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못이 더 크다는 말에 고개를 젓는 선배. 넘어졌음에도 짜증내지도 않고, 딱히 탓하지도 않는다. 역시 마음이 따듯하신 분 같다. 오랜만에 만난 듯한 정상인에, 뭔가 조금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러다 뭔가 굉장히 뿌듯하고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선배. 좋은 일이라도 생기신 것 같다.
그러던 중 종이를 같이 들고가주겠다는 제의에 당황한 걸까, 선배의 얼굴에 약간 고민하는 낌새가 보였다. 역시, 몇 번 보지도 못한, 방금 통성명한 사이인데 너무 부담스러운 제안일수도 있겠다. 실례를 범한 것 같아 제의를 철회하려고 말을 꺼내려는데, 고민하던 선배가 가볍게 웃으며 나를 본다.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역시 어색하다. 아영 선배는 모종의 이유로 말을 못하시는 모양이고, 수첩을 통해 대화를 하고 있다. 나도 딱히 꺼낼 말이 없어 침묵을 유지중이다. 어색함을 떨쳐내기 위해 뭐라도 말하려다가, 아까 선배가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선배님, 아까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되게 뿌듯한 표정을 지으시지 않았습니까?"
킥킥. 희수의 따박따박한 대꾸가 이어짐에 따라 현율의 웃음소리도 잦아진다. 작게 소리 죽인 웃음은 얼핏 듣기에 성질을 돋구는 건가 싶어도 저 평화로운- 극단적으로 말해 무심해보이기까지 한 옅은 미소를 보면 아니구나 싶을 것이다. 제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현율은 그저 정말로 이 상황을 재밌어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면에서 싫다는 말을 들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기분이 조금 그런 걸. 나는 그저 동급생 남자애가 잘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보고싶었을 뿐인데."
아쉬워라.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조금 흠칫할만한 발언을 하고 또 웃음. 금방이라도 농담이야, 라고 말할 것 같으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담인걸까. 여유만만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진담일지도. 판단은 희수가 할 일이었다.
"그게 궁금한거네. 흠. 흔한 질문이라 좀 기운 빠지는 걸. 기운 빠진 만큼 적당하게 대답해버려야지."
자신이 궁금한 걸 물으래놓고 그 질문이 흔해빠졌다며 대답의 질을 낮추겠다니. 상대하는 쪽에서 화 내지는 짜증을 내도 할 말이 없을 무례한 행태다. 그럼에도 현율은 스스로 한 말은 지키겠다는 듯이, 아주 잠깐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네 말마따나 내 말을 믿을지 말지는 네 자유라는 전제 하에 대답해줄게. 나한테는 이것 밖에 없으니까 열심일 수 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붕대를 감는 것도 네가 오기 전까지는 할 일이 이것 뿐이었으니까 좀더 느긋하게 할 예정이었어. 최소 한시간은 감았다 풀려고 했지."
그저 당장 눈 앞에 할 일이 그것 뿐이어서. 라는 어이없는 이유가 튀어나올 줄 희수는 알았을까. 하지만 현율로서는 조건을 갖춘 최대한의 성의가 담긴 대답이었다. 적당히, 거짓 없이, 라는 애매한 조건에 맞춰서 내놓을 대답이 그 뿐이었다. 대답과 함께 붕대 감기를 마치고 블라우스를 마저 입는다. 붕대 감긴 팔을 슥 끼고 담추를 몇개 대강 잠그는 걸로 적당한 매무새를 갖추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 마실래? 아님 뭐 먹을래? 음료나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나 빵 정도는 있어. 차가운게 싫다면 차도 내줄 수 있고."
조금 늦은 대접을 하려는지 그런 물음을 희수에게 던지며 부실 한켠에 자리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는 현율이었다.
물론 동급생 남자애(이성)가 잠을 잘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보고싶다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당당히 이야기한다고 해서 '알겠습니다' 하고 들어줄 사람은 없다. 게다가 평소에도 부실의 문을 잠그지 않는 것 같으니 자고있다가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들어온다면 그것도 못 볼 상황이었다.
"그래, 사실 네 bmi 수치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러는 편이 더 좋았겠다."
