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부벼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비비면 헝클어지지 않게 하려 하도 흐트러지겠는데. 검지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건드린 다음 머리카락을 결대로 쓸어내려 정리해 주고 손을 뗐다. 고맙다는 말엔 역시 같이 웃어주면서.
"영화엔 팝콘과 음료수면 충분해."
그리고 지훈도 괜찮은 듯하니 두 사람 몫의 카라멜 팝콘과 콜라를 결제하고 받아들었다. 역시 일반 팝콘보단 카라멜이 맛있지.
"벌써 입장할 때야...?"
그 말에 눈을 뜨자 정말로 입장시간 직전이었다. 아니,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 타임을 외치고 싶은 마음이지만, 늦게 들어가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혼란스러운 속은 미뤄두고 몸만 움직여 상영관으로 입장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티켓 검사가 끝나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직 영화가 나오지 않는 스크린인데도 곧 호러영화가 나올 스크린이라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건 왤까...
"영화 도중에 자리를 나서는 건 몰입을 깰 수 있으니까. 평생 이런 걸 못 보며 살 수도 없으니, 익숙해져야지."
그리고 정말 무리라면 나가도 좋다는 말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유령이 나오는 게이트 같은 걸 갈 때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게이트에 갔을 때 나오는 건 나나 랜스가 마음껏 뚝배기를 깰 수 있는 유령일 거라는 점은 넘어가도록 하자. 이래서 조금 준비시간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광고시간이 시작되서부터는 곧게 앉은 자세로 팝콘에 손을 대지 않고 광고에 집중했다. 광고도 영화를 보는 것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짜 영화가 시작한 게 아니니만큼 팝콘은 아끼고 있지만.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다. 다섯 남녀가 한 차에 타서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시작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나지만 다소 올드한 취향의 노래를 조수석의 여자가 타박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가 그러면 네가 운전하라면서 질겅질겅 껌을 씹었다. 제법 닮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걸 봐선 남매였을까. 결국 조수석의 여자가 말다툼에서 승리해 라디오의 내용은 클래식과 함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송으로 바뀌었지만, 평화로운 음악과 달리 남매의 말다툼은 멈추지 않았다. 코믹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이 점점 풀어지고 있을 때 상영관을 뒤흔드는 큰 소음과 함께 스크린 속 화면이 덜컹 움직였다. 차가 뭔가에 걸린 것이다.
"악...!"
손으로 바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이 새어나가진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사람을 놀래키다니... 조수석의 여자가 운전 제대로 안 하냐면서 운전하는 남자를 갈구고, 남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며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아무 관심도 없이 보조배터리를 연결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또 다른 여자와, 너무 싸우지 말라며 물병을 꺼내서 갈구는 여자에게 내미는 서글서글한 외모의 남성. 그리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또 한 명의 여자가 불연듯 몸을 돌려 차의 뒷창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차가 달리고 있었던 고속도로의 아스팔트에 가로로 긴 금이 가 있었다. 차가 지나면서 뒷창을 보는 여자의 시선도 뒤쪽으로 끌려가고, 그 바닥의 금도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이미 넘어버린 선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처럼. 의도적인 듯 창밖을 비추지 않았던 카메라가 적극적으로 창밖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희멀건한 안개가 멀리 끼어 있는 축축한 도로 풍경이 스크린을 채웠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라디오가 잠시 음소거되고, 고요함 속에서 문득 창밖을 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명아. 우리 어디 가기로 했지? -있잖아, 그 거기. 무슨 정신병원? -월선정신병원. -그렇구나...
