑 담판 지어야지... 그리고 주방에서 달달한 냄새가 풍겨져 오기 시작한다. 음~ 향 좋은데? 약간... 약간... 빵냄새도 나고... 킁킁... 그리고 이건... 팔각이랑.. 계피 흠흠.
"다했다구리."
향에 취해 있는 동안 춘덕이가 요리를 끝냈는지 접시와 소스 같은 것을 들고 테이블로 서빙해왔다. 춘덕이가 내온 요리는
"이건 행인두부다구리. 살구씨와 우유를 혼합하여 응고제를 이용 응고시켜 만든 푸딩같은거다구리." "이쪽은 탕후루구리. 말 안 해도 알거라 생각한다구리. 그리고 이건 앙금을 넣어 만든 경단과 깨를 빻아 거기에 꿀과 설탕을 넣고 조린 소를 넣고 만든 경단에 조청을 묻히고 깨를 버무린 깨경단이다구리."
춘덕이는 마지막으로 실험작이라 소개하며 케이크도 가져왔다.
"이건 킹구리님께서 서양식 디저트도 도전해보라 말씀하셔서 만들어본 케이크다구리."
약간 투명하게 하얀 크림이 덕지덕지 발라진 케이크다. 장식으로는 분홍색의 사탕이 장식되어 있으며, 갈색 초코 아이싱으로 꾸며진 케이크.
"에이, 열정이 밥 먹여줍니까?? 거, 사장님 이메일이라도 알려주쇼. 전자근로계약서라도 보내게."
아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깝군. 하지만, 비주얼.. 나쁘지 않다. 행인두부는 정말 하얀 푸딩같은 느낌이고 한 입 떠먹어 보면 달콤하고 고소하다. 두부..같지만 두부가 아니다. 아시아 푸딩 같은 느낌! 음~ 좋다. 간장을 뿌려보고 싶은 비주얼이지만... 아니, 이거... 커피랑 어울릴지도...? 정확히는 커피 시럽이지만.. 흠, 나쁘지 않아. 춘덕이에게 피드백으로 줄 메모를 작성작성... 그리고 깨경단과 앙금 경단을 먹어본다. 음음음... 깨경단은 확실히 달다.. 완전 달아!!! 하지만, 깨가 고소하게 씹히는 것이 나쁘지 않아... 하지만 호불호 진짜 많이 탈 것 같아... 앙금 경단은.. 뭐... 그냥 경단이네. 탕후루는.. 패스. 과일을 좋아하지만 말 안 해도 아는 맛이잖아?
마지막은 케이크인데... 에릭 선배는 케이크부터 먼저 먹었나보다. 흠... 난 왠지 불안한데..
"춘덕아, 케이크에 들어간 재료가 뭐야?" "평범한 케이크 재료다구리. 거기에 나만의 개성을 위해 팔각과 계피 가루를 넣었고, 고량주를 섞어 아이싱과 잼을 만들었다구리."
하루가 엮어준 손가락 고리. 아슬아슬하지만 생각보다 단단히 이어진 가느다란 손가락. 문득, 아주 어릴 적, 큰 오빠의 두꺼운 손가락을 한 손에 꼭 쥐고 옆에서 쫑쫑 따라다녔던 것이 떠오른다.
"응."
날이 좋으니 조금 더 걷자는 이야기에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게 쭉쭉 내뻗는 하얀 구둣발, 매끄럽고 늘씬한 다리. 그녀는 나를 공원의 산책로 쪽으로 이끌며 안부를 물어왔다. 나를 위해 차분히 걸어주는 걸음걸이도, 물어오는 말들에도 하나같이 섬세한 배려가 박여 있다.
"별 일 없었어. ... 나도 좋아."
약속 장소에 나오면서 느꼈던 감상처럼, 나도 상쾌하고 기분 좋아. 산뜻해. 하지만 그런 말들을 너처럼 예쁘게 담아내기엔 내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가 않아. 그저 단아하게 올라간 네 입꼬리를 힐끔 쳐다볼 뿐이야.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조금 천천히 해도 괜찮겠지.
"있지."
입꼬리에서 오똑한 코로, 코에서 큼지막한 눈망울로 시선이 올라가. 어느 하나 못난 구석이 없는 고운 이목구비, 새하얀 피부, 큼지막한 눈망울, 기다랗고 결 좋은 머리카락. 나는, 걷는 것보다 그녀를 감상하는 것에 더 집중하다가 문득 운을 떼었어.
"친구부터 해요." 시선을 피하는 것에 시선이 따라붙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듯한 그런 느낌은 있더라도 그걸 묻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뭔가 입맛이 쓰다는 것 정도는 다림도 알고 있습니다.
"상관없긴 하지만. 안 되면 친구로. 같은 것보다는.." "아니요.. 거절 같은 걸 잘 못 해서 이래요." 상관없다는 말은 친구부터 시작하는 것도 상관없다라는 말뜻도 있었지만. 아직도 회피성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지훈에게 미룬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지요. 안타깝게도?