사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을 바로 생각해내서 말 하며 그녀의 대답을 들었다. 듣고싶은건 붕대를 한 이유를 듣고싶었는데. 라는 불평불만을 마음속만으로 해 두었다. 이윽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행동에 놀라며 얼굴은 창가를 바라보는 그대로 눈알을 천천히 굴려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고 명확하게 확인을 한 후에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밤새도록이라 함은 기숙사까지 들어와야 가능한 일인데. 애초에 서로의 기숙사에 서로 들어갈 수 없으니 되지도 않을 일- 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대가 현율이라는 점에서 어떤 이변이든 일어날 수 있기도 한 거다. 누군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걸 물었어도 재미없었을거야. 그런 건 나한테 없으니까."
의미가 없는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 그냥 없다, 고만 해버리니 이전 대답과 다를게 뭔가 싶다. 묻지 않은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대답을 들어버렸지만.
빵이 먹고싶다는 말에 현율은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고 그 옆 선반에서 빵이 담긴 바구니를 꺼낸다.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두 팔로 들고서 소파로 돌아와, 두 소파 사이에 자리한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조금 다른게 있다면 희수에게는 흰 우유를 줬지만 현율 자신은 딸기 우유라는 부분 정도였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걸로 얻는거래봐야 좀전 같은 상황이 고작이야.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는 그렇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구조거든."
가볍게 말하며 제자리에 앉은 현율이 우유팩을 뜯어 한모금 마신다. 손가락 하나하나 붕대를 감아놓고 자유자재로 쓰는 걸 보면 정말로 저 붕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건지. 그 역시 묻지 않으면, 파고들지 않으면 현율은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해줄 것이었다. 희수는 그걸 눈치챘을까. 새로 감은 붕대가 젖는게 싫은지 한모금 마신 우유팩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묻으며 그제야 희수를 똑바로 마주본다.
"그래서, 너는 뭘 하고 싶어서 여길 온 건데? 나랑 수다 떨러? 그런거면 언제든 환영이지."
밤새도록 보여주는걸 요구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잠 자는 얼굴에 그 정도 까지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시지. 자신에게는 육체가 없다는 농담으로 밖에 안 들려."
그리고 육체가 없는데도 말하는게 들리고 모습이 보이는것을 보통 유령이나 괴기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난 지금 귀신에게 홀린거라는 말이 되는거고. 그는 살면서 그런 괴기현상이나 귀신, 유령을 본 적도 없었고 주변 사람들 중 그런 걸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친거야?"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가 붕대를 감은 손을 자유롭게 쓰는 모습을 보고 곧 바로 말했다. 혹시 뭐 패션붕대같은걸까? 세상에 붕대를 패션으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걸.
어영부영 이어지는 대화도 나쁘지 않다. 말을 그다지 조심할 필요 없고 무형의 무언가를 신경써 말을 고를 필요도 없으니. 손에 든 패를 툭툭 던지듯 주고 받는게 이렇게 편할 수가. 가끔은 불러도 좋겠다. 찾아가도 좋겠고.
"언젠가라고 해도 네가 편할 때니까. 음- 진짜 없을 수도 있지. 너 나를 직접 만져본 적 없잖아. 그러면서 네가 보고있는 내가 실존한다는 걸 어떻게 확신해?"
유령이라 하기엔 우유도 빵도 들고왔으니 실체가 없다고도 못 할 텐데. 계속 이런 말을 하는 현율의 의도는 무엇일지. 그저 희수를 놀리는게 즐거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냥 정말 단순하게 재밌어서.
결국은 나온 팔에 대한 질문에 현율이 붕대가 감긴 팔을 들었다 내려놓는다. 아, 이거? 라고 말하는 걸 대신하는 몸짓이었다. 붕대 탓인지 조금 둔하게 움직이는 팔을 늘어뜨려두고 멀쩡한 팔로 턱을 괸다.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팔걸이에 기댄 탓에 제대로 잠그지 않은 단추 사이가 헐겁게 내비친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붕대 같은 걸 감아둘 리가 없잖아. 너도 참 당연한 걸 묻는구나. 다쳤지만 잠깐 정도는 쓸 수 있으니까 움직이는거야. 움직이다보면 붕대가 풀려서, 그래서 다시 감았던거고."