마치 홀린 것처럼 높낮음 없는 숨소리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창밖을 보는 여자의 목소리가, 흰 안개가 금을 완전히 삼켜버림과 동시에 흩어져 사라졌다. 다시 라디오가 켜졌지만 더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말다툼하는 목소리도 흐려진다. 말리는 목소리도 흐려진다. 작품의 세계와 관객의 단절. 그 침묵을 끊어놓듯 무겁게 쿵 내리찍는 효과음과 동시에 페이드아웃 없이 화면이 암전되고, 잠시 후 어두운 스크린 뒤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10월: 가을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종일 새가 날아와서 종일 너를 놓쳤다 저게 새야, 가는 비 오는 날 먼 산 위에 낀 흰 안개를 자꾸 새라고 하던 너는 옆에 있어도
권현형 / 안과 밖
(잘 모르겠음)
사비아: 196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나한테든 다른 사람한테든 찾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죽길 바라진 않는다. 막을 수 있을 동안 막아내야 하는 것. 하지만 너무 불연듯 찾아올 수 있는 것. 그래서 슬픈 것. 298 본인이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지? 자신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사비아한테 놀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봐를 시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202 캐릭터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뜻, 호불호,지어준사람 등) 시트에 있듯이 맡을 사司, 비유할 비譬, 맑을 아雅를 씁니다. 성은 온(溫)입니다. 독특한 이름이긴 하지만 이상한 이름은 아니기도 하고, 뜻도 정성들여 지어준 것인 만큼 자기 이름을 좋아합니다. 지어준 사람은 당연히 부모님! 다만 4글자면 이름이 좀 복잡해지기도 하고 이름 세 글자만 대면 성이 사고 이름이 비아인 평범한 이름 같아 보여서 평소엔 사비아란 이름만 대고 다닙니다. 비아라고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기분.
" 이미 믿고는 있어. 다만 이런 부분에선, 어느정도 짓궂음이 느껴지는 부탁이었으니까... "
지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자신의 이마를 톡 건드리자 그대로 얼어붙듯이 부빗거리는 것을 멈추었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것은 기분 좋게 받아들였겠지만, 아마 손을 뗐을 땐 아쉽다는 듯이 비아를 바라보았겠지. 머리카락을 정리해줄때만 해도 골골거리기 직전이었으니.. 하지만 더 해달라고 조르거나 하진 않았던가?
팝콘과 콜라면 충분하다는 말에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라는 듯이. 나쵸라던가 더 살 수 있기는 하지만 딱히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고, 비아 역시 그런 듯 했으니까.
" 시간이 꽤 지났어. 눈 감고 있느라 잘 모르겠지만. "
비아의 생각보다도 시간이 꽤 많이 지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긴장한 마음에 시간이 빨리 간 것처럼 느낀 것이려나. 조금 당황한 듯한 모습이 의외이면서 재미있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비아를 바라보았다.
" 굳이 싫어하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정 힘들면 꼭 말해줘야 해. "
비아의 눈을 빤히 쳐다보려고 하다가,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로 무섭다면 말을 걸 거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성격상 말을 안 할 가능성이 높으니 어느정도는 게속 살피면서 영화를 봐야겠지만.
잠시간의 광고 시간이 지나고, 영화가 시작된다. 내용은 생각보다도 클래식한 공포영화였다. 초반부터 긴장감을 주는 연출과 함께 제목이 크게 나오더니, 중반부와 후반부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놀래켰다. 갑툭튀나 징그러운 귀신 디자인은 물론이고, 시간차로 갑툭튀를 하거나, 등장인물이 빠진 공포를 생생하게 묘사하거나, 아예 의자가 흔들리거나 하는 등 관객을 직접 놀래켰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 4D였다..!
지훈은 멍하니 영화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비아가 걱정되는지 살짝 몸을 기울여 비아의 표정을 살피려고 했다. 너무 무서워하는 듯 하면 상영관 밖으로 이끌 생각이었을까.
>>711 (피폐뇌 풀가동) 지훈이가 진심으로 사랑한 대상은 욕심쟁이었기에 지훈이가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도록 만들어, 자신을 제외하면 고립되어버리게 만들고... 정작 자신은 거기에서 더 욕심을 내서 아예 영원히 자신을 쫓고 원하고 사랑하도록 일부러 지훈이 곁에서 떠나버린 전개라거나? 지훈이는 사랑하는 이가 떠난 이유를 알면서도 그 사람을 보고싶어 하기에 계속해서 쫓고...
>>713 시가 거참 모의고사에서 나오기 좋게 생겼...(이거아님) 사비아가 얼마나 재미있는 친구인데요 놀리고 싶고(?)
