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한 번쯤 보고 싶었는데 이 한번뿐인 기회에 부탁하면 거절할 것 같아서-같은 이유를 댔으면서, 부탁 자체를 짓궂음으로 생각한다는 건 처음부터 놀릴 의도였단 걸 인정해버리는 거잖아. 쓰다듬던 손을 떼고 살짝 쏘아보다가 표정을 풀었다.
- 정 힘들면 꼭 말해달란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약속하면 지켜야 하니까.
그리고 공포와 긴장감과 이완의 반복과 조절로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긴장을 놓으려 하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고 엄청난 메소드 연기로 '영'의 유혹에 정신이 나가버리는 '명'과 그 광기를 모른 상태로 의지하려다 멘탈이 산산조각나며 유리창을 깨고 떨어져내리는 '연'과 누나를 부르며 오열하는 '결'을 이끌고 끝나지 않는 복도를 뛰어가는 '과'. 아무튼 절망적인 상황... 의념각성자도 즐길 만한 기준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정말 사정없이 관객을 흔들어대는 4D 연출... . . . 인터넷에서 아주 유명한 소설이 있다. 판타지 소설 중에도 게임물 장르가 범람할 때 나왔던 수많은 소설 중 하나였다. 회귀물 테이스트가 첨가되어 있는, 비참한 삶의 주인공이 게임의 히든피스를 모두 알고 과거로 회귀해 성공을 거둔다는 소설. 이 소설이 유명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결말 때문이었다. "형님, 이 새끼 웃고 있는뎁쇼?" "냅둬.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나보지" 실제로 이런 대사는 없지만, 아무튼 비슷한 결말이다. 사실 회귀해서 행복한 삶을 거두는 건 꿈이고, 꿈에서 결혼한 여동생은 이미 자살해 있는 현실이고, 최후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불법 장기매매 수술을 진행하던 중 과다출혈로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웃으며 숨을 거두는 것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면... 사비아는 웃고 있었다.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앉은 채로... 기절했어...! 굳이 데려가지 말고 내버려둬.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으니까... 라고 지훈에게 알리는 듯, 정말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기택(난 기절을 택하겠다는 뜻)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받쳐주는 카사의 말에, 하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인다. 아까까지도 쉼없이 흔들리던 것과는 거리가 먼 또렷한 목소리. 하루는 올곧은 눈으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카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내 마음은 단순한 육체와 정신의 피로로 인한 혼란도, 착각도 아니야. 고작해야 그런 걸로 내 진심을 덮으려 하지마. 하루는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을 안아든 카사를 밀어낸다.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끌어모아 카사를 밀어내곤 바다에 나뒹군다. 큰 충격이 덮쳐왔지만, 하루는 그런 것 쯤은 더이상 아랑곳 하지 않는다.
" .... 그렇게 말하지마.... "
하루는 비틀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써서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 물고 말한다. 방금 전까지 이어진, 진심을 담은 자신의 마음을 고작해야 착각이라고, 그냥 방금 전까지 생과 사를 오고가는 곳에 있다 와서 피곤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걸까. 저 아이가 순수하고, 어린 아이 같은 부분이 있다는 것 정도는 하루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고민하고, 고뇌하고, 답을 내려 애를 쓰는 아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저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 ..... 내 마음을 고작해야 그따위 피로 때문에 너한테 털어놨다고 말하지마!! "
하루는 처음으로 카사에게 사나운 목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며칠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고뇌하고, 이것이 맞는 행동일까, 이건 어쩌면 좋지 못한 행동이 아닐까, 고민하던 나날 속에서 내놓은 결론이었다. 자신은 카사를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솔직하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이하루라는 존재에서, 카사 앞에서는 이기적으로 사랑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진심은 그저 피로에 의한 착각이라는 말로 치부되어졌다. 아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내 결의가 부족한거야? 아니면 내 말의 어딘가가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거야?
하루는 거칠게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새하얀 머리카락, 아니 지금은 어둠에 잠식되어 검은색으로만 보이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카사를 바라본다.
" 아아, 그렇구나... 늑대처럼 자라온 카사에게는 내 결의가 한 없이 부족했던거지? "
하루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사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방금전까지 날카롭게 외치던 목소리와는 다른, 여태까지 카사에게 다정다감하게 흘러나오던 잔잔한 호수 같던 목소리와는 다른, 냉랭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는 이상할 정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 너를 향한, 방금 전에 네게 속삭였던 내 마음은... 고작해야 피로 때문에 헷갈릴 정도로 가벼운 마음이 아니야, 카사야. 네가 서툰 아이라는 것도 알고, 분명 사랑이란 어려운 감정이란 것도 알지만...역시 그런 말을 들으면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 "
천천히 그렇게 속삭이듯 이야기를 하며 카사를 지나쳐 창문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하루가 지금만큼은 한치도 흔들림 없이 천천히 창가로 다가간다. 창가에 도착한 하루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창문을 열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방으로 흘러들어온다. 잠시 입을 다물고 창 밖을 바라보던 하루는 천천히 창을 등진 체로 카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 나, 열심히 찾아봤는데... 역시 나 혼자의 노력으론 늑대의 문화를, 늑대의 습성을 온전히 알기 어렵더라.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나름대로 네게 마음을 전했어. 하지만 그것이...그것이 부족해서..카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좀 더 확실하게 내 마음을 보여줘야 하는걸까. 이렇게라도 하면 네 마음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걸까. "
눈을 천천히 감고선 속삭이듯 말을 이어간 하루가 천천히 품으로 손을 밀어넣는다. 손에 쥐어져서 나온 것은 새하얀 은빛 메스, 그것을 역수로 쥔 하루는 천천히 창문의 틀 위로 올라간다. 창문의 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선 하루는 천천히 메스를 쥐지 않은 손을 카사에게로 내민다.
" ...잘 봐줘, 그리고 기억해줘 - 늑대의 문화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렇게라면 내 진심이 네게 전해지겠지. 그리고 네가 기억해줄거야. 아마도 오래도록 기억해주겠지. "
희미한 미소, 무표정했던 하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리기 시작한다. 이것으로 자신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자신의 진심이, 자신의 각오가 올곧게 카사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 고작해야 착각이라는 단어로 덮여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카사가 이해한다면 자신을 기억해줄 것이다. 오래도록, 오래도록 기억해주지 않을까.
" 그거면 된거지. 그치? "
하루는 상냥한 미소를 지은 체 말하곤 메스를 역수로 쥔 손을 카사에게로 내밀었던 팔로 가져가며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인다. 몸 뒤쪽에는 그저 차가운 공기만이 가득한 허공이라는 것을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