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부터 해요." 시선을 피하는 것에 시선이 따라붙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듯한 그런 느낌은 있더라도 그걸 묻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뭔가 입맛이 쓰다는 것 정도는 다림도 알고 있습니다.
"상관없긴 하지만. 안 되면 친구로. 같은 것보다는.." "아니요.. 거절 같은 걸 잘 못 해서 이래요." 상관없다는 말은 친구부터 시작하는 것도 상관없다라는 말뜻도 있었지만. 아직도 회피성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책임을 지훈에게 미룬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지요. 안타깝게도?
"따끔거려..." 울어본 적이 매우매우 오래 전이어서 눈물에 익숙지 않은 볼이 소금기로 따끔거립니다. 그렇게 잠깐 동안 푹 숙인 고개를 들고 지훈을 바라보면 표정은 꽤 가라앉아서 맑은 물 마냥 멀끔한 표정입니다. 디폴트 표정이라고 해야하나.
//다림주: 나 어젯밤 기억이 하나도 안나!(해맑) 다림: (전체보기를 가리킨다) 다림주: 캐오분리 아주 잘 됐네! 아무튼 캐주는 치유하고 있다구... 탈통할 수 있다구... 회피스텟 만렙도 찍을 거라구.. 다림:
짧은 대답과 함께 무심히 끄덕여지는 고개. 짧고 성의가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루는 그것이면 족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음을 흘리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안 좋은 일이 있었으면 어쩌나 했어요, 후후. 춘심양도 좋다니 약속을 잡긴 잘했단 생각이 들어서 더 기뻐요. "
춘심의 대답에, 하루는 기쁜 듯 한손을 뺨에 가져다대며 조금 높아진 톤으로 말을 이어갑니다. 그저 짧은 대답을 들었을 뿐인데도, 마치 자신의 일인양 기뻐하는 것이 춘심에겐 어떻게 다가올까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음에도, 마치 수십가지의 이야기를 해준 것처럼 반응을 하던 하루는 짧게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기울여 보였습니다.
" ....제가 예뻐요? "
하루는 잠시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자연스레 눈을 곱게 접어 웃어보이며 되묻기 시작합니다. 걷던 것도 멈추곤, 잠시 춘심을 마주 보고 선 하루가 장난스레 자신이 쓰고 있던 챙이 넓은 하얀 모자를 춘심에게 한손으로 씌워주려 했습니다. 선크림을 챙겨올 걸 그랬어요, 하는 가벼운 말과 함께.
" 제가 보기엔 춘심양도 충분히 예쁜걸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예쁜 사람 눈에는 예쁜 사람만 보인다고. 아마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
그래도 예쁘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춘심양. 하루는 장난스레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윙크를 해보이곤 쿡쿡 웃음을 흘립니다. 다시 둘이서 엮은 손가락을 꼭 잡고 걸어가려던 하루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공원 속 카페를 발견합니다. 카페의 테라스에선 연못도 보여서 분위기가 괜찮아 보입니다.
" 아, 오늘은 저기 가서 이야기 하는게 좋겠어요. 더 걷고 싶지만.. 춘심양의 피부가 타면 곤란하니까요. 햇살이 따스한 건 좋지만요. "
제가 죽는다면 제 어린 시절의 꿈 속에 묻히면 좋겠어요. 싱싱한 녹색보단 노란색이 많이 섞인 부드러운 연두색의 무늬 없는 클로버가 가득 핀 언덕, 한 사람을 묻고 나서도 큰 언덕 하나와 작은 집이 올라있는 언덕 하나가 남아있는 작은 세상. 나의 천국. 그런 한 뼘의 땅 속에 묻히면 좋겠어요. 아픔도... 고생도... 아무도... 없는... 달콤한 비가 내리는, 내가 마지막으로 꾼 아프지 않은 꿈, 다섯 살의 꿈 속에...
죽음을 상정해본 적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느 한 사람은 문득 그렇게 말했더란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던 말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자기 옷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할 달의 침묵 속에서.
3월. 이미 겨울은 다 지나갔다며 풀이 돋아난지도 한참 지난 완벽한 봄. 따뜻하진 않지만 겨울의 추위는 한결 씻겨나간 바람 속에 생명냄새가 섞여있었다. 무덤 앞에 선 사람을 보며 비아는 부드러운 풀과 달라붙지 않는 흙 속에 발소리를 살짝 감춰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멈추기를 택했다. 집중을 깨고 싶지 않았고, 추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목에 맨 금속 줄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려, 안식처들이 많이 보이는 곳을 바라보다가 두 손 사이에 작은 은빛 십자가를 쥐고 가만히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너무 많이 죽었다. 너무 큰 비극이었다. 죽음을 상정하고 있어도 견디기 힘들 만한 그런 일이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지. 그렇다면 이 희극에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언제라도 여신은 잘못이 없다. 잘못이라면 고통이란 걸 가진 인간의 잘못일 것이다. 침묵을 지새고, 침묵을 지새고, 읊조림이 끝났을 때 그 옆으로 다가갔다. 이곳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미련을 포함한 모든 감정이 엉켜있는 사람을 위한 곳이다. 바스락거릴 만큼 마른 잎이 없는 싱싱한 녹색들은 듣기 힘든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내서,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연기 없이 냄새만 남아 어른거리는 옅은 탄내와 차갑게 황홀하게 녹아가는 철냄새. 그 옆자리의 무덤 앞에 섰을 땐 그런 냄새가 나는듯했다. 무얼, 아마 유령은 아닐 것이다. 죽은 사람은 멈춰있기에, 그 바람도 더는 불지 않으니까.
" 잘 지냈어요? "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
당신이 저 세상에서 듣고 있을라 꾸며내기 힘든 미소를 만드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 좋은 친구, 당신이 나 걱정할까 봐 나는 걱정을 해요. 비아는 꽃을 여러 색 모아 묶고 종이로 감싸 자홍색 스피넬을 붙인 꽃다발을 앞에 내려놓고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에릭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추모하러 온 사람은 다르지만, 추모하러 온 것은 같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손에 든 회중시계를 꽉 쥐면서 내려다 보았다. 아직 반지 못 받았는데, 검도 못 받았는데.. 아직 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고 하지못한 이야기도 너무나 많은데. 사람 한명 한명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기에, 남겨진 사람은 그저 주어진 시간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자신 보다 먼저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과의 추억을 짊어지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뿐 이다.
" .... "
녀석의 무덤 앞에서 회중시계를 보던 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슬쩍 고갤 돌렸다. 청월의 교복을 입은, 보라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아이 였다. 평소라면 친절하게 굴었을 것 이다. 애써 친절하게 무해하게 굴었을 것 이다. 그러나 나는 너의 무덤앞에서 더 강해지기로 마음먹었기에, 네가 강화한 강철을 품에 안고 나아갈 것 이다.
" 무슨 일인가요 "
초면인 사람에게 호구마냥 해실거리며, 욕이나 모멸감을 받아도 그저 참고 넘어가던 시기는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