평소 연애적 감정과 거리가 먼 카사였지만, 비슷한 상황은 한번쯤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학교에 테러리스트가 침범하면?! 같은 수업 중 따사로운 햇살 아래 하는 상상말이다. 할멈의 소설처럼 누가 내게 고백하면 어쩌지?? 같은 생각말이다. (아니, 여기는 황궁이 아니니까 소설은 아니고, 할멈의 만화책을 기반으로 삼아야겠다. 락커안 러브레터... 음? 여기 아카데미는 락커가 없는데? 뭐, 사소한 것은 신경쓰지 말자.)
카사는 흐흥, 고개를 엄중이 끄덕였다. 아주 타당하고 가능성 높은 생각이었다! 그야 카사는 멋지고 강하고 똑똑하고 착하니까! 그 누구도 반려자로 삼고 싶을 테다!
그러니 카사를 잘 모른다면, 분명 서둘러 고백하고 싶어 질테다. 아주 현명한 판단일테다! 원래 사냥감은 누가 채어가기 전에 일빠로 들고 튀는 게 옳은 판단이니 말이다. (이런 김칫국카사는 흠흠, 하며 상상의 얼굴 모를자를 칭찬하였다. )
그러니 카사는 그냥 그 점을 칭찬하며 잘 차버리면 되는 거였다! 자신의 신중함을 잘 설명하고, 자신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대충 미래에 다른 좋은 녀석 찾아라! 나보다 좋은 녀석은 찾기 힘들겠지만! 와하하! 하고 웃으며 보내주면 되는 거였다!
완벽한 행동지시법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카사는 그리 만족하고 그 생각을 깨끗히 치워버렸다. 그 '해결법'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각도 안한채.
첫번째. 어째서 카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어야 고백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가?
두번째. 카사를 알고, 카사의 생각을 알고, 그를 존중하는 사람이 고백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리고 세번째.
카사 본인의 감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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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니야.
오해가 풀어진다. 간단명료한 해답이었다. 카사는 질문을 하였고, 하루는 진실된 대답을 하였다. 생명의 본질인 붉은 피를 그대로 내보이며 진실을 말했고, 카사의 기민한 귀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굳게 다문 꽃봉오리에서 어여쁜 꽃잎이 터져나오는 것처럼, 작은 기쁨이 카사의 가슴에서 피어나온다.
하루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게 아니다. 하루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루는 나를 제대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하루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나는 불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둘은 같이 행복을-
무엇을? 같이서?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생각이 멈춰섰다. 카사 속의 무언가가 카사를 멈춰세웠다. 본능에도 가까운 관념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쓸쓸히 권해왔다. 카사는 이런 자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멈춰섰다. 복잡한 것은 싫었다. 하지만 지금 복잡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어라? 나는 —
아니 잠깐.
카사의 혼란속에서도 하루의 말에서 무시하면 안되는 게 나왔다. 아니,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식이 왜 내 오빠야!!!!!!"
버럭, 상황에 맞지 않게 왈왈 짖는 카사. 에릭???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에에에리이익???? 그 밥맛 할멈성애자 꼰대가아??? 내 오빠??????? 하아???????? 난 오빠(특: 늑대) 따로 있거든!!! 훠어어얼씬 근사하고 멋진 오빠가 멀쩡히.... 있지는 않지만!!! (특: 이미 노사함) 하여튼 에릭 녀석이 왜 내 오빠냐!!!! 기분 더러워!!! (특: 이것은 현실남매의 반응과 일치하기도 한다.)
먼곳(천국?)에 있는 부모님같은 분(엄마 늑대?)은 머리속으로 끼워맞춰도 이 부분은 흘러 들을수 없는 거 같은 모습이다. 아브엘라가 안 다면 또 다시 피눈물을 흘릴 이야기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잊어버려 씩씨거리는 카사.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모습이 생각나는 모습이다. 아니, 이런 무거운 상황이 이례적이니까 당연할 테지만 말이다. 얀하루의 에릭 납치감금(?) 사건에 대해 들으면 할 반응이 궁금해지지만, 제정신을 돌려 받았는지, 상기된 얼굴로 크흠, 헛기침을 한다.