기껏 감았으면 얌전히 있으면 될 것을 굳이 움직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현율의 행동 대부분이 그렇다는 걸 알 만도 하다. 이해관계를 포기한 것처럼.
"두고보자고 해도 내가 뭔가 원한 살만한 짓을 한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저번에 연극부실에서 살짝 말장난 친게 억울했던거야? 아니면 내가 기억 못 하는 뭔가 있었나?"
그렇게 말하고 현율은 눈짓으로 빵이 담긴 바구니를 가리킨다. 안 먹을 거냐고, 그 정도는 굳이 말로 할 것도 없다는 듯이.
직접 만져본 적이 없다면 지금 당장 만져서 확인하면 그만이라고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러 그녀의 붕대를 감지 않은 손을 형해 뻗다가 가까이 접근했을때에 천천히 움직여 결국에는 마치 달에 최초로 상륙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착륙하듯 '톡' 하고 천천히 그리고 작은 힘으로 그 손을 만져보려고 했다.
"옷 단추를 다 잠그는게 좋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많이 다쳤기에 그렇게 많이 붕대를 감은걸까 하는 의문을 생각하며 망막에 내비친걸 보지 않기 위하여 애써 빵이 든 바구니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적당히 그 중의 하나를 골라 자신의 자리 위에 올려놓았다.
"맞아, 그거야. 두고보자는 친구 안 무섭다고 하지만 이렇게 그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면 살짝이라도 긴장은 하지 않겠어?"
말하며 빵을 집어들고 그 포장을 뜯었다. 부드러운 빵이 먹음직스러웠다. 그는 빵을 많이 좋아했다. 이렇게 빵을 구비해놓은 봉사부실을 가끔 찾아가면 좋겠다고 생각 할 정도로는.
희수가 존재증명이라는 이름의 접촉을 시도했을 때, 톡 하고 닿는 순간 그대로 손가락이 통과하는 비현실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늘한 촉감이 그 손끝에 닿는 걸로 끝났겠지. 잡고 만지작댔어도 체온이 좀 낮은 평밤한 사람의 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잔뜩 이상한 소리를 한 것 치고 너무나 평범해서 어이가 없을 만큼.
"단추? 아."
지적을 받고서야 눈치챘다는 듯이 옷의 상태를 내려다본다. 봤으니 이제 제대로 잠그려나 싶겠지만, 의외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댄 자세 그대로 딴청을 피우는게 당장은 고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얼른 말머리를 돌려버리는 것도 희수가 더 언급을 못 하게 하려는 수작처럼 보인다.
"어- 그야 어떤 이유든 찾아와주면 좋으니까. 긴장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지? 그리고 실제로 오기만 했지, 나한테 위해를 가하진 않았잖아. 했어도 그다지 놀라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현율은 턱을 괸채 말하며 희수가 빵봉투 뜯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아직 뜯지 않은 빵들을 지그시 보다가 좀전에 뜯었던 딸기우유로 옮겨간다. 한모금 마신 후로 손대지 않은 우유를 보는 시선은 이후로 더 마실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지금 자세가 너무 편해서 움직이기 싫은 것 같기도 하다.
"이래보여도 딱히 널 업신여기는 건 아니야. 너 말고도 다른 애들한테도 다 이러니까. 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나름대로 성의껏 대하고 있어. 성의를 그대로 받아들일지, 다르게 볼지는 너희 판단이고."
그러니 기분 상해하지 말라던가 기분 나빠하지 말라던가 하고 말할 거 같으면서도 안 한다. 그것마저도 상대에게 맡기겠단 태도, 아니, 떠넘기려는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고 뭐라고 한들 현율의 저 능글능글한 웃음이 쉬이 가시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친절하게 말을 해 주었고 그녀는 자신의 옷의 단추가 잠겨있지 않은걸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리대로 진행될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단추를 잠그지 않고 있었다. 이건 뭘 의미하는거지? 내가 하는 말은 무시하겠다는 행동? 그렇다고 하기에는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의도가 어떻든 그는 또 다시 시선을 옮겨야 할 필요가 있었고 결국은 마치 죄인처럼 땅바닥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위해를 가할 리가 없잖아."
