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까지만 말하기로 한다. 춘덕이가 마침내 깨어났다. 아주 잘 잤는지 눈이 훨씬 또렷하다. 생기가 가득한 걸 보니, 역시 잠이 보약이라는 말은 참말이야. 깨어나자마자 성학교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지만, 그것은 0.1초도 안되는 망설임. 곧바로 "아! 이래서 제가 청월 교복이나 제노시아 교복 입자고 했잖아요.." 라며 거짓말을. 그리고 에릭, 그가 하는 말을 가만 들어보다가 다짜고짜 종신계약 노예가 필요하다는 말에 이 사람은 절대 사업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입을 막는다.
"춘덕아, 우린 디저트를 만들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노예처럼 대우할 생각은 없어. 비록, 5인 이하의 사업장이라 너의 근로시간 보장과 야근수당, 주말수당, 해고 전 통보와 부당 해고에 대해 법적으로 항의할 권리와 너의 연차와 같은 휴무일도 보장해주지 못하겠지만... 그렇지만, 너에게 생선을 제공해줄 수 있어..."
주머니에서 편지의 원본을 꺼낸다. 뭐??? 춘덕이에게 준 건 원본 아니었냐고? 그것도 의념으로 만들어진 가짜. 애초에 증거는 남기면 안된다. 크크..
"이 편지 기억해? 이 편지에 적힌... 전복 양식장은... 진짜야. 정확히는 '전복' 만 진짜지."
시트스레에 일정 기간 이후로는 참여가 힘들다는 참치가 있는데... 참여를 못해서 피해를 본다거나 속상하다거나 한 게 제일 큰 건 아마 본인 아닐까. 캡틴한텐 시한부 자식이고 2개월쯤 함께하면 나도 정들어서 마음아프긴 할거같지만. 일단 주말 정도에만 시간 낼 수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일단 캡틴 오면 시트스레 보라고 해봐야겠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내린 캐릭터는 뭔가가 빠져나간 빈자리에요. 아주 흔적까지 없어져 버린 건 아니라 얼마 안 지나선 더듬으면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굳어져있지만, 비가 오고 흙이 물러지면 흘러내린 진흙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언젠가 그 위에 꽃이 필 거에요. 지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모두 신경쓰지 않게 하기 위해서'니까 지금 이런 말을 꺼낸건 실수였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말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 없다고만 말하고 싶어요.
...사실, 성학교가 이렇게 잘 안다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춘덕이는 의심이 없구나.. 역으로 잘 됐다. 발버둥치지만, 저 담요는 대 늑대 결전병기. 누구도 부리또로 만들면 잠이 온다는 그 담요라고. 어쩔 수 없이 춘덕이를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낚시 영상을 틀어줬다. 입질이 올랑말랑 하는 그 순간으로... 춘덕이는 천천히.. 천천히... 발버둥을 멈췄다. 그 사이 에릭 선배의 귀에 속삭인다..
"괜찮아요... 저희는 5인 이하 사업장이니까... 4대보험? 수당? 하... 그런 거... 구속 안 받아.."
노동법부터 바꾸고 와라... 춘덕아.. 그리고 시작된 둘 만의 협상. 하루에 한개를 줘야 한다는 말에 6개로 응수하는 춘덕이.
"춘덕아.. 1일 1개면 잘 생각해봐. 최저시급보다 전복이 비싸니까, 더 많이 받는 거야. 그리고, 6개 라는 말이 뭐겠어? 주 1일은 휴무라는 소리야. 쉴 수 있어."
춘심 양. 내 이름이지만 다른 사람 입에서 그 단어가 들려오는 것은 언제나 어색하고 부끄럽다. 보통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백서희'라고 소개하곤 하지만, 이건 가명도 뭣도 아니다. 그냥 내가 안고 가는 거짓말이다. 언젠가는 다 털어놓을 거짓말.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꿔버릴 수는 없으니까, 내 기분이 편하자고 이러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 양에게는 차마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상냥하고 배려 깊고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이건 그냥 내 시선일 뿐이지만) 그녀 앞에선 작은 거짓말조차 커다란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뭐, 아무래도 좋다는 말이다. 나는 그녀가 좋다.
"..."
