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주웠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많이 남아있네. 허리를 숙여 한조각 더 줍는다. 마치 모내기를 하는 농부가 된 느낌이야. 낯선 기숙사에서 홀로 밥먹자니 무서, 아니 어색해서 바깥에서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먹고 외로움을 달랠 만화책이라도 사갈까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걸까.
푸념하듯 조금전을 떠올려본다.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잔뜩 취한 누군가가 비틀거리면서 가다가, 홧김에 유리창을 후려쳐 부순 것을 봤을 뿐. 불쌍한 화풀이 대상이 된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을 뿐, 나와 크게 관련있는 일조차 아니었다. 그래 그냥 지나쳤으면 되잖아.
다만 나는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바닥에 산산조각 깨어진 날카로운 파편들이, 혹여나 누군가의 발에 찔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고 있었다. 결국 나는 궁상맞은 모습으로 신세한탄을 하면서 유리조각이나 줍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내 자신이 자처한 것인데도 말이야. 조금 웃겨서 허허 하고 소리내어서 웃었다. 손에 모아둔 유리조각은 별거 아닌것처럼 작더라도, 그런대로 뾰족한 모퉁이가 손바닥을 가볍게 찌르고 있었다.
그래. 궁상맞은 바보짓일지도 모르지만, 이걸로 혹시나 누군가의 상처를 덜 가능성이 생겼다면 싼 값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쪼그려 앉아 묵묵히 유리조각을 계속 주웠다.
>>219 흐릿하게 번졌다. 안개가 퍼져갔다. 오직 한 사람이 퍼트린 안개. 누군가의 어깨로부터 타고 피어난 검은 장미꽃이 천천히 안개를 내뱉었다. 그는 척 보기에도 가라앉은 폼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천천히 다가온 채로 손을 뻗었다. 목을 끌어안고, 제 큰 품에 나를 끌어안으며, 그 한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다행이란 말을 하였다. 무서웠다고, 이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무엇이라도 가지려 하는 것이 두려웠다고 그는 말했다.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지는 것을 무서워 했다니. 참 우스우면서도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과거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혼자가 아니게 된다는 것과,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같이 감정을 토로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221 해가 지기 직전의 그림자는 진하면서도 긴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의 키는 비슷했다. 누가 더 크거나, 작기보단 서로가 비슷한 키를 가지고, 서로가 비슷한 시선을 공유하고 있었다. 조금 더 해가 지는 방향으로 걸으며, 더 길어진 그림자를 늘이고 즐거운 미소를 보였다. 이렇게 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 큰 키를 가질 수 있으니까. 적어도 그림자만큼은 이제 아이가 아니라, 당신보다 큰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너다운 대답이라고, 꽤 바보같단 말을 들었지만 그녀도 웃는 얼굴로 당신에게 다가왔다. 당신을 끌어당긴다. 그림자가 서로 겹쳐 하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긴 시간,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230 그 물음은 조용했다. 또 말도 안 된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는 옅은 수염이 난 턱을 만지며 당신의 말을 듣고, 다시금 판단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단 한 마디의 문장만을 내뱉었다. 문장은 덤덤했다. 또, 적었다. 그러나 그 말은 꽤나 중의적이었고, 해석하기 나름의 문장이었다. 문장을 해석하면 이런 말이 되었다.
언제까지고 눈은 내릴 수 없다지만, 결국 내린 눈은 녹아버릴 것이라고. 녹은 눈이 대지에 스며들어, 다시금 꽃이 필 양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이 너를 이루었으니, 너는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꽃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 여실히 좋은 미소로 날 보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231 손가락을 살짝 세운 채, 천천히 목을 끌어안았다. 큰 키로 매달리듯 안겨, 보드라운 미소를 지어냈다. 은근한 손길이 천천히 목을 지나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상태로 천천히 숨을 뱉으며 말했다. 나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묶이지 말라고, 나의 야수. 나의 사랑하는 늑대야.
"어느쪽이든 재미있네..." 라며 다림이를 바라보다가 얼버무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짓궂은 표정으로 빠안히 바라보았을지도? 짓궂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에는 애써 마주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히엣, 하는 표정을 보고는 "뭘 생각한 거려나." 라고 장난스레 물었지.
의외로 다른 곳으로 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 하긴 하지만... 이것저것이라고 해도 같이 영화보고 살짝 껴안은 것 외에는(?) 문이 닫히면, 담요를 찾는 다림이를 뒤로하고 벽에 등을 기댔겠지.
" 그럼, 이제 자국 보여줘. "
일부러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담요를 찾아 덮으면 그제서야 보여달라며 짓궂게 다림이를 바라보았으려나?
>>253 차가웠다. 고지에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천천히 손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단순히 추운 것이 아니라, 꼭 무언가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을 부르는 냉기였다. 그런 바람을 둔 채로 입에서 흩어지는 입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찬 공기가 하늘로 오르다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흐려졌다. 웃었다. 단지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 뿐일까 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