"따끔거려..." 울어본 적이 매우매우 오래 전이어서 눈물에 익숙지 않은 볼이 소금기로 따끔거립니다. 그렇게 잠깐 동안 푹 숙인 고개를 들고 지훈을 바라보면 표정은 꽤 가라앉아서 맑은 물 마냥 멀끔한 표정입니다. 디폴트 표정이라고 해야하나.
//다림주: 나 어젯밤 기억이 하나도 안나!(해맑) 다림: (전체보기를 가리킨다) 다림주: 캐오분리 아주 잘 됐네! 아무튼 캐주는 치유하고 있다구... 탈통할 수 있다구... 회피스텟 만렙도 찍을 거라구.. 다림:
짧은 대답과 함께 무심히 끄덕여지는 고개. 짧고 성의가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루는 그것이면 족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음을 흘리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안 좋은 일이 있었으면 어쩌나 했어요, 후후. 춘심양도 좋다니 약속을 잡긴 잘했단 생각이 들어서 더 기뻐요. "
춘심의 대답에, 하루는 기쁜 듯 한손을 뺨에 가져다대며 조금 높아진 톤으로 말을 이어갑니다. 그저 짧은 대답을 들었을 뿐인데도, 마치 자신의 일인양 기뻐하는 것이 춘심에겐 어떻게 다가올까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음에도, 마치 수십가지의 이야기를 해준 것처럼 반응을 하던 하루는 짧게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기울여 보였습니다.
" ....제가 예뻐요? "
하루는 잠시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자연스레 눈을 곱게 접어 웃어보이며 되묻기 시작합니다. 걷던 것도 멈추곤, 잠시 춘심을 마주 보고 선 하루가 장난스레 자신이 쓰고 있던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춘심에게 한손으로 씌워주려 했습니다. 선크림을 챙겨올 걸 그랬어요, 하는 가벼운 말과 함께.
" 제가 보기엔 춘심양도 충분히 예쁜걸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예쁜 사람 눈에는 예쁜 사람만 보인다고. 아마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
그래도 예쁘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춘심양. 하루는 장난스레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윙크를 해보이곤 쿡쿡 웃음을 흘립니다. 다시 둘이서 엮은 손가락을 꼭 잡고 걸어가려던 하루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공원 속 카페를 발견합니다. 카페의 테라스에선 연못도 보여서 분위기가 괜찮아 보입니다.
" 아, 오늘은 저기 가서 이야기 하는게 좋겠어요. 더 걷고 싶지만.. 춘심양의 피부가 타면 곤란하니까요. 햇살이 따스한 건 좋지만요. "
제가 죽는다면 제 어린 시절의 꿈 속에 묻히면 좋겠어요. 싱싱한 녹색보단 노란색이 많이 섞인 부드러운 연두색의 무늬 없는 클로버가 가득 핀 언덕, 한 사람을 묻고 나서도 큰 언덕 하나와 작은 집이 올라있는 언덕 하나가 남아있는 작은 세상. 나의 천국. 그런 한 뼘의 땅 속에 묻히면 좋겠어요. 아픔도... 고생도... 아무도... 없는... 달콤한 비가 내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꾼 아프지 않은 꿈, 다섯 살의 꿈 속에...
죽음을 상정해본 적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느 한 사람은 문득 그렇게 말했더란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던 말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옷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할 달의 침묵 속에서.
3월. 이미 겨울은 다 지나갔다며 풀이 돋아난지도 한참 지난 완벽한 봄. 따뜻하진 않지만 겨울의 추위는 한결 씻겨나간 바람 속에 생명냄새가 섞여있었다. 무덤 앞에 선 사람을 보며 비아는 부드러운 풀과 달라붙지 않는 흙 속에 발소리를 살짝 감춰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추기를 택했다. 집중을 깨고 싶지 않았고, 추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목에 맨 금속 줄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려, 안식처들이 많이 보이는 곳을 바라보다가 두 손 사이에 작은 은빛 십자가를 쥐고 가만히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너무 많이 죽었다. 너무 큰 비극이었다. 죽음을 상정하고 있어도 견디기 힘들 만한 그런 일이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 그렇다면 이 희극에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언제라도 여신은 잘못이 없다. 잘못이라면 고통이란 걸 가진 인간의 잘못일 것이다. 침묵을 지새고, 침묵을 지새고, 읊조림이 끝났을 때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미련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엉켜있는 사람을 위한 곳이다. 바스락거릴 만큼 마른 잎이 없는 싱싱한 녹색들은 듣기 힘든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내서,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연기 없이 냄새만 남아 어른거리는 옅은 탄내와 차갑게 황홀하게 녹아가는 철냄새. 그 옆자리의 무덤 앞에 섰을 땐 그런 냄새가 나는듯했다. 무얼, 아마 유령은 아닐 것이다. 죽은 사람은 멈춰있기에, 그 바람도 더는 불지 않으니까.
" 잘 지냈어요? "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
당신이 저 세상에서 듣고 있을라 꾸며내기 힘든 미소를 만드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좋은 친구, 당신이 나 걱정할까 봐 나는 걱정을 해요. 비아는 꽃을 여러 색 모아 묶고 종이로 감싸 자홍색 스피넬을 붙인 꽃다발을 앞에 내려놓고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에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추모하러 온 사람은 다르지만, 추모하러 온 것은 같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