말을 마치고 빵을 먹었다. 부드러운 빵의 식감이 정말로 훌륭했다. 그는 남 몰래 만족스러운 작은 미소를 띄우며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고 있다고 받아들일 것 같은데 본인이 그렇다니까 일단 믿을게."
성의.. 성의라. 여러 사람들에게 성의를 보이는 학생이라. 애늙은이인가. 어떻게든 저 능글능글하게 웃는 모습을 바꿔주고 싶은데 가능성이 높지는 않아보였다.
하은이 올려다본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봄이 아니라 여름 초입의 장마같이 오락가락하는 하늘은 어제와 같은 햇살이 아닌 추적거리는 빗살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특기 적성화 학교라는 특이한 학교인 적영고라도 학교는 학교인지 한정된 색채를 띄고 있어 이런 칙칙한 날에는 왠지 모르게 칙칙하다는 인상을 누군가에게는 주고 있었다. 희뿌연 바깥의 물안개가 청백색 형광등과 만나고, 비를 머금은 바람은 서늘해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운 날씨. 그런 날씨에 흰 얼굴로 불안하게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하은의 모습 역시 얼핏 보면 스산해 보였지만, 마음 속의 외침을 들어보면...
'우산이 없는데...어떡하지...? '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통학길은 통학길이요, 통학길보다 가깝다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하은이었으나 절찬리 갈등중인 모습이 심각하기는 이루 말할데 없었다. 교사 너머 빼꼼 고개를 내민 기숙사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간장이 타들어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간절해보였고, 왜 하필 오늘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나, 적어도 우산을 빌려도 괜찮은지 말이라도 건네 보지 못했나, 등등의 후회로 가득찬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된 하은의 얼굴은 시간이 가면 갈 수록 핏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빗물이 튕기는 물방울에 힐끗 시선이 보내는 모습이 비의 세기를 가늠해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맞고, 가면...'
하은은 한발을 현관 문 밖으로 내딛으려다 다시 후퇴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좌우로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를 맞고 가는 건 아닌거 같았다. 하지만 기숙사로 가지 않고서 언제까지 교사 안에 있을 수 있을런지. 시간은 꾸물거리면 꾸물거릴수록 어디로든 오도가도 못하고 서 있는 제 등을 밀어낸다. 밀려난 몸은 제대로 제 몸을 추스를 새 없이 허둥거리기만 했다. 하은은 현관을 기점으로 발을 자꾸만 내디뎠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현율의 기준으로는 상담실에 찾아오는 학생이 꼭 평화로운 요구사항만 가져올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희수의 말은 제법 의외로 들렸다. 위해를 가할 리가 없다, 라. 적어도 희수는 그렇다는 걸까.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지. 언젠가 이 예상이 뒤집히더라도 그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자고 현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중 일은 나중에 맡겨야 하는 법이니. 그러면서 짧게 말했다.
"상냥하네. 하는 말들은 제법 까칠한데 말야."
츤데레, 라고 할거까진 아닌거 같지만. 대화가 끝나가는 순간까지도 현율의 웃음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여전히 작게 키득키득 웃으면서 고개 숙인 희수의 정수리를 응시한다.
"편한대로 생각해. 내가 네 생각에 참견할 권리는 없는 걸."
적당히 주고받는 말 사이로 어느 누구도 움직이는 기척이 없던 순간, 희수의 정수리를 무언가가 툭 건드린다. 검지로 정수리 한가운데를 살짝 눌렀다가 떼는 감촉이라 하면 정확하겠다. 누가 그랬는지는 명확해보이나, 고개를 들어보면 능청스런 표정의 현율이 단 1미리도 틀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희수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표정으로 마주보다가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빵과 우유가 마음에 들었다면 다음에 또 와. 항상 준비해둘게. 낮잠 잘 기분이 들었을 때 와도 좋고. 여긴 누구든 거절하지 않으니까."
자리를 마무리 하기 위한 말을 몇마디 하고 잠깐 눈을 굴려 더 할 말이 없나 생각해본다.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자 인사만을 덧붙인다.
"배웅은 안 할게. 잘 가. 희수야. 또 놀아주러 와."
그 때까지 늘어져있던 붕대 감긴 팔을 들어 손을 살랑살랑 흔든다. 마치 오랫동안 못 볼 사람처럼.