"하, 하여튼! 그 녀석은 내 오빠 아니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하루 아래 깔려 있는 상태에서는 별로 신뢰감이 올라가는 일이 없지만, 그래도 눈을 슬며시 피한 채, 중얼거리듯 말을 지속하는 카사.
"이거 말하려고 왔어. 난, 나는."
네가 좋아하는 게 나의 불행이라 생각했어.
죄를 고하는 듯 말을 내뱉고선 침묵으로 다시 돌아간다. 여전히 하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카사는,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상념에 빠진 표정 무색하게 지속되는 말은 횡설수설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 밖에 있는 동안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깨닫고 말았어. 나, 사실 말이야. 네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좋아한다고 해도, 상관없었어. 상관없던거야."
댐이 터지듯, 말이 계속 나온다. 하루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전하고 싶은 말을,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폭력이라는 본능의 언어가 아니라, 새로히 배워간 인간의 언어로. 사랑과 노력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일념으로 노력해 배워낸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 불쌍함의 의미를 얘기한다. 나는 내 삶이 자랑이야. 내 삶의 모든 것 - 그 모든 고통도 기쁨도 시련도 성공도 모두 나의 자랑이야. 내게 동정은 그 의미를 퇴색하는 거였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어. 별빛 가득한 봄하늘 아래에서 생각했어. 아니, 깨달아버렸어. 그 깨달음을 대놓고 고백하기에는 용기가 약간 부족해, 카사는 눈을 감는다.
"난 그냥 네가 나를 계속 좋아하게 해주기만 된다고 깨달은거야..."
애초에 치료를 거부하고 여기까지 온것. 조금은. 약간 더 불쌍해 보이기 위한 영약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덫을 피해 멀리 멀리 도망을 간다는 생각을 해도 이미 늦었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늦었다. 늑대는 이미 덫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 감정은 체념이자 해방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카사는 눈을 떳다. 깊은 주홍색의 호박빛 눈동자. 야생의 짐승과도 같은 그 눈은 하루의 찬란한 금빛의 눈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서. 그,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속삭임에 가까운 혼잣말. 소녀가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나의 고통은 그녀의 사랑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나를 덫에서 풀어주었다. 그녀가 한 말은 그런 의미였다.
하루의 얼굴이 다시 한번 가까워진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입술이 다시 한번 부드럽히 닿는다. 최근 익숙해진 거친 타격감과 쓰린 움직임과는 상반되었다.
예전에 하루는, 이런 입맞춤이 '기도'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은밀하고, 개인적이고, 소중하고...
그 입술이 맞닿은 순간에는, 카사는 자신이 그런 소중하고 부드러히 다뤄야하는 무언가가 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것같아, 몸을 비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카사는 용맹한 산속의 포식자였으니까! 선두에 서는 대장은 이렇게 조심히 다루는 게 아니었다. 이리 던지고 저리 방치해도 씩씩하게 자라는 게 카사였다. 날카로운 칼날, 둔탁한 주먹, 관통하는 총알도 다 문제없고 끄덕없는 녀석, 그게 카사였다!
그러니 하루의 부드러운 손길, 말랑한 입술, 축축히 뺨에 떨어지는 눈물같은 것에는, 그러니까.
익숙치가 않아서.
내성이 없어서.
그 어느때보다도 연약한 느낌이었다.
숨이 가빠 이미 붉은 볼에 혈색이 돌았다. 피투성이 몰골과는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어두운 기숙사방.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지 오래되어 옅게 쌓여있던 먼지가 흐트려져, 허공에 빛을 반사하며 떠 다녔다. 개인물품이 없어 공허해보이던 방은, 두 소녀의 존재로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바닥 위 두 소녀의 실루엣. 그 사이의 공간은 한숨하나로 들어 찰것 같았다. 딱딱한 방바닥이 카사의 뜨거운 등을 식혀주었다.