반가움을 표하는 동시에 가벼운 배려의 말까지 곁들이는 그녀였다. 그러고는 내 머리 쪽으로 손을 뻗어온다. 떨어지던 나뭇잎이라도 붙었었나 보다. 머리칼에 살며시 스치는 손길마저 간지러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감각을 환기시켰다. 얼결에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도 함께하게 되었을까.
나는 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그녀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붙들었다. 상대가 남자였다면 오히려 팔짱을 끼거나 팔을 끌어안거나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나보다 키도 크고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이다. 이는 내가 아직까지도 여자를 어렵게 생각한다는 방증이자, 여자아이 앞에서 주뼛거리는 남자아이의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볼 수 있겠다.
"저, 선배, 있는지도 모르는 사장, 춘덕이. 합하면 4명에다가 알바생 한 명 고용한다고 해도 5인이라 딱 맞아떨어져요."
고개를 끄덕이며 에릭 선배를 바라보다가 춘덕이로 눈을 돌렸다.
"춘덕아, 잘 생각했어. 전복 8개의 시세가 최저가 1,470GP라고 할 때, 1개의 가격은 184GP야. 이는 편의점 시급보다 쎄다고? 남들은 하루종일 편의점에서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춘덕이는 하루만에 번거야."
그게 그거라는 소리지만, 고생은 덜 한다는 소리. 그럴듯한 소리. 그리고 웃으며 "잘 하면 승진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승진... 꿈의 단어... 하지만, 결코 다가오지 않지. 어쨌든, 계약 성립의 장면을 봤으니... 춘덕이를 담요에서 풀어준다. 그리고 춘덕이는 에릭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학원섬에는 직원대신 미어캣과 너구리가 청소나 급식을 해결해주는데요. 그 중 너구리들을 통솔하며, 요리부의 부장인 킹구리가 있어요. 그 킹구리의 제자중에 춘덕이가 있는데 춘덕이는 괴짜라서 집채만한 참치를 잡으러 가버리기도 하는 아이에요 그래서 망한 카페를 되살리자~ 라는 컨셉의 일상을 시리즈로 이어가는 에릭과 화현이 요리사를 어떻게 구할까 하다가 춘덕이를 납치하기로 한거구요
나뭇잎을 떼어주자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춘심을 바라보며 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듯, 상냥하기 그지 없는 웃음소리였다. 그러다 춘심이 다가와 소맷자락을 가볍게 붙드는 것을 느낀 하루는 눈이 잠시 동그랗게 변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조심스럽게 그 손가락을 풀어선 하루의 손가락 하나와 춘심의 손가락 하나를 엮어줍니다. 왠지 아슬아슬 해보이면서도, 소맷자락을 붙들었을 때보다는 단단해진 두사람의 고리였습니다.
" 좋아요, 그러면 날씨도 좋으니까 밖을 좀 더 걷는게 좋을 것 같아요. "
고개를 살짝 들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춘심에게, 하루는 상냥하게 대답을 돌려주며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새하얀 구두를 신은 늘씬한 다리가 앞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걸음의 목적지는 공원의 산책로, 날도 좋아서 사람들이 종종 지나가기도 하는 깔끔한 길이었습니다.
" 그동안 잘 지냈어요?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
하루는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춘심을 바라보려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춘심을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라는 것이 춘심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차분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 저는 요즘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춘심양이랑 걸을 수 있는게 기뻐요. 상쾌하기도 하구요. "
춘심양도 그렇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루는 그렇게 속삭이며 입꼬리를 단아하게 올려보입니다. 그녀의 말은 한점 거짓말이 없다는 듯, 망설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춘덕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뾱뾱 거리는 발과 함게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에선 달걀 깨는 소리와 가루재료를 계량하는 소리. 화기를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 나는 필요한 대화를 하기로 마음 먹고...
"그 사장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춘덕아.. 미안.. 너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근로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내 잘못 아니야.
"근로계약서도 작성하고, 제가 법적으로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서류도 작성하고 아까와 똑같지만 주 근로시간이 저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줄어드니까 근로시간도 합의를 봐야 하거든요..."
하지만, 선밴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요? 그러니까 사장이랑 담판 지어야지... 그리고 주방에서 달달한 냄새가 풍겨져 오기 시작한다. 음~ 향 좋은데? 약간... 약간... 빵냄새도 나고... 킁킁... 그리고 이건... 팔각이랑.. 계피 흠흠.