카사는 앞의 소녀를 생각했다. '하루'라는 이름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늘어져 카사의 뺨을 간지럽힌다. 군데군데 붉은 피가 묻은 게, 새하얀 바탕에 너무나도 잘 드러났다. 상처와 긴 전투의 흔적, 그리고 피로함. 이 모든 것을 지니고도 하루는. 물기 어려 반짝이는 눈동자. 체액에 젖어 축축한 연분홍빛 입술. 하루는 아름다웠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처음 만났을 때는 언제였더라. 그렇게 가까운 데도 너무나 먼 기억 같았다. 아는 게 몇달밖에 되지 않는 데 평생을 약속하는 자신의 특성을 알고도 좋아한다고 하다니. 정년 진심인가?
의심을 하루의 절절한 말이 짓눌렀다. 날것없는 진심. 거짓말을 하지 않는 카사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 진심. 카사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왜 나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 찾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이유 없이 카사를 좋아할, 아니. 사랑할 이유가 없으니까.
[Q. 질문. 그 첫번째. 어째서 카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어야 고백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가?] [A. 카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카사를 반려로 삼고 싶지 않을 것이다.]
[Q. 두번째. 카사를 알고, 카사의 생각을 알고, 그를 존중하는 사람이 고백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A. 그럴리 없다. 전제가 모순적이다. 아마 그런 일이 생긴다면 카사를 놀리려는 것이 틀림없다. ]
[Q. 그리고 세번째.] [Q. 카사 본인의 감정은?] [A. ...]
[Q. 답해야지.] [A. ...]
[A. 모르겠다. ]
[A. 카사는.]
[A. 머리가 나쁘다. ]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 우정과 사랑. 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질투심? 애증? 갈망? 욕망? 평소의 좋아한다와 지금의 좋아한다의 의미는 다르다는 것은 알거 같다. 하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다.
하루가 설명해준다. 하루는 똑똑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이 무서운 나는, 하루와 함께 있으면 덜 무섭다. 조금 더 용기가 나는 것 같다. 모르는 것. 귀신. 수학. 존댓말. 대화. 인간. 마음.
지금도 용기를 내고 있어. 나를 붙잡고 용기를 내고 있어. 많이 아플텐데.
그래도 잘 모르겠다. 애정은 쉽다. 증오는 쉽다. 이것은 모르겠다. 일어날리 없는 것을 보는 느낌이다. 서쪽에서 뜨는 태양. 날개달린 돼지. 의념의 발현.
[Q. 그래서. 싫어?] [A. ...아니.]
[Q. 좋은 거 잖아. ] [A.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야.]
[Q.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게 산다고 불평하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웃기네. 그렇게 자기애가 넘쳤으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워?]
[Q. 네가 그런 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면. 싫었거나, 아니면 전혀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없었다면. 그냥 거절했겠지. 거절은 너에게 쉬우니까 말이야.]
[Q.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 자체가 증명이야. 네가 정의하지 못하는 마음은 — ] [A. 난 그냥.]
[A. 하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A. 다른 건 다 필요없어. 그렇게 깨닫고 온거야.]
카사는 한참 멀었다.
먹이 사슬 꼭대기의 최강의 포식가가 되어야 했고. 친구도 많이 만들어야 했고. 최강의 워리어가 되어야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머리도 좋아져야 했고, 키도 여기서 더 커야 했고,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적어도, 앞의 절절하게 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의 눈물정도는 그칠수 있어야 했다. 인간이 덜 된 소녀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짐승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 잔혹해질수 있었지만, 그 본질이 악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소중한 소녀를 같이 덫에 끌어 들어버릴 만큼 악하고 잔인하지는 않았다. 카사는 악한 인간은 못되어도 착한 짐승은 될수 있었다.
[Q.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
손쉽게 스러지는 생명. 도망치듯이 와 같이 할 생명을, 오래오래 살수 있는 생명을 찾았다. 그래도 생명인 이상, 본질이 가디언인 이상, 죽음에서, 영원한 이별에서 도피할수 있는 자는 영영 없지 않을까.
카사는 손을 뻗었다. 거친 손이 하루의 부드러운 뺨에 닿았다. 손 아래 온기에, 한순간 이름모를 욕망에 삼켜지는 느낌에 제정신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