"다했다구리."
향에 취해 있는 동안 춘덕이가 요리를 끝냈는지 접시와 소스 같은 것을 들고 테이블로 서빙해왔다. 춘덕이가 내온 요리는
"이건 행인두부다구리. 살구씨와 우유를 혼합하여 응고제를 이용 응고시켜 만든 푸딩같은거다구리." "이쪽은 탕후루구리. 말 안 해도 알거라 생각한다구리. 그리고 이건 앙금을 넣어 만든 경단과 깨를 빻아 거기에 꿀과 설탕을 넣고 조린 소를 넣고 만든 경단에 조청을 묻히고 깨를 버무린 깨경단이다구리."
춘덕이는 마지막으로 실험작이라 소개하며 케이크도 가져왔다.
"이건 킹구리님께서 서양식 디저트도 도전해보라 말씀하셔서 만들어본 케이크다구리."
약간 투명하게 하얀 크림이 덕지덕지 발라진 케이크다. 장식으로는 분홍색의 사탕이 장식되어 있으며, 갈색 초코 아이싱으로 꾸며진 케이크.
"에이, 열정이 밥 먹여줍니까?? 거, 사장님 이메일이라도 알려주쇼. 전자근로계약서라도 보내게."
아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깝군. 하지만, 비주얼.. 나쁘지 않다. 행인두부는 정말 하얀 푸딩같은 느낌이고 한 입 떠먹어 보면 달콤하고 고소하다. 두부..같지만 두부가 아니다. 아시아 푸딩 같은 느낌! 음~ 좋다. 간장을 뿌려보고 싶은 비주얼이지만... 아니, 이거... 커피랑 어울릴지도...? 정확히는 커피 시럽이지만.. 흠, 나쁘지 않아. 춘덕이에게 피드백으로 줄 메모를 작성작성... 그리고 깨경단과 앙금 경단을 먹어본다. 음음음... 깨경단은 확실히 달다.. 완전 달아!!! 하지만, 깨가 고소하게 씹히는 것이 나쁘지 않아... 하지만 호불호 진짜 많이 탈 것 같아... 앙금 경단은.. 뭐... 그냥 경단이네. 탕후루는.. 패스. 과일을 좋아하지만 말 안 해도 아는 맛이잖아?
마지막은 케이크인데... 에릭 선배는 케이크부터 먼저 먹었나보다. 흠... 난 왠지 불안한데..
"춘덕아, 케이크에 들어간 재료가 뭐야?" "평범한 케이크 재료다구리. 거기에 나만의 개성을 위해 팔각과 계피 가루를 넣었고, 고량주를 섞어 아이싱과 잼을 만들었다구리."
하루가 엮어준 손가락 고리. 아슬아슬하지만 생각보다 단단히 이어진 가느다란 손가락. 문득, 아주 어릴 적, 큰 오빠의 두꺼운 손가락을 한 손에 꼭 쥐고 옆에서 쫑쫑 따라다녔던 것이 떠오른다.
"응."
날이 좋으니 조금 더 걷자는 이야기에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있게 쭉쭉 내뻗는 하얀 구둣발, 매끄럽고 늘씬한 다리. 그녀는 나를 공원의 산책로 쪽으로 이끌며 안부를 물어왔다. 나를 위해 차분히 걸어주는 걸음걸이도, 물어오는 말들에도 하나같이 섬세한 배려가 박여 있다.
"별 일 없었어. ... 나도 좋아."
약속 장소에 나오면서 느꼈던 감상처럼, 나도 상쾌하고 기분 좋아. 산뜻해. 하지만 그런 말들을 너처럼 예쁘게 담아내기엔 내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가 않아. 그저 단아하게 올라간 네 입꼬리를 힐끔 쳐다볼 뿐이야.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조금 천천히 해도 괜찮겠지.
"있지."
입꼬리에서 오똑한 코로, 코에서 큼지막한 눈망울로 시선이 올라가. 어느 하나 못난 구석이 없는 고운 이목구비, 새하얀 피부, 큼지막한 눈망울, 기다랗고 결 좋은 머리카락. 나는, 걷는 것보다 그녀를 감상하는 것에 더 집중하다가 문득 운을 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